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3_2
지우는 어지간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 아주 특별한 형태의 천재였다. 본인조차 자기가 천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
연산 및 정보 처리 속도가 압도적으로 뛰어나거나, 데이터 저장 용량이 방대한 컴퓨터와도 같은 두뇌를 천재라고 부른다면 지우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다. 그의 천재성은 평범한 컴퓨터 여러 대가 병렬로 연결되어 각각의 태스크를 수행하고, 그것을 마치 원래부터 단 한대의 컴퓨터가 수행했던 것처럼 하나로 종합하는 능력에 있었다. 어쩌면 그는 천재가 아니라 자연법칙에 새겨진 하나의 균열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우의 두개골 안에는 컴퓨터가 단 한 대뿐이기 때문이다. 그 한 대의 컴퓨터가, 마치 양자역학이 기술하는 소립자의 움직임처럼 한꺼번에 여러 가지 양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진가는 일이 이렇게 복잡하게 진행될수록, 그리고 생각해야 할 각각의 일들에 정답이 없을 때 발휘되었다. 보통은 평범한 천재 한 명이 여러 가지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는 게 더 빠르고 정확하다. 뛰어난 사람 혼자 어려운 일을 할 때는 평범한 사람 여럿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지만, 힘든 일은 평범한 사람 여럿이 함께 하는 게 나은 것과 같은 이치다. 지우의 평범한 두뇌는 한꺼번에 여러 사람 몫을 해낸다.
지우가 원한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수험생에게 그러하듯이, 집중력이란 원한다고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기가 있을 때 가끔씩 선심 쓰듯 작동되는 것이다. 발현되는 정도도 매번 다르다. 지우의 경우에는 여러 가지 독립적인 사고를 동시에 수행할 때마다 주변의 전자기기가 망가져 버렸다.
그것이 지우가 이 세계에 일으키는 유일한 균열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우의 사고 하나하나는 천재와 거리가 먼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것이었기 때문에, 또 다른 균열에 대해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쓸데 없는 걱정 하나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벽에 붙어서 내려가고 있으니까 우리를 쏘려면 적어도 총은 난간 밖으로 완전히 나와야 해. 그래야 각도가 나오지. 완강기를 쏘려고 해도 마찬가지야. 난간 아래 모서리에 고정시켰으니까. 이 거리라면 총이건 손이건 내가 먼저 쏴버릴 수 있어. 그런데 만약에…… 아주 만약에, 총알이 또 휘어져서 날아오면 어떡하지? 말이 안 된다고 눈으로 본 걸 부정할 수 있나?’
하지만 그건 부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총알이 휘어져서 날아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행동도 무의미했다.
지우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난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서연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이대로 1층까지 내려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그래? 난 좀 아쉬운데. 이러고 있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거든. 어쨌건 난 바쁘니까, 중간에 유리 깨고 들어갈만한 방이 있나 살펴봐.”
33층 아래로는 스위트룸이 아니어서 객실에 발코니가 없었다.
서연이 고개를 살짝 내밀고 지나쳐가는 창문을 들여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평소엔 여자 취급도 안 하다가 이럴 때 성희롱이라니…… 강제로 인공호흡을 하질 않나……”
“그래서 아쉬운 게 아니고, 사람 체온이 따뜻하다는 게 기억났을 뿐이야. 인공호흡은 뭐, 성희롱이라고 치자. 맞을 각오를 한 이상 순수한 의료행위라고 할 수는 없겠지.”
서연이 얼굴을 붉히며 화제를 돌렸다.
“지금 여기 창문이 열려 있는데요?”
“사람이 있거나 곧 돌아온다는 얘기잖아.”
“창문이 잠기고 불이 꺼져있어도 아무도 없다는 보장은 없어요.”
“내가 여자의 직감이라는 걸 좀 믿는 편이거든? 좋은 여자는 감도 좋은 법이야. 아무도 없는 방을 골라봐.”
“흥! 의부증 환자나 만나라!”
서연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을 가늘게 뜨고 코팅된 창문을 투시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13층을 지날 때였다.
“여기! 이 아래 층이 마음에 들어요.”
“나도 기쁘다. 그런데 조금 기다려야겠는데?”
“뭐예요! 기껏 찾았더니. 이제 사람 있는 데 골라도 오빠 책임이에요. 근데 뭘 기다리는 건데요?”
“영화에 보면 보통 이런 일은 두 명이 한 팀으로 움직이잖아. 동료가 저기 널브러져 있는 걸 보면 와서 고개를 내밀건 총을 내밀건 할 거 아냐. 밑에도 기다리는 놈들이 있겠지만 우선 위에 있는 놈을 제거해야 적을 더 혼란 시킬 수……”
지우는 미처 말을 맺을 수가 없었다. 대여섯 층쯤 아래에서 창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총구가 튀어나온 것이다. 머리 위를 겨누고 있던 라이플로는 대처가 불가능했다. 지우는 자신이 이런 일에서는 아직 초보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지우는 총구를 돌릴 틈도 없이 라이플을 내팽개쳤다. 라이플은 머리 위를 겨냥하던 모습 그대로 괴한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중력에, 지우가 뿌리친 힘이 더해져 수직으로 낙하하는 라이플은 제법 위력적이었다. 괴한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면서도 손을 뻗어 라이플이 건물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다.
지우는 이미 효용가치를 잃어버린 라이플이 마지막으로 벌어준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몸을 옆으로 틀어 서연을 감싸며, 오른발로 있는 힘껏 벽을 밀어내 건물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한 번의 도약으로는 고층 빌딩의 튼튼한 유리창을 깨고 들어갈 만한 탄력이 생기지 않았다. 지우는 고목이 꺾이는 소리를 내며 균열을 일으킨 유리창을 다시 한 번 발로 걷어차 좀 전보다 더 큰 반발력으로 두 번째 진자운동을 일으켰다.
개머리판을 팔뚝으로 막아낸 괴한은 고통을 참으며 간신히 라이플을 건져내 방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가 다시 총구를 머리 위로 향했을 때는 지우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괴한은 서연의 비명소리를 듣고 표적이 두 번째 진자운동의 정점에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급히 총구를 돌렸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이 다시 건물로 돌진하고 있을 때였다.
총구는 표적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표적은 총구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면 두 점이 일직선 상에 놓이는 시간이 극히 짧아진다. 권총 사격을 피할 수 있는 최상의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최상의 움직임이 항상 최상의 결과를 낳는 건 아니다.
지우의 귀에는 품 속에서 울리는 서연의 비명보다 10여 미터 아래 권총 소음기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소리가 훨씬 더 크게 들렸다. 소리가 들렸다는 것은 총알은 벌써 지나갔다는 뜻이다. 하지만 서연을 감싸 안고 등으로 유리창을 깨고 들어간 다음에도 바람을 가른 총알 세 발 중 한 발도 맞지 않았다는 확신은 갖지 못했다. 통증은 생각보다 훨씬 늦게 전달된다.
“아픈 데 없어?”
“괜찮은 거 같아요. 오빠는요?”
“괜찮은 거 같은 걸로는 안 돼. 침착하게 살펴 봐. 내 총에 맞은 놈들은 대부분 죽은 다음에야 자기가 총에 맞았다는 걸 알게 되거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괜찮아요. 확실해요. 오빠는요? 다친 데 없어요?”
“65킬로그램짜리 여자가 팔꿈치로 갈비뼈를 짓누르는 거 빼고는 그럭저럭. 이렇게 에로틱한 자세에서 한시바삐 벗어나고 싶어 보기는 또 처음이다.”
서연이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지우의 몸에서 내려왔다.
“자기만 믿으라더니? 상대는 오빠 머리 꼭대기에 있네요.”
“무슨 소리야? 머리 꼭대기에 있는 줄 알았던 놈이 발 아래에 있어서 허를 찔린 거잖아. 사실을 호도하지마.”
“아이고, 말이나 못하면. 하여간 큰소리 치는 남자는 믿을 게 못 된다니까.”
“그걸 알면서도 홀라당 넘어가서 신세 망치는 게 또 여자지. 여자들이 큰소리 치는 남자를 좋아하니까 그런 유전자가 자꾸 널리 퍼지는 거 아니냐. 너는 절대 그런 놈 아이를 낳아주지 말라는 교훈을 주려고……”
“아, 시끄러워요! 여자가 무슨 애 낳는 기계야? 그렇게 안 생겨가지고 사고방식은 무슨 조선시대 영감탱이라니까? 아, 빨리 일어나기나 해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지우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갈비뼈가 아파서 못 일어나겠다. 조금만 쉬자.”
“자꾸 이상한 소리…… 아!”
서연은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비명을 삼켰다. 지우의 하얀 와이셔츠가 왼쪽 옆구리에서부터 점점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지우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건 괜찮아. 진짜 갈비뼈 때문에 그래. 그리고 조금 쉬는 게 좋아. 저 아래에 있는 놈은 우리가 당연히 서둘러서 이동할 거라고 생각하겠지. 다섯 층 아래에 있었으니까 가장 먼저 체크할 곳은 이동경로야. 엘리베이터와 비상 계단을 먼저 확인하고 이 방은 마지막이지. 어설프게 나갔다가 괜히 복도에서 마주칠 수 있어”
멍하니 듣고 있던 서연은 대답도 하지 않고 두 손으로 와이셔츠를 거칠게 열어 젖혔다. 단추가 뜯어져 나가며 바닥에 작은 원을 서너 개 그렸다.
지우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야, 야. 너 너무 적극적인 거 아니냐? 그럴 시간까지는 없어. 아니, 시간이 있어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이런 식으로 마초 유전자가 퍼져나가는 거라고.”
“농담할 기운은 있나 보네. 아기는 나중에 더 좋은 여자 만나서 낳아달라 그래요. 나는 그 짜증나는 유전자 제대로 사람 구실할 정도로 희석시킬 자신 없으니까.”
“응? 그건 아니지. 자부심을 가져. 너 제법 좋은 여자야.”
“흥. 또 뭐라는 거야……”
지우는 필요 이상으로 고개를 숙이고 손수건으로 상처를 닦아내는 서연의 정수리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라니까? 여기 빈방이잖아. 감이 좋은 여자가 좋은 여자라고. 나쁜 건 그 좋은 감으로 귀신같이 나쁜 남자만 찾아내서 신세를 망치는 이상한 심리지.”
서연이 고개를 번쩍 들고 지우를 노려 보았다.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무슨 콤플렉스 있어요? 양아치한테 애인이라도 뺏겼나 보죠?”
“젠장. 감이 너무 좋아도 일장일단이 있다니까.”
“상처 별 거 아니네요. 옆구리가 좀 많이 찢어졌지만 능글거리는 거 보면 출혈과다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고. 인공호흡만 좀 하면 일어날 수 있겠어요.”
“뭐?”
서연은 대답 대신 지우의 얼굴 위로 몸을 숙여 거의 기도를 타고 넘어가던 호흡을 빼앗아 삼켜 버렸다.
생사의 기로를 함께 넘나든 남녀가 순간적으로 서로에게 과도한 성적 호감을 갖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누가 봐도 지나치게 태평하게 여길 정도로 오랫동안 입술을 떼지 않았다.
수년 째, 단지 살아남겠다는 의지 말고는 삶의 이유를 철저히 망각하고 있었던 지우는 지금 자신이 말 그대로 살아있다는 사실을 느닷없이 깨닫고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흑백으로 어두운 호텔 객실을 ‘생명’이라는 두 글자가 총천연색으로 가득 메웠다.
그러나 그 놀라운 색채는 서연이 고개를 드는 순간 빠르게 채도를 잃었다. 서연을 보호하며 살아남아야 한다는 과제가 ‘이 여자를 지키고 싶다’는 욕망으로 변질되려는 찰나, 그의 두뇌가 그 방법을 찾고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또 다시 여러 갈래로 나뉘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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