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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의 나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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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DA
작품등록일 :
2023.11.22 15:06
최근연재일 :
2024.04.03 17:00
연재수 :
6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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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44,696

작성
24.02.1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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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결의

DUMMY

“오른쪽!”


철현이 소리치자, 청대가 재빠르게 몸을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그녀가 몸이 흔들릴 때마다 야무지게 위로 정수리까지 올려 묶은 검은 머리가 꼬리처럼 따라 흔들렸다.


앞서 달리던 철현은 뒤를 힐끗 쳐다봤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청대의 동공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항아리에 갇힌 바람 같은 소리를 내던 혼은 이제 희끄무레하나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혼은 철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뒷걸음질 쳤다. 그런 와중에서 혼은 철현을 향해 끊임없이 손짓했다.


처음에는 갓난아기가 아장아장 걷는 수준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그 빠르기가 잰걸음처럼 빨라지더니 이제는 온 힘으로 달음박질하지 않으면 금세 시야에서 사라질 정도였다.


철현은 헐떡이면서도 용케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고, 두 다리는 만근 납을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뒤에서 그 꼴을 보던 청대는 폴짝 뛰어 철현의 옆에서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정 힘들면 내가 앞장서고.”


하며 청대가 웃었다. 철현은 마음 같아서는 얄밉게 눈짓하는 청대의 미간 사이에 손가락을 튕기고 싶었지만, 멀어져가는 혼을 따라잡는 것만으로도 벅찬 마당에 그녀의 장난을 받아줄 여유 따 따위는 없었다.


“왼쪽··· 허억, 허억···!”


갑자기 청대가 우뚝 멈춰 섰다. 혼을 따라가던 철현은 한참 지나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뭐해! 이러다 놓쳐!”


철현이 멀찍이 서서 부르자 청대가 별안간 말로 둔갑했다. 철현은 그사이에도 멀어지는 혼을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청대의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그녀의 등 위에 올라탔다. 안장도, 등자도 없는 탓에 두어 번 올라타는 데 실패했지만, 청대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러나 철현이 올라타자마자 청대는 기다렸다는 듯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혼은 금세 철현이 팔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철현은 몸을 바짝 낮추고, 청대의 갈기를 움켜쥐고서 혼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혼은 철현의 또래거나 그보다 두어 살 많아 보이는 사내였다. 그러나 철현이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그는 혼을 여자로 착각했을 것이다.


혼은 어느 지체 높은 집안의 딸들이나 입을 법한 옷과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었다.


철현은 그런 옷을 입은 남자를, 이곳 수씨 가문 저택의 지하에서 몇 번이나 봤다. 그들은 하나 같이 말하지 않았고, 공허한 그 얼굴에는 슬픔도, 원한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 땅에 남은 미련을 미처 거두지 못해 그야말로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어 수씨 가문의 발아래에서 울부짖었다.


생전에도 그러했듯.


“처음 보는 얼굴이야.”


철현이 말했다.


지금 철현의 앞에 있는 저 혼은 철현이 이곳에서 봐왔던 그 수많은 혼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낯선 얼굴이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거 아냐?”


하고 청대가 무심하게 말했다. 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자기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대든 혼은 그저 손짓하며 어딘가로 두 사람을 이끌 뿐이었다.


“청대야, 더 빨리!”


혼의 움직임이 다시금 빨라지기 시작했다. 청대의 속도를 맞추기 위함인지, 아니면 청대와 달리기 시합이라도 하자는 것인지, 이제 혼은 준마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청대가 속도를 내 보았지만, 철현이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던 혼은 이제 그보다 두 척, 아니 세 척이나 멀어졌다.


“청대야!”


“에이, 씨!”


청대는 있는 힘껏 내달렸지만, 그럴수록 혼은 점점 멀어졌다. 철현은 목을 길게 빼고 눈에 힘을 주어 혼을 쳐다봤다.


이제 보니 혼은 아주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숨이 찰 리도 없고······’


그러나 철현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혼이 숨을 몰아쉬는 듯이 보였다.


‘죽은 사람이 숨이 찰 리도 없고······’


고개를 갸웃한 철현은 곧이어 깨달았다.


그것은 달리느라 지친 표정이 아니라, 다급하고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철현이 청대의 귀에 입을 바짝 가져다 대고 소리쳤다.


“도망쳐!”


청대는 두말 않고 죽어라 뛰기 시작했다. 철현은 납작 엎드린 채 고개만 뒤로 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시시각각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철현의 폐부에 죄어들었다.


“소리 안 들려?”


청대가 말했다.


“무슨 소리?”


청대가 대답하기도 전에 철현의 귀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발이 빠른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내는 소리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등장한 사람은 거학 한 명뿐이었다. 거학은 검을 뽑아 든 채로 눈을 부릅뜨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 빠르기는 청대와 다를 바 없었다.


‘아니다. 나보다 빨라. 따라잡히겠어!’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거학의 발소리를 들은 청대는 고민할 것도 없이 그 자리에 멈췄다. 그녀는 놀란 철현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앞발을 들며 철현을 재촉했다. “내려!” 청대가 발버둥을 치는 탓에 철현은 별수 없이 그녀의 등에서 내려야 했다.


철현이 두 발을 땅에 딛자마자 청대는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말했다.


“너 먼저 가.”


“어쩌려고?”


철현은 그 와중에도 청대에게 그녀의 옷을 건네며 대꾸했다. 그러나 청대는 옷을 받아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보니까 저놈은 보통 놈이 아니야. 도망치다가 잡히느니 같이 들이받는 것이 나아.”


그사이 거학이 다섯 척을 사이에 두고 멈춰 섰다. 거학은 양손으로 검을 주고받듯 던지며 말했다.


“철현 아니냐?”


철현은 대답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청대가 그런 그를 재촉했다.


“얼른 가라고. 이러다 놓쳐버린다, 진짜?”


그러고는 철현의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거학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철현? 죽은 놈을 왜 여기서 찾아? 옳아! 너도 그 철현이처럼 귀신을 보는구나? 그럼 납작 엎드려서 빌어야지!”


그 말에 거학이 껄껄 웃었다.


“빌어? 뭐라고?”


“네놈들 그 더러운 짓거리에 아무 죄도 없는 사람 손에 피를 묻혔으니 사죄해야지.”


“네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거학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청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청대가 곧장 호랑이로 둔갑하자, 철현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모습을 본 철현은 뒤돌아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멀어져가는 철현을 힐끗 본 거학은 다시 청대를 보고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도련님께서 보시면 아주 좋아하시겠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백곡이 그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상하다. 저자가 왜 거학을 두려워하지?’


수씨 가문 저택의 지하에는 제 나이에 죽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는 혼들이 더러 있다. 철현은 약을 먹을 때는 그들을 볼 수 없었으나, 제때 약을 먹지 못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들이 우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럴 때면 철현은 되도록 그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약실에 머물며 약효가 돌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명의 심부름으로 온 거학이나 백곡이 약실을 찾을 때면, 실상 우크미의 몸종에 불과한 철현은 밖으로 쫓겨나야 했다. 그러면 그는 별수 없이 우크미와 명의 심부름꾼들이 비밀스러운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꼼짝없이 귀신들의 곡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다행스러운 일이 하나 있다면, 그들이 산 사람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고목처럼 빳빳하게 굳어 벽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철현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일은 있어도, 그에게 대화를 시도하거나 겁을 주는 일은 없었다.


그건 거학이나 백곡, 그리고 명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저 자는 왜 거학에게서 도망치려 했을까? 그저 나와 청대를 걱정한 걸까?’


청대가 거학을 상대하는 줄을 알았는지, 겁에 질려 있던 혼의 표정은 차츰 평온을 되찾았다. 서두르던 발걸음도 느려졌다. 말을 달리지 않고 뛰는 것만으로도 따라잡을 수 있을 속도였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렇게 뛸 수 있을지 철현은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뜀박질이라도 할 걸.’


그러나 온종일 약실에서 약초를 분류하고, 탕약을 달여야 하는 처지에 뜀박질이라니, 가당치 않은 말이다.


그의 일상 대부분은 약실에서 이루어졌고, 그게 아니면 침소에서 눈을 붙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살다 보면, 스승님처럼 수씨 가문에 신임을 얻고, 나중에는 아버지를 모실 수 있을 줄 알았지.’


철현은 문득 뒤를 돌아봤다. 청대의 모습은 어느새 어둠 속에 묻혀버렸다.


‘혼자서 괜찮을까? 거학은 전쟁터에서 명과 함께 싸우기도 했다던데······’


그러나 이제라도 돌이켜 청대에게 간다고 한들, 그에게는 청대를 도울 힘도, 도리도 없었다.


‘괜히 객기 부리지 말고 도망치기를 바라야지.’


철현을 쳐다보며 뒤로 내달리던 혼은 어느새 몸을 돌려 이제는 앞을 보며 달리고 있었다.


‘저자는 대체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믿을 것은 오직 저 이름 모를 혼의 호의뿐이었으나, 사실 그가 호의를 베푸는 것인지 장난을 치는 것인지 철현은 알 도리가 없었다.


괴이한 소리로 철현을 부른 혼은 무작정 그에게 손짓하며 어디론가 바쁘게 움직였고, 그를 놓칠 수 없었던 철현은 청대를 이끌고 역시 무작정 달려야만 했다.


‘이대로 약실로 가면 좋으련만······’


그러다 문득 철현은 자기가 어떤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왜 아무도 없지?’


좌우를 둘러봐도, 위아래로 고개를 젖혔다 떨어뜨려 봐도 다른 혼은 보이지 않았다.


‘약실 앞에서는 혼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철현은 우뚝 멈춰 섰다. 그러자 앞장서서 달리던 혼이 철현을 힐끗 쳐다봤다. 철현은 멀어져가는 혼을 향해 말했다.


“다른 이들은 어디 있소?”


혼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달리던 것을 멈추고 철현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 계속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텅 빈 두 눈에서 별안간 눈물 같은 것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말해 보시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요? 난 스승님께 돌아가야 하오.”


그러자 혼은 철현을 향해 몸을 돌이켰다. 곧이어 그의 온몸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모양새가 마치 날 선 이빨들이 사방에서 그를 갉아먹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그 이빨들은 혼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그의 허리와 허리에서 튀어나오는 내장들을, 종아리와 정강이에 붙은 살들을, 허벅지와 갈비뼈에 붙은 살들을,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붙어있는 살들과 힘줄을, 어깨와 목과 귀와 입술을, 코와 질끈 감은 눈꺼풀을, 그 안에 숨은 눈알을, 그리고 모든 가죽을 남김없이 갉아 먹었다.


혼은 꼼짝 못 하고 서서 그저 비명만 질렀다. 그러나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철현은 그 광경이 혼이 아직 생인이던 시절 겪은 죽음임을 단번에 깨달았다.


철현이 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스승님께 들어서 나도 이제야 알았소. 수씨 가문이 당신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당신들 목숨을 재료 삼아서······ 자기들 목숨을 이어 붙이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와 스승님이 그 끔찍하고 더러운 짓거리에 손을 보태고 있었다는 것도······”


철현은 어느새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못 하고 말을 이었다.


“이제 와서 용서를 어찌 바라겠소? 다만, 스승님은 그래도 나는 살리려 하셨소. 내게는 함께 살자 약속하셨지만, 나만 이 집에서 내보내셨소. 아마 이제라도 자기 죗값을 치르시려는 모양이오.“


말 없는 혼은 그저 팔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 철현을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나를 도와 달라는 말은 차마 못 하겠소. 스승님을 구하러 여기까지 왔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도 아닌 당신들에게 어찌 도움을 청하겠소? 다만, 청대는 무슨 죄요? 또 저 위에서 그저 주인 명령에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종들은 또 무슨 죄요? 그래서 우리는 스승님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살리려 하오. 그러니 만약 당신이 내 앞길을 막고 있는 것이라면, 부디 잠시나마 그 노여움 풀고 길을 열어 주시오.”


그러나 혼은 길을 비키지도, 그렇다고 이제까지 그랬든 길을 인도하지도 않았다. 철현 역시 가만히 서서 혼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혼의 표정이 좀 전과 다름을 눈치챘다.


눈물을 뚝뚝 흘리지도 않고,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지도 않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악다문 그 표정에서 떠오른 것은 치밀어 오르는 두려움을 가까스로 참아내는 결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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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얼룩이 24.03.25 4 0 12쪽
57 괜찮아 24.03.22 4 0 12쪽
56 백곡의 심기(2) 24.03.20 5 0 13쪽
55 백곡의 심기(1) 24.03.18 4 0 12쪽
54 이서의 꿈(2) 24.03.15 4 0 12쪽
53 이서의 꿈(1) 24.03.13 4 0 11쪽
52 재회 24.03.11 4 0 12쪽
51 수명의 판 24.03.08 4 0 13쪽
50 죽은 듯이 24.03.06 4 0 12쪽
49 죽지도 못하고 24.03.04 4 0 12쪽
48 24.03.01 4 0 12쪽
47 유일한 무기 24.02.28 4 0 12쪽
46 다시 꿈 24.02.26 4 0 11쪽
45 꿈을 꾸는 죄인 24.02.23 4 0 13쪽
44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24.02.21 5 0 13쪽
43 남 걱정할 처지냐? 24.02.19 4 0 13쪽
42 분수대로, 얌전 24.02.16 4 0 12쪽
» 결의 24.02.14 6 0 13쪽
40 정신 나간 여자, 귀신 보는 남자 24.02.12 4 0 12쪽
39 각자의 일념 24.02.09 4 0 12쪽
38 소래와 융의 사정 24.02.07 4 0 12쪽
37 효부인의 침소 24.02.05 5 0 12쪽
36 추명의 사정 24.02.02 4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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