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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DA 님의 서재입니다.

동쪽의 나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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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DA
작품등록일 :
2023.11.22 15:06
최근연재일 :
2024.04.0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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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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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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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꿈에서 본 남자

DUMMY

해를 등진 탓에 남자의 얼굴은 그림자가 드리워 거의 보이지 않았다. 8척이 넘는 키를 가진 장정이 온몸에 갑옷을 두르고 있으니, 그 한 치 앞에 서 있는 소우에게는 사람이 아닌 바위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나마 남자에게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뿐이었다.


남자는 그저 가만히 서서 소우를 내려다봤다. 소우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지 않았음에도, 남자는 언짢은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소우를 지나쳐 조서원 안으로 발을 들였다. 마침 수를 다 센 효부인이 남자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말했다.


“어서 오세요, 명.”


그녀는 소우에게 손짓했다. 소우는 남자를 힐끗 쳐다보고는 천천히 효부인의 곁으로 걸어갔다. 효부인이 소우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인사하렴. 수명 장군이시다. 이 집의 주인이 될 분이시지.”


소우는 어제 소래가 했던 말을 퍼뜩 떠올리고는, 명에게 고개를 숙였다. 명은 소우의 인사를 본만체 하고는 효부인에게 물었다.


“근래에 아버지를 뵈셨습니까? 차도가 있던가요?”


“이리 서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차라도 드시지요. 먼 길 다녀오셨는데······”


하며, 효부인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연못 한 가운데 있는 작은 누각이었다. 소여가 어느새 누각에 다과상을 차리고 있었다.


명은 버릇처럼 누각을 빤히 쳐다보더니 별말없이 누각으로 향했다. 수명을 앞서 보낸 효부인이 소우에게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속삭였다.


“입도 뻥끗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저자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걸 아주 싫어하거든.”


효부인은 소우를 제 뒤에 세우고, 수명과 마주 앉아 찻잔을 기울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효부인의 말마따나 수명이라는 자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수명이 그저 효부인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인 것인지 소우는 알 수 없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효부인이 이 불편한 침묵을 즐기는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씰룩거리는 효부인의 머리깃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효부인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를 먼저 뵙고 오지 않으시고요.”


“오침 중이시랍니다.”


“어머,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요즘 들어 장군께서 부쩍 잠이 느셨습니다. 그래도 차도가 있다고 하시니 다행이지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집을 너무 오래 비웠습니다.”


명이 먼 산을 쳐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가 있잖습니까?”


효부인이 대답했지만, 명은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러자 효부인이 화제를 바꿨다. 그녀는 소우의 손을 잡으며 자기 옆으로 끌어당겼다.


“얘를 좀 보세요. 참 예쁘지요?”


명이 고개를 돌려 소우를 쳐다봤다. 소우 역시 그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했다. 얼굴이 희기로는 백옥 같은 효부인의 얼굴보다 더 흰 것이 마치 유리를 깎아 만든 듯했고,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카락은 그보다 더 밝았다. 눈으로 실을 잣는다면 꼭 그 같은 빛을 띨 것 같았다.


높은 콧대와 턱은 절벽을 정으로 깎아 만든 듯 단단해 보였고, 그사이에 박힌 푸른 두 눈은 그야말로 보석이었다.


소래는 소우의 눈이 꼭 명의 눈처럼 푸르다고 말했으나, 명의 눈은 소우의 것보다 더 짙었다.


소우는 그날 난생처음으로 백견족의 얼굴을 본 것이다. 그러나 소우에게는 영 낯선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말하자면 그의 얼굴은 소우가 그간 봤던 타인의 얼굴 중 가장 최근에 본 것이었다.


‘꿈에서 봤던 남자잖아.’


명이 소우에게 시선을 붙박은 채로 말했다.


“이번에는 어디서 사 오셨습니까?”


효부인이 버릇처럼 웃더니 대답했다.


“들으시면 깜짝 놀랄 겁니다. 글쎄, 서천강에서 주워 왔다지 뭐예요?”


그 말에 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고 효부인이 말했다.


“왜요? 천하의 수명 장군이라도 서천강은 무서운 모양이지요?“


“서천강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너머에 있는 것들이 무섭지요.”


효부인의 눈이 커졌다.


“그대도 무서운 게 있나요?”


“부인께서는 마치 무서운 게 없다는 듯 말씀하시는군요.”


그 말에 효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늘 그림처럼 걸려있던 미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 그래요. 누구나 하나쯤은 무서워하는 게 있지요.”


그리고는 괜히 소여에게 심통을 부렸다. “차가 다 식었잖아!”


소여가 부리나케 찻잔을 다시 채우는 사이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효부인은 그런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소여를 닦달하기만 했다. 명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이켰다.


명이 누각을 벗어나 연못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고 나서야 효부인이 명에게 말했다.


“조만간 함께 아버지께 인사나 여쭙지요! 우리가 함께 얼굴을 비추면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명은 고개를 살짝 돌려 위아래로 까딱하고는 그대로 조서원을 떠났다.


효부인이 다시 빙긋 웃으며 소우에게 말했다.


“숨바꼭질할까?”




숨바꼭질은 효부인의 승리로 끝났다. 효부인은 지칠 때까지, 그러니까 8번이나 숨바꼭질을 했고, 숨는 사람은 매번 소우였다.


숨바꼭질을 8번이나 하는 동안 소우가 얻은 수확이 하나 있다면 바로 조서원의 구조에 대한 지식이었다. 어떻게 하면 효부인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오랫동안 떨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소우는 그야말로 쥐새끼처럼 조서원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덕분에 그는 효부인은 물론 소여도 모를,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비밀통로도 찾았고, 종들이 몰래 휴식하는 비밀공간도 발견했다. 그곳에서 종들이 모여 담배를 태우는 모습도 봤다.


8번의 숨바꼭질 끝에 지쳐버린 효부인은 의자에 앉은 채로 제 발치에 앉은 소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그러고 나서도 소여는 한참 동안 소우를 그 자리에 앉혀 놓았다. 효부인이 코를 드르렁 골고 나서야 소우는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도방에 도착하니, 종들이 모여 한창 석반을 먹고 있었다. 소래가 소우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빈자리에 그를 앉혔다.


그를 살가운 사람은 소래뿐이었다.


“마님 시중드느라 고생이 많아.”


하며, 소래는 손수 소우를 위해 밥을 퍼주었다. 그러나 고봉처럼 쌓인 밥을 보고서도 소우는 쉬이 수저를 들지 못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효부인이 조서원에서 잡아먹은 쥐가 몇 마리인지 세고 있었다.


‘10마리였어. 10마리나 산 채로 먹었다고······’


소래는 하얗게 질린 소우의 얼굴을 걱정스레 쳐다봤다. 그때, 웬 남자 하나가 소우에게 말했다.


“밥상머리 앞에서 죽상하고 앉아 있을 거면 방으로 들어가서 잠이나 자. 누가 보면 제사상 앞에 앉은 줄 알겠네.”


그 말에 소우가 겨우 한술 입에 털어 넣었다. 소래가 남종에게 마디 했다.


“융 오빠, 살갑게 좀 대해줘.”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했다.


“언제까지 소 닭 보듯 할 거예요? 어찌 됐든 한 지붕 아래에서 살게 됐는데, 친절하게 굴면 어디가 덧나요? 야박하시네, 정말 다들!”


사람들은 소래의 잔소리에 별 대꾸도 못하고 저들끼리 눈치를 살피더니 한 명씩 소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소래가 웃으며 말했다.


“소우는 유도에서 왔대요.”


그러자 융이 또 딴지를 걸었다.


“유족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보라색 날개라니, 다들 이렇게 생긴 요괴 본 적 있어?”


사람들이 저마다 고개를 흔들며 소우를 쳐다봤다. 소우가 대답했다.


“난 귀태예요. 부모가 누군지는 모르고······ 기억을 잃은 채로 서천강변에 쓰러져 있는 걸 유족들이 발견해서 거둬줬어요.”


그러자 종들이 ‘서천강, 서천강’ 하고 쑥덕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우는 딱히 그들의 불안을 해소하고 싶지도, 그래서 자신을 향한 그들의 경계심과 적개심을 덜어내고 싶지도 않았다. 성실하게 변명을 늘어놓기에는 너무나 피곤한 하루를 보낸 탓이었다.


“서천강이 뭐 어때서요?”


하며, 갑자기 구석에 앉아있던 소녀가 불쑥 말했다. 청대였다. 추명이 그 옆에 앉아서 청대와 다른 사람들을 불안한 눈빛으로 번갈아 쳐다봤다.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청대는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서천강 너머에서 왔어요. 인간인 추명이는 말할 나위 없고! 귀태 중 태반이 그럴걸요. 그게 아니더라도 부모 중 하나가 인간인데 서천강 너머에서 온 거나 마찬가지죠. 서천강 너머에도 사람은 살아요. 그것도 아주 멀쩡하게, 당신들과 하나 다를 바 없이. 여기 사는 사람들 참 이상해요. 서천강을 왜 그렇게 무서워한담? 그냥 강이에요! 한 번 빠지면 절대로 못 건져낸다는 소문이 도는 모양인데, 나도 서천강을 건너는 도중에 배가 뒤집혀서 빠져 죽을 뻔했지만, 멀쩡히 잘 살아 있다고요.”


그녀가 말을 마치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서로 눈치만 봤다. 그러다 한 사람이 퍼뜩 생각난 듯 말했다. “너, 마님이 굶으라고 하지 않았어?”


청대는 보란듯이 입 안에 밥을 집어넣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알 바예요? 소여도, 마님도 여기 없는데. 그렇게 꼴보기 싫으시면 마님께 직접 이르시든지요!”


사람들은 기막히다는 듯 입을 다물더니, 갑자기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청대의 시원스러운 성미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웃고 떠들던 그들은 자연스럽게 소우에게 관심을 던졌다. “나이는 어떻게 되나?” “효부인 상대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지?” “음식은 좀 입에 맞나?” “유족들과 살았으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겠는데? 거기 장사꾼들이 보고 들은 게 좀 많나!”


그렇지 않아도 피곤함에 푹 젖어 수저를 들 힘도 없었던 소우는 밀물처럼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 모습이 또 우스운지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소우를 놀려댔다.


그 사이 청대는 추명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너도 쟤 안다 하지 않았어? 같이 팔려 왔다며.”


추명은 대답 없이 소우를 바라봤다. 그러나 소우는 청대를 보지 못한 모양인지, 아니면 그녀를 아는 척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녀에게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추명은 괜히 의기소침해져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잘못 봤나봐.”


사람들이 두서없이 던져 대는 질문에 대답하느라,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식사 시간이 모두 끝나고, 소우는 더부룩한 배를 쓰다듬으며 제 방으로 돌아갔다.

돌아가기 전 소래가 그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다들 널 좋아해서 다행이야.”


“좋아하는 걸까?”


소우의 대꾸에 소래가 고개를 갸웃했다. 소우는 제 날개를 쳐다보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신기한 거겠지.”


그러고는 제방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소래는 그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소래의 말대로 도방 사람들이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다 할지라도 소우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는 명의 얼굴을 떠올렸다. 꿈에서 봤던 그 아지랑이 같은 얼굴에 명의 얼굴을 가져다 대니, 기가 막히게 이목구비가 맞아떨어졌다.


‘그래, 꿈에서 봤던 얼굴이 맞잖아.’


그 생각이 내내 소우의 머릿속을 사로잡았고, 그 탓에 소우는 밤을 꼬박 새울 처지에 이르렀다.


‘꿈에서처럼 그자가 내 머리를 자를까?’


침상에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그래도 잠이 오지 않으면 침상 위에 앉아 보기도 하고, 방 안을 빙빙 돌기도 했다. 그럴수록 명의 얼굴은 점점 선명하게 떠올랐고, 그만큼 마음은 복잡해졌다.


‘우연일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소우는 계속 간밤의 꿈을 파헤쳤다. 생시와 다를 바 없는 효부인의 거처로 가는 길, 그곳에서 만난 명의 얼굴을 한 남자. 아직 하나 생시에서 확인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효부인의 침실뿐이었다.


‘언젠가 침실에 나를 부를지도 모르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 마지않았지만, 그녀의 침실을 확인하기만 한다면 소우는 그 꿈이 우연인지, 자신에게 어떤 기막힌 조화가 일어난 것인지 또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이 틀 무렵,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오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소우는 모든 생각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제야 소우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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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의 나라하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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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그림 24.01.31 4 0 13쪽
34 흉신이 지나간 자리 24.01.29 7 0 12쪽
33 인사 24.01.26 4 0 13쪽
32 꿈을 훔치는 일 24.01.24 6 0 13쪽
31 사람을 죽이는 일 24.01.22 5 0 12쪽
30 넌 절대로 안 죽어 24.01.19 5 0 11쪽
29 영안을 뜨게 하는 약 24.01.17 5 0 14쪽
28 장례 24.01.15 6 0 14쪽
27 부엉이의 꿈 (2) 24.01.12 5 0 12쪽
26 부엉이의 꿈 (1) 24.01.10 6 0 12쪽
25 어머니 덕이지 24.01.08 4 0 13쪽
24 탈출 시도 24.01.05 5 0 12쪽
» 꿈에서 본 남자 24.01.03 5 0 13쪽
22 불청객 24.01.01 4 0 14쪽
21 부추의 효능은? 23.12.29 4 0 13쪽
20 팔려온 처지 23.12.27 8 0 12쪽
19 붉은 주단이 깔려 있는 집 23.12.25 6 0 12쪽
18 수완 좋은 장사꾼 23.12.22 5 0 12쪽
17 염국 입성 23.12.20 9 0 13쪽
16 재앙의 불 23.12.18 8 0 13쪽
15 충분한 시간 23.12.15 7 0 12쪽
14 희생양 23.12.13 6 0 13쪽
13 사람 잡는 귀신 23.12.11 8 0 13쪽
12 고향의 자장가 23.12.08 6 0 13쪽
11 바림 23.12.06 7 0 13쪽
10 범인을 찾아라 (2) 23.12.04 7 0 13쪽
9 범인을 찾아라 (1) 23.12.01 7 0 12쪽
8 떠나면 안 돼 23.11.29 7 0 12쪽
7 작은 새의 꿈 23.11.27 7 0 12쪽
6 달빛 아래에서 23.11.24 6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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