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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DA 님의 서재입니다.

동쪽의 나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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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DA
작품등록일 :
2023.11.22 15:06
최근연재일 :
2024.04.03 17:00
연재수 :
62 회
조회수 :
347
추천수 :
3
글자수 :
344,696

작성
24.03.2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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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누명

DUMMY

백곡은 잰걸음으로 지하감옥의 통로를 가로질렀다. 나시와 우크미가 말도 없이 자리를 떠버렸지만, 백곡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은 오로지 명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보는 눈들이 없었다면, 그녀는 진작에 뛰었을 것이다. 그리고 탁한 회색빛 머리를 날개처럼 펄럭이며 지하감옥을 완전히 빠져나온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뛰기 시작했다.


청대는 백곡의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얼룩이가 했던 말들을 되짚어봤다.


‘그냥 괴상하게 생긴 수괴인 줄 알았는데······’


백곡이 먹인 약이 무슨 작용을 했는지, 얼룩이는 백곡을 형님이라 부르며 그녀가 묻는 말에 사근사근 잘도 대답했다. 얼룩이가 한 말 그 뒤에 어떤 사실들이 묻혀 있는지 청대는 알 수 없었지만, 얼룩이가 실은 사람의 마음을 가진 존재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람에게 수괴의 탈을 씌울 수도 있나? 요괴들은 별 희한한 주술을 쓴다고 하니,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왜 백곡을 형님이라고 불렀지? 헛것을 본 건가?’


짐승의 탈을 쓰고 벌거벗은 몸으로 사지가 묶인 채 옥에 갇혀 있는 처지임에도 얼룩이는 백곡을 하대했고, 백곡은 그런 그를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그 짐승이 수씨 집안 사람이려나?’


얼룩이는 제 처지를 모르는 듯했다. 어쩌다 갇히게 되었는지, 심지어 자기가 지금 어떤 몰골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청대는 혀를 내둘렀다.


‘하여간 수명 그놈 참 신통한 놈이야. 무슨 수로 사람 몸에 수괴의 탈을 씌웠는지 모르겠군. 그것도 제 혈육에게 말이야.’


청대는 한시라도 빨리 명의 만행을 밝혀내고 싶었다.


‘그놈 속에 어떤 괴물이 들었는지 만천하에 알려야지. 기왕에 죽여버릴 거, 남의 손에 돌 맞아 죽는 꼴을 보는 게 더 재미있을지도 모르잖아.’


사람 죽이는 일을 즐기는 고약한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청대는 자기를 한 번 죽인 놈의 숨통을 끊은 일에까지 죄책감을 느낄 만큼 자애로운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기왕이면 더러운 피는 손에 묻히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영감님에게는 만나는 대로 목이라도 물어뜯어 죽일 것처럼 말하기는 했지만, 그건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고, 뒷일도 생각해야지. 굳이 이 외딴곳에서까지 내 이름을 알릴 필요 있겠어?’

이처럼 교활한 생각을 제 머리카락에 품은 줄도 모르고 백곡은 그저 명이 있는 곳을 향해 바쁘게 달리고 있었다.


—찍!


그 바람에 백곡은 발밑에 있는 쥐를 미처 보지 못하고 밟아버렸다.


바람 새 나가는 듯한 외마디 비명과 함께 신발 밑에서 물컹, 하고 느껴지는 감각에 백곡이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그녀는 반쯤 으깨진 쥐의 지체와 발에 묻은 붉은 살점을 보고는 재빨리 뒤로 돌아섰다.




소우는 잠에서 깨어났다. 오랜만에 꿈 하나 꾸지 않은 단잠이었다. 소우가 몸을 일으키자, 옥방 한쪽 구석에 앉아서 멍하니 창살 밖을 내다보던 맥이 그를 힐끗 쳐다봤다. 소우는 몸을 반쯤 일으킨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홍우가 보이지 않았다.


소우의 속내를 눈치챈 맥이 말했다.


“나갔다.”


“어······”


소우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자, 맥이 한숨 쉬듯 말했다.


“석방이란다.”


소우는 뭐라 물을 말이 없었다. 똑같이 누명을 쓰고 들어온 처지라면 맥에게도 자유를 얻을 기회가 주어져야 하건만, 맥은 여전히 창살 안에 앉아 있었다.


소우가 겨우 한 마디 물었다.


“언제 나가셨습니까?”


“네가 여길 나가고 바로.”


맥은 여전히 창살 밖을 보고 있었다.


“오죽 급했으면 해도 뜨지 않았는데 데리고 나갔겠냐?”


“해도 뜨지 않았다고요?”


“다들 자는 와중에 데려갔으니 밤중이었겠지.”


“그럼, 누명이······”


“몰라.”


맥은 바닥에 드러누웠다.


“누명이 풀려서 나갔는지······ 어쨌든 목이 떨어지지는 않을 거다. 간수들이 석방이라고 말했으니까.”


소우는 입을 다물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는 두 손을 배 위에 얌전히 올려놓고 옥방 천장을 바라봤다. 습한 냄새를 풍기는 벌레들이 천장 위에서 춤을 추며 기하학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별달리 할 일도 없었고, 무엇보다 맥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던 소우는 다시 잠이나 자야겠다며 편한 자세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거기에 맥의 얼굴이 있었다.


맥은 소우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는 말했다.


“꿈꿨지?”


벌어진 맥의 입안에서 저 벌레들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놀란 소우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가만히 누워서 겨우 대답했다.


“아니요.”


“무슨 꿈인 줄 알고 아니래?”


“홍우 아저씨가 석방되는 꿈을 꿨냐는 말씀 아닙니까? 아니요, 그런 꿈은 안 꿨습니다.”


그러나 맥은 소우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로 소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소우도 따라 일어났다.


“홍우 아저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던가요? 제가 꿈을 꿨다고?”


맥이 고개를 흔들었다.


“물을 기회도 없었어. 다 자는 와중에 데려갔다니까. 홍우 그놈이 발로 나를 툭 치고 지나가는 결에 잠에서 깼지. 내가 본 건 홍우가 간수가 아닌 사람들 손에 붙들려서 옥방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었어. 그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지. 죽으러 가는 건지, 살아난 건지.”


소우가 맥의 눈치를 쓱 살피고는 말했다.


“누명이 풀리셨나 봅니다.”


맥이 힘없이 웃더니 말했다.


“꿈이나 좀 꿔 다오.”


“말씀드렸지만, 꿈이라는 게······”


“좀 꿔 달라면 꿔 줘! 그냥 알겠다고 대답이라도 하란 말이야! 한잠 자고 일어나서 아무 말이나 되는 대로 지껄이면 될 거 아냐!”


“거짓말을 하라고요?”


“니미! 그동안 거짓말을 했는지 알 게 뭐야!”


맥은 몸을 날려 소우의 멱을 잡고는 그대로 그의 몸을 깔아뭉갰다. 숨이 턱 막힌 소우가 캑캑거리며 발버둥 쳤지만, 맥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괴력으로 소우의 숨통을 짓눌렀다.


“이 새끼야! 그냥, 아무 말이나 하라고!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야! 썅, 주둥이로 나불대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놈이, 어? 나를 무시해? 무시해?”


맥은 소우의 멱을 잡고 그를 흔들어댔고, 그때마다 소우의 뒤통수가 망치처럼 옥방 돌바닥을 두드렸다. 눈앞에 빛이 번쩍 터졌다.


“떨어져!”


간수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소우는 뒤통수가 으깨져 죽고 말았을 것이다. 간수들이 발악하는 맥에게 매질하는 동안 소우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채로 숨만 겨우 몰아쉬었다. 머리가 흔들리는 것인 것, 몸이 흔들리는 것인지, 아니면 온 세상이 흔들리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소우가 짐승처럼 네 발로 버티고서 벌벌 떨고 있으니까, 간수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괜찮냐?”


소우가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맥은 결국 옥방에서 쫓겨났다. 간수장은 그를 독방에 가두고 일주일간 물만 마실 것을 명령했다. 그 일주일 중 이틀 동안 맥은 화를 내며 온갖 욕을 내뱉었고, 또 이틀은 통곡하기만 했다. 그리고 나머지 사흘은 지쳐 나가떨어져서는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다시 옥방으로 돌아온 그날, 맥의 몰골은 곧 무덤에 묻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일주일 만에 음식을 먹고 겨우 기력을 되찾은 맥이 처음 꺼낸 말은 사과였다.


“미안하다. 내가 정신이 나갔었다.”


“이해합니다. 그럴만하죠.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그 말에 맥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뚝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소우를 쳐다봤다. 소우는 그 시선이 영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렸다.


“나한테도 가족이 있다. 생때같은 자식들이 있고, 멧돼지같이 성질이 사납기는 해도 현명하고 착한 아내가 있어.”


그는 정말 울기 직전이었다. 별수 없이 소우가 물었다.


“어쩌다 누명을 쓰셨습니까?”


“홍우한테도 물었냐?”


“네, 마지막 날 밤에······”


“그럼, 공의란이란 자에 대해서 들었겠구나.”


“예.”


잠시 입을 다문 맥은 말을 고르듯 우물쭈물하더니 곧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의란이 황족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자의 얼굴이 폐하의 용안을 닮기도 했지만, 출신에 관한 것도 그렇고, 과거 행적이 묘연한 탓에 날이 갈수록 소문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지.

하루는 밤중의 공의란의 심복이 날 부르더군.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그러면서 공의란이 폐하를 몰아낼 계획을 세웠으니, 손을 보태라고 설득했다.”


“설득에 넘어가셨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냐? 단칼에 거절하고 돌아섰지. 그런데 그놈이 내 뒤통수에 대고 이 일을 폐하께 고하면 나는 물론이고 내 가족들까지 전부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하는 거야.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혼자서 며칠을 끙끙 앓았지.

공의란은 내가 정말 역모를 고발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심지어 우리 집에 사람을 보내기까지 했다. 밤중에 웬 놈들이 우리 집 앞에 서서 기웃거리는 것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야. 미행까지 당하고, 어떤 날은 요리하려고 보니까 내 칼을 몰래 부러뜨려 놓기까지 했어. 우리 애들에게는 엿인지 사탕인지를 쥐여주고, 마누라한테는 독이 든 음식을 팔고······”


“독이 든 음식이요?”


“그래!”


얼굴이 하얗게 질린 맥의 눈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의심스러워서 집에서 기르는 개한테 먹였는데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고 죽었다. 이러다가는 처자식들 다 죽이고 나까지 죽이겠구나, 싶어서······ 별수 없이 공의란을 찾아갔지. 그놈이 그랬어. 딱 하나만 시키는 대로 하라고. 역모에 성공하면 공을 치하할 테지만, 실패하더라도 내 이름을 불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그 약속을 믿으셨습니까?”


“제기랄, 믿고 안 믿고, 가 중요하냐!”


맥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별것도 아니었어. 그냥, 술잔에 독을 바르면 된다고, 아주 살짝······”


“어주를 따르는 술잔에요?”


맥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우가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홍우 아저씨가 담근 어주 잔에 독을 묻혔단 말씀입니까? 그게, 그게 어떻게 누명이란 겁니까?”


맥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를 노려보던 소우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홍우 아저씨는 끝까지 모르셨군요.”


맥이 겨우 대답했다.


“그렇지······”


“어쨌든, 다행입니다. 누명을 벗으셨으니······”


하며, 소우는 맥을 힐끔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땟국물에 까맣게 젖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마치 앉은 채로 죽은 사람 같았다.


소우가 말했다.


“그럼, 왜 지금까지 누명을 썼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누명이야!”


맥이 얼굴을 가린 채로 소리쳤다.


“공의란 그놈이 나를 협박했어! 내 처자식의 목숨을 쥐고 있는데, 내가 무슨 수로······!”


“황제에게 고했어야죠.”


“그러다 내 가족이 다 죽으면?”


“황제 앞에서도 그렇게 말했습니까?”


맥이 손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깊이 고개를 숙인 탓에 소우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폐하께서 나 같은 놈의 낯짝을 보고 싶으셨겠냐? 그분께 억울함을 호소할 기회조차 없었다, 니미랄······”


소우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옥방 구석에 홍우가 두고 간 서책들과 가족에게 쓴 편지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편지야, 어차피 집으로 돌아갈 텐데······’


한 귀퉁이가 찢어진 편지를 가만히 쳐다보던 소우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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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변하지 마 24.04.03 2 0 11쪽
61 내 꿈 24.04.01 5 0 12쪽
» 누명 24.03.29 6 0 12쪽
59 딱 하나만 24.03.27 4 0 12쪽
58 얼룩이 24.03.25 4 0 12쪽
57 괜찮아 24.03.22 5 0 12쪽
56 백곡의 심기(2) 24.03.20 5 0 13쪽
55 백곡의 심기(1) 24.03.18 5 0 12쪽
54 이서의 꿈(2) 24.03.15 5 0 12쪽
53 이서의 꿈(1) 24.03.13 4 0 11쪽
52 재회 24.03.11 4 0 12쪽
51 수명의 판 24.03.08 4 0 13쪽
50 죽은 듯이 24.03.06 4 0 12쪽
49 죽지도 못하고 24.03.04 5 0 12쪽
48 24.03.01 5 0 12쪽
47 유일한 무기 24.02.28 5 0 12쪽
46 다시 꿈 24.02.26 5 0 11쪽
45 꿈을 꾸는 죄인 24.02.23 5 0 13쪽
44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24.02.21 5 0 13쪽
43 남 걱정할 처지냐? 24.02.19 4 0 13쪽
42 분수대로, 얌전 24.02.16 4 0 12쪽
41 결의 24.02.14 6 0 13쪽
40 정신 나간 여자, 귀신 보는 남자 24.02.12 5 0 12쪽
39 각자의 일념 24.02.09 4 0 12쪽
38 소래와 융의 사정 24.02.07 5 0 12쪽
37 효부인의 침소 24.02.05 5 0 12쪽
36 추명의 사정 24.02.02 4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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