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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DA 님의 서재입니다.

동쪽의 나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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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DA
작품등록일 :
2023.11.22 15:06
최근연재일 :
2024.04.03 17:00
연재수 :
62 회
조회수 :
346
추천수 :
3
글자수 :
344,696

작성
24.03.2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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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괜찮아

DUMMY

소우가 눈을 떴다.


유리구슬처럼 맑은 검은 눈동자는 사라지고, 대신 낯익은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남자의 목소리만은 여전히 소우의 귓가에 쟁쟁했다.


— 다시 한번 해보자.


맥락도 없이 뚝 떨어진 그 말이 어쩐지 자기를 응원하는 것 같다고 소우는 생각했다.


— 다시 한번 해보자.


그 말에 홀려 소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의 몸이 공기처럼 붕 떠올랐다. 그제야 소우는 자신을 둘러싼 이 낯익은 모습들이 지하 약실의 것들임을 깨달았다.


그는 공중에 뜬 채로 한 바퀴 빙 돌고는 저 아래 누워 있는 제 몸을 내려다봤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소우의 얼굴은 또 납빛으로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는 살아서 올 곳은 아닌 모양이다.’


또 약을 먹은 부작용 탓이겠거니, 소우는 애써 담담하게 생각하려 했지만, 두려운 마음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탕약실 밖으로 나가 보니, 거학 혼자 뒷짐을 지고서 약실 여기저기를 구경할 뿐, 우크미는 보이지 않았다. 거학은 습관처럼 탕약실 쪽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어 무슨 소리라도 들리나 확인하고는 다시 약실 구경에 빠졌다.


소우도 그를 따라 탕약실을 한번 쳐다본 뒤 그대로 문을 통과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처음 죽음을 경험했던 그때만큼이나 소우는 두려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넋으로라도 바림을 만나자 했던 그때처럼 자포자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곧장 몸을 돌려 이서를 향해 날아갔다.


‘아직 듣지 못한 얘기가 많아. 명이 내 꿈을 왜 훔치려 하는 건지도 알아야 하고, 뭣보다 이서가 앞으로 내게 도움이 될지도 확인해야지.’


명의 계략이 무엇인지 알아낸다 한들, 소우에게는 그에게서 벗어날 힘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늘의 별이었다는 이서는 땅에 떨어져 시취를 풍기는 땅쥐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자기와 비슷한 껍데기를 가진 인간에게 마음을 준 탓이었고, 그 이전에 많은 것을 알았음에도 많은 것을 또한 잊어버린 탓이었다.


사람에게 제 고기를 바치고, 그 대가로 사람이라는 고기를 받아먹으며 사는 가축이 과연 도움이 될까? 소우는 의심쩍었지만, 달리 이서 외에 그에게 유의미한 정보를 제공할 존재도 없었다.


‘그리고 융도······’


융이 아직 살아있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소우는 이제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 명의 손아귀에서 영영 벗어나지도 못하더라도 융은 살려야 했다. 그래야 지금까지도 그의 등에 업혀 있는 죽은 소래를 떨쳐버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이서를 향해 날아가던 소우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곧 포기했다. 어차피 빛 하나 없는 이 어두운 굴속에서 눈을 의지해봤자 아무 의미 없었다. 그렇다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호기롭게 나선 길이었지만, 이제는 이대로 가다가는 이서도 만나지 못하고 영영 지하를 맴도는 반쪽짜리 귀신 신세가 되고 말겠다는 불안이 소우를 엄습하고 있었다.


“이서!”


소우가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칠 것도 없이 그의 입을 채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효부인의 침소에서도 그랬었지.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소우는 문득, 효부인의 침상에 있는 그 입구가 죽음과 삶 어느 경계에 걸친 세계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신통한 것을 만들 힘이 있으면서, 왜 사람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을까?’


생각해 보면, 이서 역시 소우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비참하고 딱한 처지였다. 별이라는 격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지금 조금 시끄럽고 번거로운 가축 취급이나 받는 것이다.


그러나 소우는 그 이상으로 이서를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 명과 달리 자기에게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니건만, 소우는 이서를 불쌍히 여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시는 맡고 싶지 않은 냄새야.’


이서가 풍기는 그 냄새야말로 그녀의 비참한 처지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소우는 이서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영 께름칙했다. 그녀의 기억을 들여다본 이후로, 그녀를 향한 의심은 조금 덜 수 있었지만, 그 대신 께름칙한 마음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상했잖아. 정말 이상했다고.’


몇 번씩이나 정신이 들락날락하는 모습만 생각해 봐도 가까이할 만한 상대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변덕스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불안했지.’


그녀는 불안하고, 위태롭고, 아슬아슬해 보였다.


만약 그녀가 외줄타기를 하는 것이라면, 그녀의 손을 잡는 것이 함께 그 외줄을 타야만 하는 것이라면······


“소우!”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소우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이서는 없었다.


“어?”


바람 빠진 소리로 대꾸한 소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철현이 조금 멀찍이서 문틈 사이로 머리를 빠끔히 내밀고 소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우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죽었었는데?’


“죽었어?”


철현이 물었다. 죽었으나 다시 살아난 사람과 살았으나 이제는 거의 죽어버린 사람이 놀란 눈초리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철현이 좌우를 재빨리 살피더니 소우에게 손짓했다. 주저하던 소우는 철현이 아예 문을 닫고 사라지자 냉큼 철현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철현은 방 안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팔짱을 끼며 크지도 않은 방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던 철현은 소우가 들어서자 말했다.


“정말 죽은 거야? 명이 죽였어?”


소우는 고개를 흔들다 말했다.


“내 말이 들려?”


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들리니까 말해. 전부 다.”


“어떻게? 다른 사람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데······”


철현이 멋쩍은 표정으로 곁눈질했다.


“내 재주야. 혼을 볼 수 있어.”


그러더니 작정한 듯 침상 위에 앉았다. 소우는 공중이 둥실둥실 뜬 채로 생각에 잠겼다. 어디서부터 말하라는 걸까? 또 뭘 말해야 하는 걸까? 소우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철현은 잠자코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소우가 입을 열었다.


“네 얘기부터 해. 날 어떻게 알지? 명과는 무슨 관계야?”


“네 얘기는 청대한테 들었어.”


“청대?”


“그날 청대도 함께 죽은 거 봤잖아.”


철현이 대꾸하자 소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내가 본 건 너랑 큰 호랑이······”


철현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우의 눈도 커졌다.


“호랑이? 그 호랑이?”


“청대는 둔갑할 줄 알아. 호랑이로 변해 거학을 상대하려다 백곡까지 끼어드는 바람에······”


“왜?”


소우의 대꾸에 철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철현이 보기에 소우는 자기가 아는 걸 전부 털어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소우는 아마도 극도로 소심하고, 그만큼 조심성이 많은 사람일 것이다. 본래 그렇지 않았더라도 소우가 이제까지 겪은 일들을 짐작해 보자면, 그런 성미가 생겼어도 할말이 없겠다고, 철현은 생각했다.


철현은 한 발 뒤로 물러나기로 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집 밑에 매가 살고 있어. ‘이서’라고 하는 매인데, 어느 수씨 가문 사람이 매의 고기를 먹으면 불사를 얻는다는 말을 듣고 이서를 꾀어 자기 집에 가둬 놨지. 스승님과 나는 매의 음기를 다스리는 약을 만드는 일을 해왔어. 본래는 양기가 가득한 젊은 남자를 먹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지만, 사람의 양기보다 조금 못한 약으로 이서를 길들여온 거야.”


소우는 융선이 던져준 사람 고기를 먹던 이서를 떠올렸다.


“하지만, 말하자면 그건 어쨌든 이서의 기력을 북돋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수씨 가문에서는 주기적으로 이서에게 사람 고기를 갖다줬어. 우리가 이서의 음기를 다스려준 덕분에 이서는 목숨을 부지하며 드물게나마 던져주는 사람 고기를 먹고 생존할 수 있었던 거지.”


소우는 철현의 손을 힐끗 쳐다봤다. 꽉 그러모은 두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스승님은 수씨 가문이 사람을 죽이는 일에 우리가 동조했다고 생각하셨어. 그래서 나만이라도 이 집에서 내보내려 하셨지. 하지만 들켜버렸어. 그 벌로 나와 나를 도운 청대는 죽었고. 스승님은 약을 짓는 재주 덕에 지금까지 살아 계시지만.”


“하지만 지금 너도 살아있잖아. 청대도 살아있는 거야?”


“청대 덕분이야. 인계에서 우연히 얻은 어떤 약초 덕분이야. 그 약초가 뭔지는 나도 몰라. 스승님도 모르시고. 하여튼 청대는 널 도와주고 싶어 해.”


“그래.”


하며, 대꾸하는 소우의 눈이 서늘했다.


철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알고 있었어? 이서에 대해?”


대답이 없었다. 철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정말 널 돕고 싶어.”


“왜?”


“네가 위험하니까.”


“내가 쓸모 있기 때문이 아니라?”


“뭐?”


소우가 뒤로 물러났다. 그는 문간에 서서 말했다.


“너는 날 모르잖아. 청대도 날 이름으로만 알 뿐이고. 너희의 그 탈출 계획에 내가 필요한 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면 굳이 날? 왜? 죽음 무릅써야 할 정도로 위험한 계획 아니야? 게다가 한 번 실패했고. 그런 와중에 내 목숨까지 챙겨주겠다고?”


철현은 별안간 짜증이 치솟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청대 그 녀석이 절대로 두고는 못 간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하기는 했지만, 나도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알지도 못하는 네 목숨까지 챙기고 싶지 않아. 그렇지 않아도 스승님은 우리가 죽은 이후로 명의 감시를 받으며 죽은 사람처럼 지내고 계시고, 나와 청대는 한 달이 넘도록 이 방 안에 틀어박혀 꼼짝하지도 못하고 있어. 솔직히, 너만 아니었다면 난 진작에 스승님을 모시고 도망쳤을 거야. 청대 그 녀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철현이 말끝을 흐렸다. 소우가 웃었다.


“꼼짝하지도 못한다는 청대는 지금 어디 있는데?”


“널 구하러!”


철현이 버럭 소리쳤다. 놀란 소우는 하마터면 문밖으로 넘어갈 뻔했다.


“젠장할, 너 구한다고 지하감옥으로 갔다, 왜! 근데 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넨장 맞을 새끼. 스승님이 그때 구해줬잖아. 또 죽은 거냐, 그래? 약을 먹고 또 뒈져버렸어?”


소우는 입을 떡 벌리고서 철현이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을 넋 놓고 보기만 했다. 철현의 호통이 끝나자, 소우가 겨우 한마디 했다.


“들키겠어.”


그렇지 않아도 벌겋게 달아오른 철현의 얼굴이 완전히 시뻘겋게 변해버렸다. 철현은 침상에 앉아서 들락날락하는 숨을 가라앉혔다.


“지금 여기서 말해.”


“뭘?”


소우가 문간에서 떨어지며 말했다.


“도움이 필요한지, 아닌지.”


철현이 소우를 노려봤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말 다 했어. 도움이 필요하다면 너도 네가 할 수 있는 말 다 해. 전부 말 안 해도 좋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라도 해. 그조차도 싫으면 당장 나가.”


“나가서, 내가 명에게 네가 살아있다고 말하면?”


철현이 코웃음쳤다.


“그 개새끼의 똥구멍이나 핥으며 살겠다면 말리지는 않으마.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아 둬. 그 자식에게 중간이라는 건 없어. 필요하면 무슨 수를 쓰든 옆에 두지만, 필요 없으면 단번에 죽여버린다는 걸.”


소우는 철현을 가만히 쳐다보다 대답했다.


“괜찮아. 무기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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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딱 하나만 24.03.27 4 0 12쪽
58 얼룩이 24.03.25 4 0 12쪽
» 괜찮아 24.03.22 5 0 12쪽
56 백곡의 심기(2) 24.03.20 5 0 13쪽
55 백곡의 심기(1) 24.03.18 5 0 12쪽
54 이서의 꿈(2) 24.03.15 5 0 12쪽
53 이서의 꿈(1) 24.03.13 4 0 11쪽
52 재회 24.03.11 4 0 12쪽
51 수명의 판 24.03.08 4 0 13쪽
50 죽은 듯이 24.03.06 4 0 12쪽
49 죽지도 못하고 24.03.04 5 0 12쪽
48 24.03.01 5 0 12쪽
47 유일한 무기 24.02.28 5 0 12쪽
46 다시 꿈 24.02.26 5 0 11쪽
45 꿈을 꾸는 죄인 24.02.23 5 0 13쪽
44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24.02.21 5 0 13쪽
43 남 걱정할 처지냐? 24.02.19 4 0 13쪽
42 분수대로, 얌전 24.02.16 4 0 12쪽
41 결의 24.02.14 6 0 13쪽
40 정신 나간 여자, 귀신 보는 남자 24.02.12 5 0 12쪽
39 각자의 일념 24.02.09 4 0 12쪽
38 소래와 융의 사정 24.02.07 5 0 12쪽
37 효부인의 침소 24.02.05 5 0 12쪽
36 추명의 사정 24.02.02 4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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