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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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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벗
작품등록일 :
2012.11.14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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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5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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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31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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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회귀의 장-115

DUMMY

큰 돌을 던져놓고서 시작된 식사시간은 그 여파가 사라지진 않았으나 그럭저럭 잔잔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카스야나와 슈티리느는 무슨 일이 있었나는 듯이 태평하게 소소한 신변잡기부터 시작해서 제법 깊이 있는 정치이야기나 가문 간의 거래 이야기 따위를 주거니 받거니 했지만 이오리린과 무이트는 딴 생각에 잠겨서는 영혼 없는 추임새만 간간히 넣고 있었다. 카스야나와 슈티리느는 아주 가끔 그런 둘에게 시선을 던지곤 했지만, 식사를 마칠 때까지 그들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요구하는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렇게 미묘하게 아귀가 맞지 않은 채로도 식사 시간은 그럭저럭 단란하게, 어느 정도는 쓰임새 있게 지나갔다. 부부동반임에도 불구하고 카스야나와 슈티리느 외에는 있으나마나한 곁다리로 끝나버렸지만 말이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이오리린은 처음부터 ‘부부동반’이라는 상징적인 자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던 만큼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역할을 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이트는 아니다. 본인은 모르는 듯하지만, 그는 처음 인사를 주고받았을 때 말고는 계속해서 실패만 하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슈티리느가 카스야나 앞에서 그를 ‘가야다 가의 가주’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순간부터.

물론 그런 중대한 사안을 당사자인 무이트에게조차 사전에 말하지 않고 대뜸 오르세만 가의 차기 가주인 카스야나 앞에서 꺼낸 것은 슈티리느의 악취미다. 그나마 구명줄은 이 자리는 엄연히 ‘사석’이라는 것이다. 무이트의 대응에 따라서 얼마든지 빈말이나 농담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무이트는 여기서 처음 실패했다. 그는 대범하게 받아들이지도 못했고, 겸허하게 거절하지도 못했다. 당황해서 슈티리느에게 진의를 직접적으로 캐물으려 했고, 그 후에도 자신의 감정을 삭히느라 침묵했다. 가야다 가의 가주자리가 싫었다면 웃으며 농담으로 치부했어야 했고, 원했다면 슈티리느가 아닌 카스야나을 상대하며 자신의 그릇을 과시했어야 했다. 그는 어느 쪽도 하지 못했다. 제 감정 하나만을 추스르느라 바빠서, 가장 중요한 사안은 얼렁뚱땅 넘겨버렸다. 여기서 그는 이미 자신이 가야다 가주를 감당할 역량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슈티리느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사석’에서 카스야나와 대면하게 한 것이다. 이 ‘첫대면’이 공석에서 이뤄졌다면 카스야나는 무이트의 미흡함을 기꺼이 이용했을 테니까. 물론 그 경우엔 슈티리느가 차단하거나 보충했을 테지만, 피할 수 있는 신경전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여기서 무이트는 두 번 실패했다. 카스야나는 무이트가 가야다 가의 가주를 움켜쥘 각오를 다질 시간을 주었다. 무이트가 그 자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면 슈티리느는 그런 선언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원하지도 않는 자에게, 그것도 걸맞는 능력을 갖추지도 못한 자에게 떠넘기기엔 가야다 가주 자리는 너무나 높고 크고 무거우니까.

그러니 무이트는 카스야나가 관대하게 넘겨준 시간을 자신의 각오를 다지는데 썼어야 했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왜냐면 슈티리느의 계획대로 그가 가야다 가의 가주가 된다면, 결과적으로 카스야나와 그는 동등한 지위에서 끝없이 경쟁해야 하는 라이벌이 되는 거니까. 카스야나의 관대한 배려를 받은 이 시간은 후에 무이트에겐 굴욕, 또는 빚이 될 테니까

그런 면에서 카스야나는 무이트를 동정했다. 무이트는 제 감정을 수습하고 나면 이 자리에서 자신이 보인 추태를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사전에 언질을 주지 않은 슈티리느를 원망하겠지. 그것이 매우 알기 어렵긴 하지만 슈티리느의 배려였음을 깨닫는 일은 아마 영영 없을 지도 모른다.

슈티리느는 카스야냐에게 무이트의 미숙함을 일부러 보임으로써 자신의 각오를 카스야나에게 확실하게 알린 것이다. 무이트는 가야다 가의 가주가 될 자질이 부족하다. 그걸 내가 보충할 거다. 그러니 무이트의 미숙함을 이용하려면 나를 정면승부를 할 각오를 해라. ······라고.

어쩌면 그 배려를 무이트가 깨닫는 날이 올 지도 모르지. 그렇다 해도 그는 고마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 자체를 굴욕으로 느낄지도 모른다. 카르민 계층에 올라서, 그 정점인 가주 자리까지 노리는 남자가 아내의 치마폭에 싸여있는 자신을 기꺼이 여길 리 없으니.

슈티리느가 가주가 되는 것이, 그래서 무이트가 단순한 데릴사위로서 나름의 직책을 맡는 것이, 적어도 무이트에게는 훨씬 나았을 것이다.

‘힘들어질 테지······.’

그 고행은 무이트나 슈트리느의 것만이 아니다. 든든한 지원이 있다고 해도, 역량이 부족한 자가 지탱하기엔 카르민 계층의 가문은 녹록치 않다. 그렇기에 카르민 계층의 가주 계승싸움은 치열하지만, 한번 정해지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누리는 것의 몇 배는 크고 무거운 것을 짊어져야하는 자리니까.

물론 슈티리느가 무이트를 가주로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유력한 가주 계승권자인 것은 슈티리느지 무이트가 아니다. 그런 슈티리느조차도 가주 계승싸움에서 질 확률이 존재한다. 그러니 본인도 아닌 데릴사위인 무이트를 가주로 올리는 것은 당연히 험난할 것이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티리느의 뜻대로 된다면, 가야다 가는 힘들어지겠지. 역량이 부족한 자가 가주가 된 것도, 그런 가주를 보충하고 지원해주는 후원자를 정작 가주 자신은 달가워하지 않는 것도, 그렇게 뒤틀려 있는 진형에게 패배하고 만 가야다의 가주 계승권자들이 품을 굴욕감과 반발심도.

어쩌면 가야다 가는 카스야나가 예상하는 것보다도 더 오래 흔들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카스야나의 동정도, 배려도, 관심도. 이후는 슈티리느와 무이트, 그리고 가야다 가가 해결해 나가야할 문제니까.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뚜렷한 불협화음 속에서 ‘부부동반’의 식사가 끝났다.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지위가 높은 귀족일수록 지키는 암묵의 예법이 있다. 함께 식사를 하더라도, 식당을 나서는 것은 지위가 높은 쪽이라는 것이다. 남겨진 측은 차를 한 잔 마실 만큼의 시간을 두고 나온다. 이는 단순히 신분차이를 과시하거나 권위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안위를 위한 합리적인 규칙이다.

귀족이란 크든 작든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마련이다. 그에 따른 암살 위험도 크든 작든 항상 따라온다. 암살자의 유무나 질 등은 다 제쳐놓고 그저 단순하게만 보면, 귀족 둘이 사석에서 만났다는 것은 둘을 노리는 암살자가 합쳐졌다는 뜻이 된다. 그만큼 호위도 합쳐지지만, 평소에 제휴를 맺고 움직였던 것이 아니라면 서로의 방해만 된다. 식당에 들어가 있을 때는 괜찮다. 대상보다 장소의 경비에 집중하면 되니까. 그러나 불특정 다수가 들락거리는 입구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번잡함 속에서 호위에 틈이 생기기가 쉽고, 한때 암살자들에겐 애용되던 무대였다.

심지어 하위 귀족을 ‘사고’로 죽이기 위해 상위 귀족들 암살하는 척 대규모 공격을 하는 일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방비가 굳건한 상위 귀족은 안전하나 휘말린 하위 귀족은 죽거나 크게 다쳤고, 상위 귀족은 ‘말려든’ 하위 귀족에게 위로금이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것을 노리고 자작극을 펼치는 일마저 발생했다. 때문에 따로 이동함으로써, 각자 몫(?)의 암살자를 챙겨가는 것(!)이 자연스럽게 굳혀지게 된 것이다.

지위가 동등할 때는 나이가 많은 자가 먼저 나온다. 나이마저 같을 경우엔 먼저 공직에 오른 순서. 매우 희박하지만 이마저도 같을 경우엔 동반인의 지위로 나뉜다. 동반인이 없을 때는 호위기사다. 지방으로 갈수록 귀족 개인의 성향에 따라가지만, 수도에서는 매우 불가피한 일이 아닌 한 반드시 지킨다.

이번 경우엔 당연히 카스야나가 먼저 나오는 것이 맞았다. 차기 가주로서 반보 앞선 상태이기도 하고, 나이도 많기 때문이다.

식후 차를 2할 가량만 마시고 일어선 카스야나와 이오리린이 식당 입구에 섰을 무렵엔 이미 종업원에게 연락을 받은 마부가 마차를 대기시키고 있었다. 카스야나의 손을 잡고 식당 입구의 계단을 내려온 이오리린이 마차 안으로 한 걸음 내딛었을 때였다.

“······!”

그것을 제일 먼저 감지한 것은 당연히 청월이다. 하지만 먼저 움직인 것은 다른 호위기사들이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들보다 반 박자 빨리, 상대가 움직였다.

“으윽······!”

열려 있는 마차 문의 좁은 틈새를 비집고 날아온 암기가 이오리린의 어깨에 박혔다. 손바닥만한 길이의, 조금 두께감이 있는 대바늘 형태의 암기였다. 암기가 쏘아진 방향, 타이밍도 실로 절묘했다. 마차문은 이오리린의 좌측에 열려있었고, 카스야나는 우측에서 에스코트를 하고 있었고, 청월은 카스야나의 반보 뒤에 서있었다. 즉, 청월이 미리 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때 막지 못한 것은 마차문과 카스야나가 이오리린의 양 측에서 방해가 됐기 때문인 것이다.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이오리린이 비틀거리는 것을 카스야나가 지탱했다. 그런 둘을 청월이 마차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귀족가문의 마부는 가문 밖에서 마차를 세울 때면 마차를 떠나지 않는다. 암살자가 숨어들 수도 있고, 위험물이 설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부의 감각을 속일 수 있을 만큼 은밀성이 뛰어난 암살자라면 마차 안에 숨어들 수 있겠지만, 단순히 매복하는 것 이상의 기술을 요하는 위험물의 설치는 아무래도 힘들다. 때문에 청월은 안전을 위해 마부가 바뀌지 않은 것과 마차 안에 숨어든 자가 없다는 것만 확인하면 됐다. 그리고 마차 안에 침입자가 없다는 것은 마차를 보자마자 확인한 상태였다.

따라 들어가지 않고 마차 문을 닫은 청월이지만 그렇다고 암살자를 추적하지는 않았다. 그저 평소보다 조금 날카롭고 예민하게 주위를 경계할 뿐이었다. 당연했다. 이오리린을 노린 암살자를 잡기 위해 청월이 움직이면, 진짜 호위대상인 카스야나가 위험에 노출된다.

마차 안에서는 치유 마법을 구사할 줄 아는 마도사인 카스야나가 시급히 해독 마법을 시전 했다. 암기 자체의 살상력이 낮다면 그것에 독이 발려있다고 봐야한다. 다행히도 해독 시기가 늦지 않았는지, 이오리린의 안색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이어서 강한 수면 마법을 써서 이오리린을 기절시키다시피 잠재웠다.

암기는 아직 뽑을 수 없다. 암살자의 도구는 기발한 것이 많고, 그 중에는 뽑을 때 안에서 터지거나 쪼개지는 것도 많다. 아마추어가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위험하다. 시급히 전문의에게 보이는 것이 안전하다. 다행히 독 주입이 주된 목적이었는지 출혈을 유도하는 장치는 없다.

한편, 마차 밖에서는 호위 기사들이 미리 정해진 방향을 둘러싸고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암살자의 공격을 통해서 암살자가 있는 방향이나 위치는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지만, 그것을 정직하게 뒤쫓는 것은 하책이다. 특히 고위 귀족의 경우에는, 암살자가 한 팀으로 움직이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카스야나를 덮친 마스터급 암살자조차 거의 대부분 팀으로 움직였다.

그러니 암살자의 첫 공격은 치명타를 주는 것이 아니라 틈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 봐야한다. 하물며 최소한의 조사만 해도, ‘부부동반’으로 움직이는 이오리린의 남편에게 붙어있는 호위가 누군지 모를 수가 없다. 진짜 그녀가 목표였다면 최소한 카스야나와 떨어져 있을 때를 노렸겠지. 지금 경솔히 움직이는 것은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긴장 상태가 얼마나 계속 됐을까? 체감 상으로는 상당했지만 실제로는 카스야나가 이오리린을 해독시키고 막 잠재웠을 때였다. 청월이 말했다.

“갔다.”

“······.”

암살자의 위치조차 완벽하게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던 호위기사들은 경계심을 완전히 누그러뜨리지는 못했지만, 일단 일급 경계 태세는 해제시켰다. 청월을 신뢰한 것이다. 마스터인 실력도, 지금껏 카스야나를 완벽하게 지켜온 실적도.

이오리린의 호위 책임자가 물었다.

“그 자였습니까?”

“아마도.”

“또 올까요?”

“반반일까나?”

청월은 어깨를 으쓱이며 무게감 없이 답했다. 무성의하게도, 경박하게도 보였지만 그것에 발끈하는 기사는 없었다. 애초에 청월에게 확답을 원하고 물었던 것도 아니었다. 암살자의 속내를 누가 알랴?

“붙어있지만 않으면 돼.”

“그러겠죠.”

이오리린의 호위 책임자는 씁쓸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차기 가주인 카스야나는 현재 오르세만 가에서 가주 다음 가는 중요 인사다. 아니, 실질적인 가치를 두자면 가주보다 더 중요하다. 카르민 계층의 가주들은 후계자에게 자리를 물려준 뒤로 완전히 손을 씻고 은거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때로는 은퇴 이후의 행방조차 제대로 모를 때조차 있을 정도다. 때문에 가문 입장에서는 길어야 일년 가량만 보게 될 가주보다 앞으로 수 십 년은 혹사 당해 줄······ 가문을 지탱해줄 차기 좀비······ 가주가 더 중요한 것이다.

반면, 차기 가주의 부인에 불과한 이오리린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특히 든든한 맹수도령······이 아니라 후계자까지 있는 상태라 더욱 그렇다.

욤 제국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황족만이 황제에 오를 수 있다. 꼭 황후가 낳을 필요도 없고, 꼭 남자일 필요도 없고, 심지어 꼭 황제의 자식일 필요도 없다. 그리고 욤 제국에서는 대대로 일대에 겨우 한 두명 정도의 황족이 보라색 눈동자를 지니고 태어난다. 둘일 경우에도 그 나이차가 제법 떨어져 있었다. 그런 만큼 황후나 후궁의 지위는 황태자보다 몇 단계나 떨어진다. 그리고 그 특성은 황족과 섞이는 일이 많은 고위 귀족일수록 짙게 이어받았다. 카르민 계층쯤 되면, 가주의 부인의 지위는 가주의 애정도나 당사자의 능력, 또는 친정의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로 갈리게 된다.

이오리린은 남편과의 관계도 건조하고 능력이 특출나지도 않을뿐더러, 별 볼일 없는 시골 귀족 출신이기까지 하다. 그녀가 오르세만 가에 내세울 만한 것은, 여태껏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무난하게 제 소임을 다했다는 것과 테밀시아라는 걸물을 낳았다는 것뿐이다.

당연히 오르세만 가에서 이오리린의 중요도는 낮고, 호위의 수나 질도 그에 맞게 조율되었다. 휴첼단이 가장 바쁜 시기임에도 휴첼단장을 구색 갖춤 용으로 수도로 불러들이고, 또 다른 마스터인 휴첼부단장을 전담으로 붙일만큼 극진함의 극을 달하고 있는 카스야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런 이오리린에게 오르세만 가의 좀비들······이 아니라 직계들의 경각심을 뒤흔든 암살자가 본격적으로 달려든다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자신들로서는 지켜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청월이 닫은 마차문 안에서 카스야나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으로 가자.”

이후의 일정들을 미룬 것이다. 당연하다. 몸에 암기가 박힌 부인을 마차에 내버려두고 황실 연회나 타 가문의 중신들을 만나러 다닐 사람은 없다. 최소한 전문의에게 보여준 뒤에 하는 것이 맞다. ······단순히 ‘부부동반’이라 마차를 함께 타고 왔기 때문에 그리 결정한 건지도 모르지만.

이오리린의 호위 책임자는 조금 씁쓸한 생각을 하면서도, 신속하게 주위에 명을 내렸다. 암습이 벌어진 직후의 편성이 그 전과 같을 리가 없다. 우선 청월부터가 마차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안 하고 있다. 암기가 박힌 위치를 보아, 어느 정도 옷이 흐트러졌을 이오리린이 있는 마차 안에 들어갈 만큼 다급한 상황이 아니라 판단한 거다. 드레스에 따라서 가슴 노출도가 상당한 것들이 많지만, 처음부터 그런 옷을 입고 있었던 것과 다른 이유로 노출되어버린 상태인 것은 얘기가 다르다.

귀부인의 자존심과 안위 중에서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호위 기사의 판단에 달렸고, 불행히도 그 책임도 호위 기사의 몫이었다. 본인은 (당연히)알지 못하지만, 청월은 그런 미묘한 상황에 대한 판단력이 매우 뛰어났다. 정확히는 법적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면서,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큰 상황에 대한 판단력이 말이다.

그걸 알 리는 없지만, 청월의 결정에 간섭하는 기사는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를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청월은 마차 문에 기대어 서서 구경했다. 자신을 탓하지 않고 경계에만 전념했던 것은 사태가 급박해서라 쳐도, 상대가 물러간 이후에도 자신들의 호위 태세를 다듬는 것에만 집중하는 모습이 청월에겐 실로 기묘한 것으로 보였다. 배척하는 게 아니라 능력과 실적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무관계. 그런 깔끔함따위, 청월은 ‘몰랐다’.

청월은 이 상황에 대한 아주 적합한 표현을 떠올렸다.

‘낯설다.’

암묵의 규칙이라도 막상 일이 터지면 강자를 탓하는 것이 사람 심리다. 당신이라면 막을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그런데도 내버려둔 것은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가 아니냐고. 자신들이 지키지 못한 소임을 뒷전이고, 암묵의 규칙이고 뭐고 다 무시하고 그저 남을 탓하는 것이 보통이다.

휴첼단원은 그렇다쳐도, 저들은 이번에 처음으로 함께 움직인 사이에 불과하다. 휴첼부단장이라는 지위나 마스터라는 힘에 눌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보면 알 수 있다.

······아니, ‘그들’이 탓했던 것은 ‘강자’도 ‘남’도 아니었을 것이다. ‘청색 머리’를 가진 청월이었겠지.

청월은 바람을 타고 산만하게 흐트러지는 제 머리를 무심히 쓸어 넘기며 히죽 웃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인가? 청월은 이곳에서 이렇게 살아있다. 그거면 되지 않았는가? 그래, 이긴 것이다!

머리를 넘기던 손이 움찔 멈췄다.

······이겨? 누구에게?

“······.”

청월은 머리를 쓸어 넘긴 손을 검자루 위에 얹으며 피식 웃었다.

누구에게 이겼든, 무엇에 이겼든, 알게 뭔가?

‘이겼으면 됐지, 뭐.’


작가의말


간신히 날짜를 맞췄네요;


이렇게 간당간당하게 돌아올 생각은 없었는데 3월의 절반 가량을 병원 다니는데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아, 제가 아팠던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ㅁ; 많은 검사를 통해서 밝혀진 병명도 다행히 상정하고 있던 것들보다는 훨씬 가벼운 것이었어요. 하하 ;ㅁ;


너무 오래 격조해서 민망할 따름입니다(__);;;

지금껏 잊지 않고 기다려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려요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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