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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지 못한 왕은 주나라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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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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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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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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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625화 자질구레한 일

DUMMY

625화 자질구레한 일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다.’


대리국 국왕 임경업과 대면하는 자리에서 물러 나온 승문원 교리 임관일은 그렇게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멀리 와서 보이지 않음에도 고개를 돌린 순간 저 멀리에 있을 임경업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전에는 그의 이름 석 자만 보고 들어도 화가 치솟고 못마땅했는데 정작 마주하고 나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으니 실로 기이하게 느껴졌다.


‘의주 부윤, 사천 총독, 대리국 국왕. 조선 사람, 명나라 사람, 대리국 사람.’


임경업이 거쳐온 정체성들을 속으로 하나씩 떠올린 임관일은 도대체 그가 어떠한 생각으로 이러한 길을 걸어왔는지 사뭇 궁금해졌다.


이러한 생각은 비단 임관일만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 임관일이 그에 대한 분노며 못마땅함을 내려놓았다는 걸 제하면 북방 출신 사대부들은 다들 이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하여 그가 임경업 앞에서 말한 대답, 알지만 모른다는 말은 사실 그 혼자만의 대답이라고 하기보다는 북방 사대부들의 대답이며 물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분명 북방에서 함께 하였고 한때는 존경하고 따랐고 동고동락하였건만, 어느 순간 임경업은 그들로서는 좀처럼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를 보였으니 말이다.


특히나 의주 출신인 이들에게 더욱 그러하였으니, 그들에게 있어서 명나라는 가도는 물론이고 오가는 사신들로 인해서 상국이나 재조지은이라는 말은 딱히 공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대체 그 사람은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위하기에 저리 살 수 있었을까.’

“교리 나으리.”

“음? 아, 자넨가.”


생각에 잠겨서 걷고 있던 임관일은 제게 말을 건 사람이 이곳까지 대동하였던 역관임을 알았다.


동시에 반사적으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살핀 임관일은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도착하였군그래.”


대리국 국왕과 대면하기 전에 먼저 안내받았던 거처에 도착하였음을 안 임관일은 문득 역관이 그에게 할 말이 있다는 얼굴로 주저하는 걸 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별다른 건 아닌데, 안쪽에서 대리국 국왕 전하를 뵙는 동안 대리국 사람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물었다? 무엇을?”

“유민들을 본 모양입니다.”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어 이르는 말에 임관일은 대충 짐작하고는 알겠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맡기라고 하던가, 아니면 내보내라고 하던가?”

“예?”

“둘 다 아니었나?”


당황하여 되묻는 역관에게 제가 생각한 것이 틀렸는지 물으니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굳이 따지면 전자에 더 가깝긴 합니다. 하지만 믿기 어려워하는 것도 없잖아 있는 거 같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대리국까지 유민들을 데리고 오는 것은 청나라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함이고 동시에 그들이 바란 조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여 대리국 측에서 보면 이는 다소 수상하여 경계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유민이라는 이름으로 청나라 사람이 몰래 섞여서 무언가 하고자 하면, 아니면 간자로서 정보를 모으고자 할 수도 있음을 고려해야하니 섣불리 이들을 받아들이긴 어려울 터였다.


“그래서, 뭐라고 하던가?”

“구역을 정해줄 테니 당분간은 그곳을 벗어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대신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도 배정해 줄 모양입니다.”

“뭐, 그 정도면 아주 나쁜 건 아니군.”


거주 제한을 건다고 하지만 보통 사람이 평생 자기가 사는 동네를 벗어나지 않는 경우도 흔한 편이라는 걸 생각하면 온당하다.


여기에 더해 일거리를 주겠다고 하였으니 적어도 저들이 배곯을 일은 없을 것이라 여긴 임관일은 그만하면 대리국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여겼다.


또한 유민들도 만족할 것이 그것이 아무리 고되고 힘들다고 한들 먹을 것이 없어서 떠도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던 처지에 비하면 분명 좋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내에 임관일은 다른 생각이 들어서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만, 이거 설마 노역을 시키겠다는 건가?”

“아마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건 좋지 않은데.”


그들이 유민들을 구한 것은 그저 그들이 배곯고 있는 불쌍한 백성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대리국까지 데려온 것은 그들로 살길을 열어주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노역이라니, 이건 숫제 사람 잡아다가 노비로 파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물론 때로는 노비가 더 나은 삶을 살기도 한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안정된 상황에서 고관대작, 아니면 적어도 천석지기는 되는 이에 속하였을 때에나 성립하는 말이었다.


‘이를 어쩐다.’


속으로 고민하던 임관일은 문득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군.”



***



“전하, 신 송헌책이옵니다. 늦은 시간 송구하나 잠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들어오시오.”


내각 대학사 송헌책의 방문에 임경업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았다.


그에 송헌책은 다가와서 예의를 차린 후 힐끗 그것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편지를 보내고자 하십니까?”

“편지? 이건 그런 것이 아니오.”


고개를 흔든 임경업은 적당한 말을 찾고자 고민하더니 이내에 이것이 어울리겠다고 여기고는 피식 웃었다.


“후후, 편지가 아니긴 하지만 남들은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대학사, 아니 송 선생.”

“말씀하시지요.”

“이것은 일기입니다. 그것도 한참 늦게 지금 내 시점에서 다시 쓰는 일기 말입니다.”

“그러면 일기보다는 회고라고 하는 편이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송헌책의 말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으니 임경업은 영 마음에 차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는 뒤늦게 떠올리고자 이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살아온 것을, 살아갈 날을 기록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런 것이라면 이미 사관이 있으며 개인적으로 기록하시는 것도 따로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과 이것은 다릅니다. 그간 써온 것이 의주 부윤, 사천 총독, 대리국 국왕으로서 쓴 것이라면 이건 임경업이라는 사람이 쓰는 것입니다.”


임경업이라는 사람이 쓰고 있다는 말에 송헌책은 어렴풋이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알지만 모른다. 그 말을 마음에 두신 겁니까?”

“마음에 두었다는 게 옳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내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분명 그 말입니다.”


여러 감정을 가득 담아 복잡하게 이르는 임경업의 말에 송헌책은 잠시 그를 살피다가 천천히 입을 열어서 물었다.


“무엇을 주장하고자 하시는지요?”

“주장?”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묻는 임경업을 보며 송헌책은 오히려 당황하며 물었다.


“모른다고 하는 이들에게 나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 위해 작성하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않소이다. 그들이 무어라고 하든 그것은 중하지 않소.”


고개를 가로저은 임경업은 아직 먹이 마르지 않은 글자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저 기록하고 싶었을 따름이오. 임경업이라는 자는 무슨 생각으로 살았으며 어찌 그렇게 살았는가 하는 걸 말이외다.”

“기록하여 보인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주장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전에도 말했듯 사후의 일은 내 알 바가 아니오. 혹여 나중에 그대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시오. 하지만 분명히 말하노니, 이 일은 내가 누구에게 설명하거나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오. 그저 나 자신이 확실하게 하고 싶을 따름이외다.”


알 거 같으면서도 무언가 엇물리는 감각에 송헌책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에 임경업은 살며시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이 이야기는 그만하십시다. 어쩌면 후일에는 결과적으로 송 선생의 말처럼 될지도 모르오. 허나 지금은 그저 내 자신이 떳떳하여 기억하고자 하는 일이니 그것으로 정의하면 족하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소이까?”

“이거 중요한 본론을 잊을 뻔하였습니다.”


임경업의 물음에 그제야 자신이 말을 고하고자 찾아왔음을 기억한 송헌책은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다름이 아니라 조선에서 온 사람이 제안하여 이르길, 맡긴 유민들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살피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있는 곳을 주기적으로 드나들며 살피겠다고 한 것입니다.”

“어려운 일은 아닌 거 같은데.”


그것이 무슨 대수로운 일인가 싶어서 의아함을 보이던 임경업은 이어지는 말에 송헌책이 이리 찾아온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전하, 우리 대리국이 지금 가장 공을 들이는 게 무엇인지는 익히 아실 겁니다.”

“물론이오. 이번 전쟁에 모든 걸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렇습니다. 더 세밀하게 따지면, 전쟁에 낸 병사들은 지금에서 그치고 후방 지원에 전념하여 뒤를 든든히 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하여 이번 순나라 지원도 이득과 별개로 그러한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랬지요.”


순나라를 지원함은 약조 받은 것이 있기 때문이나 한편으로는 전에 번국으로서 맹세한 것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 임경업은 오히려 전자보다 후자에 더 근거를 두고 있으니 이번 전쟁에서 대리국은 든든한 병참 기지화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허나 모두가 생업을 버려두고 전쟁 돕는 일에 매달려서야 곤란하기만 할 뿐이며 그저 한순간의 만족과 회피에 그칠 따름입니다. 그러니 생업을 종사하는 자들은 두되 필요한 최소 인원을 제하고는 모두가 병참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손이 부족하니 이번 유민들은 실로 좋은 인력이라고 하겠습니다.”


현 대리국 상황은 실로 사람이 부족하여 조금이라도 손을 보탤 수 있다면 과장을 살짝 보태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고 보아도 좋았다.


그런 와중에 건장한 장정 오십 여가 당도 하였으니 송헌책은 그들을 당장에 일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본래 그들을 부리고자 했던 게 단순한 노동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소신은 본래 유민들을 모아 장인들에게 붙이려고 했습니다.”

“조총 확보를 위해서로군?”

“그러합니다.”


당장 가장 급한 것은 화약과 조총이니 그것을 우선하여 생산하도록 인력을 늘여야 한다고 여긴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유민들이 무슨 대단한 기술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으나 사지 멀쩡한 장정들이다.


그런 이들이면 당장 험하고 힘쓰는 일이 주된 장인들 보조 정도는 능히 할 수 있으니 조금이나마 작업 과정에 숨통이 트일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술을 익혀서 한 사람으로 장인으로 거듭나면 더욱 좋아질 것이고 말이다.


헌데 그들을 조선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살피겠다고 하니 이는 자신들 대리국이 비밀하게 지켜야 할 기술을 다 드러내는 것과 다르지 않아 곤란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대로는 제대로 일하기 어렵고 자칫하면 오히려 더 쓸데없이 힘이 빠질 수도 있습니다.”

“아군이라고 모든 걸 드러내는 건 아니며 하물며 조선은 완벽한 동맹이나 같은 편이라고 하기 어렵지.”


정세가 그러하니 임경업은 차분히 그렇게 말한 후에 잠시 생각하더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당장 손 하나가 급하니 놀리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다른 일에 돌리자니 그도 여의치 않소. 허니 자잘한 일들을 모두 그들에게 맡기도록 합시다.”

“자잘한 일이라. 좋은 생각이나 조선에서 이로 인해 무언가 이상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러진 않을 것이오. 아마도 이번 일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기보다는 단순히 책임진 자들을 끝까지 가능한 지켜보겠다고 하는 생각으로 제안한 것일 테니까.”


송헌책의 우려를 일축한 임경업은 붓을 도로 들며 말을 이었다.


“조선 사람들이 데려온 유민들을 분리하여 부싯돌 만드는 일이며 심지 만드는 일 등 간단하지만 시간이 들고 여분이 많이 필요한 것들을 맡기도록 하시오.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시간을 줄일 수 있겠지.”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 작성자
    Lv.65 ageha19
    작성일
    24.07.01 21:49
    No. 1

    송헌책의 우려와 달리, 임경업은 아까 만난 임관일의 모습을 통해 지금의 조선은 자신이 떠나오기 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알아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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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화 자질구레한 일 +1 24.07.01 48 10 12쪽
625 624화 알지만 모르는 사람 +1 24.06.30 52 10 13쪽
624 623화 숫자를 살리는 방법 +2 24.06.29 59 13 12쪽
623 622화 단단한 쐐기 +1 24.06.28 60 11 12쪽
622 621화 의복과 말 +1 24.06.27 59 13 13쪽
621 620화 정면돌파 +2 24.06.26 65 14 16쪽
620 619화 치부 +1 24.06.25 67 11 13쪽
619 618화 가장 안전한 방패 +3 24.06.24 67 12 15쪽
618 617화 증오 +1 24.06.23 69 11 13쪽
617 616화 뒤틀린 계획 +1 24.06.21 67 14 12쪽
616 615화 현실은 상상을 넘는다 +2 24.06.20 68 13 12쪽
615 614화 숨긴다고 하여 보이지 않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1 24.06.19 78 13 13쪽
614 613화 고변 +2 24.06.18 71 13 11쪽
613 612화 순수하지 않은 의도 +1 24.06.17 68 13 13쪽
612 611화 반쪽짜리 영광 +4 24.06.16 76 12 14쪽
611 610화 희생과 목소리는 비례한다 +2 24.06.15 68 11 14쪽
610 609화 누구나 살고 싶다 +3 24.06.14 71 13 12쪽
609 608화 적을 믿어라 +4 24.06.13 67 13 14쪽
608 607화 솎아내기 +1 24.06.12 80 10 14쪽
607 606화 쇠와 나무 +2 24.06.11 80 11 11쪽
606 605화 돌아서 가는 게 빠르다 +1 24.06.10 71 10 12쪽
605 604화 오늘과 내일 +1 24.06.08 87 10 12쪽
604 603화 같은 진지 +1 24.06.07 81 1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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