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YADA 님의 서재입니다.

동쪽의 나라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YADA
작품등록일 :
2023.11.22 15:06
최근연재일 :
2024.04.03 17:00
연재수 :
62 회
조회수 :
334
추천수 :
3
글자수 :
344,696

작성
24.03.15 17:00
조회
4
추천
0
글자
12쪽

이서의 꿈(2)

DUMMY

땅을 밟는 한 이서가 모르는 것은 없었지만, 풍주의 풍경은 그런 이서에게도 생경했다. 그저 아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인 건지, 늘 그랬듯 알았던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인 건지 이서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이서를 풍주로 초대한 융선은 그녀를 황제처럼 극진히 모셨다. 종이란 종은 죄다 불러 모아 그녀의 시중을 들게 했다. 그들은 이서가 다니는 곳마다 그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그녀의 수족이 되었다.


이서는 그런 생활이 꽤 만족스러웠다.


“염국의 황제는 일찍이 사람 위에 군림하는 법을 깨우쳤지. 다른 매들도 그를 본받았다면 좋았을 것을······”


풍주에 머무는 동안 이서는 자주 융선을 찾았다. 융선의 가족들, 특히 융선의 아내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것을 이서는 잘 알았지만 괘념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서에게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천년을 사는 나무나, 발에 밟히고 말 들풀이나, 그 들풀을 먹고 사는 짐승과 또한 그것들을 먹으며 연명하는 짐승이나 하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융선은 특별했어.”


이서가 말했다.


이서는 융선과 대화하고 있었고, 또한 소우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서의 몸속에 있던 소우는 어느새 그녀와 융선을 바라보는 위치에 서 있었다. 이서는 저를 보고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융선을 내버려둔 채로 소우를 쳐다보고 말했다.


“그날 내가 왜 융선을 먹지 않았지? 몰라, 기억나지 않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융선이 그랬어. 자기 살을 줄 테니 내 살을 제 어미에게 달라고. 어디선가 내 소문을 듣고 와서는 죽어가는 어미를 살리게 자기 목숨과 내 살덩이 조금을 맞바꾸자고 했어.”


“그렇게 바꿨나?”


이서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웬 여종이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린 채로 상전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융선의 어머니는 초로를 향해 달려가는 제 아들보다 스무 살은 어려 보였다. 오히려 융선의 딸이라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땅을 밟는 한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어. 하지만 아는 만큼 비우지 않으면, 나는 깨져버리고 말아. 그래서 나는 늘 비웠지. 필요 없는 것, 가치 없는 것, 해로운 것. 그러나 사람에게는 그런 것을 분별할 지혜가 없어. 내 살을 먹은 덕에 융선의 어미는 불로불사를 얻었지만, 그와 함께 세상 모든 지식도 얻었지. 그러나 매보다도 작은 그릇을 가진 사람이 어찌 버티겠어? 그래서 융선의 어미는 전부 잊어버렸어. 어제 옆집 닭이 알을 몇 개나 낳았는지는 보지 않고도 알지만, 제 나이가 몇 살인지는 모르지. 제 아들도, 제 이름도······”


이서가 소우를 향해 왼손을 내보였다. 새끼손가락 첫 번째 마디와 두 번째 마디 사이에 희미한 흉터가 보였다.


“아마 일부러 남겨뒀을 거야. 난 어떤 상처는 금세 낫거든. 하지만 흉터가 남아 있는 걸 보면······ 아마 일부러 남겨 뒀겠지.”


이서는 융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융선은 염제가 얼마나 비겁하고 속 좁은 황제였는가에 대해 일장 연설을 쏟아내고 있었다.


“염제는 결국 식인하는 법을 고치지 못하고 나라를 버린 비겁자입니다. 사람들은 염제 덕분에 우리가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산다고 하지만, 모를 일이죠. 그렇게 백성들을 살찌워 자기 배를 채우려 한 건지.”


이서는 그런 융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서글픈 목소리로 소우에게 말했다.


“융선이 내 비위를 맞추느라 낭비한 시간이 너무 길어. 사람이 사는 세월을 생각하면 너무 길지. 하지만 그걸 알게 된 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어. 그전까지 나는 융선이 그저 날 만나고 싶었을 뿐이라고, 날 좋아했을 뿐이라고 생각했지.”


융선이 눈을 감으며 이서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어느새 닳고 닳아 주름지고, 바싹 말라버렸다. 검버섯이 피어난 융선의 손은 이서의 손에 붙잡힌 채로 떨리고 있었다. 소우의 눈에는 그 모습이 꽤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융선은 침상 위에 누워 흐린 눈으로 이서를 찾았다. 이서가 그의 손을 붙잡고 있음에도, 그는 애먼 공중을 두리번거렸다.


“여기 있어.”


이서가 융선의 손을 제 얼굴에 가져갔다. 별안간 융선이 눈물을 흘렸다.


“죽기 싫어요, 이서 님..”


융선의 어미는 여전히 젊은 낯으로 융선의 머리맡에 꿇어앉아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신 닦았다. 그러나 그 손길에는 어미보다 먼저 늙어 죽어가는 아들에 대한 연민도, 창자가 끊어질 만큼의 비통함도 없었다.


이서가 소우에게 말했다.


“내가 어쩌면 좋을까?”


이곳은 이서의 기억 속이고, 소우가 무슨 대답을 하든 이서가 할 일은 정해져 있다. 그럼에도 소우는 대답했다.


“살리지 말았어야 했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융선의 어미가 이서에게 작은 칼을 건넸다. 이서는 망설임 없이 왼쪽 새끼손가락을 잘랐다.


붉은 피가 솟구치더니, 이내 온 방에 붉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순식간에 홍수가 되어 방을 가득 채웠다.


소우는 핏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밑으로 쑥 가라앉았다. 이서가 저 바닥에서 소우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소우가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이서의 아귀힘은 소우의 발목을 부러뜨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사이 피는 방을 완전히 메워버렸다. 그리고 이제 소우의 폐를 메우기 시작했다.


마지막 숨을 토해낸 소우가 밑으로 가라앉는 순간,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차피 꿈일 뿐이야.’




눈을 떠 보니, 소우는 거대한 동굴 안에 우뚝 서 있었다. 피로 젖어 있어야 할 몸에는 아무 흔적도 없었다.


“네 말이 맞아. 살리지 말았어야 했어.”


이서가 효부인의 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서 고개만 모로 돌려 소우를 쳐다봤다. 그녀는 단훈산에서와 달리 화려한 비단옷과 금붙이로 온몸을 치장하고 있었다.


“융선은 똑똑했어. 그래서 죽기 직전까지 살려달라는 말을 안 했지. 제 어미처럼 될까 봐. 하지만, 막상 죽음을 만나니 피하고 싶은 생각뿐이었겠지. 그래서 끝까지 날 제 옆에 붙들어 둔 거지.”


쾅쾅쾅—!


갑작스러운 소리에 소우가 뒤를 돌아봤다. 수씨 가문 지하에서 본 문이 그곳에 있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늙은 융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오른손에는 작은 칼이, 왼손에는 자루가 들려 있었다.


융선은 거의 주둥이까지 가득 찬 자루를 질질 끌며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자루가 바닥에 끌릴 때마다 검붉은 자국이 나타났다. 냄새를 맡지 않아도, 소우는 그것이 죽은 사람의 피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서가 자루를 보고 침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서는 침상에서 펄쩍 뛰어내려 융선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자 융선이 그녀에게 칼을 들이밀었다. 과일이나 겨우 깎을 그 작은 칼로 이서를 위협할 수 있을 리 없었지만, 이서는 두말하지 않고 그 앞에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칼을 받았다.


이서는 그 자리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치마를 걷어 올렸다. 종아리를 향하는 칼끝이 떨렸다. 그러나 단번에 살덩어리를 찌르는 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살을 도려내며 소우에게 말했다.


“이, 이이승은 매가 살기에는 너, 너무 소란해. 여, 여기는 음과 양이 하, 항상 같이 있어. 나, 나는 음기만 타고 나서, 양기가 활개 치는 나, 낮에는 땅속에 수, 숨어 꼼짝하지 않았지.”


이서는 도려낸 살을 융선에게 바쳤다. 융선은 품속에서 보자기를 꺼내 피가 뚝뚝 흐르는 살덩어리를 여러 번 싸맸다. 그것을 다시 가죽 주머니에 담고 난 뒤에야 융선은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이서가 개처럼 자루를 향해 덤벼들었다.


이서는 자루에서 두 동강이 난 사람 팔을 꺼내어 뜯어먹기 시작했다. 융선은 그런 그녀를 향해


“천천히 드십시오. 체하십니다.”


라고 말하고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이서의 침소를 나가버렸다. 융선이 나가거나 말거나 이서는 식사에 집중했다. 그사이 이서의 치마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서의 살을 계속 먹어왔구나. 이서와 점점 가까워지도록. 그러면 기억을 잃는 일도 덜 하겠지.’


소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서가 그런 그를 힐끗 보고는 한결 안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숨어 지내는 것 말고는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어. 무엇보다 그건 그리 좋은 방법도 아니었어. 앞으로 내가 살아야 할 날은 까마득할 정도로 많이 남았고, 이승의 음기는 턱없이 부족했거든. 밤이라고 해서 양기가 온전히 물러나는 것은 아니니까. 해가 뜨기 시작하면, 음기에게 밀려났던 양기가 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르지. 그럴 때마다 나의 기운과 세상의 기운이 부딪히고,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몸이 점점 쇠하기 시작했어.”


팔을 다 먹은 이서는 이번에는 발바닥을 먹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내 안에 양기를 함께 두기로 했어. 이승에 걸맞은 존재가 되기로 한 거야. 그럼, 이 세상도 나를 받아주리라 생각했지. 그래서,”


“그래서 남자를 먹었다고?”


소우가 이서의 말을 잘랐다. 그는 자루에서 삐쭉 나온 머리카락을 쳐다봤다.


“효부인이 데려온 남자들도 전부? 소래의 오빠도?”


이서는 먹던 발을 내려놓고 소우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꿈꾸는 놈들은 똑똑하고 그만큼 건방지지. 어찌나 건방진지 함부로 생각에 침범하지를 않나, 꾸짖으려 하지를 않나.”


이서가 벌떡 일어났다. 그와 함께 붉은 별들이 점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짝을 맞춰 떠오른 그것들은 찍찍거리는 소리와 함께 동굴 한 편을 가득 메웠다.


이서가 한 발 앞으로 나서자, 쥐 떼가 소우를 덮쳤다. 소우가 몸을 움츠리자 ‘그’가 세 번째로 말했다.


“이건 꿈이야!”




“자꾸 피하기만 하면 어떡해?”


하며, 남자가 소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무릎을 꿇고 움츠려 있던 소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소우의 옆에는 칼 한 자루가 나뒹굴고 있었다.


“형.”


소우가 남자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 손은 마치 천 년 동안 축적되고 풍화하기를 반복한 암석처럼 단단하고 따뜻했다. 남자가 소우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다시 한번 해보자.”


남자의 새카맣고 깊은 눈동자가 유리구슬처럼 반짝였다.




누각에 앉아있던 명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감로수 열매?”


마주 앉은 백곡이 명의 잔에 새로운 차를 부었다. 거학이 뒷짐을 지고 그 옆에 서서 말했다.


“네, 우크미 영감 말이 감로수 열매를 쓰면 자백을 받아낼 수 있답니다.”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죄수들에게 그런 방법을 쓰기도 한다더군.”


“우리도 그 방법을 쓰면 어떨까요?”


“구하기 쉬운 열매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걱정하지 마십쇼. 영감 말이 풍주는 큰 고을이라 감로수 열매를 파는 약방이 하나 정도는 있을 거랍니다. 없으면, 자기가 풍주 밖에 있는 다른 약방이라도 소개해 줄 수 있답니다.”


명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백곡에게 말했다.


“다녀와라.”


“예.”


백곡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학이 그 뒤를 따라가려는데 명이 그를 불렀다.


“혼자 가게 둬.”


“······알겠습니다.”


거학은 이유를 묻지 않고, 대신 백곡이 앉아있던 자리에 앉았다. 명은 그를 위해 백곡이 마시던 잔에 차를 부어주었다. 쌉쌀한 차 내음 같은 공기가 안개처럼 이서보에 자욱하게 깔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동쪽의 나라하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작품명 변경 24.02.02 3 0 -
공지 연재 일정 24.01.12 7 0 -
공지 수정 사항 안내 24.01.07 5 0 -
62 변하지 마 24.04.03 2 0 11쪽
61 내 꿈 24.04.01 4 0 12쪽
60 누명 24.03.29 5 0 12쪽
59 딱 하나만 24.03.27 4 0 12쪽
58 얼룩이 24.03.25 4 0 12쪽
57 괜찮아 24.03.22 4 0 12쪽
56 백곡의 심기(2) 24.03.20 5 0 13쪽
55 백곡의 심기(1) 24.03.18 4 0 12쪽
» 이서의 꿈(2) 24.03.15 5 0 12쪽
53 이서의 꿈(1) 24.03.13 4 0 11쪽
52 재회 24.03.11 4 0 12쪽
51 수명의 판 24.03.08 4 0 13쪽
50 죽은 듯이 24.03.06 4 0 12쪽
49 죽지도 못하고 24.03.04 4 0 12쪽
48 24.03.01 4 0 12쪽
47 유일한 무기 24.02.28 5 0 12쪽
46 다시 꿈 24.02.26 4 0 11쪽
45 꿈을 꾸는 죄인 24.02.23 4 0 13쪽
44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24.02.21 5 0 13쪽
43 남 걱정할 처지냐? 24.02.19 4 0 13쪽
42 분수대로, 얌전 24.02.16 4 0 12쪽
41 결의 24.02.14 6 0 13쪽
40 정신 나간 여자, 귀신 보는 남자 24.02.12 4 0 12쪽
39 각자의 일념 24.02.09 4 0 12쪽
38 소래와 융의 사정 24.02.07 4 0 12쪽
37 효부인의 침소 24.02.05 5 0 12쪽
36 추명의 사정 24.02.02 4 0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