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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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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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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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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15장-귀향歸鄕 (6)

DUMMY

레가야의 수도, 란.

일반적인 수도와는 달리, 이 도시는 대공이 거주하는 왕성과 시가지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간단히 그리자면 우선 하나의 원을 그린다.

그리고, 그 원 안쪽의 우측에 맞닿는 작은 원을 하나 더 그린다.

마지막으로 바깥쪽 원의 좌측을 지우면 하늘에서 본 란의 형태가 완성된다.

왕성이 자리잡은 대지는 다른 곳에서 가져온 섬처럼 깎아지른 절벽과 강으로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다.

성과 육지를 연결하는 것은, 오로지 정문으로 통하는, 카제린 대교라 불리는 단 하나의 다리 뿐이다.

그 다리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첫 번째 레가야의 주인이 무슨 생각에서 그런 기이한 땅을 수도로 삼았는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하지만 밤이 되면 발 아래에서도 별이 떠오르는 듯 아름다운 강 위로 드리워진 몽환적인 다리의 풍경은 전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중 하나로 정평이 나 있었다.

손에 닿을 듯 불타오르는 별들이 가늘고 유려한 다리 너머로 사라지고 차차 새벽이 밝아올 때, 도시가 품은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절정에 다다른다.

파도와 바람의 만남이 자아낸 물안개가 희미하게 도시를 감싸안으며 새벽빛을 머금고, 그와 함께 도시 곳곳에서 마력에 의해 빛을 뿌리는 가로등의 빛이 뒤섞여, 꿈결보다도 더욱 꿈같은 환상을 자아낸다.

헛딛을 경우 위험하다는 이유에서 카제린 대교의 교각 주위로는 바람의 주문이 영구적으로 걸려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다리의 양 시작점 부분은 조금씩 안개에 삼켜지기 마련이다.

덕분에 말 그대로 다리를 건너서는 순간 다른 세계로 끌려갈 것만 같은 분위기는 더더욱 강해진다.

카제린 대교에 얽힌 수많은 민담, 설화들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물론 레가야의 주인인 르비아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창틀에 몸을 기대고 한가로이 란의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자면, 마치 그의 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은은하게 모여든 안개가 주위를 감싼다.

대공의 자리에 앉은 후, 과연 이 장면을 몇 번이나 눈에 담았을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을 보더라도, 이 풍경만큼은 쉽게 질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몇 번을 보더라도 다시 눈에 담을만큼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미노스티야도 이 풍경을 원했던 것일까.

언제나 그렇듯, 저 절경조차 자신의 손에 넣어, 홀로 즐기고픈 욕망을 품었던 것일까.

정작 죽어버린 인간은, 더이상 대답해줄 수 없으리라.

르비아는 안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얼핏, 사람의 팔이 안개 속에서 보였다.

죽은 자의 망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르비아의 손을 향해 뻗어오는 손이었다.

만일 르비아의 팔을 잡아당긴다면, 창틀에 걸터앉은 그로서는 성 아래로 굴러떨어지리라.

그러나 르비아는 서슴없이 손을 내밀어 안개의 손을 맞잡았다.

부드럽게 깍지를 낀 손은, 다행히 그를 끌어당기지는 않았다.

"위험해요."

안개가 모여들며 인간의 모습을 취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흰 안개 속에서 콧잔등 위를 가리는 가면과 허리까지 내려오며 물결치는 잿빛 머리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익숙할 정도로 눈에 각인되어버린 그의 생령, 야룬다였다.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야룬다는 르비아의 곁을 단숨에 지나쳐, 그가 앉아있던 창틀 안으로 날아들었다.

포옹하듯, 등 뒤로부터 르비아를 끌어안은 손길이 부드럽게 그를 끌어당겼다.

뒤이어 두 사람의 발이 방 안쪽의 바닥을 딛었다.

르비아는 꿈에서 깨어나버린 것처럼 약간의 상실감을 느끼며 조금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굳이 불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얼굴의 미소는, 야룬다가 걱정할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위태로운 곳에 앉아있던 것을 사과 역시도 담고 있는 것이었으니.

그 방은 르비아의 집무실이었다.

아무리 이른 새벽이라지만, 군주가 자리한 곳인데도 등장 하나 켜 있지 않은 모습은 다소 어색했다.

더군다나 르비아의 복장도 평소와는 달리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셔츠의 단추도 반쯤 풀어헤치고, 옷깃 역시 곳곳이 구겨져있었다.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르비아가 남에게 보일리가 없다.

적어도 수 시간 이상은, 누구 하나 그를 찾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야룬다가 위험하다고 말할만도 했다.

"그 많은 적으로 모자라 이제는 스스로 목숨을 위협하실건가요?"

"화 내지 마. 그란드리아가 있잖아?"

"정말, 조금쯤은 몸을 걱정해주세요."

상당히 언짢아하는 말투였다.

확실히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은, 지금만 해도 충분할 정도로 많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찾아드는 암살자의 수가 셋 이하였던 날이 없을만큼,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지 않았던가.

대부분은 란에 거미줄처럼 펼쳐진 경계주문에 걸려 야룬다에 의해 퇴치되었지만, 개중에는 흔적도 없이 침실까지 들어올 정도의 실력자들도 섞여있었다.

대정령의 눈조차 속이고, 영격술까지 쓸 수 있는 암살자라면 물론 아르타야의 그림자 기사단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르비아가 그 손으로 직접 털어낸 암살자만 서른 셋.

다시는 검을 쥘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 돌려보냈던만큼, 심혈을 기울여 그들을 길러냈을 아르타야 공 리카드라의 속도 시커멓게 타들어갔으리라.

그러나 야룬다가 걱정하는 것은 그런 사소한 것이 아니다.

작은 손짓만으로도 흩어버릴 수 있는 가벼운 위협보다는, 지금도 쉽게 떨쳐낼 수 없는 무거운 족쇄를 걱정하는 것이다.

"아직 결계 수복조차 완전치 않아요. 게다가······."

"그래, 티엘이 오고 있지."

르비아는 욱신거리는 오른팔의 각인을 지그시 누르며 옅게 미소지었다.

레가야의 결계가 떨고 있었다.

외부의 공격에 의한 것이 아니다.

강력한 마력 중심체, 그리고 카르티치스의 피.

몇 안되는 일가친척마저 모조리 숙청해버리고, 후계자조차 두지 않은 르비아로서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결계 계승자의 기척이었다.

티엘의 기척은 채 숨기려는 생각조차 없다는 듯 당당하게 란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제법 가깝다.

아마 하루나 이틀.

티엘이 란에 도착하기까지는 겨우 그 정도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리라.

"······이스티엘님은 검은 용의 저주까지 떨쳐내는 데 성공했어요. 행운이 손을 들어주었다고 해도, 이제는 어엿한 마법사라고 할 수 있겠지요."

두 사람은 똑같이 시원의 용과 계약하고, 별의 권호를 받은 성좌의 주인이다.

분명 마법사의 격으로 따지자면 르비아와 티엘은 절대로 견줄 수 없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시야에서 본 것.

이 세상을 창조하고, 또 거두어가는 힘에 비한다면 그 차이는 하찮은 수준일 것이다.

게다가 티엘은 그와 마찬가지로 카르티치스의 피를 타고났다.

비록 싹이 트는 것은 늦었다지만, 수백 년간 대륙 최강의 흑마법사들을 품어온 그 피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만일 티엘의 능력이 완전히 개화했다면, 마법사로서의 격 역시 르비아의 턱밑까지 쫒아왔을지도 모른다.

야룬다가 속을 끓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계약령으로서 계약자의 뜻을 꺾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고집이 계약자 자신을 위험하게 만든다면, 마찬가지로 계약령으로서 두고 볼 수는 없는 법이다.

의지와 목숨,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

쉽게 답을 낼 수 있는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르비아는 그런 야룬다의 고뇌를 알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느새 르비아의 시선은 버릇처럼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작은 물건에 고정되어 있었다.

낡고 초라한, 대공가의 문장만 아니라면 잡동사니로밖에 보이지 않는 녹슨 열쇠.

그나마 짝을 이루던 형제마저 잃어버린 열쇠는, 이전보다 더더욱 볼품없어 보였다.

"칼라가스는?"

여전히 긴장감 없는 목소리가 형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성체에 가까워진 상태였지만, 아직은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티엘쪽은 어땠지?"

르비아는 팔을 움켜쥐었던 손으로 소매를 걷어, 각인이 뿌리내린 팔을 드러냈다.

손등에서 팔꿈치에 이르는 검은 색의 복잡한 문양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숨쉬듯 빛을 머금고 맥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먹물처럼 진한 검은빛이었을 그의 각인은 군데군데가 탈색된 것처럼 잿빛으로 시든 상태였다.

야룬다는 손을 내밀어 상처입은 각인을 어루만졌다.

마력의 흐름이 약화된 상태에서도 결계와의 연결을 복구하며, 아직 충분히 차오르지 않은 마력천을 몇 곳이나 자신과 그란드리아의 마력으로 수복시켰다.

아무리 르비아라고 해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다.

그 정도의 부하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도, 야룬다는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을 수 있었다.

"이미 목숨을 대가로 마력을 다루고 있어요. 아마 인간으로서는, 이 땅을 벗어날 수 없을거에요."

"그런가······."

자신의 손으로 끝맺지 못하는 아쉬움일까.

르비아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에 가까울 정도의 씁쓸함이 묻어있었다.

"그 애가 가진 걸 모두 빼앗아버렸으니, 빼앗길 각오는 돼 있었지. 하지만······."

르비아는 무심결에 탁자 위로 손을 뻗으려다 그만 두었다.

그를 눈치챈 야룬다는 이 번만 눈감아주겠다는 듯한 얼굴로 적포도주와 유리잔 두 개를 들어올렸다.

르비아는 가볍게 잔을 들어 감사를 표하며 자신의 잔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는 잔을 입가로 가져가는 대신 눈앞에서 가볍게 몇 번 흔들었다.

눈의 착각일까. 투명한 붉은 빛의 액체가 담겨있어야 할 유리잔은 반대편의 모습이 전혀 비치지 않았다.

포도주와 비슷한 빛깔이지만, 더욱 짙고, 더욱 탁한 무언가가 담긴 것처럼.

어쩌면, 옅은 비린내를 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듯, 잔의 내용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되돌아와 투명하게 찰랑거렸다.

말없이 잔을 흔들던 르비아는 조금 어색한 동작으로 술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달콤한 포도향과 술 특유의 알싸한 맛 사이로 어째서인지 알 수 없는 옅은 비린내가 느껴지는 기분이다.


이 정도로 마음이 흔들린다니, 아직 갈 길이 멀구나.


르비아는 스스로를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입안을 감도는 미미한 혈향을 삼켜버렸다.

"제대로 결말을 맺지 않는다는건, 정말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거니까."

사 년, 아니 오 년.

티엘이 그의 손을 빠져나가고,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한없이 뒤로 미뤄진 지 어느새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한 사람은 스스로를 깎아가며, 한 사람은 주위의 모든 것을 쌓아가며, 한 번 멀어졌던 거리를 좁혀오던 시간.

이제야 겨우 두 사람이 간신히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이 만남으로, 두 번 다시 마주보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르비아는 순수하게 가슴의 고동을 받아들였다.

"묘한 기분이 들어. 몇 년이나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이제야 겨우 만나는 것처럼 설레고 긴장되는걸."

"분명 항쟁의 날 만나지 않았나요?"

"그 때는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만났으니까. 그리움이든, 증오든, 나를 향하는 감정을 마주하고 싶은거야."

씁쓸하게 웃던 르비아는 문득 손 안에서 매만지던 쇳조각을 불쑥 내밀었다.

작고 녹슨데다가 초라하기까지 한, 대공가의 물건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 열쇠야말로 레가야 내에서는 절대자로 군림하는 대공왕이 그 이름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유일한 문의 열쇠였다.

"이 성에서 단 한 곳은 레가야 공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 알고 있어?"

"그런 곳이 있었나요?"

"유일하게 단 한 곳 뿐이야. 대공비의 소유였고, 두 명의 꼬마들이 물려받은, 레가야의 주인조차 허락없이 들어설 수 없는 유일한 장소. 대공가의 비밀정원."

르비아는 눈을 감았다.

손에 잡힐듯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눈앞을 스쳤다.

오후 햇살처럼 따사로운 황금빛이 내려쬐는 끝도 없이 펼쳐진 나무들의 세계.

해는 지지 않고, 추위또한 찾아오지 않는 그 하늘 아래에는 때때로 초여름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오밀조밀하게 자라난 덤불들에서는 싱그러운 향기를 품은 꽃송이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정원의 중앙에는 조그만 샘과, 정원을 떠받치는 것만 같은 거대한 전나무가 서 있다.

뛰어놀다 지칠때면 언제고 시원한 샘물로 목을 축이고, 나무둥치에 기대누워 뒹굴었다.

짓이겨진 풀잎의 알싸한 냄새도, 나무들이 내뿜는 싱그러운 향내도, 손과 입술을 적시던 차가운 샘물의 맛도,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르비아는 잔잔한 목소리로 정원의 풍경을 그려냈고, 야룬다는 르비아를 따라 눈을 감으며 그 모습을 머릿속에서 되살렸다.

황금빛으로 물든 정원에서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

흔해빠진 이야기이지만, 그렇기에 인간적인 행복이 느껴지는 풍경이다.

르비아에게 있어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며, 동시에 다시는 눈에 담을 수 없을 서글픈 풍경이기도 했다.

눈을 뜬 야룬다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르비아를 바라보았다.

르비아 역시 조금은 꿈결에 취한 듯한 그윽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미안한걸. 정원의 문은······, 열쇠 하나만으로는 열 수 없으니까."

대공비가 가지고 있던 열쇠는 두 아이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한 쌍의 열쇠가 서로 헤어진 뒤로, 르비아가 다시 정원을 찾는 일은 없었다.

자신에게 그럴 자격따윈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숲 속에 떨어져있던 열쇠를 가까스로 찾아낸 르비아는, 정원을 찾는 대신 서슴없이 그것을 바다 건너의 누군가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가질 수 있는 열쇠는, 어디까지나 단 하나 뿐이다.

어린 시절 맺었던 규칙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그 문을 열 수 있더라도, 더이상 그 곳으로 향하진 않을거야. 내가 원하는 미래는 그 안에 없을테니까."

그 곳은 시작의 땅이자 추억의 땅이며, 그리고 돌아갈 수 없는 땅이다.

열쇠를 움켜쥐며 몸을 일으킨 르비아는 한 구석에 던져두었던 옷을 집어들었다.

그가 옥좌의 방으로 나갈 생각이라는 것을 눈치챈 야룬다는 재빨리 다가가 르비아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었다.

일터에 나가는 남편을 보살피는 아내같은 모습같다는 생각이 들어, 르비아는 무심결에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무슨 일 있나요?"

"내조에 힘쓰는 아내같다고 생각했거든."

"대외적으로는 대공비인걸요. 이상할 건 없잖아요?"

손가락만으로 엉망이었던 칼라의 주름까지 깨끗하게 펴낸 야룬다는 가볍게 르비아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자, 됐어요."

"언제나 고마워. 갈까?"

"기꺼이."

르비아는 조심스럽게, 야룬다가 내민 손을 가볍게 쥐었다.

그 순간, 주위의 모습이 일그러지며 순식간에 옥좌가 있는 방의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레가야 성 내에서라면 공간의 전이따위, 레가야의 주인에게 있어서는 장난 치는 것보다 간단한 일이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의 성에 주문을 걸고 온갖 특권을 부여했던 카제린 이안 카르티치스.

그녀의 유산이 있었기에 르비아가 원하던 일을 밀어붙일만큼 강대한 힘을 얻을 수 있었건만, 그런 르비아의 발목을 잡은 것 또한 그 카제린의 유산이며, 그를 죽이고자 다가오는 이 역시도 카제린의 핏줄이다.

어쩐지 조금은 우스운 일이었다.

그러나 르비아는 쓸데없이 웃음을 흘리는 대신, 조용히 눈을 들어 앞을 응시했다.

이미 옥좌 앞에는 몸을 굽힌 채 그를 기다리는 네 명의 그림자가 자리잡고 있었다.

"카라프, 데일런, 라인슬렛, 아이드라하."

네 명의 가신들을 조용한 호명에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지금까지 르비아의 곁에 남아있는 자들은, 그들 넷 밖에는 남지 않았다.

본래 르비아가 거느리고 있던 가신은 열 둘이었다.

르비아의 눈에 안타까운 빛이 진하게 스며들었다.

어린 시절, 헬루타를 위시한 열 두 명의 기사와 마법사가 그를 받들기로 맹세했다.

그 중 세 명은 망명길에서 추적을 뿌리치는 도중 르비아를 지키다 죽었다.

둘은 미라야에서 치졸한 술수에 휘말려 영원히 잃었고, 또다른 한 명은 그란드리아와의 계약을 위해 스스로 몸을 바쳤다.

항쟁의 날, 성공적으로 습격에 성공했음에도 결국 아첼레란도의 아스트라에 또다시 한 명을 잃었다.

가장 오랫동안 그를 섬겨온 헬루타마저 노환으로 비교적 한직인 탈리아의 영주를 맡으며 곁을 떠난 뒤, 최후의 최후로 남은 마지막 네 사람.

레이븐처럼 단순히 이해관계로 얽힌 것이 아닌, 수족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마지막 가신들이다.

"오랜 세월, 나를 도와준 너희들에게는 언제나 감사하고 있다."

굳이 입을 열어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미노스티야가 레가야를 쥐고있던 시절, 물밑작업을 하며 이중첩자 노릇을 했던 헬루타를 제외한 가신들은 항쟁의 날을 기다리며 그림자 속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르비아와 생사를 같이 해온 이들에게는, 더이상 치하와 충성의 말을 주고받을 필요조차 없었다.

치하보다는 순수한 감사로서 말을 꺼냈던 르비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몸을 낮춰, 가신들과 눈높이를 맞췄다.

"때가 왔다. 영지조차 없이 내 곁을 지켜주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헬루타와 마찬가지로, 너희들 역시 각 지역에서 영지를 지켜다오. 카라프, 네게는 란마이어 남작령을 맡기겠다. "

"알몬티아 백작의 견제입니까."

"파르타 백의 장점이자 단점은 잔머리를 심하게 굴린다는 점이지. 적당히 구슬러서 묶어두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다른 지역도 사정은 비슷해. 데일런은 나바이드 남작령, 라인슬렛은 모르건 남작령이다. 아이드라하는 게헤드 백작을 맡도록."

르비아가 입에 올린 영지들은 모두 인근 지역 영주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길목들이었다.

특히 게헤드 백작령은 레가야 남부 전체의 중심지로, 과거 수많은 항쟁의 뿌리가 되어온 지역인만큼 북방의 탈리아, 동북방의 아르미스 변경백령만큼이나 중요한 위치였다.

아무리 대공인 르비아라지만 이렇게 인사처리를 해도 되는것일까.

그러나 가신들의 분위기를 눈치챈 르비아는 조금 짓궂게 웃었다.

"애석하게도 저 영지들은 지금 주인이 없어. 영지에 싫증이라도 난 건지 조심성없게도 타국과 밀무역을 시도했더란말이지."

가신들 사이에서도 쓴웃음이 번졌다.

군신의 관계는 잊고 실없이 웃던 르비아는 차차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다시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큰 혼란이 생길거다. 못다한 항쟁을 끝낼 생각이니까."

"그렇다면 저희는 전하의 곁을 지켜야하지 않겠습니까?"

르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드라하. 헬루타와 레이븐이 떠난 지금, 현재 내 휘하의 마법사중에서 가장 강한 자가 그대다. 그렇다면 그대에게 물어보지. 은막의 성채 아이드라하. 그대는 그란드리아의 일격을 한 번이라도 막아낼 자신이 있나?"

'은막의 성채' 아이드라하는 분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오선 중반에 달하는 그의 마력은 분명 매우 강하며, 그가 전력으로 펼친 방어계 주문은 그의 권호처럼 성채에 비견될 방어력을 지닌다.

실제로 조금만 더 원숙해진다면 한 때 방어계 주문으로 따를 자가 없다던 그 헬루타의 전성기에도 이를 수 있으리라는 평을 받는 자다.

하지만 그런 아이드라하라도 시원의 용을 상대로는 단 일 합을 버티지 못한다.

자신의 한계에 분개하는 가신을 조용히 응시하던 르비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책할 것 없다. 전성기의 헬루타도 그란드리아를 상대로는 버티지 못해. 알겠나? 그녀는 더이상 그대들이 기억할 나약한 소녀가 아니다. 나와 같은 시원의 계약자이며 그런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대천사나 같은 시원의 용의 계약자 뿐이다. 나를 지켜주겠다는 그 마음은 잘 알지만, 너희들을 의미없는 죽음으로 밀어넣을 생각은 없다."

만용을 부릴 정도로 어리석은 이들은 여기에 아무도 없었다.

네 명의 가신들은 침통한 얼굴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레가야 공의 이름으로 명한다. 이 땅에 불어올 혼란을 좌시하지 마라. 레가야 공의 허락이 있기 전에는, 너희들의 책무는 다하지 않을테니. 가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네 명의 기사들은 일제히 외치며 옥좌의 방을 나섰다.

뒤켠으로 물러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야룬다는, 마지막 한 사람이 문을 나선 뒤에야 한 걸음 앞으로 나서 르비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상할 정도로 작아보이는 등이었다.

드넓은 제국을 주무르고, 저 천상의 신을 지상으로 끌어내려 자신의 소망을 이루고자 한 위대한 마법사일텐데도, 마치 어머니의 손을 놓쳐버린 어린아이처럼 작고 연약하게만 보였다.

자신의 기척을 듣고 돌아보는 르비아의 표정을 본 야룬다는, 그 감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아니, 오히려 그런 인상이 더더욱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입은 웃고 있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은 눈빛은, 너무나 애처롭게만 보였다.

"힘들다면······. 버겁다면······, 아직 기회는 있어요. 지금이라도 그만두시지는······, 않을건가요?"

"그런 말 하면 안돼, 야룬다. 정말로 그만둬버릴 것 같으니까."

언제나 그의 그림자를 자처하던 열두 명의 가신들은, 이제 단 한 명도 그의 곁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 공백은 생각보다 쓰라린 상처였다.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생겨났던 상처가 너무도 쓰라렸기에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레가야를 떠나 미라야로 가겠다는 말을 했을 때, 미노스티야는 형식적으로나마 '위험하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르비아는 미노스티야의 위협과 감시를 떨쳐내기 위해 결국 울며 매달리는 티엘조차 떼어놓으며 미라야로 향했다.

하필이면 그 날 폭풍이 불었던 것은 무슨 우연이었을까.

어둠을 틈탄 도적떼들이 르비아의 행렬을 덮치는 일이 일어났다.

사실 도적떼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

누가 그들을 단순한 도적떼라 부를까.

허름한 누더기 아래로 마력처리가 된 가죽갑옷을 받쳐입고, 마력이 깃든 검을 일률적으로 갖춘 그들을?

쓰러진 뒤에는, 그 유해에 새겨둔 마법진을 통해 마령까지 끌어모았던 그 비정상적인 무력집단을?

누구의 손으로 보내진 것인지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것이나 다름없는 치사하고 더러운 방식이었다.

일국의 왕이라는 자가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조카를 죽이기 위해 준비한 '선물'은 한 줌도 되지 않는 호위병력을 우습게 찢어발겼고, 그 사이에 숨어들어 있었던 세 명의 흑마법사만이 가까스로 무수한 창검과 발톱을 막아낼 뿐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르비아가 몸을 피할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웃으면서 목숨을 던져버린, 세 명의 젊은 마법사들을 떠올린 르비아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끌어내렸다.

"준비는 끝났어. 이제와서 돌아갈 수야 없지."

"후회는 없나요?"

"후회했던 모든 것들을 되짚어가기 위해 여기까지 왔잖아. 그래서 알아. 어떤 길을 가더라도 후회는 남고, 늦는다는 걸. 하지만 그렇더라도······."

오른팔의 각인으로부터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모여드는 마력을 조심스럽게 가다듬은 르비아는 조용히 손바닥을 기울여 손 안에 고인 마력을 흘려보냈다.

먹물처럼 진한 검은 빛의 액체가 가느다란 폭포를 이루며 쏟아졌다.

본래 죽음의 속성을 품은 마력이라면 돌로 된 바닥이라도 부식시키고 썩게 만들어버리지만, 막 바닥으로 떨어져내린 마력은 보이지 않는 펜으로 찍어 긋듯 조금씩 굴러가며 진한 선을 그렸다.

이 장소야말로 세계의 중심, 수 많은 마력천을 이어 발동시키는 마법진의 심장이었다.

"앞으로 한 걸음밖에 남지 않았어. 후회는 잊고, 미련은 버린다. 이 한 걸음을 위해,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었으니까."

조용히 바닥을 적시는 마력을 바라보며, 르비아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듯, 무거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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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시, 얼음의 용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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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15장-귀향歸鄕 (4) 19.11.13 57 4 28쪽
145 15장-귀향歸鄕 (3) 19.11.12 68 3 24쪽
144 15장-귀향歸鄕 (2) 19.11.11 66 4 25쪽
143 15장-귀향歸鄕 (1) 19.11.10 67 6 24쪽
142 14장-약속約束 (18) 19.11.09 72 4 35쪽
141 14장-약속約束 (17) 19.11.08 66 4 29쪽
140 14장-약속約束 (16) 19.11.07 56 4 24쪽
139 14장-약속約束 (15) 19.11.06 60 4 35쪽
138 14장-약속約束 (14) 19.11.05 55 4 26쪽
137 14장-약속約束 (13) 19.11.04 54 3 27쪽
136 14장-약속約束 (12) 19.11.03 49 3 25쪽
135 14장-약속約束 (11) 19.11.02 57 4 27쪽
134 14장-약속約束 (10) 19.11.01 68 4 26쪽
133 14장-약속約束 (9) 19.10.31 65 3 26쪽
132 14장-약속約束 (8) 19.10.30 62 3 31쪽
131 14장-약속約束 (7) 19.10.29 59 3 27쪽
130 14장-약속約束 (6) 19.10.28 59 2 27쪽
129 14장-약속約束 (5) 19.10.27 64 4 28쪽
128 14장-약속約束 (4) 19.10.26 72 4 31쪽
127 14장-약속約束 (3) 19.10.25 62 3 30쪽
126 14장-약속約束 (2) 19.10.24 55 3 26쪽
125 14장-약속約束 (1) 19.10.23 65 3 27쪽
124 13장-인도引導 (15) 19.10.22 72 3 36쪽
123 13장-인도引導 (14) 19.10.21 61 3 26쪽
122 13장-인도引導 (13) 19.10.20 59 3 24쪽
121 13장-인도引導 (12) 19.10.19 54 3 26쪽
120 13장-인도引導 (11) 19.10.18 59 4 23쪽
119 13장-인도引導 (10) 19.10.17 64 3 33쪽
118 13장-인도引導 (9) 19.10.16 62 3 32쪽
117 13장-인도引導 (8) 19.10.15 62 3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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