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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시계 님의 서재입니다.

도망치지 못한 왕은 주나라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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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시계
작품등록일 :
2022.10.2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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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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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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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글자
12쪽

526화 연약한 사람

DUMMY

526화 연약한 사람


“이렇게 뵈어 반갑습니다.”


세자빈 강씨가 밝게 웃으며 건넨 인사에 고륜영안공주 아이신기오로 비양고는 지지 않겠다고 하듯 마주 밝게 웃었다.


“반갑습니다. 안 그래도 여러 사람과 교분을 맺고 싶다고 생각하던 참에 이리 초청하여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심양에 있을 때 뵈었다면 더 좋았겠습니다.”


비양고가 하는 말에 세자빈은 웃음을 유지하며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활기가 넘치는 분이라면 한번 만난 것으로 기분 좋게 되었을 것이니, 실로 타향 생활에서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가만히 말을 듣던 비양고는 어딘지 모르게 이게 그저 빈말이 아니라 무엇을 암시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는 동행하여 곁에 있는 시녀 한명화에게도 마찬가지였으니, 두 사람의 이러한 생각이 그저 과한 상상이 아니라고 하듯 세자빈 강씨는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허나 제가 겪지 못하였다고 하여 좋은 일을 남들도 겪지 못하게 함은 실로 소인이며 야만적이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여 이제 멀리 가시는 두 분께 제가 작게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세자빈께서 함께 바다를 건너가거나 찾아오시겠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묻는 비양고의 말에 세자빈 강씨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짐짓 아쉬운 듯이 말을 더하니, 사정을 모르는 이가 들으면 그 말을 진심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마음은 그렇게 하여 친분을 다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물론이고 이제 공주께서도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운 몸이며, 그렇게 빈번하게 오감은 실로 양국에 크나큰 부담이 될 것입니다. 아니, 삼국이라고 함이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요. 비록 몸은 멀어져도 제 근본은 만주며 심양입니다. 그런데 이제 태어난 곳이며 살아갈 곳은 물론이고 그 양쪽 모두에 좋은 이웃인 나라를 힘들게 함은 바람이 아닙니다.”

“정말 훌륭하시군요. 그 마음은 아름답고 성품은 고결하니 분명 좋은 국모가 되실 수 있을 겁니다.”


국모라고 하여 기분을 좋게 하나 일본국의 사정을 생각하면 다소 어려운 말이기도 했다.


청나라에서 온 여성이니 대우는 해줄 것이나 이미 후계자를 낳은 부인이 있으니 아주 높임을 얻기에는 요원하다.


물론 시간이 이를 해결하여 줄 수도 있지만 그것은 확신하지 못할 일이니 세자빈 강씨의 말은 사실상 빈말에 가깝다고 함이 옳았다.


이러한 이치는 비양고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그 빈말을 들추기보다는 이용하고자 하였으니, 비양고는 곧장 입을 열었다.


“양국의 국모될 자들이 친하다면 이는 곧 양국의 관계도모로 이어지니 참으로 필요한 일이겠습니다.”

“맞습니다. 이를 위해 오늘 연락할 방도를 논하고자 청하니, 적어도 일 년에 열두 번은 서로 서신을 교환함이 좋다고 여깁니다.”


일 년에 열두 번.


상당히 크게 부른 숫자이나 비양고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생각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오히려 혼선이 있을 수도 있어.’


일 년에 서신을 열두 번 적어서 보내는 일이야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매번 중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필요는 없으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적어서 보내다가 어느 순간 중요한 이야기를 슬쩍 끼워 넣으면 될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일인가 하면 비양고는 오히려 나쁘게 될 수도 있다고 여겼다.


아직 직접 경험하진 않았으나 일본은 바다 건너에 있는 나라다.


그러한 나라에 오감은 육지가 붙어 있는 것과는 다름 정도는 알고 있으니 한 달이라는 간격을 두고 연락하려고 하면 오히려 빠르고 늦어서 오해를 부를 수 있었다.


가령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서신을 보내었더니 생각보다 대단치 않은 일이라 대답이 오기도 전에 일이 해결된다던가 말이다.


그럴 경우 괜한 연락으로 인해 오해를 심어주어 관계가 이상하게 될 수도 있으니 비양고는 선뜻 대답하기 꺼려졌다.


그러한 심리를 읽었음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그저 허세를 부린 것이었는지 세자빈 강씨가 다시 연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달랐다.


“그렇지만 마음에 따라서 무엇이든 하기란 어렵습니다. 하여 일 년에 네 번에서 여섯 번으로 하되 반드시 답장을 오고 가게 하고자 합니다. 공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은 생각으로 들립니다.”


비양고가 대답하는 말에 세자빈 강씨는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명화를 보았다.


“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의 피를 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혈연적으로 아비인 한윤이 아니라 할아버지인 한명련을 이르며 묻는 말에 한명화는 저도 모르게 안색을 굳혔다.


그러나 세자빈 강씨는 불쾌함 하나 없이 대답을 기다렸고 비양고 역시 딱히 개입할 생각이 없는 듯 한명화를 살폈다.


두 여인의 시선이 모이니 한명화는 이 대답이 온전히 제게 맡겨졌음을 알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여기서 그녀가 대답할 수 있는 방향도, 그리고 앞으로 쌓을 수 있는 관계의 방향도 수없이 많았다.


그리고 가장 무난한 것은 세자빈 강씨가 제시한 지위, 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명장의 손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한명화는 조선에서 나름대로 연줄을 가지며 이후의 연에 대해서 불문으로 활동할 수 있을 터였다.


또한 비양고와 논한 일 역시 이로서 한층 더 수월하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허나 머리는, 이성은 그렇게 판단하였다고 한들 입은, 감정은 도통 그에 따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청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서일까 하면 그건 아니었다.


가문의 억울함을 생각하여서 일까 다시 생각하면 그건 더욱 아니었다.


분명 그녀는 지금 조선왕에게 가문이 당한 일을 듣고 자랐다.


하여 희미하게, 혹은 적게나마 조선에 거리낌이며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가장 우선하고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감정인가, 혹은 그녀를 움직이는 가장 큰 감정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한명화는 도무지 세자빈 강씨가 내민 지위를 좋다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핏줄로 인해 받은 것은 없다고 살았고, 설령 이제부터 있다고 한들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으득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이에 힘을 너무 주었는지 한명화는 귓가에 제 이가 갈리는 소리를 듣고 마음을 정했다.


“이 나라에 반란을 일으키고 도망한 자, 그리고 돌아와 복수한 자의 피도 이었습니다.”


냉기를 담아서 이른 한명화는 눈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저는 충성하기도 적대하기도 거부합니다.”

“······.”

“명화야.”


세자빈 강씨는 말없이 바라보고 비양고는 당황하여 이름을 부르나 한명화는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은 물론이고 달리 말하여 변명하거나 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어디에도 매이고 싶지 않다는 뜻을 담아서 세자빈 강씨를 바라보니 그녀는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웅의 후손이자 반역자의 후손. 익숙한 말입니다.”

“익숙하다?”

“부끄러운 일일지도 모르나 제 아버님 역시 그러한 계보에 해당합니다.”


세자빈 강씨는 그렇게 말하더니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하나 펴서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아, 제가 이런 말을 귀빈 두 분께 하였다는 건 비밀입니다.”


아버님이라고 하면 보통은 친부를 이르나 비양고와 한명화는 세자빈이 말하는 자가 조선왕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동시에 두 사람은 작금 조선왕이 반정을 통해 권좌를 쥐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으나 이어서 들린 이야기는 상상과 조금 달랐다.


“조선을 세운 태조 대왕께서는 먹을 것을 눈앞에 두고도 죽어가며 사방에서 침탈하는 온갖 도적들에게 시달리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어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분은 사방에 도적을 치고 안정하나 나라 안에 도적이 남아있기에 잠시에 그칠 것이라는 걸 알고 뜻을 세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영웅이, 나라를 연 태조가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오래된 이야기에 두 여인은 살짝 당황했다.


그러나 일단 들어보고자 하여 귀를 기울이니 세자빈 강씨는 특유의 고운 음색에 힘을 담아서 말을 이었다.


“하여 그분은 조선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자손 가운데 하나가 욕심을 내니, 그는 조카의 자리를 빼앗았습니다. 찬탈자이자 반역자인 그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조선왕들 모두의 조상입니다.”

“!?”

“그, 그런 말은 위험하지 않습니까?”


그저 놀란 얼굴이 된 비양고에 비해 그래도 조선에 직접 오진 않았어도 조금 더 지식이 있던 한명화는 지금 하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당황했다.


이에 세자빈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후후. 전이라면 그러하였을 겁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이 일로 논쟁이 있었으니, 상께서는 그 일을 잘못으로 인정하여 새로운 정통성을 내세웠습니다. 바로 태조부터 그 이후에 내려온 모든 바른 뜻을 잇는 자가 정통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논쟁에서 공언된 것이 있으니, 당금 성상은 누구보다도 그 정의며 뜻이 잘 잇고 계시기에 가장 정통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한때 한양을 크게 달구었고 조보를 타고 퍼져 지방도 크게 달구었던 이야기는 사실 이렇게 간단히 말할 일이 아니기는 했다.


지금도 유생 둘이 모였다고 하면 이 일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논하고는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세자빈 강씨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하여 당금 임금께서는 영웅의 후손이자 찬탈자의 후손, 그리고 본인이 영웅이자 반역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정통하다고 말을, 칭송을 듣고 있지요. 그러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자빈은 비양고를 한번 보고 한명화와 눈을 맞추더니 또렷하게 말해주었다.


“혈통이 무의미하다고 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평하는 것은 그 사람 본인을 살피고 함이 마땅합니다.”


단언하는 말에는 힘이 있으니 한명화는 물론이고 비양고 역시 살짝 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러한 느낌에 이끌린 한명화는 잠시 주저하더니 물었다.


“그렇다면 세자빈께서는 소녀를 어떻게 보고 계신지요?”

“감히 말하자면 청나라 공주와 그대는 같다고 여깁니다. 가족을 떠나 멀리 가는, 이제 다시 의지할 곳을 찾아야 하는 연약한 사람이라고요.”

“저는 연약하지 않습니다.”

“강하다고 스스로 주장하여도 가족이든 친구든 기댈 곳이 적은 이는 언제고 지쳐 쓰러집니다. 그러니 연약하다고 함이 옳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동정한다, 그런 말씀이십니까?”


눈을 치켜 올리며 묻는 말에 세자빈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 동정하지 않는다니, 그 사람은 가슴에 사단(四端)이 없다고 하여도 무방하겠지요.”

“······처음입니다. 동정한다는 말을 부정하지 않은 사람은요.”

“하긴, 나도 그랬지.”


옆에서 비양고가 거들듯이 고개를 끄덕이니 한명화는 어쩐지 재밌다는 생각이 드나 그 이유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영 나쁜 기분은 아니었으니, 그녀는 가만히 세자빈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세자빈과 같은 분을 아는 건 나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공주님과 함께 열심히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부디 좋은 연으로 길게 교제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저도 명화가 같습니다. 그리고 세자빈께서는 실로 당차고 현명하시니, 제 어머니에 비길 만하다고 여깁니다. 길고 깊게 알고 싶습니다.”


두 여인이 하는 말에 세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 저하께 도움을 받아 조선의 연락망에 언질을 해둘 것입니다. 동래에만 도착하면 반드시 제게 닿을 것이니 여러 이야기를 기대하겠습니다.”


포근함을 담아서 이른 세자빈은 깜빡했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을 이 연락에 더할 생각입니다.”


사람을 더한다는 말에 비양고와 한명화가 그녀를 바라보니 세자빈 강씨는 가리지 않고 일러주었다.


“일본의 공주께서도 참 적적하시지 않겠습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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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 541화 원로 +1 24.04.02 161 15 12쪽
541 540화 세 경쟁자 +2 24.04.01 161 14 14쪽
540 539화 목패 협약 +4 24.03.31 155 15 16쪽
539 538화 감추는 재미 +2 24.03.30 162 16 12쪽
538 537화 모두가 아는 비밀 +2 24.03.29 151 14 13쪽
537 536화 승부에서 이기는 방법 +4 24.03.28 150 15 12쪽
536 535화 알고도 모른 척하긴 어렵다 +2 24.03.27 153 14 12쪽
535 534화 미룸은 미정이 아니다 +3 24.03.26 163 14 12쪽
534 533화 허황된 이야기 +2 24.03.25 156 14 16쪽
533 532화 덕은 풍성함이 전부가 아니다 +2 24.03.24 166 12 12쪽
532 531화 소망은 성장한다 +4 24.03.23 168 15 15쪽
531 530화 한가함 뒤에 다가오는 것 +2 24.03.22 158 13 12쪽
530 529화 신부 교환 +2 24.03.21 179 14 13쪽
529 528화 어려운 관계 +3 24.03.20 180 13 11쪽
528 527화 친하면 조금이라도 돌아본다 +1 24.03.19 167 15 13쪽
» 526화 연약한 사람 +6 24.03.18 164 18 12쪽
526 525화 물려받은 천성 +1 24.03.17 164 13 12쪽
525 524화 인정받지 못한 아이 +1 24.03.16 189 15 12쪽
524 523화 뜻은 누구나 품을 수 있다 +2 24.03.15 157 16 13쪽
523 522화 병졸과 역관 +4 24.03.14 166 19 12쪽
522 521화 오는 사람, 가는 사람 +3 24.03.13 176 14 13쪽
521 520화 용기 있는 말 +4 24.03.12 175 16 17쪽
520 519화 정통성 +4 24.03.11 182 19 13쪽
519 518화 그대는 옳다 +3 24.03.10 176 14 11쪽
518 517화 거울 같은 사람 +3 24.03.09 176 14 12쪽
517 516화 우선하여 해결할 일 +2 24.03.08 190 17 13쪽
516 515화 맞수 +3 24.03.07 180 17 14쪽
515 514화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7 24.03.06 185 16 13쪽
514 513화 소리는 사람을 모은다 +2 24.03.05 186 15 12쪽
513 512화 비상함은 필요하지 않다 +4 24.03.04 177 1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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