[1권] 6_2
“아무래도 네가 사근동 달동네 재개발 계획의 첫 삽을 뜬 것 같다.”
내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태영이 지우를 보며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우와 서연은 태영의 말을 듣고도 저들이 코지로의 부하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리레이쉰은 달랐다. 이미 츠지야마 패밀리에게 괴한의 습격을 받은 약혼녀를 보호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기 때문이다. 리레이쉰과 강서연 암살 계획은 츠지야마 본가의 의지가 아니다. 리레이쉰이 상황을 꿰뚫고 있다는 걸 안 이상 코지로도 섣불리 움직일 리 없었다. 게다가 이런 야단법석은 야쿠자의 방식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태영의 분석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리레이쉰 또한 빈민가에서 성장했다. 태영의 한 마디로 상황을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자본과 권력, 그리고 깡패가 손을 잡는 카르텔은 우리민족만의 고유한 문화가 아니다.
그가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코지로 얘기로는 두 사람은 킬러들의 배후가 나라고 생각한다더군. 코르시카 마피아가 내가 아동 성애자라는 소문을 퍼뜨렸을 때도 이렇게 억울하진 않았어. 맹세컨대 쟤들은 우리 식구가 아니야. 츠지야마 패밀리도 아니고. 나는 태영 군 말에 설득력이 있는 것 같은데? 아니면 지우 너 어디 가서 따로 원한이라도 사고 다녔냐?”
“짚이는 데가 너무 많군. 소말리아 군벌이 바다 건너에서 테러를 자행할 여력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하는 말이지만.”
리레이쉰이 피식 웃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모양이군.”
“무슨 소리야? 내가 소말리아에서 여자라도 잘못 건드렸다는 거야?”
“여자가 진짜 무섭게 한을 품는 건 잘못 건드렸을 때가 아니야. 전혀 안 건드렸을 때지.”
리레이쉰이 그렇게 말하며 웃자 서연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내 주변 남자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석기시대 마초들뿐인지 몰라. 아주 그냥 백마 타고 화장 고치느라 여념들이 없으세요. 아…… 태영 선배님은 빼고요……”
태영이 부드럽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저게 누구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불을 끄고 쥐 죽은 듯 숨어 있는 겁니다. 여러분 성격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맞겠냐?”
지우와 리레이쉰이 입을 모았다.
지우는 쓰게 입맛을 다셨지만 리레이쉰은 웃으며 지우에게 윙크를 보냈다. 다행히 지우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리레이쉰이 몸을 일으키며 서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연이 엉겁결에 그 손을 잡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태영 군 오해할까 봐 하는 얘긴데, 여긴 내 마음에 쏙 들어. 고향에 온 기분이야. 하지만 이 상황은 숙녀를 모시기에 적합해 보이지 않는군. 내가 안전하게 모시지. 어때? 두 사람도 같이 가겠나?”
리레이쉰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끝났던 만화책 신간을 사서 첫 페이지를 들쳐보기 직전에 짓는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태영은 상황도 잊고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자기와 함께 가면 안전은 보장되겠지만, 죄 없는 주민들만 곤경에 처하게 만들어 놓고 우리만 쏙 빠져나가겠냐고 묻고 있는 거로군. 뭐 우리가 남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겠지만, 저 친구 모르는 게 하나 있어.’
태영이 일어나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집을 두고 어딜 가겠습니까? 여럿이 움직이면 괜히 눈에 띄기만 할 겁니다. 우리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불을 끄고 숨어 있으면 별 일은 없을 테니까요. 아직 퇴거 명령도 나오기 전이니까 쟤들도 집집마다 들쑤실 명분은 없어요. 그냥 지우를 찾는다는 명분 하에 겁만 주고 물러갈 겁니다.”
리레이쉰이 아니라 서연에게 한 말이었다. 깡패와 경찰이 가득한 달동네에서 두 사람이 어떻게 무사히 빠져나가겠다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리레이쉰과 서연 걱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건 서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저 서연이 혼자 몸을 피하기 미안해할까 봐 한 말이었다. 서연이 말한 대로, 그 방에서 진정으로 여성을 배려하는 남자는 태영뿐이었다.
태영을 바라보는 리레이쉰의 눈에는 여전히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장난끼는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이날 그 반 지하 방에서 리레이쉰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던 사람은 지우도 서연도 아닌 태영이었다.
태영은 리레이쉰조차 생전 처음 보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물론 그때는 리레이쉰도 그 관심이 인류에게 얼마나 큰 재앙으로 돌아올지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태영은 이곳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눈 여겨 보지 않으면 창문이 있다는 것도 눈치 채기 힘든 이 방은 안전하겠지만, 꼭대기에 창고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는 태영의 집은 불도 켜 놓은 채였다. 앞질러 가서 이것저것 단속하지 않으면 피해가 너무나 클 터였다.
그러나 그가 리레이쉰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지우는 결코 그를 따라 나서지 않을 것이다. 세상 그 누가 하이에나 떼가 몰려온다고 호랑이 등에 올라 타겠는가?
태영의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
“태영이 말을 듣고 보니 저놈들 나한테 원한을 품은 게 맞는 것 같네. 내가 패거리 하나를 병신 만들었거든. 도의적으로 내가 여길 떠날 순 없지.”
지우의 말을 들은 리레이쉰이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소리만 들어도 한두 놈이 아닌 것 같은데 혼자 남아서 어쩌겠다는 거야? 태영 군 말대로 조용히 숨어 있을 생각이라면 남거나 떠나거나 별 차이 없지 않나?”
“그게 문제야. 나는 총이 없으면 그냥 평범한 대학생이거든. 요즘 같으면 졸업하고 할 일도 없어. 젠장. 컴퓨터 수리 기사가 되고 싶었는데.”
리레이쉰이 피식 웃으며 품 속에서 낡은 리볼버 권총을 꺼내 던져주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겠지만 사제 권총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조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좋은 엄마가 되는 게 쉬울 거다. 총알은 거기 든 게 다야. 소음기도 없어. 건투를 빌게. 내일 약속 잊지 말고. 일곱 시야.”
서연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잠깐만요! 그걸로 뭘 어쩌겠다고요? 총알도 여섯 발뿐이라면서요!”
지우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충분해. 더 많아 봤자 일만 커질 뿐이지. 내일 저녁 일곱 시, 지옥에서 보자.”
리레이쉰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이, 거긴 내 집이라고.”
“그러니까. 거기서 보자.”
“젠장. 그 얘기 쏙 들어가도록 융숭하게 대접해주지. 천국을 느끼게 해주마. 태영 군도 꼭 오도록 해.”
“노력해 보죠.”
태영이 그렇게 대답하며 다시 서연을 안심시켰다.
“걱정 말아요. 이건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거니까. 제가 쓸데없는 짓 못하도록 잘 감시할게요.”
태영이 그렇게 나오니 서연도 더 할 말이 없었다.
깡패들은 벌써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서연은 걱정스런 눈으로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리레이쉰의 손에 이끌려 방을 나섰다.
“일단 변장을 해야겠는데.”
두 사람이 나가자 지우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태영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옷장을 뒤져 군복을 꺼냈다.
“이 양반 올해로 예비군 끝났어. 좀 작겠지만 그 정도는 참아야지 뭐.”
지우가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짓 못하게 감시한다고 하지 않았냐?”
태영이 군복에서 이름, 계급, 사단마크 등을 떼어내며 대답했다.
“총성이 몇 번 울려도 경찰은 바로 투입되지 않아. 내가 달동네 처음 살아 보는 게 아니다. 지난 번 동네에서는 지역 주민 여섯 명이 무참히 살해당했는데도 보도조차 되지 않았어. 깡패도 하나 죽었는데 그것도 문제되지 않더군. 여학생들이 여기저기서 강간당하며 살려달라고 울부짖는데도 근처에 있던 경찰은 서둘러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내려갈 뿐이었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세상은 악당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힘 없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하다. 그 세상을 대다수 선량한 시민들의 무관심이 지탱한다.
“확실히 쓸데없는 짓은 아니군.”
“그리고 화살은 야쿠자에게로 돌아가겠지.”
태영은 서연이 재일교포 3세라는 사실, 그리고 리레이쉰이 ‘츠지야마 패밀리’라는 어휘를 입에 담았다는 점으로부터 벌써 요 며칠 집 주위를 얼쩡거리던 자들이 야쿠자라는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지우는 자기가 실제로 야쿠자의 일원이라는 걸 떠올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태영이 군복을 건네며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그래. 진짜 괴물이지.”
“아니, 너 말이야. 그 괴물 앞에서 하나도 기죽지 않더구만. 너 속으로 반말했지?”
지우가 옷을 갈아입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윤태영 진짜 다 됐네. 예측이란 예측은 모조리 빗나가질 않나…… 그렇게 보였냐? 내가 기죽지 않았다고? 뭐, 반말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라도 안 했으면 당장 무릎을 꿇어버렸을 거야.”
사실이었다. 리레이쉰이 권총을 던져줬을 때도, 총을 든 자기가 무방비 상태의 리레이쉰을 쓰러뜨리는 광경은 도저히 머리 속에 그려지지가 않았다.
태영이 웃으며 마지막으로 마스크를 건넸다.
“수고해.”
“그래. 괜히 문단속한다고 나다니지 마라. 이 위로는 한 발짝도 못 올라가게 할 테니까.”
지우는 문을 나서며 신발장 위에 놓여 있는 더러운 목장갑을 집어 들었다. 태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대로 드러누워버렸다. 지우가 방을 나서며 전등을 껐다.
그게 전부였다.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친구를 배웅하는 광경치고는 싱겁기 그지 없었다. 한쪽은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며 따라 나서려 하고, 다른 한쪽은 짐만 될 뿐이라며 애써 만류하는 훈훈한 시간낭비는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각자의 영역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
서로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할 위험한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는 두 친구의 냉철한 판단 하에 사근동 달동네에 죽음의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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