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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DA 님의 서재입니다.

동쪽의 나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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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DA
작품등록일 :
2023.11.22 15:06
최근연재일 :
2024.04.0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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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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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696

작성
23.11.2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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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떠나면 안 돼

DUMMY

그녀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밝고, 차분하고, 초여름의 바람처럼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소우는 그녀의 목소리 저 밑바닥 뿌리 끝에서 울컥 치밀 듯 올라오는 울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바림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하늘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너야말로 괜찮아?”


바림은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밤하늘을 바라보는 바림 옆에서 소우는 잠자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니, 아무 대답이 없더라도 그는 밤새도록 그녀의 곀을 지킬 생각이었다. 섣부른 말 몇 마디로 바림의 상처를 들쑤시고 싶지는 않았다.


바림은 눈물을 닦지도 않고 여전히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엄마 생각이 났어.”


이제껏 바림은 소우에게 자신의 과거에 관해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녀가 어쩌다 아버지와 떨어져 살게 되었는지, 아버지가 없는 나날을 어떻게 보냈는지.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분이셔. 말을 할 때마다 우리 엄마 입에서는 갈대 냄새 같은 것이 났어. 엄마는 내가 잠투정을 부릴 때마다 그 갈대 냄새가 나는 목소리로 옛날이야기를 해주셨어. 우리 엄마는 아는 것이 참 많았어. 세상이 어쩌다 두 동강이 났는지, 하늘에서 떨어진 용이 어쩌다 이무기가 되었는지,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만나야 행복할 수 있는지······”


소우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을 지어주신 분도 우리 엄마야. 바닷가에서 태어났다면서 나를 바림이라고 부르셨어. 아버지는 없었지. 아버지는 멀리 돈을 벌러 나갔다고 했어. 아버지는 타고난 장사꾼이기 때문에, 집에 머무는 일이 거의 없으셨어. 그래서 난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어. 아버지도 나를 잊어버리셨을 거야. 나도, 우리 엄마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다 잊어버리고······ 그래서 아버지는 어느 날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어.

엄마는 아버지를 찾으러 하루 한 번씩은 꼭 집을 나서셨지만, 멀리 나가지는 못하셨지. 내가 혼자 빈집을 지켜야 한다는 걸 아셨으니까. 아버지는 멀리 나가는 것이 일이고, 엄마는 멀리 나가지를 못하시니 결국, 둘은 만나지 못했고······ 나는 아버지 없는 애가 되었어.”


어린아이가 자초하는 불행은 없다. 생명을 스스로 선택하는 이는 없으며, 그러므로 자기 생명과 삶의 의미를 깨닫기에 너무 어린아이들은 자기 삶을 책임질 수 없다.

어린아이의 삶은 생명의 씨를 가진 부모가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


바림은 골패의 씨에서 태어났지만, 골패는 그녀의 삶을 책임지지 않았다. 바림의 어머니는 홀로 딸의 삶을 책임지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바림은 너무 일찍 혼자가 되었다.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은 갖추지 못한 채 자기 삶을 책임져야 하는 형편이 된 것이다.

바림이 자청하여 소우를 거둔 것은, 그에게서 일찍 부모를 여의고 홀로 살아남아야 했던 자기 처지를 비춰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든 기억을 잃고, 어른과 아이 그 중간 어디에 발이 묶여 처음부터 삶을 시작해야만 했던 소우의 부모가 되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바림은 담담한, 그러나 여전히 저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울음이 샘처럼 솟아 나오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다 우리 엄마가 병에 걸렸는데, 내 생각에는 있지······ 그건 화병이야. 사람이 너무 많은 한을 품으면 병에 걸리고 말아. 난 그걸 우리 엄마를 보고 알았어.

의원이 와서 화병에는 약이 없으니 단념하고 효도하라고 하더라. 그런데, 엄마가 죽어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손 놓고 있는 게 어떻게 효도니? 나는 꼬박 3년 동안 우리 엄마를 봉양했어. 몸에 좋다는 것은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라도 구했지. 할 수만 있으면 내 살점이라도 팔았을 거야. 하지만 먹지 못해 비쩍 마르고 속이 곯아버린 여자애의 살점을 누가 사겠어?

내가 13살 되던 해에 엄마가 돌아가셨어. 엄마를 어디에 묻으면 좋을지 몰라 바닷가에 묻고 곡을 했어. 울다 보니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서 앞이 잘 안 보이더라. 그러다 보니 또 해가 뜨고 지는 것도 제대로 못 봤지. 시간이 가는 줄도 곡만 하다 보니 3일 밤낮이 훌쩍 지났어.

몸 안에 있는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쏟아낸 것 같아.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숨만 간신히 붙어서 엄마 무덤을 꼭 끌어안고 있었지. 그래도 이대로 굶어 죽는 것은 엄마에게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겨우 일어나 남은 쌀을 모조리 솥에 부어서 흰쌀밥을 하고, 엄마가 생전에 담그신 젓갈로 반찬 삼아서 밥을 먹었어.

배가 부르고 나니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알겠더라. ‘살아야지. 내가 기운이 빠져 죽으면 우리 엄마가 얼마나 속상하실까?’ 그래서 나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몸을 의탁했어. 그러다 장사하러 나온 시해 어르신의 사환들이 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글쎄 정신을 놨다는 거야.”


바림은 그제야 소우를 돌아봤다. 눈물은 어느새 다 말랐고, 그녀의 눈동자는 밤하늘에 완전히 물들어 버린 듯 아무 빛도 나지 않았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그 말에 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왜 자신에게는 마음 깊이 숨겨둔 비밀을 털어놓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녀의 슬픔을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려는 자신의 간사함에 실망했다.


아마도 골패는 바림의 어머니를 두고 두 집 살림을 차린 모양이다. 무슨 일로 유도에 꾸린 가정이 파탄 나고, 정신을 놓은 골패만 홀로 이 큰 집에 덩그러니 남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누군가는 조강지처를 버린 도리 없는 남자가 천벌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림은 그 도리 없는 아버지 곁을 지키고 있다. 이따금 비참한 어머니와의 애틋한 추억을 기리며.


바림은 곧 어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소우는 그녀의 영혼의 얼마는 맨손으로 죽은 어머니를 묻고 맨발로 바닷가를 하염없이 걸으며 울고 또 울었던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으리라 생각했다.


늦게라도 허물어져 가는 집이 아닌, 허물어지지 않는 담에 둘러싸여 사람의 온기를 가득 품은, 언제나 햇살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그런 집에서 살게 된다면, 바림은 상처받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드디어 안녕을 고하고 어른이 될 것이다.


소우는 상상했다. 바림이 굳건하고 자상한 남자를 만나 혼인하여 자식을 낳고, 다복한 가정을 일궈 사랑으로 자식들의 삶을 책임지는 광경을. 바림의 아이들은 어머니를 닮아 햇살처럼 밝고 붉은 날개를 달고 있을 테고, 아버지를 닮아 민첩하고 용감할 것이다.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바림의 옆에서 소우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빛이라고는 어스름한 달빛이 전부였음에도 그 어두운 땅에 그보다 더 어두운 소우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그때, 바림이 쓰러지듯 소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는 더 이상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소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림은 소우의 차가운 손을 제 손안에 품고 말했다.


“쓰러진 널 보고 우리 엄마가 생각났나 봐. 우리 엄마처럼 너도 갑자기 날 떠날까 봐.”


“미안해.”


소우는 바림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바림이 미소 지었다.


“그게 왜 네 탓이니?”


“걱정 끼쳐서 미안해.”


바림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무사하잖아. 하지만 앞으로는 몸을 사리는 것이 좋겠어. 의원이 네 기력이 많이 쇠해졌다고 하더라.”


바림이 손가락으로 소우의 손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아프지 마.”


“응.”


“마을 사람들이 하는 말도 신경 쓰지 말고.”


“다들 좋은 사람들이야.”


그 말에 바림이 코웃음을 쳤다.


“나도 알아. 다들 네 뒤에서 널 무시하고······ 혹덩어리라도 된 것처럼 말하잖아.”


“사실인걸. 밥만 축내는 객식구지.”


소우는 짐짓 밝은 목소리로 농담처럼 말했지만 바림은 그를 나무랐다.


“그런 말 하지 마.”


소우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바림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바림은 아예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붙잡고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소우는 놀라서 그만 숨을 집어삼켰다.


“그런 말 하지 마! 너는 우리 집의 빛이야. 네가 와서 내 숨통이 트였어. 평생 볕 뜰 날 없을 줄 알았는데, 네가 우리 집에 와서 드디어 사는 것 같단 말이야. 네가 없으면 나는······”


그러더니 별안간 눈물을 왈칵 터뜨리는 것이다. 소우는 허둥지둥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자 바림은 아예 그의 품에 안겨버렸다. 소우는 어쩔 도리 없이 그녀를 살포시 안았다.


“아무 데도 가지 마, 소우. 떠나면 안 돼.”


바림은 소우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서 간절히 말했다. 그러나 소우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바림은 한참이나 울었다. 바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소우의 굳은 어깨도 서서히 힘이 빠졌다. 그렇게 바림을 달래던 소우의 귀에 소란이 들려왔다.


젊은 남자들이 대화하는 소리였다. 거의 속삭이다시피 하는 작은 소리였지만, 모두가 잠든 시간인지라 뜰에 나온 소우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깥 좀 살펴보고 올게.”


그 사이 울음을 그친 바림이 얌전히 소우를 보내주었다.


대문을 슬며시 열고 고개만 빠끔히 내민 소우는 유족 청년 서넛을 발견했다. 그들은 마침 바림의 집 대문을 두드리려던 참이었다.


골패가 깨기 전에 문을 열어 다해이라고 생각하며 소우가 그들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앞에 서 있던 석명이 대답했다. 그는 솔의 형이었다.


“식구들 다 집에 있지?”


“그건 왜요?”


“도견이 도망쳤어.”


석명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래서 혹시 아직 귀가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지 살펴보는 중이야.”


소우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작은 개 한 마리가 없어졌다고 이리 수선을 떨 일인가? 소우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석명이 부연했다.


“도견은 피를 먹으면 포악해져. 사람도 잡아먹을 정도야.”


“갇혀 있는 놈이 어떻게 피를······”


석명이 혀를 찼다.


“모르지. 멍청한 닭이 도견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는지, 아니면 누가 일부러 먹였는지······ 우리도 듣기만 했지 직접 보지는 못해서······”


그러고는 소우를 힐끗 바라보는 것이다. 소우는 석명은 물론, 곁에 있는 다른 청년들의 눈초리도 놓치지 않았다. 어쩐지 소우의 눈에는 그들이 자신에 대해 뭔가 미심쩍은 생각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네에서 도견을 본 적 없냐?”


소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있으면 바로 말했을 거예요. 그보다 아까 서천강에서······”


소우는 잊고 있었던 인간 노예에 대해 말할 참이었지만, 청년들은 그의 말을 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손을 흔들며 몸을 돌이켰다.


“아무튼 조심해라.”


그러다 방금 생각났다는 듯, 석명이 고개만 휙 돌려 소우를 꼬나봤다.


“솔이 그러던데? 네가 도견 옆에 있었다고······”


소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솔도 같이 있었어요. 다른 애들도.”


석명은 별다른 사과의 말도 없이 다시 고개만 휙 돌려 청년들과 함께 제 갈 길을 갔다. 소우는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들은 소우에 대해 떠들어댔다.


“네 동생도 같이 있었어? 그런 말은 안 했잖아.” “몰라, 난 동생한테 들은 대로 얘기했을 뿐이야.” “그럼, 저놈이 풀어줬다는 말은?”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도견을 보는 눈이 심상치 않더래.” “어땠길래?” “아주 분기가 가득해서는 당장이라도 풀어줄 것 같더라는 거야.”


얼마 안 가 그들의 목소리는 먼지처럼 사라졌지만, 소우의 귓가에는 여전히 그들의 목소리가 쟁쟁했다.


“소우? 무슨 일이야?”


바람의 목소리가 그들의 목소리를 몰아냈다. 소우는 대문을 닫고 웃으며 바림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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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그림 24.01.31 4 0 13쪽
34 흉신이 지나간 자리 24.01.29 7 0 12쪽
33 인사 24.01.26 4 0 13쪽
32 꿈을 훔치는 일 24.01.24 5 0 13쪽
31 사람을 죽이는 일 24.01.22 5 0 12쪽
30 넌 절대로 안 죽어 24.01.19 5 0 11쪽
29 영안을 뜨게 하는 약 24.01.17 5 0 14쪽
28 장례 24.01.15 6 0 14쪽
27 부엉이의 꿈 (2) 24.01.12 5 0 12쪽
26 부엉이의 꿈 (1) 24.01.10 6 0 12쪽
25 어머니 덕이지 24.01.08 4 0 13쪽
24 탈출 시도 24.01.05 5 0 12쪽
23 꿈에서 본 남자 24.01.03 4 0 13쪽
22 불청객 24.01.01 4 0 14쪽
21 부추의 효능은? 23.12.29 4 0 13쪽
20 팔려온 처지 23.12.27 8 0 12쪽
19 붉은 주단이 깔려 있는 집 23.12.25 6 0 12쪽
18 수완 좋은 장사꾼 23.12.22 5 0 12쪽
17 염국 입성 23.12.20 9 0 13쪽
16 재앙의 불 23.12.18 7 0 13쪽
15 충분한 시간 23.12.15 7 0 12쪽
14 희생양 23.12.13 6 0 13쪽
13 사람 잡는 귀신 23.12.11 8 0 13쪽
12 고향의 자장가 23.12.08 6 0 13쪽
11 바림 23.12.06 7 0 13쪽
10 범인을 찾아라 (2) 23.12.04 6 0 13쪽
9 범인을 찾아라 (1) 23.12.01 7 0 12쪽
» 떠나면 안 돼 23.11.29 7 0 12쪽
7 작은 새의 꿈 23.11.27 7 0 12쪽
6 달빛 아래에서 23.11.24 6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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