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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DA 님의 서재입니다.

동쪽의 나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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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DA
작품등록일 :
2023.11.22 15:06
최근연재일 :
2024.04.03 17:00
연재수 :
62 회
조회수 :
349
추천수 :
3
글자수 :
344,696

작성
24.03.1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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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이서의 꿈(1)

DUMMY

너비도,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시커먼 공간 속에 여자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두 팔을 벌리고 소우를 향해 함박웃음을 내보이는 그녀의 몸을 악취가 파리 떼처럼 감싸고 있었다.


소우는 다가가지 않고 멀찍이 서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에게 물어봐야 할 것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녀의 정체는 무엇인지, 또 목적은 무엇인지. 어떻게 나에 대해 알고 있으며, 그녀가 알고 있는 나는 누구인지.


그러나 가장 먼저 소우의 입 밖으로 빠져나온 질문은 그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융은 어디 있어!”


소우를 향해 양팔을 활짝 벌리고 서 있던 여자가 두 팔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그녀는 실망한 것 같았다.


그녀가 말했다.


“마지막일지도 몰라.”


“뭐가?”


소우는 멀찍이 떨어진 채로 대꾸했다.


“명이 알아버렸어.”


“뭐?”


여자는 몸을 휙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우가 다급히 그녀를 따라갔다.


캄캄한 공간이 그녀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변화했다. 한걸음에 풀밭, 또 한걸음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리, 바다, 골짜기, 어느 단란한 가정집의 마당. 그리 빠른 걸음도 아니었건만, 순식간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장면들은 모두 소우의 예상을 벗어나는 것들이었다. 소우는 멀미를 느꼈다.


그는 되도록 여자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넌 누구야?”


“이서.”


“명이 알아버렸다는 게 무슨 말이야?”


“내가 널 꿈속에서 만났다는 거, 다 들켜버렸어.”


그 말에 소우가 우뚝 멈춰 섰다.


“그럼, 이젠 전부 말해줄 건가? 명에게 들킬까 봐 날 서둘러 내보냈잖아.”


이서가 휙 돌아섰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뒤편으로 그날 봤던 들판이 펼쳐졌다. 저 멀리 바림의 집이 소우를 기다리고 있는 풍경으로.


그러나 소우는 그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소우가 서 있는 자리는, 이미 이서가 지나간 자리는 다시 어둠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소우는 그 어둠이 훨씬 편했다.


소우의 속내를 알았는지, 이서는 들판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어둠의 경계에 서서 말했다.


“나는 네가 어떻게든 날 도와줄 줄 알았어. 너는 꿈을 꾸니까.”


“나에 대해선 어떻게 아는 거야?”


“나는 땅의 매야.”


이서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신도 신지 않은 제 발끝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땅속에 있는 한, 땅에서 나고 자라는 것들은 전부 알아. 하지만 여기 온 다음부터는 알았던 것들도 거의 잊어버렸고, 새로운 것들을 아는 것은 더더욱 힘들어. 네가 풍주에 오고 나서야 널 알았지. 넌 그래도 특이하니까. 특이한 것들은 눈에 잘 띄잖아.”


그 말에 융의 이름 뒤로 밀려났던 질문들이 소우의 입술을 비집고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소우는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 질문에 대답해. 그다음에 널 도와줄지 말지 결정할 거야.”


그러자 이서가 씩 웃었다.


“융이 나한테 있는데?”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소우가 받아치자, 이서는 금세 시무룩해져서는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너 진짜 똑똑하구나. 그래, 꿈꾸는 사람들은 똑똑하지.”


그녀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집을 가리키며 소우를 떠보았으나, 소우는 강경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서 꿈쩍하지 않았다. 이서가 별수 없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젓자, 풍경이 사라졌다. 뒤이어 침상 하나가 바닥에서 쑥 올라왔다.


효부인의 침상이었다. 이서는 침상 위에 올라앉고는 말했다.


“물어봐.”


소우는 그제야 팔짱을 풀었다.


“융은?”


“걔는 잘 있어. 진짜야. 걔가 있어야 나도 살아.”


이서는 헛구역질하더니 제 손바닥 위에 뭔가를 뱉어냈다. 머리카락 한 줌과 손톱이었다.


“융이 준 것들이야. 대신 나는 먹을 것을 훔쳐다 주지.”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열 걸음도 넘은 거리에 떨어져 있음에도 그것들이 눈앞에 놓인 것처럼 선명하게 보인 이유는 순전히 이 모든 것이 꿈이기 때문이었다.


‘저 여자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있는 것도 꿈속인 덕분인가?’


“또 물어봐.”


이서가 재촉했다.


“날 이용해서 얻으려는 게 뭐야?”


이서가 좌우로 눈치를 살피더니 소매를 손목 위로 걷어 올렸다. 웃을 수도 없이 겹쳐 입은 탓에 소매 하나 걷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자꾸 흘러내리는 소매를 겨우 추스르자, 나타난 것은 앙상한 손목이었다.


앙상하다는 말 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말 그대로 뼈가 드러난 앙상한 팔이었다. 안에서부터 썩어들어가기라도 한 듯 그녀의 팔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안에는 검붉게 부패한 살덩이들이 노란 진물에 덮여 번들거렸다.


악취의 정체였다.


소우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고 이서가 눈물을 글썽였다.


“다 수씨 가문이 한 짓이야. 내 고기를 먹겠다고······”


소우는 치밀어 오르는 구토를 겨우 참았지만, 차마 입에서 손을 뗄 수는 없었다.


“왜 그런 짓을······”


“난 죽지 않으니까. 죽지 않는 매의 고기를 먹으면 불사를 얻는대. 정말 그런가? 모르겠다. 다 잊어버렸어.”


이서가 소우를 향해 다시 두 팔을 벌렸다. 그러나 더는 소우를 향해 함박웃음을 짓지 않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악취는 점점 진해져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소우가 다시 뒤로 물러났다.


‘이건 꿈이야.’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는 생각이었다.


꿈이기에 소우를 두르고 있는 이 모든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것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이었고,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선명했다. 이서의 악취는 마치 손가락을 가진 살아있는 생물처럼 코를 틀어막은 소우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비집고 벌려 기어코 그의 콧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악취는 소우의 목젖을 쥐고 흔들었고, 그의 눈물샘을 터뜨리고 나와 그를 유린했다. 악취는 소우의 모든 혈관과 통로를 타고 흘러가 그의 뇌를 장악했다. 기어코 말초신경 하나하나까지 소우를 가득 채웠다.


소우는 뒤로 까무러쳤다. 이서가 재빨리 그를 붙잡지 않았다면, 바닥에 머리를 호되게 부딪쳤을 것이다.


‘아니지, 어차피 꿈이잖아?’


뒤집어진 소우의 눈이 순간 이서를 노려봤다. 놀란 이서가 물러나려 하자 소우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서 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소우가 뒤를 돌아봤다. 아니, 그것은 이서를 부르는 소리였지만, 소우는 마땅히 그 부름에 응답해야만 했다.


“이서 님.”


이제 막 어린아이의 태를 벗은 백견족 소년이 이서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에 소우의 얼굴이 비쳤다. 아니, 이서의 얼굴이 비쳤다.


이서는 옷을 겹겹이 입지도, 그 아래에 너덜너덜해진 육신을 숨기지도 않았다. 이서에게서는 어떤 악취도 나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나는 것은 축축한 흙내음, 그리고 그 흙에 뿌리를 내린 식물들의 파릇한 풀내음이었다.


소년은 이서를 보자마자 등에 지고 있던 보따리를 내려 놓았다. 그 안에는 김이 펄펄 나는 만두가 담겨 있었다. 소년은 뜨거움도 참아가며 이서에게 만두를 건넸다.


소년과 이서는 나란히 풀밭에 앉아 만두를 먹었다. 이서의 입에는 영 맞지 않았지만, 이서는 소년이 애써 챙겨온 만두를 하나도 남김 없이 먹었다. 소년은 빈 보따리를 보고 웃었고, 이서도 그를 따라 웃었다.


“이서 님.


소년이 다시 이서를 불렀다. 이서가 눈을 감았다 뜨자, 어느 새 어린 태를 완전히 벗은 젊은 남자자가 그녀를 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가 이서의 손을 잡았다.


남자가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이서가 고개를 흔들었다.


“오히려 네 시간을 빼앗아 미안한걸.”


남자가 이서의 손을 꼭 쥐고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가 땅을 밟을 때마다 아침 이슬에 젖은 땅이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터뜨렸다. 이서의 발이 땅이 한숨에 축축해졌다.


남자가 말했다.


“이서 님을 뵙는 것에 유일한 낙입니다.”


“풍주에서 단훈산까지 오래 걸릴 텐데······”


“이서 님께는 눈 깜짝할 시간이지요.”


남자가 이를 시원하게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나 이서는 마주 웃을 수 없었다. 이서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 시간은 없어. 모든 시간은 다 중요하지. 특히나 땅에서 나고 자라는 것들에게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얼굴에서 이서는 한차례 그를 지나간 세월을 느꼈다.


남자는 가만히 서서 이서의 손길을 느꼈다.


“언젠가 이서 님께 풍주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이서 님은 한 번도 단훈산을 떠나신 적이 없다 하셨죠?”


“그래. 이승에 온 후로는······”


“답답하지 않으신가요?”


이서가 웃었다.


“땅을 밟는 한 내가 모르는 것은 없어.”


남자가 서글프게 웃었다.


“하지만, 제가 떠나고 나면 또 저를 잊어버리시겠지요?”


이서가 눈을 깜빡, 감았다 떴다. 그러자 어느새 젊은 티를 벗은 장년의 남자가 이서를 보고 웃고 있었다.


남자가 이서를 향해 말하려는 순간,


소우의 눈앞에 깜깜해졌다.


그는 아득한 구덩이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구덩이 저 위에서 수면이 일렁였다. 소우는 효부인의 침실에서 꼭 같은 모습을 봤다. 검은 기운이 물처럼 흐르고, 수면 너머에서 이서가 소우를 내려다보며 울부짖었다.


“나가!”


그러나 소우가 도착한 곳은 꿈 밖이 아닌 또 다른 비현실이었다.


또다시 이서의 몸속에 갇혀버린 채, 소우는 단훈산 산자락을 거닐고 있었다. 회색빛 안개가 폭포수처럼 산 아래까지 밀려 내려와 온 땅을 자욱하게 적셨다. 그러나 이서가 걸음을 옮길 때면 안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좌우로 물러났다.


그러다 이서는 안개 속에 묻혀 있는 백견족 소년을 발견했다.


아직 나물을 캐고 다닐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어린 소년 옆에는 바구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맨손으로 땅을 헤집고 다녔는지, 소년의 손가락은 손톱 밑까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소년에게서는 시큼한 땀 냄새와 함께 따뜻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침 이서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제 심장에 성에가 서리는 것을 느꼈다.


이서는 소년의 머리맡에 무릎 꿇고 앉아 소년의 팔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녀는 마치 기도를 올리듯 머리를 숙이고 소년의 팔에 제 입을 가져갔다.


“안녕하세요, 이서 님.”

소년은 이서를 알고 있었다.


“너는 누구니?”


이서가 소년의 팔을 든 채로 물었다.


“이서 님은 땅을 밟는 것은 모두 아신다고 들었어요.”


“아는 게 많아지면 그만큼 잊어버려야 한단다.”


“저는 융선이에요.”


소우는 융선의 얼굴에서 청년 시절의 그를, 장년이 된 그를 봤다.


“나가.”


이서의 목소리에 소우가 뒤로 돌이켰다. 다시 풍경은 사라지고, 어둠뿐이었다. 이서는 반쯤 벗겨진 채로 두 손으로 제 온몸을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며 소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 남은 것은 분노가 아니라 두려움뿐이었다.


“나가.”


이서의 말에는 아무 힘도 없었다. 소우는 주저하지 않고 이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손이 이서의 얼굴에 닿는 순간,


장년이 된 융선이 말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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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내 꿈 24.04.01 5 0 12쪽
60 누명 24.03.29 6 0 12쪽
59 딱 하나만 24.03.27 4 0 12쪽
58 얼룩이 24.03.25 4 0 12쪽
57 괜찮아 24.03.22 5 0 12쪽
56 백곡의 심기(2) 24.03.20 5 0 13쪽
55 백곡의 심기(1) 24.03.18 5 0 12쪽
54 이서의 꿈(2) 24.03.15 5 0 12쪽
» 이서의 꿈(1) 24.03.13 5 0 11쪽
52 재회 24.03.11 5 0 12쪽
51 수명의 판 24.03.08 4 0 13쪽
50 죽은 듯이 24.03.06 4 0 12쪽
49 죽지도 못하고 24.03.04 5 0 12쪽
48 24.03.01 5 0 12쪽
47 유일한 무기 24.02.28 5 0 12쪽
46 다시 꿈 24.02.26 5 0 11쪽
45 꿈을 꾸는 죄인 24.02.23 5 0 13쪽
44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24.02.21 5 0 13쪽
43 남 걱정할 처지냐? 24.02.19 4 0 13쪽
42 분수대로, 얌전 24.02.16 4 0 12쪽
41 결의 24.02.14 6 0 13쪽
40 정신 나간 여자, 귀신 보는 남자 24.02.12 5 0 12쪽
39 각자의 일념 24.02.09 4 0 12쪽
38 소래와 융의 사정 24.02.07 5 0 12쪽
37 효부인의 침소 24.02.05 5 0 12쪽
36 추명의 사정 24.02.02 4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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