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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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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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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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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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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7쪽

14장-약속約束 (1)

DUMMY

부드러운 바람이 장난치듯 몸에 매달리는, 어느 따사로운 햇살 아래.

두 명의 꼬마가 있었다.

어딘지 얼굴에 그림자를 품었지만, 그럼에도 상냥한 눈빛을 잃지 않은 남자 아이.

오랫동안 소중히 길러온 듯, 나이에 비해 상당히 긴 머리를 자연스레 풀어헤친 여자아이.

하지만, 섬세한 손길로 빚어낸 인형처럼 귀여운 두 아이는 신기할 정도로 서로 닮아있었다.

아름다운 흑요석처럼 흐림없는 검은 머리칼과 투명한 흰 피부, 그리고 이슬을 머금은 듯 반짝이는 눈빛까지.

비록 서로를 비추는 눈동자의 색이 다르다고는 하나, 놀라울 정도로 빼닮은 얼굴이다.

그러나 두 아이의 표정만큼은 조금도 닮아있지 않았다.

여자아이 쪽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아이는 젖어든 보라색의 눈동자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난처하게 웃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돌아서려 해도, 옷자락을 꼭 붙드는 손은 애달프면서도 필사적이라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다.

'가지 마······.'

커다란 눈 가득 눈물을 머금고 울먹이는 동생을 보며, 남자아이는 난처하게 웃었다.

여섯 살 차이가 무색하게도 어른스럽던 동생이지만, 이 때 만큼은 어린 아이답게 떼를 쓰고 있었다.

아마도 그 아이가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물론 남자아이 역시 귀여운 동생의 곁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저 아이가 웃는 모습을 보며 웃고, 저 아이가 우는 모습에 마음 졸이며 제 몸처럼 보살펴온 동생이다.

이런 생이별을 그가 바랄 이유 따위,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남자아이의 뜻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어른들의 사정이란 언제나 똑같다.

아이들의 순진한 감정과 달리 무겁고 차가우며, 때로는 추잡스럽고 더러운 일이다.

게다가 거부할 기회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주어지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따르라고 강요할 뿐.

참으로 역겨운 일이다.

하지만 남자아이는 굳이 그런 속사정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 대신 허리를 숙여 동생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금방 올거야.'

'정말로?'

'그럼.'

남자아이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동생의 눈가를 소매로 살짝 닦아낸 뒤, 그 조그만 어깨를 꼭 안아주었다.

동생의 눈을 똑바로 보며 거짓말을 할 자신이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어느새 남자아이의 옷자락을 쥔 손에는 꾸욱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영악하고 눈치빠른 동생은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서글프게도, 그 때문에 여자아이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울고 싶을 때 울 수 없다는 것처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때문에 남자아이는 동생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거듭해서 약속했다.

다시 돌아오겠다고.

다시, 여자아이가 좋아했던 따뜻한 얼굴로 밤 새 이야기를 들어주겠노라고.

'그럼······, 약속해.'

여자아이는 오라비의 품을 벗어났다.

발갛게 부어있는 눈에는 다시 눈물이 고이고 있었지만, 더이상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것이 여자아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다시 울어버릴 듯한 얼굴로도 애써 눈물을 참으며, 옷자락을 놓아준 손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아직 망설임을 담은 채 떨고 있는 손가락이었다.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는 손이지만, 동시에 이별을 뜻하는 손.

순간 남자아이는 자신의 손 역시 파르르 떨린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남자아이는 망설임을 떨쳐내듯, 단숨에 동생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그리고 동생을,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듯 조용히 한 마디를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약속할게. 꼭 돌아올거라고.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할게. 약속할게······.'



* * *



어둠에 반쯤 잠긴 집무실이 죽은 사람의 집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벽난로에는 오랫동안 불을 대지 않은 듯 먼지가 쌓이고, 곳곳에 놓여진 촛대 역시 심지에 그을음 하나 묻지 않은 새 것 그대로 놓여있었다.

매일같이 세심한 손길이 그 모든 것을 닦아내긴 하지만, 사용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는 것 만큼 물건을 빠르게 낡게 만드는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방에서만큼은 그런 낡아가는 것들이 아무런 흠이 되지 않았다.

이 방의 주인은 오히려 춥고, 어둡고, 쓸쓸한, 적막감이 감도는 이 공간을 좋아했다.

여러 가지 일들에 지쳐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앞으로 다가올 일들에 질려버린 것일까.

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인은 자신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천 년을 더 살아오더라도, 아마 그 질문의 답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지막히 터져나오려는 탄식을 조용히 삼킨 여인은 살짝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잠든 남자의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넘겼다.

언제나 지쳐 보이는 그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휴식은 이 정도밖에 없다.

그러나 고른 숨소리를 내던 남자는 그녀의 손길이 닿는 순간 눈꺼풀을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완전무결한 작품에 섣부르게 손을 대 흠을 남긴 것은 아닐까.

여인은 약간의 상실감을 느끼며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잠을 깨운 모양이군요, 르비아."

여인의 무릎을 베고 있던 남자가 한숨을 흘리며 완전히 눈을 떴다.

얇고 창백한 눈꺼풀이 열리며 심연처럼 푸르른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야룬다."

막 잠에서 깨어난 눈은 조금 몽롱하게 흐려져 있었다.

아직, 꿈 속에 두고 와야 할 것들을 다 털어내지 못한 것일까.

"조금 더 쉬는게 어떤가요.""

"아냐, 이걸로 충분해······. 잠깐 꿈을 꿔서, 현실감을 찾을만한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야."

멍하던 눈이 점차 초점을 되찾았다.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남자는 잠든 인형에서 레가야의 대공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생기가 느껴지는 부분은 겨우 눈 뿐이었다.

수려한 얼굴은 마치 대리석을 깎아 만든 조각 같았다.

상투적인 비유가 아니다.

정말로 돌을 쪼아 만든 것처럼, 온기나 활기 따위는 느껴지지 않은 창백하고 딱딱한 얼굴이었다.

살아있는 자에게서는 사라질 리 없는 생명력이, 눈에 띌 정도로 희박해져 있었다.

날이 갈수록 체력이 떨어지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그의 곁을 언제나 지키는 야룬다로서는, 점차 잦아지는 쪽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눈치채고 있었다.

육신의 피로는 짧은 잠으로라도 대부분 풀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쌓인 피로는 그 정도만으로는 모자란다.

자신이 한 일, 하고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할 일.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를 하는 그에게, 이런 짧은 잠은 휴식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부족했다.

"점점 멀어져가기 때문일까. 어째서인지 요즘들어 옛날 일을 꿈에서 보는 일이 잦아지는군."

야룬다의 걱정을 증명이라도 하듯, 르비아는 뜻밖에도 별 의미 없을 꿈 이야기를 입에 담고 있었다.

"역시 지치셨군요."

"잠은 죽어서도 충분히 잘 수 있다고 하지. 이 정도는 아직 괜찮아."

르비아는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야룬다가 허리를 깊숙히 숙였다.

무릎에 놓여있던 남자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그녀는 남자의 검은 머리칼과 뒤엉킨 자신의 흰 머리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생령들의 왕인 대정령.

그런 그녀와 나란히 설 수 있는, 몇 안되는 강력한 마법사.

하지만 그 마력보다도 그녀의 마음을 끄는 것은 그의 운명이다.

지금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너머의 불확실한 것을 향하는,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같은 삶의 자세.

한 걸음 한 걸음이 스스로의 파멸을 부르는데도 망설이지 않는 강한 마음.

"수 많은 죽음, 다툼······, 수천 년을 봐 왔고 앞으로도 그렇겠죠. 이제는 슬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신들은 끊임없이 싸우고 있군요. 하지만 수천 년의 시간을 살아와도, 당신처럼 이상한 싸움을 한 사람은 없었어요."

"의외인걸, 야룬다. 단 한번도 죽음을 겪지 못한 네가, 그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는걸."

"당신은 특별하니까. 수천 년의 세월에, 처음으로 내 마음을 흔든 것이 당신이니까요. 불가능을 알면서도 자신을 깎아가며 달리는 그런 삶의 방향성, 신기하면서도 아름다워요."

르비아는 소리내어 웃었다.

장난감을 선물받은 아이처럼 순진한 웃음이 적막을 깨뜨렸다.

하지만 야룬다는 그 웃음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감미로운 음악을 듣는 듯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을 뿐이었다.

"아하하하하, 낯부끄러운 소리를 본인 앞에서 할 줄은 몰랐는걸? 하하하하······."

나름대로 유쾌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웃음소리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이 또한 항상 있는 일이다.

유쾌한 일이 있다면 웃고, 즐거운 일이 있다면 또 웃는다. 그러나 그 어떤 이야기도, 르비아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모두 거두어내진 못했다.

르비아는 순식간에 다시 메말라버린 얼굴로 손을 들어 자신의 각인을 쥐었다.

"참 지독한 일이야. 이 안에 품은 갈망이 어긋나있다는 걸 알면서도, 무슨 짓을 해서라도 손에 쥐고 싶다는 거."

"당신은 그것이 마법사의 업이라고 말했죠. 마법사란 누구보다 강렬하게 소망하는 자라고도 했고요."

"마법은 의지의 힘이니까. 우습게도 자기 자신조차 그 갈망에 휘말릴지라도, 내가 원했다는 그 사실 때문에 멈출 수 없게 돼지. 자, 야룬다. 슬슬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 비켜주겠어?"

대정령이 한숨을 쉬며 몸을 비켜주었다. 르비아는 가볍게 몸을 굴려 몸을 일으켰다.

르비아가 일어며 대충 옷을 추스르는 사이, 야룬다는 허공에 손가락을 까딱였다.

소리도 없이 주먹만한 얼음결정이 자라나, 창문으로부터 빛을 받아 방안 곳곳으로 빛을 전하기 시작했다.

"반면이 움직이고 있어. 로셀의 황제도 뭔가 움직임을 취하기 시작했고, 다른 대공국들도 슬슬 불안을 느끼고 삐걱이고 있지. 조만간 대공국간의 항쟁이 일어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듯 한걸. 참 지겹지 않아? 겨우 스물 몇 해밖에 살지 못한 나도 이렇게 질리는데, 수천 년을 살아온 너는 더더욱 진절머리가 나겠지."

"인간의 일을 생령이 이해하려 한다면 참 우스운 일일테지요. 하지만 그래도 말해야 한다면,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야룬다는 방 한 가운데 놓여있는 제국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지도는 참으로 어지러운 상태였다.

레가야를 견제하려는 다른 다섯 개의 대공국의 움직임, 내전중에도 귀찮을 정도로 외부 정세에 발을 들이밀려는 리가르트 왕국, 그동안 꾸준히 힘을 길러 기회를 보고있는 구 제국 익티아누스, 혹시라도 레가야가 주춤거리면 그 때를 틈타 세를 불리려는 피앙투스 공화국.

애석하게도 지도의 대부분을 차지한 나라들 가운데 레가야의 우방은 없다.

그러나 우습게도 사방에서 견제를 받으면서도 레가야가 흔들리지 않는 것은 그들끼리도 서로를 견제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한 몫을 했다.

르비아 단신으로도 한 국가의 수도를 궤멸시키는게 가능한 상황에서, 그런 빈틈은 오히려 반가운 먹잇감이다.

지도 위를 수놓은 수많은 문자들은 레가야로 파고드는 불순한 움직임을 끊어내고 역공을 되돌려준 일종의 흉터들이었다.

압도적인 적을 눈앞에 두고도 손을 잡지 못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창세신의 손으로 빚어져 마신룡의 숨결을 받아들인 자들이기 때문일까.

의미모를 한숨을 짧게 내쉰 야룬다는 지도 중앙에 가까운 부분을 손으로 짚었다.

미라야 외곽지역의 소도시 멜람.

그 곳은 대륙 곳곳을 이어가던 선의 마지막 한 점이 찍힌 채 그 여정을 중단한 지점이었다.

멜람을 향해 날아갔던 검은 도래까마귀의 발자취는, 그 곳에서 끊어져 있었다.

"연락이 끊긴지 이미 나흘.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은 의심할 수 없겠죠."

야룬다는 레이븐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제멋대로에다 자기 기분에 맞춰 흥미거리를 찾아다니는 성가신 성격이었지만, 동시에 그걸 메우고 남을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이기도 했다.

그런 자가 임무를 마치지도 못한 채 느닷없이 연락이 끊겼다면 그 이유도 뻔하다.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로 에둘러 말할 뿐, 사실상 그의 죽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르비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흑마법사의 나라 레가야에서도 여섯번째로 강력한 마법사를 잃었으니 꽤 속이 쓰릴 터였다.

"검은 문에서 권호가 회수되었다는 이야기는?"

"정기 개방일이 아니면 알 수 없다고 하더군요."

"언제부터 그렇게 절차를 따졌다는건지······. 우선 에둘러서 헬베르트 가에 알려 둬. 보상은 충분히 챙겨주고. 그림자에 몸담은 자이니 명예로운 순직으로 보내줄 수 없는 것을 애석해한다고도."

"제가 보내는건가요? 역시 멜람엔 직접 가보실 생각이군요."

르비아는 쓰게 웃었다.

"공백을 메우긴 힘들어. 그러니 이번에도 잘 부탁해. 해야 할 일이 많진 않을거야. 게다가 대공비로서 기반이 없는 너는, 어느정도 실적과 신뢰를 쌓아둘 필요도 있잖아."

"자기 좋을대로 하는 주제에 입은 살았네요."

야룬다는 얕은 한숨을 쉬며 옆자리로 손을 뻗었다.

눈으로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 곳에 쌓여있던 문서 중 한 장을 뽑아낸 야룬다는 곧바로 그 서류를 르비아에게 내밀었다.

르비아가 잠든 사이 시종이 전해주고 간 서신이었다.

르비아는 나른한 표정으로 서류를 받아들었다.

성의없이 내용을 훑어보돈 르비아의 얼굴에서 점차 짜증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칼틴, 리그마이어, 이번엔 파르타. 눈치가 빠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쓸데없는 바람이 부는군."

"파르타 백 알몬티아에게서 추가로 서신이 있습니다. 결계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며 사병의 수를 늘리고 싶다는군요."

야룬다의 눈이 움직였다.

가벼운 손짓에 옅은 안개가 일어나 또다시 몇 장의 서류를 들어올렸다.

손을 한번 더 튕기자 날아오른 일렬로 허공에 늘어선 서류들이 르비아의 눈앞에 하나의 벽을 이루었다.

르비아는 마지못해 하는 일이라는 듯 불평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 모든 서류를 빠르게 읽었다.

야룬다의 말대로였다.

일부 영주들이 몰래 만남을 가지거나 타 대공국의 영지와 허가없이 밀거래를 하는 등, 르비아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적지 않았다.

"이런이런. 나름대로 잘 대해준다고 생각했는데말이지. 애초에 이 녀석들은 항쟁에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은 기회주의자들이었어. 이제와서 꿈틀거려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지."

"숙청할 생각인가요? 지나치게 억압하는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는군요."

"아니, 간단히 경고장만 날려 둬. 진심으로 반항할 생각이라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다들 알테니."

르비아의 말에 호응하듯, 문득 그의 그림자가 일렁이듯 움직였다.

춤을 추던 그림자가 한 순간 검은 용의 형상을 띠었다.

그 것을 알아차린 르비아는 가볍게 웃으며 꿈틀거리는 그림자를 몇 번 어루만졌고, 야룬다 역시 그림자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거칠게 물결치던 그림자는 이내 잠잠해지고 평범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르비아도, 야룬다도 그림자에서 눈을 떼지는 않았다.

검은 용, 그란드리아가 그 뒤에서 휴식하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휴식에 지칠 때도 되었지. 하지만 그란드리아,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두르지 마세요. 황제는 지금도 기회를 보고 있어요."

얼마 전 미라야에 일어난 참극이 무엇 때문이었던가.

그것을 잊을 사람은 아니지만, 때때로 불안감은 필요치 않은 말까지 하게 만든다.

더군다나 이번 일로 레이븐마저 잃었다.

대정령과 계약하고, 스스로도 서사급의 주문을 만들어낼 정도의 실력자가 한 마디 연락조차 남기지 못하고 쓰러졌다면 황제의 움직임은 생각 이상으로 거친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정작 르비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황제의 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지금으로서는 고작해야 대의회를 소집하는 정도고, 그것만으로는 큰 의미가 없지."

"대의회에서 결정한 것을 무시하기는 어려울거에요. 황제에게도, 다른 대공들에게도, 사실상 대의회가 마지막 보루일테죠."

"······알고 있었나?"

야룬다의 입술이 소리없이 하나의 단어를 말했다.

르비아는 그것을 보며 쓴웃음을 흘렸다.

"그래, 가능성은 낮지 않아. 샤르세인이라면 발목을 잡아챌 정도는 될테지. 미라야가 전부 달려든다면······. 지진 않더라도 굉장히 귀찮을테고."

"방법이 없는건 아닌가보군요."

르비아는 장난스레 야룬다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미라야 방향으로 흘러가는 영맥 중 비교적 가까우면서 규모도 큰 줄기가 있는 걸로 알고있는데?"

"로셀 근방, 미라야와 아르타야로 나뉘어 흘러들어가는 것이 하나 있지요. 미라야에 직접 영향을 주려면 제도까지 들어가야 할거에요."

"대략적인 위치는?"

허공에 투명한 지도가 떠올랐다 시작했다.

얇게 펼쳐진 물과 얼음, 안개가 서서히 자라나 강과 산맥, 평야, 그리고 도시들을 정교하게 빚어낸 것이다.

샤르세인이 종종 보이는 재주와 흡사했지만, 대정령인 야룬다의 마력은 단순히 지형만을 표시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 아래 잠들어있을 영맥의 흐름까지도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야룬다는 그 위로 손을 움직여 한 지점을 짚었다.

조금 전 야룬다가 말한 것처럼, 로셀 근방에서 갈라져 크게 꺾이며 두 대공국으로 흘러가는 커다란 마력 줄기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레가야로부터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곳이다.

영맥이 가장 근접하는 지점이라고 해봐야 황제 직할령 내부. 제도 로셀에서 보자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고 할 수 있었다.

"까다로운걸. 하긴, 레가야와 직접 영맥이 닿았더라면 역대 미라야, 레가야 공들이 상대를 내버려뒀을 리가 없겠지."

르비아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직접 움직이기엔 위험할거에요."

"역시 레이븐이 아쉬워지는군. 아니, 레이븐이라고 해도 이번엔 역부족이었을지도 모르겠어."

수원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강이 되어 흐르듯, 마력 역시 자연적으로 모여 고이고, 흐른다. 전자를 마력천이라고 부르며, 후자의 경우가 영맥이다.

이 영맥이 대규모로 발달한 곳에서는 마력을 사용하기가 더 쉬워지며, 영맥을 끊어버리는 것은 그만큼 커다란 타격이 된다.

물론 한 두 명의 마법사가 시도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시원의 용과 계약한 르비아로서는 불가능한 일 까지는 아니다.

단지, 영맥을 고갈시켜버릴 정도로 마력을 불태우면 일시적으로 무방비한 상태가 됀다는 것이 문제다.

레가야 영내라면 결계로 마력을 빨아들일 수도 있고, 아예 적을 무력화시키는 것도 가능하지만, 대령결계의 유효범위는 황제 직할지까지 미치지 못한다.

문득 야룬다는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르비아를 살폈다.

예상대로, 르비아는 곤란하다고 말하면서도 조금은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말하더라도 직접 갈 생각이군요."

"조금 생각을 해 더 해 봐야지. 이것 참, 그런 얼굴 하지 마. 무리한 짓은 하지 않을테니. 게다가 대공비의 표정이 안좋으면 매일 얼굴을 마주해야 할 가신들도 불안해한다고."

"······당신을 말릴 수는 없겠죠.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야룬다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계약자의 태도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 * *



"신, 레가야 대공 카르티치스의 핏줄을 이은 자, 이스티엘 아르야 카르티치스가 제국의 주인이자 여섯 검의 주인, 파헬 산맥에서부터 로이아 해의 지배자이자 북의 빙원에서 남의 미투스에 이르는 모든 땅의 영주라는 허울좋은 이름을 가진 자, 아쉬칼페인 샤티네스 아르노 시엘 카이라 황제 폐하를 배알하나이다."

방 안의 시간이 멈췄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세 사람은 석상이나 된 듯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앞에 따라붙은 칭호들은 그들이 죽을 때까지 두 발로 채 돌아보지 못할 정도로 넓은 지역을 다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 뒤, 맨 뒤에 따라붙은 칭호는 무엇인가.

모욕이라면 이 이상의 말은 필요없을 정도로 훌륭한 도발이 아닌가.

"그 무슨 무엄한 말인가!"

예상대로 한 발 물러서있던 기사가 불같이 화를 내며 앞으로 나섰다.

순간적인 자세로 보아 아마 검이 있었다면 즉시 뽑혀나왔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탁자 위의 검에 닿으려는 순간 무언가에 걸린 듯 그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종잇장처럼 얇은 얼음이 한 겹 둘러져 탁자가 있는 중심으로 오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음의 강도는 대체 얼마나 되는 것이었을까.

에젤린드가 말아쥔 주먹으로 힘껏 후려치는데도, 얼음에는 작은 균열조차 가지 않은 채 고집스레 기사의 손길을 막아내고 있었다.

에젤린드는 억지로라도 얼음을 부수려는 것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단단히 움켜쥔 주먹을 끌어당겼다.

"에젤린드. 진정하라."

순간, 황제의 말이 막 얼음에 몸을 던지려는 기사를 가로막았다.

"하오나-"

"로이체 마인 에젤린드. 물러나라. 검을 들이댄 것도 아니야. 단순한 말장난에 과민하게 반응하지 말도록."

기사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에 맞춰, 황제라 불린 사내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티엘의 기억이 맞다면, 그는 아마도 삼십대를 갓 넘긴 젊은 얼굴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젊은 나이인데도, 그 얼굴에서는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고고한 분위기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고고한 바위, 혹은 깎아지른 절벽 중간에 뿌리내린 소나무.

어중간한 바람에는 흔들리지도 않을 듯한 인상이 전해진다.

스스로가 어떤 지위에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가져야 할 책임이 무엇인지 알고있는 자의 눈이다.

그러나 그 바위는 안쪽으로부터 스며나오는 약간의 열기까지 억누르지는 못했다.

허울좋은 껍데기.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욱 비참한 말이다.

침착하게 자신의 기사를 말리긴 했지만, 황제 역시도 티엘의 도발에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레가야 공 미노스티야의 영애. 역시 항쟁에서 살아남았군. 설마하니 이 땅에서 마주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말이야. 그래, 그대 역시 카르티치스의 사람이라는 것인가. 불가능을 태연하게 넘어선 뒤 내 앞에 똑같은 얼굴로 서는군."

이번엔 티엘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르비아와 동일선상에 놓이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황실을 능멸했다는 불호령보다도, 넌지시 에둘러 찌르는 그 말이 티엘의 심기를 더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신경전은 그리 생산적인 일이 아니다.

괜히 서로 감정만 깎아내리는 소모전에 내어줄 시간은 없다.

티엘이 조용히 분노를 삭히는 것을 눈여겨본 황제는 두 손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일종의 정전 협정이다.

"언제까지 신경전을 할 생각인가? 그리 유쾌하지 않은 만남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그러나 하나의 적을 두고 교차한 이상 서로에게 득이 되는 거래를 하는것이 좋지 않겠나?"

"진실된 거래를 원하신다면 거짓에 거짓을 더하는 것부터 그만두시지요."

그러나 티엘은 아직 정전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거짓이라 했나?"

"처음부터 제 권호를 지명한 것이 누구일지, 모를거라 생각하신건가요? 이 미라야 땅에 타국의 마법사가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 가운데 미라야 공과 직접 접촉한 이들을 찾는 것이 과연 그리 어려운 일일까요?"

갸름해진 자색의 눈동자가 퇴로를 끊었다.

미라야에서 보내진, 설원의 새벽의 지원을 청하는 밀서.

그리고 사라진 검은 가지의 기사들을 노리듯이 나타난, 이국의 마법사를 찾아 헤매는 대리인.

시름시름 앓는 티엘 탓에 마음이 급해진 탓에, 리아나 올로비스 모두 그 점을 잊고 있었다.

세 사람이 히랄디안 로실데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을 끼워넣는다면, 저 움직임은 하나의 선 위에 놓이는 것이 당연하다.

처음부터 황제는 티엘을 노리고 있었다.

황제는 티엘의 말에 별다른 부정을 표하지 않았고, 때문에 티엘은 그런 황제에게 다시 한 발의 화살을 날렸다.

"몇 가지 우연을 제외하면 우리, 아니, 제가 제국으로 건너와 레가야를 가로막는 것은 '당신'이 계획한 그대로일테죠. 이제와서 우연을 가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당신'이라는 호칭에 다시한번 에젤린드의 손이 꿈틀거렸다.

티엘의 말투는 여전히 도발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도발을 받아주는 황제는 처음의 동요 이후로 별다른 감정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티엘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이며 호응해준 그는 대수롭지 않은 것을 묻는 듯한 태도로 질문을 던졌다.

"그대 역시 현 대공에게 돌려받아야 할 것이 있을텐데. 이미 알겠지만 여기서 협력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도 내일은 없을 터. 서로의 미래를 위한 일에 나름대로의 보수까지 얹어준다면 나쁘지 않은 거래이리라 생각하네만?"

"······돌려받아야 할 것이라면?"

"잃어버린 계승권을 되찾으려는 마음, 정녕 없는것인가?"

티엘의 입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웃음이 아니다.

뿌득, 하며 이를 가는 소리가 음산하게 퍼지며 동시에 싸늘하게 식은 바람이 흘렀다.

노골적으로 적의를 보이면서도 얼굴에 드러내지는 않으려 애쓰던 티엘이었지만, 계승권이라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얼음 가면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말았다.

황제가 요구하는 것은 결국 당장 르비아를 막기 위한 협력만이 아니다.

르비아를 꺾은 후에는, 자신의 수족이 되어달라는 것이다.

레가야 공이 되어달라? 황제의 측근으로서 다른 대공국들을 견제해달라?

"그따위 의미없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 없어요."

대륙에서 손꼽히는 부귀도, 대공국령이라는 거대한 영지와 막대한 권력도, 세계 최강의 흑마법사라는 명예도, 동료들과 어울리며 기울이는 한 잔의 축배에 비할 바가 아니다.

티엘에게 필요한 것은 제국이, 황제가 내어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겨우 대공이라는 알량한 지위와 몇 푼의 재화로 자신을 사겠다는 말 따위, 받아들일 수 있을리 없다.

"항쟁이 있던 날 제가 잃은건 그까짓 계승권이 아니었고, 이제와서 되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제안할 것이 그 뿐이라면 '의뢰'는 다음 한 걸음 까지입니다."

하지만 티엘의 차가운 반응을 본 황제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그렇다면 날 불러세운 이유는 무엇인지 듣고싶군. 그대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그저 얼굴없는 계약관계로 폭주하는 레가야를 멈춰세우는 것으로 의무를 다했을터. 그런데도 그대는 굳이 이 불편한 자리를 만들어 나와 대면하기를 바랐지. 그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작가의말

약속편 시작합니다 :)


음... 정쟁이나 모살 같은건 역시 좀 더 공부를 해보고 다루는게 좋았겠지만....

사실 티엘이 제국을 싫어하는건 룬의 아이들의 보리스가 (정치에 큰 관심이 없으면서도)공화정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거에요.

체제로 인한 불화로 많은 것들을 잃었다는 불신감과 반발이랄까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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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시, 얼음의 용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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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15장-귀향歸鄕 (3) 19.11.12 68 3 24쪽
144 15장-귀향歸鄕 (2) 19.11.11 66 4 25쪽
143 15장-귀향歸鄕 (1) 19.11.10 67 6 24쪽
142 14장-약속約束 (18) 19.11.09 72 4 35쪽
141 14장-약속約束 (17) 19.11.08 66 4 29쪽
140 14장-약속約束 (16) 19.11.07 56 4 24쪽
139 14장-약속約束 (15) 19.11.06 60 4 35쪽
138 14장-약속約束 (14) 19.11.05 55 4 26쪽
137 14장-약속約束 (13) 19.11.04 54 3 27쪽
136 14장-약속約束 (12) 19.11.03 48 3 25쪽
135 14장-약속約束 (11) 19.11.02 57 4 27쪽
134 14장-약속約束 (10) 19.11.01 68 4 26쪽
133 14장-약속約束 (9) 19.10.31 65 3 26쪽
132 14장-약속約束 (8) 19.10.30 62 3 31쪽
131 14장-약속約束 (7) 19.10.29 59 3 27쪽
130 14장-약속約束 (6) 19.10.28 58 2 27쪽
129 14장-약속約束 (5) 19.10.27 64 4 28쪽
128 14장-약속約束 (4) 19.10.26 72 4 31쪽
127 14장-약속約束 (3) 19.10.25 62 3 30쪽
126 14장-약속約束 (2) 19.10.24 55 3 26쪽
» 14장-약속約束 (1) 19.10.23 65 3 27쪽
124 13장-인도引導 (15) 19.10.22 72 3 36쪽
123 13장-인도引導 (14) 19.10.21 61 3 26쪽
122 13장-인도引導 (13) 19.10.20 59 3 24쪽
121 13장-인도引導 (12) 19.10.19 54 3 26쪽
120 13장-인도引導 (11) 19.10.18 59 4 23쪽
119 13장-인도引導 (10) 19.10.17 64 3 33쪽
118 13장-인도引導 (9) 19.10.16 62 3 32쪽
117 13장-인도引導 (8) 19.10.15 62 3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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