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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의 나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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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DA
작품등록일 :
2023.11.22 15:06
최근연재일 :
2024.04.0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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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3.12.1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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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희생양

DUMMY

“잠깐!”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석명이 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왕대가 석명에게 손짓하자, 석명은 들고 있던 다리를 내려놓고 완전히 뒤를 돌아봤다.


시해였다. 시해가 무리 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곧장 왕대에게 다가가 귓속말했다. 시해가 말하는 내내 왕대는 소우를 힐끔거렸다. 석명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고 일부러 소우 옆에서 위협적으로 발을 굴러댔다.


소우는 그저 가만히 서서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나 죽음은 오지 않았다.


“가자.”


시해가 소우에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사환이 소우의 팔에 제 팔을 걸었다.


“뭐해? 얼른 걸어.”


시해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진귀한 구경거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저마다 불만 섞인 숨을 토해냈지만, 누구 하나 시해에게 따져 묻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왕대를 쳐다보며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왕대 역시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노는 고약한 취미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왕대에게도 오랜만에 맞이한 이 성대한 의식이 흥밋거리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주민들에게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은 채로 말했다.


“시해 상단주가 저놈을 사가겠다 하셨소. 그리들 알고 그만 집으로들 돌아가시오.”


주민들은 한탄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저들끼리 뭐라고들 떠들어댔다. “저 배은망덕한 놈을 그냥 살려둔다고?” 대부분 소우의 처형을 구경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듯 했으나, 시해의 편을 드는 사람도 있었다.


“안 그래도 도견 때문에 시해 어르신이 손해를 봤으니 저렇게라도 충당하면 좋지.”


시해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석명은 제 동생에게 듣기를 소우가 도견을 풀어줬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시해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소우가 도견을 풀어줄 이유도 없거니와, 어린아이의 증언 외에는 소우의 범행을 증명할 만한 다른 증거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은 좁고, 사람들은 입이 가벼운 데다 말은 그보다 더 가벼우니 조만간 소문이 퍼질 것이다. 사람들은 어디에서 들었다는 투로 말을 옮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마치 제 눈으로 본 양 소문을 퍼뜨릴 것이다.


그것은 시해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소우는 유족은 아니지만, 어쨌든 유도의 주민이다. 소우가 범인으로 확정되면, 시해는 도견이 입힌 피해를 교족과 하낙의 유족들에게 모조리 보상해야 한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 시해였지만, 혹여라도 일이 그렇게 된다면 소우를 판 돈을 보태는 것이 그나마 수지가 맞는 일이다.


만약 시해의 사환들이나 대무의 그 사냥개가 범인이랍시고 웬 유족을 끌고 나오더라도, 시해는 소우를 범인으로 몰아세울 생각이었다.


단조 마을 남자들 대부분이 시해의 상단에 속한 사환이고, 왕대는 그런 시해를 위해 최대한 편의를 봐주고 있다. 시해는 촌장의 권위에 상당한 위세를 마을에 떨칠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다. 마을에 돈을 가져다주는 대가로 그는 위세를 얻고, 그 위세로 그는 마을의 부를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시해는 되도록 단조 마을의 주민들과 두터운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그들의 죗값을 대신 질 희생양이 필요한데, 이 이름도 기억도 없는 근본 없는 어린애야말로 가장 마땅한 제물이 아니겠는가.


아직까지 대무에게서는 범인을 찾았다는 소식이 없으니, 시해는 당장에 소우를 대무에게 들먹일 생각이었다. 대무가 소우의 목숨값을 요구할지도 모르겠으나, 시해는 소우를 최대한 비싼 값을 불러 팔아버릴 것이다.


보라색 날개는 마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것인 데다, 소우는 얼굴도 반반하고 계집애처럼 고우니, 마계는 물론 인계의 귀부인이나 남색을 좋아하는 부자들에게도 팔 수 있을 것이다.


시해가 소우에게 말했다.


“노래를 잘한다지?”


소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듣지 못하는 것인지, 들을 수 없는 것인지. 시해는 혀를 찼다. 사환이 소우의 머리를 툭툭 치며 대답을 종용하자 시해가 말렸다.


“바림이 그러던데? 네가 노래를 곧잘 한다고.”


그 말에 소우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시해의 입에서 바림이라는 말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그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바림이 어르신 집에 있어요?”


시해는 곤죽이 된 소우의 얼굴을 보며 다시 혀를 찼다.


‘아주 못쓰게 만들어 놨군. 얼굴이 제 모양을 찾은 다음에나 팔 수 있겠어.’


“그래. 네가 집을 다 태워버려서 우리 집에 데려다 놨다.”


“바림이··· 정말 그랬어요? 제가, 제가······”


시해는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하는 소우를 괄시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골패를 죽였다고. 그래. 하나 빠짐없이 다 말하더라. 네가 절굿공이로 잘 자고 있는 골패를 때려죽이고, 자기를 덮치려 해서 도망쳤다고. 네가 분을 못 이기고 집 안에 불을 지른 것까지. 그래, 바림을 어쩌지를 못하겠으니까 아예 같이 죽으려 했냐? 애당초 그런 말을 한 내가 잘못이지.”


그는 아예 고개를 돌리고 소우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바림을 시집보내자니까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아니냐? 억지로 잠자리를 가지면 바림이 별수 없이 네 곁에 머물 것 같더냐?”


“아니에요!”


소우는 소리칠 여력도 없었다. 숨 쉬는 것도 벅찼지만, 그러나 그는 온 힘을 다해 결백을 주장했다.


“난 추호도 그런 생각 안 했어요. 난 그 애가 행복하기를 바란다고요! 내가 왜!”


어쩌면 바림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까? 다 죽어가던 소우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어딜 감히!” 하며 사환이 소우의 머리를 내려쳤지만, 그의 눈빛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소우는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여전히 꿋꿋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림을 만나게 해주세요. 내가 골패 아저씨를 죽인 줄 알면서 남은 평생을 살게 할 수는 없어요.”


시해가 비웃었다.


“음흉한 놈. 내가 네 속을 모를 줄 알아? 너는 정말로 네가 바림에게 뭐라도 되는 줄 아는구나.”


“바림이······ 바림이 부탁했어요.”


—떠나면 안 돼.


그러나 그 말만은 할 수 없었다. 바림을 옥산에 보내버리겠다는 시해의 결정에 동조하지 않았는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이 모든 재난은 바림의 원을 저버린 대가인지도 모르겠다고, 소우는 생각했다.


소우가 더 말이 없자 시해는 걸음을 재촉했다. 집에 도착한 그는 소우를 우리에 집어넣었다. 그곳에는 돼지 몇 마리와 그것들이 싼 오물, 그리고 그 오물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는 어린 인간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소우처럼 어리고 고운 얼굴이었다.


소우는 결박된 채로 한 귀퉁이에 앉아 바림을 생각했다. 바림이 이 집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고, 숨은 점점 가빠졌다. 인간 노예들은 그런 소우를 불길한 눈빛으로 곁눈질했다.


그러다 한 명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너지?”


소우가 눈동자를 힐끗 돌리자 입을 연 소년이 용기를 내었다.


“네가 슬기를 잡았지?”


소우가 무시하고 시선을 돌리자, 소년은 목소리까지 높였다.


“네가 슬기를 잡았잖아. 왜 그랬어? 너도 노예면서.”


소우는 그제야 소년이 말하는 ‘슬기’가 누군지 깨달았다.


‘다행히 물에 빠져 죽지는 않았구나.’


“내가 안 잡았어.”


“거짓말!”


“강에 빠지는 것만 봤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는지 나도 몰라.”


소년이 반박하려 하자, 주위에 있던 다른 아이들이 그를 말렸다. 소년은 씩씩거리며 소우를 노려보다 말했다.


“요괴들은 짐승이라고 하더니 정말이야. 네놈들은 사람 목숨이 귀한 줄도 모르냐? 어떻게 사람을 짐승 잡듯 잡을 수가 있어.”


소우가 비웃었다.


“그럼, 인간은? 인간도 같은 인간을 노예로 부린다던데······ 요괴들까지 돈 주고 사서 개처럼 목줄을 채우고 기른다면서.”


그 말에 아이들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우리 안은 돼지가 울며 먹이를 먹는 소리만 가득했다. 소우가 말했다.


“너나 나나 다 똑같아. 돼지우리에 들어앉아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보이는 대로 붙잡고 욕하고 하소연하는 것뿐이야. 그래, 어차피 다 죽을 인생들인데 뭘 하든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 말에 결국, 한 소녀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리 안은 이제 돼지가 우는 소리, 그리고 어느 소녀가 우는 소리뿐이었다.




“받으시오.”


대무의 단원들이 죽은 도견 시체를 시해의 집 안뜰에 던져 놓았다. 바위가 떨어지기라도 한 든 온 집 안에 울렸다. 시해는 도견의 머리에 꽂힌 화살을 보고 버릇처럼 혀를 찼다.


대무가 말했다.


“우리는 이미 도견을 팔았고, 그 값도 받았소. 보수도 받지 않고 도망친 도견을 잡아주기까지 했지.”


시해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집 안으로 손짓했다.


“고생하셨으니 들어와서 쉬시오. 뭣들 하느냐? 어서 술상을 차리지 않고!”


대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원들에게 고갯짓했다. 단원들은 저마다 부러 험한 소리를 내뱉으며 으름장을 놓듯 떠들어댔다. 단원들이 집 안으로 다 들어갈 때까지도 대무는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시해는 사환들에게 도견의 시체를 치우라고 일렀다. 그사이 대무가 시해에게 손짓했다. 대무와 시해는 사람이 없는 뒤뜰로 자리를 옮겼다. 대무가 먼저 용건을 꺼냈다.


“범인은 잡았소?”


그 말에 시해가 웃음을 참으며, 짐짓 점잖은 표정으로 말했다.


“짐작 가는 놈이 있어 잡아놓기는 했으나, 아직 증거는 못 찾았소. 하지만 그놈이 틀림없소이다. 단장은 아직 못 잡은 모양이오?”


시해는 대무가 이를 갈며 골을 내는 모습을 기다렸지만, 어찌 된 일인지 대무는 조용하기만 했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더니 툭 말을 내뱉었다.


“우리도 찾기는 찾았는데······”


그는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놈이 댁이 찾은 그놈인지는 나도 모르겠군.”


‘아차, 선수를 뺏겼구나!’ 시해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대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간밤에 웬 놈이 집에 불을 질렀다던데, 그 집에서 주구가 뭘 좀 찾았거든.”


“골패의 집 말이오?”


그러자 대무는 곧 난감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런데 또 이게 증거가 될지 싶고. 하여튼, 그쪽에서 범인을 찾았다니 다행이지요. 그래서 그놈은 유족이요, 교족이요?”


시해는 대무가 적어도 하나는 분명히 알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 하나가 범인을 잡을 결정적인 단서가 될지, 시해의 묘수를 훼파할 무기가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시해는 관점을 바꾸기로 했다.


“따라오시오.”


시해는 대무를 데리고 돼지우리로 향했다. 그는 우리 안에 있는 소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이오.”


대무가 인상을 찌푸렸다.


“날개가 희한하게도 생겼군. 눈도 시퍼렇고. 마계 온 천지를 다녔지만, 저런 놈은 처음 보네.”


그러더니 웃으며 너스레를 떠는 것이었다.


“잘 됐군. 우리가 찾던 그놈이오!”


시해는 어리둥절했다.


“방금 처음 보는 놈이라 하지 않았소?”


“주구의 말이 그렇다는 거지. 꼭 저렇게 생긴 놈이 범인이라 하더이다. 그런데 그놈이 딱 내 앞에 있네! 그런데 이놈은 교족도 아니고, 유족도 아니구만. 그렇지요?”


하며 그가 시해를 돌아봤다. 시해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리고는 한 번 더, 이번에는 좀 더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시해는 확신했다. 대무가 알고 있는 그 하나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것이 대무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둘은 껄껄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유족도, 교족도 아닌 엄한 놈이 일을 저질렀군. 그럼 이제 저 놈은 어쩐다?”


대무의 말에 시해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촌장께서 처벌하시겠다는 것을 내가 데려왔소. 둘 다 입은 손해가 막심하니, 저놈을 팔아 그 돈을 적당히 나누는 것이 어떻소?”


대무는 그 ‘적당히’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것은 나중에 짚어도 될 문제였다.


“그건 그리합시다.”


대무는 시해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했다. 과연, 부부싸움과 마찬가지로 동업자 간의 싸움은 칼로 물 베기와 다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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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그림 24.01.31 4 0 13쪽
34 흉신이 지나간 자리 24.01.29 7 0 12쪽
33 인사 24.01.26 4 0 13쪽
32 꿈을 훔치는 일 24.01.24 6 0 13쪽
31 사람을 죽이는 일 24.01.22 5 0 12쪽
30 넌 절대로 안 죽어 24.01.19 5 0 11쪽
29 영안을 뜨게 하는 약 24.01.17 5 0 14쪽
28 장례 24.01.15 6 0 14쪽
27 부엉이의 꿈 (2) 24.01.12 5 0 12쪽
26 부엉이의 꿈 (1) 24.01.10 6 0 12쪽
25 어머니 덕이지 24.01.08 4 0 13쪽
24 탈출 시도 24.01.05 5 0 12쪽
23 꿈에서 본 남자 24.01.03 5 0 13쪽
22 불청객 24.01.01 4 0 14쪽
21 부추의 효능은? 23.12.29 4 0 13쪽
20 팔려온 처지 23.12.27 8 0 12쪽
19 붉은 주단이 깔려 있는 집 23.12.25 6 0 12쪽
18 수완 좋은 장사꾼 23.12.22 5 0 12쪽
17 염국 입성 23.12.20 9 0 13쪽
16 재앙의 불 23.12.18 8 0 13쪽
15 충분한 시간 23.12.15 7 0 12쪽
» 희생양 23.12.13 7 0 13쪽
13 사람 잡는 귀신 23.12.11 8 0 13쪽
12 고향의 자장가 23.12.08 6 0 13쪽
11 바림 23.12.06 7 0 13쪽
10 범인을 찾아라 (2) 23.12.04 7 0 13쪽
9 범인을 찾아라 (1) 23.12.01 7 0 12쪽
8 떠나면 안 돼 23.11.29 7 0 12쪽
7 작은 새의 꿈 23.11.27 7 0 12쪽
6 달빛 아래에서 23.11.24 6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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