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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시우(時雨)
작품등록일 :
2014.12.26 22:17
최근연재일 :
2014.12.28 19:12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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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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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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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4.12.27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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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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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글자
19쪽

[2권] 10_1

DUMMY

드림팀의 위력은 이동 중에도 여전했다. 부상당한 지우를 등에 업은 리레이쉰이 서연까지 억지로 자기 옆에 꼭 붙어 걷게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만 빼면 그렇다. 서연도 리레이쉰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어야 안전하다는 건 느끼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가 않았다. 지우까지 나서서 자기가 두 발로 걸을 테니 서연을 업으라고 리레이쉰을 닦달하지 않았다면 멀리 떨어져서 걸었을 것이다.

사실 두 남자의 걱정은 조금 지나친 감이 있었다. 리레이쉰이 위험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릴 수 있으니, 여차하면 지우를 팽개치고 서연을 감싸 안으면 그만이다. 날아오는 게 총알이라면 지우도 자기 몸 하나는 알아서 지킬 수 있다. 칼을 든 상대라면 리레이쉰이 미리 알아차리고 충분히 대비하기 전에 가까이 다가올 수도 없다.

그러나 그날 하루 몇 번이나 자신을 과신하여 위기를 자초한 바 있는 두 남자는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연약한 서연이 곁에 있으니 더욱 그랬다. 지우는 리레이쉰이 굳이 자기를 업고 가는 게 불만일 정도였다. 자기만 없으면 리레이쉰이 서연을 더욱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등에 업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지우가 결국 그 안을 입밖에 냈다.

“이렇게 하자. 나를 적당히 안전한 곳에 내려줘. 나는 NSA한테 도와달라고 말할게. 내가 전화하면 대기 중인 국정원 요원들이 진입할 거야.”

리레이쉰은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바보냐? 걔들이 왜 굳이 너를 구하겠어? 서연이라면 몰라도.”

“네가 서연이를 구해갔다고 말하면 되지. 이번에 적지 않은 공까지 세웠으니, 한스는 네가 나를 더 신임하게 됐다고 생각할 거야. 내가 아직 쓸모 있다고 생각할 걸?”

“한스는 나를 알아. 내가 널 여기 놔두고 가면 널 버렸다고 생각할 거야. 네 효용가치가 사라져.”

지우가 가만히 휘파람을 불었다.

“뭐야? 의리파라고 알려져 있는 거야? 그 헛소문 진짜야?”

“뭐 임마? 나 땀 흘리는 거 안 보여? 진짜 확 버리고 갈까 보다. 입 다물고 가만히 좀 있어. 서연이한테 점수 좀 따게.”

서연이 한숨을 쉬었다.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끌어들여요? 진짜 확 가만히 있어버릴까 보다.”

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정말로 그 자리에 멈춰서 버렸다. 말투는 차가웠지만 그건 사실 리레이쉰을 배려한 행동이었다. 리레이쉰의 날렵한 근육은 무거운 짐을 들고 나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아무리 리레이쉰이라도 부상당해 축 늘어진 지우를 업고 도망치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리레이쉰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지우는 서연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래. 잠깐만 쉬자. 무슨 등에다가 철심을 박아놨는지 배겨서 더 못 버티겠다.”

그 말을 듣자 리레이쉰도 서연이 자기를 배려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못 이기는 척 지우를 나무 등걸 아래에 내려놓았다.

서연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게요? 출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거 알아요?”

리레이쉰이 대답했다.

“응. 이 상태로 정문으로 걸어 나가는 건 아무리 나라도 무리야. 달동네에서와는 사정이 다르거든.”

“그래서요?”

“차를 한 대 빌려야지. 언제까지나 이 짐짝을 둘러메고 다닐 수도 없잖아.”

“검문에 걸릴 거예요.”

“그래. 그건 이 짐짝이 알아서 처리해줄 거야. 그렇지?”

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건네고는 전화번호를 하나 불러주었다.

“무슨 번호예요?”

“새 애인.”

“수진이?”

지우와 리레이쉰이 동시에 진저리를 쳤다. 둘 다 된장인줄 알고 똥을 찍어 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들 그래요? 농담교 광신도들답지 않게. 누구 번호인지나 말해봐요.”

리레이쉰이 패배를 인정하고 기분 좋게 웃었다. 그가 대답했다.

“아마 미스 NSA, 애니 그린 양일 거야. 난 그 여자가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는지 모르겠어. 헐리우드는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런 여자 안 데려가고. 아, 넌 꿈도 꾸지마. 헐리우드엔 이미 손을 써놨으니까. 아무도 널 스카우트하러 오지 않을 거야. 내가 소유욕이 좀 강하거든.”

약혼녀 앞에서 다른 여자의 미모를 칭찬하는 건 목숨을 건 행동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리레이쉰이 서연에게 아부하느라 길게 늘어놓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서연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좀 구차하네요. 옛날엔…… 뭐 그건 그렇고, 그래서 어쩌라고요? 이 여자한테 전화하라고요?”

서연은 ‘옛날엔 안 그랬던 것 같은데’라고 말하려다가 급히 입을 다물고 화제를 돌렸다. 그러나 리레이쉰은 그녀가 옛일을 기억해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짐작이라기보다는 기대에 더 가까웠다.

지우는 그런 분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는 여기서 안전하게 빠져나갈 작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전화해서 바꿔줘.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 볼게.”

서연은 전화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통화버튼만 누르고 돌려주었다. 지우가 불러준 번호는 그 전화기의 유일한 통화목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화기는 지우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 리레이쉰이 낚아채 종료버튼을 눌러버린 것이다.

“잠깐. 뭘 어떻게 할 건지 먼저 얘기해 봐.”

지우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지우는 주어진 정보 하에서 최선의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우가 가진 정보의 양이었다. 각자가 가진 정보를 취합하면 훨씬 더 나은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지우도 그건 인정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었다. 사실은 한가롭게 이야기나 나누고 있을 힘이 없었다. 애니와 통화하다 보면 또 한스가 끼어들 것이다. 그와 신경전을 벌이는 것은 대단히 피곤한 일이었다. 하지만 리레이쉰이 이렇게 나오는 데야 어쩔 수 없었다. 가능한 한 체력을 아끼고 싶었지만 리레이쉰의 말이 정론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지우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들어오기 전에 협조를 요청했어. 총성이 몇 번 울리더라도 진입하지 말라고. 그러다 총성이 그치고, 내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총성 핑계를 대고 들어와서 서연이를 구해가라고 했지. 이제 슬슬 국정원 애들이 정문에서 노크할 때가 됐어. 야쿠자 놈들은 시체를 치우느라 정신 없을 거야.”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지만, 코지로로서는 이 참패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 망신도 망신이고, 한국에 사업가가 아니라 범죄조직의 두목으로서 들어왔다는 사실이 들통나는 것도 문제지만, 가장 곤란한 것은 역시 이 일이 할아버지 오카다 츠지야마의 귀에 들어가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의 사악한 의도보다, 그 의도를 관철시키지 못한 무능력에 더 크게 분노할 것이다.

지우가 코지로와 오카다의 관계까지 알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서연과 리레이쉰은 그의 분석에 토를 달지 않았다.

지우가 말을 이었다.

“일단 차를 훔쳐서, 야쿠자 놈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문을 열고 경찰을 맞을 때 정문으로 나가는 거지. 경찰이 검문을 할 거야. NSA한테 경찰이 우리를 그냥 보내주도록 손을 써달라고 부탁할 거야. 경찰 앞에서는 야쿠자도 손을 쓰지 못해.”

서연이 미소를 지었다.

“큰오빠 부하들도 연기에 동참할 수밖에 없겠네요. 안녕히 가시라고 허리까지 숙이겠죠? 그거 좋네요. 그렇게 해요 우리.”

조용히 듣고만 있던 리레이쉰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사실 지금 여기서 빠져나가는 건 문제가 아냐. 여차하면 다 죽여버리고 천천히 나가도 상관없어. 정문에 경찰이 있건 국정원 요원이 있건 말이야. 그런데 이건 여길 빠져나가기만 하면 멀쩡하게 다음 판으로 넘어가는 게임 퀘스트가 아니거든. 다음 수를 생각한다면 그 계획엔 문제가 좀 있어.”

출혈이 심해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한 지우는 리레이쉰의 사고를 다 따라잡지 못했다. 그가 눈으로 묻자 리레이쉰이 말을 이었다.

“경찰이 우리를 태운 차를 그냥 보내준다면 나와 한국 경찰의 관계, 아니, NSA와의 관계가 의심받을 거야. 내가 너한테 관심을 가진 걸 알고 너를 소말리아에서 빼내 츠지야마 패밀리에게 팔아 남긴 놈들이 바로 NSA거든. 코지로는 몰라도 오카다는 그 배후에 NSA가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어떻게?”

“내가 말해줬지. NSA가 준 카드로 나를 흔들려고 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NSA한테 휘둘리는 거라고.”

서연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지우가 실소를 흘렸다.

“그래서 나를 그렇게 쉽게 삼합회로 넘긴 거였군. 난 또, 내가 원래 그렇게 싸구려인 줄 알았잖아.”

농담으로 받았지만 지우도 이게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다

오카다가 자신이 NSA의 표적이 되어 있다고 느낀다면, 그리고 리레이쉰이 그 매개라고 생각한다면 그와 손을 잡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카다가 리레이쉰에게 등을 돌리면 삼합회 내부의 반 리레이쉰 파에게도 명분이 생긴다. 이렇게 중요한 사업을 NSA가 개입된 추문으로 망쳐버린다면 단번에 조직 내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것이다. 삼합회에 뉴욕 뒷골목 출신의 근본도 없는 리레이쉰이 지나치게 승승장구하는 걸 곱게 보지 않는 눈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이다. 아무도 그의 편에 서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리레이쉰에게는 그의 은밀한 동기를 배제하더라도 서연과의 결혼에 사활을 걸 이유가 있었다는 얘기다. 오카다가 무서운 게 아니라, 그의 손주 사위가 되지 못하면 삼합회에게 리레이쉰을 제거할 명분을 주게 되는 것이다. 이건 리레이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 세 사람 모두 돌아갈 곳이 없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슨 수를 써도 혐의를 피하기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이 세계는 연예계와 같아서,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가 난다. 코지로는 억지로라도 리레이쉰을 모함하려고 들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경찰의 추격을 최대한 요란하게 따돌려야 했다. 그러나 그건 오늘밤 이 저택에서 벌어진 살육이 경찰에 알려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건 코지로는 물론 리레이쉰에게도 좋을 게 없었다. 백주대로에서 캄보디아 마약조직의 습격을 받지 않나, 약혼식 하루 전 날 사돈댁에 침입하여 50여 명을 학살하고 약혼녀를 보쌈 해가지 않나,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수 없는 행동들 투성이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지우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네가 처음부터 여기 없었던 걸로 할 수밖에 없어. 네 얼굴 본 놈들 중에 살아있는 놈들이 있어?”

리레이쉰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를 본 민간인들까지 다 죽였냐고? 내가 메두사냐?”

“젠장. 굼뜨고, 허술하고, 그래도 목숨을 빚졌으니 차마 이럴 걸 뭐 하러 왔냐고도 못 하겠고, 진짜 환장하겠네.”

지우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리레이쉰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공식적으로 리레이쉰의 수하인 그가 이미 일을 너무 크게 벌이기도 했지만, 리레이쉰은 오직 지우와 서연을 구하기 위해 모든 걸 버리고 여기로 온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대충 상황을 짐작한 서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오빠 새 애인한테 전화해서 국정원 요원이나 경찰들이 여기로 오지 못하게 할 순 없어요? 그 사람들하고 부딪히지 않고 떠나면 여길 수색 당할 일도 없고, 의심 살 일도……”

지우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여기 레이 얼굴을 본 사람이 너무 많다는 거야. 얘 더럽게 유명하더라고. 이 인간이 여기 왔다 갔는데, NSA와 어떤 식으로든 엮여있는 우리가 무사히 빠져나갈 때까지 경찰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걸로 이미 의심을 살 이유는 충분한 거지.”

“큰오빠가 입 단속은 확실히 할 걸요? 할아버지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단 두 명한테 안방이 뒤집어졌다는 걸 아시면 큰오빠를 사람 취급도 안 하실 텐데, 큰오빠가 그렇게 되게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어요.”

“할아버지가 많이 무서운 모양이지?”

“무섭게 생겼거든요.”

“그래도 입 단속은 어려울 거야. 사소한 일이라 잊고 있었는데, 내가 아까 저 안에서 국회의원 하나를 죽였거든. 우리가 됐건 코지로가 됐건, 이 일을 조용히 덮으려면 한국정부와 접촉해야 해. 네 할아버지 모르게 할 수는 없어.”

“그게 사소한 일? 아, 진짜 똘끼충만……”

리레이쉰은 지우가 일을 생각보다도 크게 벌였다는 걸 알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도 국회의원 하나 정도는 사소한 일이었다. 오히려 어떤 식으로든 한국 정부와의 거래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는 점에서 변수 하나가 줄어든 셈이다. 어떤 일에든 대처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에게, 과제가 어려워진 대신 경우의 수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차라리 반가운 소식이다.

“서연이가 할아버지를 닮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뭐, 어찌됐건 여기 앉아서 골머리를 썩인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 진인사(盡人事)하고, 대천명(待天命) 하자.”

리레이쉰이 한자까지 섞어가며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진인사, 대천명’은 중국어로 발음했지만 손가락으로 바닥에 한자를 써서 보여주었기 때문에 서연도 지우도 이해할 수 있었다.

오카다가 얼굴만 무서운 사람일 리 없다. 코지로 따위가 아무리 입을 단속해도 리레이쉰의 오늘 행보는 그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이제 코지로와 리레이쉰이나 실각은 시간문제였다. 둘 중 하나라도 길동무로 데려갈 수 있기만을 바라던 지우였으나, 이건 결코 그가 원하던 결말이 아니었다.

지우는 입술을 깨물면서도 순순히 리레이쉰의 등에 업혔다.

저택의 도면을 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차고로 안내하던 지우가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진인사하고 대천명하자고 했지?”

“인간사가 원래 그런 거 아닌가? 그렇게 더듬더듬 최선을 다하는 거.”

지우가 리레이쉰의 중국어 발음을 어설프게 따라 하자 리레이쉰이 웃으며 대답했다. 지우도 피식 웃으며 원하던 결론을 이끌어냈다.

“요란하게 시작한 일이니 끝까지 떠들썩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진인사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잔치는 잔치다워야 후회가 없는 법이야.”

리레이쉰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눈치 빠른 서연이 아까 리레이쉰에게 돌려받았던 지우의 핸드폰 폴더를 열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지우가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애니가 별 의미도 없는 이야기를 한꺼번에 쏟아냈다.

“지우 씨? 괜찮아요? 총성도 그치고 연락도 없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감해하고 있었어요. 어떻게 됐어요? 여자는 구했어요? 다친 덴 없어요?”

지우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 여자는 일을 하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이건 정말 애인이랑 통화하는 것 같았다. 대화의 경제성이 제로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우를 걱정하는 진심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가슴이 뭉클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우는 이제 더 이상 일에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았다. 태영, 서연, 그리고 이제 리레이쉰까지, 지우의 감정을 빼앗는 대상은 이미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지우가 차분하게 말했다.

“다 잘 됐어요. 이제 여기서 탈출할 거예요. 그래서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그럴 줄 알고 준비해뒀어요. 루마니아 보험회사 사원증 아직 유효하니까 걱정 말고……”

“아니, 그 반대예요. 지금부터는 국정원이나 한국경찰한테 개입하지 말아줘요. 뭔가 착오가 있었다고 둘러대도 좋고, 무슨 수를 써도 좋으니까 코지로의 저택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한국 경찰과 국정원이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게 해줘요. 내가 알아서 뚫고 나갈게요.”

“네? 그게 무슨……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왜 그런 무모한……”

갑자기 애니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한스가 수화기를 빼앗아간 것이다. 지우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바였다.

“그 얘긴 리레이쉰과 함께 있다는 얘기군. 혹시 이 통화내용도 듣고 있나?”

“내가 애니랑 통화하는 것도 다 엿들으면서 뭘 그래? 어차피 내가 이중간첩이라는 건 루마니아 꼬마들도 다 아는 사실 아냐?”

“이런 미친놈. 연극이라는 건 배역에 몰입해야 성립하는 거야. 스포츠도 마찬가지지. 머리 위에 매달아 놓은 바구니에 공을 집어넣는 하찮은 일이 사실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자신과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마이클 조던도 그저 잘생긴 흑인 아저씨일 뿐이라고.”

“의외네. 조던을 증오하고 래리 버드나 존 스탁턴을 숭배할 줄 알았는데.”

“별로. 나이키 주식을 좀 가지고 있을 뿐이야.”

“어쨌건 지금은 그런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어. NSA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NSA가 해결해야지. 삼합회가 리레이쉰을 쳐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줘야겠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렇게까지 해버린 이상 넌 이중간첩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걸 고백한 셈이야. 두르가 얘기까지 다 해버렸지? 빌어먹을. 진작에 윤태영 그 자식 신병을 확보했어야 했는데. 리레이쉰 이 여우 같은 놈……”

등에 업힌 채 통화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스의 목소리는 리레이쉰의 귀에도 똑똑히 들리고 있었다.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한스가 아니란 말이지? 이건 또 이거대로 골치 아픈 일인걸?”

혼잣말이었지만 지우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나 다름 없었다. 지우는 사고의 일부를 따로 떼어 잠시 잊고 있었던 태영의 일에 할당하고, 나머지로는 한스에게 대답할 말을 골랐다.

“네가 리레이쉰이 두르가와 관계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미끼는 자신이 미끼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어도 미끼의 역할을 할 수 있어. 단지 미끼일 뿐이라면 말이야. 다행히 리레이쉰도 두르가의 정체를 몰라. 이쪽에서 두르가에게 NSA를 조심하라고 알려줄 방법이 없다는 얘기야. 리레이쉰이 건재하다면 두르가는 다시 그 주위를 맴돌 거야. 뒷일은 알아서 하라고.”

그럴듯한 얘기였지만 한스는 더 이상 지우를 신뢰하지 않았다. 리레이쉰이 지우를 구하러 거기까지 갔다면 둘 사이에 그만한 신뢰가 구축되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스가 아는 한, 그런 식의 의리로 묶인 동양인들은 한 사람이나 다름 없다. 물론 거물일수록 의리는 더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가 아는 리레이쉰과 지우는 힘만 있는 양아치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한스도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네놈들 말을 어떻게 믿냔 말이지. 리레이쉰 그 여우 같은 놈이 두르가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네, 알고 있습니다’할 것 같아? 도대체 내가 왜 네놈들을 도와야 하는 거야? 누굴 바보로 알아?”

지우가 예상한 대답이었다. 리레이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둘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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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3권] 7 +2 14.12.28 2,246 64 14쪽
60 [3권] 6_2 +3 14.12.28 2,372 66 12쪽
59 [3권] 6_1 +2 14.12.28 2,695 66 18쪽
58 [3권] 5_3 +1 14.12.28 2,170 61 14쪽
57 [3권] 5_2 +2 14.12.28 2,083 70 14쪽
56 [3권] 5_1 +2 14.12.28 2,200 72 13쪽
55 [3권] 4_2 +4 14.12.27 2,264 70 14쪽
54 [3권] 4_1 +2 14.12.27 1,931 64 16쪽
53 [3권] 3_2 +5 14.12.27 2,133 66 15쪽
52 [3권] 3_1 +4 14.12.27 2,240 70 14쪽
51 [3권] 2_3 +2 14.12.27 2,067 71 10쪽
50 [3권] 2_2 +1 14.12.27 2,706 74 13쪽
49 [3권] 2_1 +2 14.12.27 2,301 73 13쪽
48 [3권] 1 +3 14.12.27 2,221 77 26쪽
47 [2권] 11_2 +5 14.12.27 2,122 74 12쪽
46 [2권] 11_1 +3 14.12.27 2,255 73 11쪽
45 [2권] 10_2 +4 14.12.27 2,467 84 20쪽
» [2권] 10_1 +4 14.12.27 2,885 75 19쪽
43 [2권] 9 +5 14.12.27 2,114 85 20쪽
42 [2권] 8 +2 14.12.27 2,430 81 24쪽
41 [2권] 7 +4 14.12.27 2,499 83 24쪽
40 [2권] 6_3 +4 14.12.27 2,440 84 17쪽
39 [2권] 6_2 +2 14.12.27 2,169 77 19쪽
38 [2권] 6_1 +5 14.12.27 2,212 71 17쪽
37 [2권] 5 +8 14.12.27 2,536 81 25쪽
36 [2권] 4_2 +6 14.12.27 2,227 75 13쪽
35 [2권] 4_1 +7 14.12.27 2,508 77 22쪽
34 [2권] 3_2 +4 14.12.27 2,517 87 13쪽
33 [2권] 3_1 +4 14.12.27 2,646 110 16쪽
32 [2권] 2 +3 14.12.27 2,685 97 12쪽
31 [2권] 1_3 +4 14.12.27 2,577 93 14쪽
30 [2권] 1_2 +3 14.12.27 2,525 86 15쪽
29 [2권] 1_1 +4 14.12.27 2,737 99 15쪽
28 [1권] 11 +4 14.12.27 2,897 100 13쪽
27 [1권] 10 +7 14.12.27 2,882 102 20쪽
26 [1권] 9_2 +6 14.12.27 3,463 84 15쪽
25 [1권] 9_1 +3 14.12.27 2,808 90 15쪽
24 [1권] 8 +5 14.12.27 2,992 105 10쪽
23 [1권] 7 +4 14.12.27 3,007 98 16쪽
22 [1권] 6_2 +10 14.12.27 2,829 116 10쪽
21 [1권] 6_1 +4 14.12.27 3,064 122 17쪽
20 [1권] 5_2 +4 14.12.27 3,107 105 7쪽
19 [1권] 5_1 +5 14.12.27 3,043 109 10쪽
18 [1권] 4_3 +9 14.12.26 3,242 128 16쪽
17 [1권] 4_2 +5 14.12.26 3,179 110 11쪽
16 [1권] 4_1 +4 14.12.26 3,199 111 7쪽
15 [1권] 3_4 +3 14.12.26 3,837 121 13쪽
14 [1권] 3_3 +6 14.12.26 3,525 126 13쪽
13 [1권] 3_2 +7 14.12.26 3,609 141 12쪽
12 [1권] 3_1 +4 14.12.26 3,635 123 10쪽
11 [1권] 2_5 +4 14.12.26 3,806 123 9쪽
10 [1권] 2_4 +3 14.12.26 3,907 118 11쪽
9 [1권] 2_3 +3 14.12.26 3,868 116 8쪽
8 [1권] 2_2 +7 14.12.26 4,041 122 13쪽
7 [1권] 2_1 +4 14.12.26 4,444 123 11쪽
6 [1권] 1_5 +4 14.12.26 4,586 135 12쪽
5 [1권] 1_4 +3 14.12.26 5,017 134 13쪽
4 [1권] 1_3 +6 14.12.26 5,451 147 12쪽
3 [1권] 1_2 +7 14.12.26 6,082 159 14쪽
2 [1권] 1_1 +6 14.12.26 7,362 172 8쪽
1 0. +10 14.12.26 8,061 178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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