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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DA 님의 서재입니다.

동쪽의 나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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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DA
작품등록일 :
2023.11.22 15:06
최근연재일 :
2024.04.03 17:00
연재수 :
6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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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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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수 :
344,696

작성
24.03.1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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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재회

DUMMY

“영감!”


거학은 늘 그렇듯 기척 하나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약초를 분류하던 우크미는 역시나 늘 그렇듯 하던 일을 멈추고 거학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오셨습니까?”


“약 만들어 놨소?”


우크미는 미리 준비해 둔 환약을 담은 주머니를 내어주었다. 거학이 주머니 안을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철 현이철현이 죽고 나서 생긴 일종의 절차였다. 거학이 저렇게 주머니 안을 펼치고 약을 검사할 때마다 우크미는 속으로 몇 번이나 웃었는지 모른다.


‘제깟 게 보면 알아?’


그러나 거학은 바보가 아니다. 거학이 이런 귀찮은 수고를 들이는 이유는 이제 다시는 명 도련님이 당신을 신뢰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것 말고도 무언의 경고는 많았다. 약실에 들어서자마자 주변을 둘러본다거나, 말도 없이 탕약실에 들어가 뒷짐을 지고 서서 역시 뭔가를 찾듯 이곳저곳을 눈으로 살펴본다거나. 아니면 우크미에게 안부 인사를 가장한 질문들을 던진다거나.


“오늘은 날씨가 참 좋던데······”


“그렇습니까? 쇤네는 통 나갈 일이 있어야 말이지요.”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린가?”


거학은 우크미를 괴롭힐 핑계를 얻은 것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요. 쇤네가 실언했습니다. 늙은이 군소리에 너무 노여워 마십쇼.”


“노망이라도 났다는 거요? 그럼 곤란한데······ 할 일이 산더미인데, 벌써부터 정신을 놓으면 쓰나······”


그러더니만 거학이 히죽 웃었다.


“그래, 나라도 자식 같은 놈을 제 손으로 묻으면 정신을 놓고 말지.”


우크미가 말없이 그저 머리만 조아리자, 거학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약실을 나서기 위해 몸을 돌이켰다. 우크미가 그런 그를 불러 세웠다.


“소우 놈은 괜찮습니까?”


“뭐?”


거학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보약이 또 필요하지는 않은지요.”


“뭐······”


하고 거학이 입맛을 다시더니 문간에 기대선 채로 대답했다.


“보약을 먹고 나서는 기력이 많이 돌아온 것 같더라만······ 그래서 다시 약을 먹이기로 한 거요. 근데 또 모르지. 백곡이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려서 약을 먹일 때마다 물벼락에, 몽둥이찜질에······”


“약을 너무 많이 먹이지는 마십쇼. 그간 영안이 많이 트였을 것이니, 약을 줄여도 전보다 더 효과는 좋을 것입니다.”


그러자 거학이 또 씩 웃었다.


“그래? 그런 것 치고는 영 신통치가 않던데.”


그때까지도 머리를 숙이고 있던 우크미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어떻습디까?”


거학은 말없이 우크미를 빤히 쳐다봤다. 우크미는 그 속에서 무슨 생각이 오가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이때까지 우크미에게서 약만 받아 갔을 뿐, 그 약으로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한 번도 밝힌 일이 없었으니, 이제 와서 거학이 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저놈은 내가 수틀리면 자진하고도 남을 놈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우크미가 거학을 향해 눈을 치뜬 채로 목을 길게 뺐다.


“약이 신통치 않은 것인지, 그놈 몸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를 알아야 약을 보완해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거학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나 늙은이의 군소리라고 무시하며 약실을 나서지도 않았다.


그가 말했다.


“영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잖소?”


“많지요. 귀신을 보기도 하고, 천기를 읽기도 하고······”


“그래, 뭐가 됐든 말이야. 그런데 그건 영안을 가진 사람이나 볼 수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놈이 봤다면 봤나 보다, 안 보이면 못 봤나 보다 할 수밖에 없잖소?”


거학은 이 일로 꽤 오랫동안 고민한 모양이었다. 한 번 말의 물꼬가 터지고 나니 거학은 닥치는 대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놈이 거짓말을 할 깜냥도 아니고, 뭣보다 도련님께서 편의를 봐주신 은덕을 저도 감사히 여겼는지 약도 넙죽넙죽 잘 받아먹고······ 하여튼 보이는 대로 말하는 것 같았단 말이지. 도련님이 눈치가 워낙 빠르셔서 거짓말하는 놈들은 정말 귀신같이 잡아내시거든. 영감도 잘 알겠지만.”


“예, 예. 알다마다요.”


거학은 갈 생각을 잃은 듯 아예 팔짱까지 끼고서 말했다.


“그놈이 옥에 갇히고 나서도 술술 잘 불기에 나는 자포자기한 줄만 알았지. 백곡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놈이 말하는 대로 믿었는데······ 그놈이 근래에 수작을 좀 부렸거든.”


그러더니만 팔짱을 풀더니 기대선 몸을 바로 세우고 우크미를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영감 말이 맞소. 그놈이 이제는 약을 안 먹어도 보이는가 보더라고. 우리가 기껏 영안을 뜨게 해줬더니, 그걸로 간수 놈들 뒷구멍을 닦고 있더라는 거요. 백곡이 눈치챘으니 망정이지, 쳇.”


“그래서야 더는 그놈을 믿지 못하시겠습니다.”


“내 말이! 심지어는 그놈이 이제는 약을 먹어도 안 보인다고 하잖아!”


아무래도 우크미가 곪기 직전의 어떤 문제를 터뜨린 것이 분명했다. 거학은 치미는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약은 아무 문제 없습니다.”


우크미가 다급히 대답하자 거학이 머리를 끄덕였다.


“아무리 봐도 그 새끼가 거짓말하는 거라니까. 백곡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서 그놈 사지를 찢어버리겠다고 지랄을 해대고······”


“이놈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어. 백곡은 그저 매가 약이라고 하는데, 그러다 진짜 죽어버리면 곤란하단 말이야. 그렇다고 약을 줄이자니 백곡이 길길이 날뛸 테고······”


거학이 우크미의 어깨를 잡았다.


“이보쇼, 영감. 뭐 그런 약은 없소? 참말만 하게 하는 약 같은 거.”


“있지요.”


우크미가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그는 책장에서 서책 하나를 꺼내 펼쳐서는 거학에게 내밀었다. 책장에는 각종 약초가 그려져 있었고, 그림마다 깨알 같은 글씨들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거학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우크미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식물 하나를 가리키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감화수라는 나무인데, 껍질을 달여 먹으면 아이를 잉태하는 데 도움이 되고, 뿌리를 먹으면 열병이 깨끗이 낫지요. 그리고 열매를 말려 먹으면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이게 술로 담그면 일품이라 예로부터 매들이 즐겨 먹었지요.”


“그래서.”


“감화수 열매가 아주 독해서 사람이 먹으면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그래서 어떤 나라에서는 죄인에게 자백을 받아낼 때 쓰기도 하지요.”


“그런 거면 그냥 술을 잔뜩 먹여도 되는 것 아니오?”


거학이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우크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어디 술에 취했다고 사람이 다 본심을 말하던가요? 감화수 열매는 말 그대로 사람의 혼을 빼놓습니다. 사람의 혼이 반쯤 빠지면 잠꼬대하는 것처럼 말을 걸면 대답도 하고, 몽중방황 하듯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지만, 제정신으로 제 몸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묻는 대로 술술 내뱉는 거지요.”


“감화수 열매라고······” 중얼거리던 거학이 우크미를 꼬나봤다.


“영감 말을 믿어도 될까?”


“쇤네는 그거 아는 대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간 베풀어 주신 도련님과 주인 나리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간특한 짓을 벌였음에도 제게 긍휼을 베푸셨으니, 이제라도 목숨을 다해 섬겨야지요.“


거학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크미가 머리를 한껏 조아렸다.


“약을 만들어 드릴까요?”


“됐소.”


거학은 거절했다. 우크미의 속내를 알아차렸기 때문일까. 우크미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여기서 더 떠보는 짓을 했다가는 거학의 인내심이 끊어지리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예.”


거학은 왔을 때처럼 별말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나가 버렸다. 우크미는 거학이 미처 닫지 않은 문 너머로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문을 닫았다.


그가 약초 분류 작업을 마저 하기 위해 돌아서는 순간,


“감화수 열매는 어디서 구하지?”


거학이 다시 문을 벌컥 열었다. 그는 문지방 너머에 서서 우크미를 재촉했다.


“구하기 힘든 거요?”


“약방에 가보십쇼. 풍주는 큰 고을이니 감화수 열매를 파는 곳이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거학이 손을 내밀었다.


“그 책!”


우크미가 좀 전에 보여줬던 책장을 다시 펼쳐 보여주자, 거학은 망설임 없이 책장을 부욱 찢었다.


‘아이고.’


우크미가 속으로 한탄하든 말든 거학은 찢은 종이를 한 손에 덜렁 들고 약실을 떠나버렸다. 우크미는 찢어진 책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제 할 일로 돌아갔다.




거학이 약을 가지러 가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백곡은 또 끓어오르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소우를 찾았다.


소우가 자기들에게 약을 먹이고 몰래 지하로 숨어들었을 때도 백곡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지는 않았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백곡은 소우의 반항을 일탈과 같은 것이라 여겼다. 혹은 짐승이 본능대로 우리를 뛰쳐나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끼니마다 배부르게 먹고, 주인이 쓰다듬는 손길 아래에서 팔자 좋게 개도 대문이 열리면 홀린 듯이 나가 온 동네를 쏘다니다 길을 잃는 법이다. 그 일로 거학은 한동안 매사 신경질적으로 굴었고, 명은 백곡과 거학 앞에서만큼은 불쾌한 내심을 감추지 않았지만, 백곡은 늘 그렇듯 잔잔했다.


개가 도망치면 잡아 올 일이다.


그런데, 소우가 간수장에게 제 꿈을 파는 광경을 보는 순간, 잔잔한 백곡의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후로 벌겋게 달아오른 숯덩이 하나가 백곡의 마음 한편을 차지했다.


‘감히 도련님의 것을······’


비천한 간수들에게는 헐값에 팔아넘기던 꿈을, 소우는 이제 명에게만큼은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정말······ 안 보여요, 꿈이······”


소우가 입을 열 때마다 백곡은 그의 뺨을 후려쳤다. 이미 그 전에 몇 번이나 물벼락을 맞은 데다 쉴 새 없이 뺨까지 맞으니, 소우의 얼굴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저 얼룩덜룩한 반죽 덩어리로 보일 지경이었다.


“간수장에게는 잘만 꿔주던 꿈이 왜 이제 와서 안 보일까?”


백곡은 눈이 뒤로 넘어가려는 소우에게 또 물벼락을 때렸다.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린 소우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내려치고 또 내려치며 말했다.


“네 목숨 줄은 간수장이 아니라, 도련님께서 쥐고 계시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느냐?”


“아라······ 아아······”


소우는 안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 안까지 부어버린 데다 백곡이 사정없이 머리를 후려갈기는 통에 제대로 된 말은 커녕 말 비슷한 것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만 좀 해라.”


거학이 고문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진짜 죽는다고 몇 번을 말해.”


백곡은 고개를 휙 돌려 거학을 꼬나보더니 못마땅한 발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거학이 그녀에게 손짓해 고문실 구석으로 끌고 갔다.


“우크미 영감한테 뭘 좀 알아봤는데······”


거학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소우는 마치 물속에 잠긴 듯했다. 혹은 아주 커다란 입을 가진 짐승이나 물고기 입 속에 들어와 있는 듯도 했다.


들리는 것은 바람이 뱅뱅 돌며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 누군가 커다란 뿔 나팔을 부는 소리, 그리고 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얼른 와! 얼른!”


오물더미에서 뒹구는 사람의 살덩이에서나 날 것 같은 악취. 역겨운 지린내.


그 여자가 두 손을 들고 소우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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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괜찮아 24.03.22 5 0 12쪽
56 백곡의 심기(2) 24.03.20 5 0 13쪽
55 백곡의 심기(1) 24.03.18 5 0 12쪽
54 이서의 꿈(2) 24.03.15 5 0 12쪽
53 이서의 꿈(1) 24.03.13 4 0 11쪽
» 재회 24.03.11 5 0 12쪽
51 수명의 판 24.03.08 4 0 13쪽
50 죽은 듯이 24.03.06 4 0 12쪽
49 죽지도 못하고 24.03.04 5 0 12쪽
48 24.03.01 5 0 12쪽
47 유일한 무기 24.02.28 5 0 12쪽
46 다시 꿈 24.02.26 5 0 11쪽
45 꿈을 꾸는 죄인 24.02.23 5 0 13쪽
44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24.02.21 5 0 13쪽
43 남 걱정할 처지냐? 24.02.19 4 0 13쪽
42 분수대로, 얌전 24.02.16 4 0 12쪽
41 결의 24.02.14 6 0 13쪽
40 정신 나간 여자, 귀신 보는 남자 24.02.12 5 0 12쪽
39 각자의 일념 24.02.09 4 0 12쪽
38 소래와 융의 사정 24.02.07 5 0 12쪽
37 효부인의 침소 24.02.05 5 0 12쪽
36 추명의 사정 24.02.02 4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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