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3개월차 -3-
왕의 뒤를 따라 걸으며 이야기하던 대사간 서상교는 왕이 몸을 돌려 이야기를 하는 통에 잠시 용안을 볼 수 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수척해진 얼굴은 큰 병에서 회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다고 이해할 법 했으나, 그 수척한 얼굴에 자리잡고 있는 두 눈, 그 두 눈이 대사간의 머릿속을 뚫고 보는 것처럼 안광이 번쩍이고 있었던 것이다.
맑다 못해 빛나는 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이 오지 않는 표정,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도 전혀 고뇌나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 표정에 대사간은 섬뜩함을 느꼈다.
‘맑은 눈의 광인... 나는 다 알고 있으니 네놈을 조질지 아니면 주워다 쓸지 답하라고 하시는 것 같구나.’
대사간은 잠시 머뭇거리다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께서는 이미 마음을 정하신 것 같사온데, 어찌 저에게 하문하시나이까?”
“그나마 경이 여의 뜻을 꺾으려 하지 않고 내 의중을 살필 줄 아는 거의 유일한 자였기 때문이다.”
‘어리고 병약하다고 얕보았다고는 경을 쳤겠구나. 하기사 저 효명세자의 적장자 아니던가.’
“저하의 명하시는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 마땅한 신하된 도리이겠으나, 저는 대사간의 자리에 있는 몸이니 간쟁(임금이 정사를 그릇되게 할 때 ‘님 도르신?’을 하는 일)과 봉박(임금의 명령서가 불의하거나 부정할 경우, 그 서류를 임금에게 돌려보내는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나이다.
상께서 그릇된 명을 따르라 하시려면 저를 이 자리에서 내친 후 말씀해 주시옵소서.”
“아직도 이렇게 간이 비대한 자가 조정의 당상관 중 남아있다니, 이 또한 조선의 홍복 아닌가.”
임금은 킬킬 웃으면서 말했다.
“어차피 그 분위기에서 경에게 독대를 명한 이상, 이제 그대는 그들에게 의심을 받게 될 것이야. 다시 세도가 아래로 줄타기를 하려 한 들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각오하고 있었사옵니다.”
“간쟁과 봉박이라... 그럴 만한 명도 여는 충분히 내리고도 남을 것이야. 허니 그대가 간쟁과 봉박을 할 여유조차 주지 않겠네.”
“...그 무슨 말씀이시온지 잘 이해하지 못하겠사옵니다.”
“논박과 탄핵만으로도 정신없이 바쁘게 만들어 주겠다는 말일세.”
한 마디로, 부정하고 부패한 관료들을 솎아내고 그들과 죽도록 싸우게 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사간원의 모든 관원들은 근무 중에도, 금주령이 떨어진 중에도 음주가 가능한 것이 왜인지 알고 있겠지?”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대상을 들이받으라고 그런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지, 그렇지. 그래서 간이 비대해지는 것이고.”
왕은 여전히 킬킬 웃으며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더니 왕은 뜬금없이 한 마디를 던졌다.
“자네, 술 먹었는가?”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전하. 어찌 국가의 대사를 논하는 자리에 음주 상태로 갈 수 있겠사옵니까?”
“그럼 맨정신이었단 말인가? 허허.”
잠시 대사간을 이리저리 쳐다보던 왕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간만 비대해져서는 이 혼란한 시국에서 살아남기 힘들 수도 있겠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고 있는 대사간에게 왕이 명했다.
“어서 환복하고 퇴청하라. 잠시 후 다시 볼 터이니.”
“...네? 어인 말씀이십니까?”
“어서 환복하고 퇴청하래두.”
그렇게 환복하고 집으로 향하던 대사간은 궐 밖에서 다시 미복을 입고 나타난 왕과 마주치게 되었다.
“저...전하?!”
“조용히 하라. 모처럼 미복을 입었는데 전하라고 떠벌리면 미복잠행을 하는 의미가 없지 않느냐?”
눈 앞이 캄캄해짐을 느끼는 대사간이었으나 왕이 엇나가면 목숨을 걸고 바른 소리를 하는 것 또한 대사간의 일이었으니, 바로 서상교는 바른 말을 올리기 시작했다.
“퇴청하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퇴청하라고 했지, 일이 아직 끝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오나 전하, 경국대전에도 여름철에는 묘사유파라 하여 묘시(5~7시)에 등청하고 유시(17~19시)에 퇴청하는 것이 법도이옵고, 겨울에는 진사신파라 하여 진시(7~9시)에 등청하여 신시(15~17시)에 퇴청하는 것이 법도이옵니다.”
하루 열두시간 근무는 기본에 출퇴근 시간은 제외하고 저 정도인데다 휴일이 따로 없는 것이 조선 관리의 근무시간이었으니, 모처럼 퇴청했는데 왕을 만나는 것이 달갑지는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왕은 대놓고 세도가들이 실권을 잡고 있는 현 조정에서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까딱 잘못 줄을 잡았다가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십상이었다.
“숙직하는 자들도 많지 않은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숙직이야 젊고 직급이 낮은 관원들이 하는 것이옵고, 당상관 이상의 숙직은 매우 드문 경우에 있는 것이옵니다.”
“그게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사옵니다.”
“대사간은 지키고 있는고?”
“사간원의 전 신하들은 최소한 등청 시간은 지키고 있사옵니다.”
“...본래 지켜야 할 것이거늘, 사간원만 그렇다는 말인가. 그래도 사간원은 법도를 지키는 것 같아 흡족하구나.”
“망극하옵니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꾸나.”
왕이 가자는데 뻗대는 대에는 아무리 대사간이라 하더라도 한계가 있었고, 왕이 미복잠행까지 하면서 자신을 만나러 온 데에는 중요한 일이 있겠거니 하며 결국 대사간도 왕을 따라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왕이 가는 대로 따라가던 대사간은 도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기겁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신을 갑주같은 것으로 감싸고 머리에도 둥글둥글한 수박같이 생긴 투구를 쓴 자의 복장도 처음 보는 입장에서는 기함할 것이었으나, 그 뒤에 있는 것은 더더욱 놀랄 만한 것이었다.
“이..이것은?!”
“아아, 이것은 ‘궤도바이크’라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한 왕은 능숙하게 그 중 한 대를 골라 뒷자리에 타고는 대사간에게 말했다.
“여기에 타라, 대사간.”
순간 대사간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전례에 있는 일인가?
아니다.
타지 않을 수 있는 법도와 사례들을 준용해 올 만한 것이 있는가?
몇 가지 있기는 하나 이미 상께서 먼저 타셨고 나더러 타라고 하시는 상황이다.
거절할 방법이 있는가?
없다.’
“까짓거 타보죠.”
순식간에 생각을 끝낸 대사간이 남여에 올라 타듯 왕이 지시한 대로 바이크에 올랐다. 그렇게 바이크는 막 지고 있는 해를 향해 쭉, 마포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대사간도 한번 봐 두면 여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알게 될 것이야.”
그렇게 두 사람을 태운 바이크는 금새 마포나루에 도착했다.
“이것이 그...”
“그래, 이것이 그 과학선이지. 과인은 조만간 저 과학선이 정박할 수 있는 정박지를 따로 만들고, 그 옆에 집현전을 새로 만들어 조선 최고의 과학 교육 기관과 연구소를 만들 생각이야. 일단 배에 올라 좀 더 자세히 보도록 하지.”
그렇게 왕은 대사간을 데리고 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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