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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의 나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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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DA
작품등록일 :
2023.11.22 15:06
최근연재일 :
2024.04.03 17:00
연재수 :
62 회
조회수 :
318
추천수 :
3
글자수 :
344,696

작성
24.04.0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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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변하지 마

DUMMY

청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예민했다. 축축하게 젖은 코는 수천수만 가지의 냄새를 즉각적으로 청대의 뇌에 전달했다. 확장된 동공은 어둠에 묻힌 빛까지도 찾아냈다. 공간을 요동하게 하는 거대한 소리의 태풍 속에서도 청대의 귀는 멀어지는 백곡의 비명을 놓치지 않았다.


청대는 고개를 휙 돌려 백곡을 확인했다. 백곡이 눈을 부릅뜨고 노호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파도와 맞서는 상어처럼 연신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전진하려 했지만, 그녀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바람에 하릴없이 휩쓸리는 파도가 아니라, 살아있는 쥐 떼였다. 백곡이 앞으로 나서면 나설수록 그것들은 더욱 이를 악물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 각각의 작고 하찮은 생물들은 단 하나의 자아를 가진 거인이 되어 백곡을 유린했다.


백곡의 비명은 멈추지 않았다. 사실 청대는 그것이 비명인지 호령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제 백곡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그녀의 회색빛 머리카락만 물에 빠진 사람이 겨우 손이나 흔드는 것처럼 위로 넘실 떠올랐다가 사라질 뿐이었다.


청대는 백곡에게 완전히 미련을 버리고 돌아섰다. 어떤 쥐들이 자기들과 다른 방향으로 허겁지겁 달려가는 그녀를 의아한 듯 쳐다봤으나, 잠시뿐, 홀린 듯 백곡을 향해 내달렸다.


얼마를 달렸을지 모를 까마득한 지하 통로를 청대 역시 홀린 듯이 달렸다. 그녀를 이끄는 것은 오직 공포, 정체를 알 수 없는 포식자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본능이 다급하게 빚어낸 원시적인 공포뿐이었다.


이성이며, 분별력이며, 인간이 가져야 할 모든 종류의 고차원적인 지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기 직전, 철현이 그녀를 불렀다.


“너 맞아?”


청대는 철현의 처소 앞에서 옆으로 드러누운 채로 달리듯 네 다리를 휘적거리다가 겸연쩍게 한마디 했다. “찍.”


철현은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들고 제 처소로 들어갔다.


한참 만에야 진정한 청대는 한숨을 한번 깊게 내뱉고는 제모습으로 돌아왔다. 철현이 챙겨준 옷을 입으며 청대가 말했다.


“죽는 줄 알았네.”


“스승님은?”


청대가 제정신을 찾을 때까지 말 한마디 붙이지 않고 잠자코 기다리던 철현이 그제야 다급히 물었다. 청대가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몰라.”


얼룩이의 옥방으로 가기까지 있었던 일을 말한 청대는 걱정으로 하얗게 질린 철현에게 말했다.


“우리보다 먼저 나섰으니, 별일은 없으실 거야. 지금 약실로 가서 확인해 볼까?”


철현은 벌벌 떨리는 청대의 볼을 보고는 머리를 가로젓더니, 이내 푹 떨어뜨렸다.


“네 말대로 별일 없으실 거야. 우선 좀 쉬어라.”


그러나 청대는 철현의 눈치를 살피느라 침상에 앉지도 못했다. 그녀는 우두커니 서서 보이지 않는 철현의 얼굴을 기웃기웃 쳐다봤다. 철현이 말했다.


“괜찮으니까 좀 앉든지 해. 정신 사나워 죽겠네.”


청대가 앉자, 철현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생각을 좀 정리한 것뿐이야. 좀 전에 소우를 만났어.”


청대가 벌떡 일어났다. 철현이 짜증을 냈다. “앉으라고.” 그러나 다시 앉은 청대의 엉덩이가 물 밖에 나온 고기처럼 씰룩이는 것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청대가 말했다.


“그놈이 어떻게 여기를 왔대? 와서 뭐라고 했어? 명한테서 도망친 거야?”


철현이 청대를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지금부터 나 혼자 말할 거야. 듣기 싫으면 떠들어.”


그제야 청대가 입을 다물었다. 철현은 습관처럼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소우의 혼을 만났어. 죽은 게 아니라, 잠깐 숨이 끊어진 것 같아. 저번처럼. 아마 지금 그놈 몸은 약실에 있을 거야. 스승님께서 제때 도착하셨다면, 소우를 치료하는 중이실 테고. 어쨌든, 말하던 도중 갑자기 사라졌으니 죽은 것은 아닐 거야.”


“자기 몸으로 돌아갔다는 말이지?”


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우는 우리를 믿지 않는 것 같아. 믿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적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어. 내가 설득한 덕분에 적대감은 어느 정도 사라진 것 같기는 하지만······”


철현은 조금 전 소우에게 역정을 내던 일을 애써 무시하며 말했다.


“아무튼, 그 녀석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 시간이 부족해서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철현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이서를 이용하려는 것 같아.”


“그놈이 이서를 어떻게 알아?”


“꿈에서 만났대.”


“뭐?”


청대의 물음에 철현은 뭐라 대답할지 몰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도 못 믿을 말이었으니까.’ 그러자 청대가 대신 대답했다.


“꿈쟁이구나?”


“꿈쟁이?”


철현이 물었지만, 청대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서 영안을 뜨게 하는 약을 먹였구나.”


“알아듣게 말해.”


철현이 재촉하자 청대가 말했다.


“말 그대로 꿈꾸는 놈이라고. 꿈으로 장래 일도 미리 보고, 사람 속도 들여다보고. 인계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번도 안 들어봤어?”


철현이 고개를 흔들었다.


“수명이 뭘 알아내려는 건지 이제 짐작이 간다. 예지몽을 꾸게 하려는 거야.”


그렇게 혼잣말처럼 몇 마디 말을 더 내뱉은 청대가 물었다. “그래서?”


“이서를 부추겨서 수명을 상대하게 하겠대. 그사이 자기는 탈출하는 거지.”


“맥을 못 추는 매를 무슨 수로?” 툭 내뱉은 청대는 제 싱거운 농담에 목젖까지 드러내고 깔깔 웃었다. 철현이 무시하며 말했다.


“아까 얘기했다시피 길게 들을 시간이 없었어. 아무튼 소우는 이서를 이용할 생각이야. 꿈을 통해 이서와 만났다고 했으니까, 그런 식으로 이서를 부추기려는지도 모르지.”


청대가 눈물을 닦고는 말했다.


“난 반대야.”


“왜?”


“만에 하나 정말 소우의 계획이 성공한다고 치자. 이서가 제힘을 전부 되찾고 수명을 상대한다면, 명색이 매인데 당연히 이기고도 남겠지. 하지만 그 바람에 추명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집에 사는 무고한 다른 사람들이 둘 싸움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넌 이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모르지.”


“그자가 어떤 식으로 힘을 휘두르게 될지는 생각해 봤어?”


철현은 괜히 자존심이 상해서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나도 찬성하겠다는 건 아니야. 그 녀석 말이 그렇다는 거지.”


청대가 씩 웃고는 말했다.


“하지만, 이서가 어떤 식으로든 소용이 있을지도 몰라. 어쨌든 소우는 이서와 안면을 텄고, 그 말은 잘하면 이서의 힘을 빌려 수명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죽이는 거야 이서가 전면에 나서지 않아도 내가 조용히 끝내면 될 일이니까.”


철현이 고개를 흔들고는 침상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소우 그놈이 우리를 안 믿는다니까.”


“나라고 믿을까?”


“뭐?”하며, 철현이 벌떡 일어났다. 청대의 웃는 얼굴이 보름달처럼 둥실 떠올랐다.


“나라고 믿겠냐고.”


철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봤다. 청대는 비시시 웃음이 입가에 번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피를 나눈 형제간도 아니고, 같이 오줌 누던 소꿉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목숨을 빚진 전우도 아닌데 내가 너를 믿어야 할 이유가 있어?”


“이제 와서 시비 거는 이유는 뭔데?”


“시비가 아니라 충고야.”


청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는 거야. 소우 그놈이 하는 소리는 재수 없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너도 영감님 말고는 너무 믿지 마. 딱 그 정도가 좋아.”


청대가 재주를 넘으려 하자 철현이 다급히 물었다.


“그럼 너는! 너는 누굴 믿는데?”


쥐가 청대의 옷더미 속에서 얼굴을 빠끔히 내밀고 대답했다.


“나.”


그러고는 문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것이었다. 철현은 문을 열어주며 그녀에게 말했다.


“너무 많이 변하지 마.”


청대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철현은 쏜살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청대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정말 변해버릴라.”




청대가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약실이었다. 그녀는 굳게 닫힌 약실 문 앞에서 찍찍 울었다. 그러다 문득 입을 다물고 냄새를 맡았다. 시큼한 탕약 냄새가 풍기는 것을 보니 안에 우크미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청대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더니 이내 약실 앞을 떠났다. 그러나 철현에게 돌아가는 대신 그녀는 나가는 길을 찾았다. 탕약 냄새가 희미해지자, 저 앞에서 또 다른 낯익은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청대는 고민 없이 냄새를 따라갔다.




차가 점점 식어갔다. 그러나 찻잔에서 풍기는 향기는 여전히 풍요로웠다. 그 향이 소우는 이곳 수씨 가문의 저택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떫고 쓴 맛 밖에 나지 않는 식은 찻물처럼 죽지 않겠다며 썩은 내가 나는 고기를 먹고 연명하는 대장군과 그의 아들, 그리고 영문도 모르고 그들을 모시는 무지한 종들만이 오가는 이 거대한 저택은 그거 향긋한 냄새만 풍길 뿐, 시시각각으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소우가 수명의 찻잔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차가 식으면, 잔을 비우고 새로운 차를 따라야죠.”


“뭐, 인마?”


거학이 성을 냈지만, 수명은 잠자코 소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소우가 말했다.


“종이와 먹을 주십쇼.”


수명이 거학에게 눈짓하자, 거학이 소우를 한 번 노려보고는 종이와 먹을 가져왔다. 손을 무릎 위에 가만히 올려놓은 채 빈 종이를 빤히 쳐다보던 소우가 천천히 붓을 들어 올렸다.

의심과 약간의 호기심으로 채워진 거학의 눈과 공허하게 푸르기만 한 수명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우가 빈 종에 천천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사이 미지근한 차는 차갑게 식어버렸고, 결코 작다고 말할 수 없는 하얀 종이는 검은 선들로 가득 채워졌다.


수명이 짐승의 바다 위에 서서 어딘가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성난 바람이 되어 찢어지듯 흩날렸고, 두 손은 다급히 짐승들의 머리털을 붙들고 있었다.


수명의 시선이 다다른 저 끝, 종이 한 귀퉁이에는 작은 쥐가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그 입안에서 짐승들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건 언제 꾼 꿈이야?”


거학이 물었다.


“가장 마지막에 꾼 꿈입니다.”


거학은 믿을 수 없었다. 가장 마지막이라 함은, 소우가 두 번째로 죽은 그날이었으니 불과 하루 전이다. 소우의 숨이 끊어져 버린 탓에 거학은 소우의 꿈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소우가 이제 와서 말한 저 꿈이 과연 진실일지, 아니면 얄팍한 수로 꾸며낸 말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고문실에서 백곡에게 시달릴 때야,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용하니 거학은 소우가 그런 와중에 머리를 굴려 거짓말을 꾸며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명에게 거래를 요구하는 소우는 거학이 그를 만난 이래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거학은 별말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뒷짐을 진 채로 수명의 한 발짝 떨어져 서서 자기 주인이 명을 내리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수명의 생각은 길지 않았다. 그는 한 귀퉁이에 있는 쥐를 가리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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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하지 마 24.04.03 2 0 11쪽
61 내 꿈 24.04.01 4 0 12쪽
60 누명 24.03.29 3 0 12쪽
59 딱 하나만 24.03.27 4 0 12쪽
58 얼룩이 24.03.25 4 0 12쪽
57 괜찮아 24.03.22 4 0 12쪽
56 백곡의 심기(2) 24.03.20 4 0 13쪽
55 백곡의 심기(1) 24.03.18 4 0 12쪽
54 이서의 꿈(2) 24.03.15 4 0 12쪽
53 이서의 꿈(1) 24.03.13 4 0 11쪽
52 재회 24.03.11 4 0 12쪽
51 수명의 판 24.03.08 4 0 13쪽
50 죽은 듯이 24.03.06 4 0 12쪽
49 죽지도 못하고 24.03.04 4 0 12쪽
48 24.03.01 4 0 12쪽
47 유일한 무기 24.02.28 4 0 12쪽
46 다시 꿈 24.02.26 4 0 11쪽
45 꿈을 꾸는 죄인 24.02.23 4 0 13쪽
44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24.02.21 4 0 13쪽
43 남 걱정할 처지냐? 24.02.19 4 0 13쪽
42 분수대로, 얌전 24.02.16 4 0 12쪽
41 결의 24.02.14 5 0 13쪽
40 정신 나간 여자, 귀신 보는 남자 24.02.12 4 0 12쪽
39 각자의 일념 24.02.09 4 0 12쪽
38 소래와 융의 사정 24.02.07 4 0 12쪽
37 효부인의 침소 24.02.05 4 0 12쪽
36 추명의 사정 24.02.02 4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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