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의 장-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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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 나도 함께 움직인다.”
아침 식사 도중 키시유안이 불쑥 말했다. 그에 청월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를 돌아봤다.
본래 키시유안은 오늘부터 저택에 남아서 마일다와 휴첼 업무를 볼 예정이었다. 그의 갑작스런 말에 가장 놀란 것은 당연히 마일다였다. 하지만 사적으로 친밀하지는 않아도 공적으로 수년간 호흡을 맞춰온 부관답게, 키시유안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을 확신하고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오늘 폐하를 만나게 될 테니까.”
“……?”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야 오늘 청월과 황제와의 대면이 이뤄질 것이란 건 분명하다. 원칙상으로는 일개 귀족 가문의 부단장이 황제를 정식 알현할 이유가 없으니, 둘은 연회장에서 약식으로 대면하게 될 것이다.
그때 황제는 청월을 의중을 떠보려 들 것이고, 청월은 솔직하게 ‘곧 떠날 예정’이라 답할 게 뻔하다. 휴첼단의 힘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는 황제는 그 답에 안심하겠지. 어쩌면 청월을 근위기사단으로 끌어들이려 들지도 모른다. 마스터란 귀한 인재니까.
그래서 구태여 청월에게 까다로운 황실 예법을 가르치지 않았던 거다. 오히려 모르는 편이 청월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데다, 그에 흡족해할 황제가 쫌스럽게 꼬투리를 잡으려 하지 않을 테니까.
휴첼단으로서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청월이 황제의 제안에도 꿈쩍도 안할 거라는 것이다. 적어도 마일다가 본 청월은 그랬다. 그가 권력을 탐했다면, 휴첼부단장보다 더 그럴싸한 자리를 진작 꿰어 차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니 이제와 새삼 청월과 황제의 만남이 걱정이 되어서 저러는 건 아닐 것이고…….
마일다뿐만 아니라 카스야나와 테밀시아도 의아한 기색이었으나, 키시유안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엔 그들의 시선이 ‘당사자’인 청월에게 향했다.
청월은 카스야나의 근처, 그러면서도 그의 시야에는 잡히지 않는 곳에 서있었다. 식사는 다른 호위 기사들처럼 새벽에 간단히 마친 상태였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제 역할을 다 하는 모습이 굉장히 능숙해 보였다. 지키는 것과 호위를 하는 것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전자는 무위가 높으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후자는 관련 경험과 지식이 있어야 한다. 때문에 오르세만 가에서는 ‘명목상 호위’ 외에는 기대하지 않았으나, 의외로 청월은 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었다.
새삼 청월의 과거가 궁금해졌으나, 누구도 그 의문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겉보기엔 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기억을 잃어 가장 답답하고 초조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당사자일 테니까. ……저 청월이라면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모두의 시선을 받은 청월은 아주 조금 궁금한 낯으로 물었다.
“황제를 만나는 게 어쨌다고?”
“황제에게 꼬투리를 잡히면 귀족들에게 공연한 빌미를 제공하게 될 수도 있다. 휴첼단은 존경과 경계를 동시에 받고 있으니까.”
“호오.”
청월은 히죽 웃었다. 어제 세이아와 시비가 붙었을 때 지었던 것과 같았다.
“네가 같이 가면 뭐가 다르냐?”
“신임 부단장을 인사시키는 것은 단장의 몫이다.”
황제가 작정하고 청월에게 말을 걸었다 해도, 직속상관인 키시유안이 대신 답하는 것을 트집 잡을 수는 없다.
청월은 그것으로 납득한 듯 고개를 한번 끄떡이고는 관심을 껐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특히 마일다는 키시유안의 행보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상황을 분명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둘의 대화에서 유추해보자면, 키시유안이 오늘까지 동행하는 이유는 청월을 커버하기 위해서다. 달리 말하면, 키시유안은 청월과 황제가 직접 대면할 경우에 황제가 청월을 공격하리라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어째서?
“폐하께서 청월 경을 못마땅하게 여기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차마 청월의 앞에서 직접적으로, ‘쟤는 금방 떠날 몸이라 황제가 신경 쓰지 않을 걸?’라고 말할 수 없었던 마일다는 우회적으로 돌려서 물었다. 그에 대한 키시유안의 답은 매우 알아듣기 쉽고, 귀에 쏙 들어오고, 입에 착 감기기까지(?) 했다.
“어제부터 청월이 정식으로 부단장직을 맡기로 했다.”
“……!”
킨사나를 제외한 모두가 놀라서 청월을 돌아보았다. 그 중에서도, 휴첼단원들의 눈은 반짝이다 못해 번뜩였다. 그렇다 해도 그들은 욤 제국의 삼대 기사단 중 하나, 자랑스러운 휴첼단의 기사들. 공적인 자리인 만큼 근엄한 기사로서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쩐지 꼬리를 맹렬하게 흔드는 대형견 무리가 보이는 것도 같았지만. ……기분 탓이겠지, 아마.
효율적인 업무 분할이라든가, 효과적인 업무 분할이라든가, 합리적인 업무 분할 등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청월에게 호의적인 마일다는 ‘정말이냐? 진짜냐? 거짓말 아니냐?’ 따위의 비효율적인 질문을 생략하고, 황급히 현실적인 안건을 꺼냈다.
“그럼 지금이라도 황실 예법을 알려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전부는 무리더라도 약식이라면…….”
“아니. 미숙하게 아느니 아예 모르는 게 낫다.”
“하지만 기본적인 예법이라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을 알게 되면, 폐하께서는 분명 어떤 식으로든 트집을 잡으실 테니까요.”
키시유안은 청월을 돌아보고 물었다.
“‘그쪽’ 예법은 알고 있나?”
“알기야 알지.”
“그럼 됐다. ‘그쪽’ 식으로 하면 된다.”
청월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둘만 아는 내용의 문답이 오갔지만, 마일다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갔다.
청월은 기억을 잃었으나,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그는 여러 나라의 언어를 현지인만큼이나 능숙하게 읽고, 쓰고, 말하곤 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은 잊어버렸어도 배운 것의 일부분은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다. 게다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의 수를 보건데, 그는 분명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 어느 나라의 예법을 기억하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청월이 어디 것이든 예법을 알고만 있다면, ‘출신성분 불명’인 마스터에게 그것을 두고 시비를 걸 수는 없다.
그렇게 마일다는 자신의 상식선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안심했다. 그런 그와는 달리 키시유안은 청월이 ‘교류자’라는 걸 알고 있었으나, ‘그쪽’ 예법이 이쪽에는 없다는 것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욤 제국은 거대한 대 제국답게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그 때문에 오히려 타국의 문화, 특히 예법에는 무지한 경향이 있다. 욤의 국민은 타국에 간다 해도 자국의 예법을 그대로 쓴다. 욤의 예법은 타국에서도 다 알고 있어서, 그 진의가 의심받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월이 생소한 예법을 보인다 해도, 그것이 ‘없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무엇보다도 어제의 사건 덕에 ‘뒤끝 있는 마스터’로 자리매김한 청월을 섣불리 건드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청월에 대해 아는 바가 적은 만큼 크게 놀라진 않았던 카스야나가 차분한 얼굴로 키시유안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키시유안도 고개를 돌려 카스야나를 마주보았다. 카스야나가 웃으며 말했다.
“네 짐이 줄었구나.”
“…….”
키시유안은 대답 없이 무미건조한 얼굴로 고개를 바로 했다. 그리고 식사를 계속 했다.
내색은 안했지만 카스야나의 말에 긴장하고 있었던 마일다는 키시유안이 아무 답도 하지 않자 목 안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키시유안의 얼굴을 살폈다. 늘 그랬듯이 의욕도, 흥미도, 관심도 없는 무미건조한 얼굴은 생동감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분명 평소와 똑같은데, 어째서인지 ‘오랜만’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카스야나는 황실 연회만 참석하는 것이 아니었다. 연회는 공개된 장소에서 단체로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보다 심화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개별적으로 만남을 가져야 했다.
보통은 신분이 높은 쪽의 집에서 만나기 마련인데, 위협적인 암살 기도가 있었던 뒤로는 카스야나가 직접 움직였다. 오르세만 가에 초대되어 온 손님이 재수 없이 휘말려 죽으면 골치가 아파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카스야나가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황실 연회기 때문에, 개별적인 약속은 오전에 서너개 정도고 늦은 점심 무렵엔 황실 연회에 참석해서 저녁 늦게까지 시간을 보냈다. 연회에서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는 자는 보통 세력이 약한 자이거나 젊다 못해 어린 귀족 자제이거나 쾌락주의자다. 카스야나는 그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그의 퇴장 시간은 제대로 된 숙면 시간이 보장되는 선에서 이뤄졌다.
그 대신 카스야나의 수족들이 번갈아가며 남아서 연회의 흐름을 살피다가, 그가 도착하면 와서 주요 사항을 알려주었다. 카스야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명문 귀족가의 실세들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연회를 보낸다.
이번에도, 연회장에 도착한 카스야나에게 곧장 수하가 다가와서 이런 저런 보고를 했다. 그 중 하나가 아직 황제가 연회에 입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스야나는 벌써 저쪽 구석에 가서 서 있는 청월을 흘낏 보았다.
역시나 황제는 오늘은 청월을 만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 분명하다. 이미 황제의 수족이 청월의 입장을 알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가 입장할 때까지, 카스야나는 휴게실로 가서는 안 된다. 호위기사인 청월은 당연히 그를 따라올 테고, 그럼 헛걸음한 황제가 몹시 불쾌해할 테니까. 그리고 그 불쾌감은 총회의에서 오르세만 진영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사항을 보고한 수족이 물러나고, 카스야나는 테밀시아와 함께 연회장을 돌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발품 파는 일 없이 한 걸음만 옮겨도 사람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었지만, 표현을 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청월과 키시유안이 선 곳에서 좌측으로 두 걸음 떨어진 곳에 보조인 에이든이 서 있고, 우측으로는 킨사나와 뮤비라가 서있었다. 뮤비라는 테밀시아의 개인시종으로 온 것인데, 생김이 워낙 귀태가 나고 곱상해서 몇몇 귀부인들이 은근슬쩍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대부분은 순수하게 감상하는 시선이었지만, 입에 담기도 지저분한 시선도 없진 않았다. 뮤비라가 시종이고, 그 주인이 아직 어린 테밀시아라서 만만히 보고 저러는 거다. 즉, 그들은 테밀시아라는 맹수 도령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쉽사리 찝쩍……이 아니라, 접근하지 못하는 것은 뮤비라의 옆에 ‘뒤끝 있는 마스터’ 청월이 있기 때문이다. 어제 세이아가 당한 것을 생각하면……! 참고로, 공적인 업무와 관련된 것이 아니면 매사 무관심한 키시유안은 처음부터 논외였다.
카스야나를 보던 청월은 자연히 그 옆에 있는 테밀시아도 보고 있었다. 처음 참석한 황실 연회에서, 그것도 평소보다 확연히 많은 이들이 접근하는 와중에서 그는 긴장하는 내색 없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그런 그를 감탄어린 눈으로 보는 이도 있었고, 질린 눈으로 보는 이도 있었다.
청월은 문득 뮤비라를 돌아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테밀시아만 바라보고 있었다. 황실 연회에 처음 온 것은 그도 마찬가지일 텐데, 화려한 장식이나 맛있는 음식 등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묘한 눈으로 보는 몇몇 변태 아줌마들도 신경 쓰지 않았다.
청월은 뮤비라의 몸을 잠시 살펴보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확실히 타고난 신체였다. 테밀시아가 아까워할 만도 했다. 그렇다 해도 딱히 흥미는 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자질이 타고난 것이 뭐가 대수인가? 본인이 하기 싫다면 그만인 거다.
“흠…….”
마지막으로 뮤비라의 손을 본 청월은 그것을 끝으로 카스야나에게 주의를 돌렸다. 뮤비라의 손은 신체에 비해 큰 편이었고,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여있었다. 팬을 잡아서 생긴 것도, 굳은 일을 해서 생긴 것도 아니다. 저건 검을 잡은 손이다. 고작 9살의 나이에 저런 손을 가졌다니…….
그러고 보면, 그때 테밀시아는 이런 말도 했었다. 뮤비라는 검을 좋아하지만, 테밀시아 앞에서만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주인이고 시종이고, 어린 것들이 똑같이 생각이 많아.’
청월은 시큰둥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연회장 구석구석에, 일정한 크기의 음성이 퍼졌다.
“입(入)-!”
어느 샌가 음악이 멈췄다. 춤추던 이들이 좌우로 갈라진다. 무리지어 뭉쳐 있던 이들이 몸을 바로하고 연회장의 상석을 돌아본다. 연회장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단의 좌측에서 남녀 한 쌍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고 이끌고는 있으나, 피차 친밀함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들의 뒤로는 기사와 시종들이 줄을 맞춰 따라왔다.
상석에 오른 남자는 비어있는 두 의자 중 하나에 여자를 먼저 앉힌 뒤, 다른 하나에 자신이 앉았다. 그러자 연회장 안의 모든 이들이 그들을, 정확히는 남자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서 예를 갖췄다.
황제의 입장이었다.
- 작가의말
"단장님이 나한테 그 임무를 맡기셨지 뭐냐! 그래서 내가........!"
"오! 멋져요! 에이든 경!"
"뭐, 그 정도는 아니고.... 으흐흐흐흐흐흐!"
창창한 나이의 휴첼기사 에이든 경은 열살미만 너구리의 칭찬에 수줍어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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