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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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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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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31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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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14장-약속約束 (9)

DUMMY

핏빛의 선이 공간을 찢었다.

혈정령이 갈라낸 공간의 틈에서 폭발하듯 솟구쳐오르는 선혈의 안개는 무언가에 놀란 것처럼 통로 저 편을 향해 빠른 속도로 손을 뻗쳤다.

적대적인 마력을 집어삼켜버리는 라레스나의 피안개.

일정치 이하의 주문에 대해서라면, 그 방어력은 수호령인 파드마에 필적하는 강력한 방어주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몇 차례나 보아온 핏빛의 안개는 그동안의 믿음을 배신하듯, 너무나 허망하게 찢겨나갔다.

안개와 뒤엉킨 것은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탁하고 진한 검은색의 가시덩굴이었다.

마치 문어발처럼 꿈틀거리는 덩굴은 피안개를 완전히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힘없이 삼켜질 정도로 약하지도 않았다.

쉽게 먹혀줄 수는 없다는 듯, 발악에 가깝게 몸부림치던 마력이 찌그러져가던 리아의 은사를 단숨에 찢었다.

"파이드모스!"

피안개를 대신해, 그보다 한층 더 강렬한 적색의 마력이 어둠을 불살랐다.

그러나 저 검은 가시덩굴은 모습만 닮아있을 뿐, 진짜 덩굴줄기와는 전혀 다르다.

불길에 휘감긴 덩굴은 타들어가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을 공격했다는 사실에 화를 내듯 더더욱 맹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올로비스도 덩굴을 태워버릴 생각으로 화염령을 부른 것은 아니었다.

"벽, 이끼! 닿는것, 좋지 않다!"

벽면을 두텁게 뒤덮었던 이끼들은, 아직 직접 저 덩굴과 마주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리아의 은사를 타고 순간적으로 그 마력에 접촉했던 부분의 이끼들은 이미 죽은 채 새하얗게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죽음 속성의 마력이다.

"제기랄! 르비아란 놈 편집증이라도 있는거냐! 리아, 은사 끊어버려! 잘못하다 닿으면 우리만 피 본다!"

칼로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방패로 칼날을 밀어내듯 피안개를 힘껏 밀어붙였다.

다행히 검은 덩굴은 안개에 삼켜지지 않을 뿐, 대정령의 마력과 직접 힘겨루기를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격렬한 저항 속에서도, 천천히 두 마력이 부딪히는 접점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레나타!"

은사를 거둔 리아는 마침 바닥을 뒹굴던, 벽에서 떨어져나온 작은 녹석 조각을 집어들어 힘껏 던졌다.

허공을 가르던 돌 조각이 모습을 바꾸어 투박한 칼날처럼 변해 바람을 갈랐다.

그러나 검은 가시덩굴은 오히려 가소롭다는듯 그 돌멩이를 잡아챘다.

단단한 얼음을 깨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마력으로 강화된 녹석이 순식간에 바스라졌다.

"적당히 벽을 쳐서 끊어버리려 했는데······."

"놈도 그 정도는 눈치 채는거겠지."

칼로스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생령의 육신 일부라고 해도, 심장석이 있을 몸의 중심은 보이지 않는다.

심장석을 노리거나 상대 마법사를 직접 쓰러뜨리지 않는 이상, 아무리 찢고 태운다고 해도 무의미한 소모전일 뿐이다.

하지만 리아는 오히려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도 최악은 아닌걸? 저래봐야 육선급이야. 카즈나 칼리에는 못미쳐."

레나타는 아직 기사급의 문턱에 위치한, 비교적 젊은 생령이다.

그런 레나타보다 근소하게 우위에 선다면, 대정령인 카즈리엘이나 용인 칼라가스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육선. 무심한 접촉은 도달한 위험이다. 까다로워, 좁은 곳. 적은, 어디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이라도 하듯 또다른 공격이 날아들었다.

조금 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검은 물결이 일렁이며 쇄도해왔다.

먹이를 노리는 검은 상어 떼의 군무(群舞)를 연상케하는 수십 갈래의 마력탄이었다.

이번에는 티엘이 한 발 빠르게 움직였다.

비스듬하게 세워올린 얼음벽으로 마탄을 받아내는 동시에, 어깨로 벽을 때리며 탐색령의 마력을 흘려넣었다.

조금 전 장난삼아 마력을 공명시킬때와는 달리, 작정하고 흘려보낸 마력이 녹석을 타고 파문처럼 번지며 일대를 휩쓸었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복잡한 수로의 구조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거기에 더해 주위의 공기를 달구는 마력의 흐름 역시도 피부로 스며들듯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러나 티엘의 감각에 걸려드는 것은 가까이 있는 세 사람의 기척 뿐이었다.

밀물처럼 먼 곳에서부터 끝없이 주문을 날려보내는 적의 마력은 얼마 안되는 거리 너머로부터는 급속도로 옅어지며 그 기척을 감추고 있었다.

무언가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 안개같은 미지의 영역이 어디까지 퍼져있을 지는 미처 알 수 없었다.

"환각주문으로 몸을 숨기고 있어요. 슈니엘로는 무리에요!"

티엘은 신음을 흘리며 한 팔을 뻗어 얼음벽에 마력을 더했다.

리아는 재빨리 얼음에 카르나의 사슬을 감고 스펠글로스의 마력을 흘려넣었다.

"우와, 이 자식. 마력이 얼마나 넘치는 거야?"

마탄 한 발이 빙벽에 꽂힐 때마다 둔탁한 충격이 몸을 덮쳤다.

스펠글로스에 의해 상당량 상쇄되었을텐데도 서른 발 가량의 마력탄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는 얼음벽이 거의 다 부스러지고 말았다.

"망할······. 여기서 발목잡힐 수는 없는데."

환각계의 마력은 대상을 불사르는 불길이나 벼락, 혹은 단숨에 얼음기둥으로 만들어버리는 빙결처럼 화려한 전투를 선보이지는 못한다.

하지만 적의 오감을 속이고 거짓을 강요하며, 그 와중에 스스로는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몸을 숨기는, 실전상황에서는 그 어떤 속성보다도 무서운 마력중 하나다.

특히 지금처럼 실내나 지하에서 전투를 벌일 경우, 환각령의 힘은 더더욱 맹위를 떨친다.

개활지라면 적의 위치를 특정하지 못하더라도 광역 주문으로 주위를 휩쓸어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겠지만, 자칫하다간 천장이 무너져 생매장을 당할 위험이 있는 이런 지형에서는 그런 무식한 방법을 선택할 수는 없으니까.

환각을 걷어낼 수도 없고, 대지령으로 찾아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면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리아는 손톱을 깨물며 어둠 저편을 노려보았다.

또다시 어두운 통로로부터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형태로 공격해올 것인가.

티엘과 리아는 흔히 하던 것처럼 방벽을 치기 위해 조용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칼로스. 가능합니까? 적 감지, 비슷한 거."

그 때, 한 걸음 뒤에서 경계태세를 취하던 올로비스가 난데없이 칼로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게 가능했으면 진작 썼지. 건드리면 터지는 것 정도밖에 없어."

"붕괴, 피함, 가능?"

"그 정도는 돼."

"선풍의 질주는 가능?"

이번에는 질문의 방향이 티엘을 향했다.

티엘 역시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군. 티엘, 너는 여기서 발목을 잡히면 안돼. 레가야의 결계에 간섭할 수 있는건 너 하나 뿐이니까. 반대로 난 이런 좁은 공간에서는 제대로 공격을 시도할 수 없어. 솔페이람이나 파이드모스는 아군까지 위험하게 만들테니까. 반대로 칼로스와 리아는 불충분하게나마 상대의 위치를 감지하거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지."

"······여기서 갈라지자고요?"

"이렇게 시간만 끌어봐야 답답한건 우리 뿐이야. 게다가 너라면 몰라도, 나는 당장 여기서 별 쓸모가 없어. 의미없이 놀리는 자원이라면 다른 곳에 돌리는 쪽이 낫겠지."

어느새 자연스러운 왕국어가 줄줄이 쏟아져나왔다.

평소라면 왕국어를 전혀 모르는 리아를 위해서라도 애써 공화국어로 말을 이어보려 했겠지만,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아, 잠깐. 일단은 찬성이긴 한데 부분적으로는 반대."

그 때 라레스나의 피안개를 펼쳐 다음 공격에 대비하던 칼로스가 낮고 빠르게 속삭였다.

"저 녀석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레가야에서 온 녀석이라면 아마 그럴듯한 장소는 다 지키고 있겠지. 그럼 나랑 리아가 막는다고 해도 너희 둘만으로 그럴듯한 장소를 물색하긴 어려워."

"하지만 이런 좁은 장소에서 넷이 모여있는것도 위험한데요."

"그러니까 부분적으로 반대라니까. 티엘, 대충 방향이랑은 알고 있지? 어차피 지하 유적으로 이동할거, 여기서 바로 빠져. 어쨌건 길은 닦여있을테고, 어쩌면 이 길로 영맥에 가까이, 어쩌면 아예 접촉할 수 있는 부분까지 닿을지도 몰라."

칼로스는 부츠의 뒷굽으로 바닥을 탕탕 찼다.

단단한 돌이 무거운 반사음을 토해냈다.

물론 티엘이나 리아가 있는 이상 소리없이 바닥을 뚫는 것은 일도 아니다.

칼라가스의 도움이 있다는 전제 하에 티엘이 꿰뚫지 못할 물건은 어디에도 없고, 대지령이 도와준다면 부분적인 형태 변환으로 길을 여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서 두 사람이나 빠져도 되는 것일까.

"네 명 전부 은신 주문으로 숨는다면······."

"애냐로 넷을 다 숨긴다고? 일반인도 아니고 마법사 상대로면 다 들킬걸?"

티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아직 어린 애냐의 힘으로 네 명이나 되는 마법사를, 같은 환각령을 쓰는 마법사를 상대로 그 희미한 위화감마저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저쪽에 탐색령이 있다면, 애초에 전제부터 의미를 잃는다.

칼로스는 다시 한 번 못을 박듯 발끝으로 지면을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난 다치고싶은 생각 전혀 없어. 그리고 나도 방어전엔 자신이 있지. 리아가 도와만 준다면 용이 나타나도 둘 다 안전할 자신 있어. 근데 이러면 난 널 못도와줘. 올로비스는 방어전에서 별 힘을 못쓴다고 본인이 말했잖아? 데려 가. 물론 지하 유적에서 뭘 만날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란게 좀 걸리긴 해. 최악의 경우라면 다른 놈들이 지하 유적까지 내려가 함정을 쳐뒀을지도 몰라. 근데 지금 당장 급한 문제는, 우리한테 선택지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거야."

마지막 한 마디가 모든 것을 결정지었다.

티엘은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간만에 실력 발휘좀 해 보실까······. 카즈리엘!"

동시에 몇 개나 되는 혈문자가 허공을 수놓았다.

카즈리엘이 직접 마력을 불어넣은 혈문자는 제각기 연막처럼 짙은 피안개를 펼쳐 한 순간 통로를 완전히 메웠다.

공격을 막는 동시에, 시야마저도 완전히 차단되는 한 순간.

리아는 재빨리 그 틈을 타고 지면에 마력을 듬뿍 흘려넣었다.

자연석을 깎아 만든 벽돌들이 녹아내리는 사탕처럼 엉겨붙으며 푹 꺼지며 삽시간에 가장자리로 빙 두르는 나선형 발판을 가진 수직통로가 저 깊은 심연을 향해 입을 벌렸다.

"행운을 빈다."

"두 분도요."

티엘과 올로비스는 두 사람에게 뒤를 맡긴 채, 망설임 없이 깊고 깊은 어둠속으로 몸을 던졌다.

리아는 두 사람이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다시 지면을 움직여 입구를 막았다.

순식간에 좁은 통로가 어둠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혹시라도 마력의 움직임 때문에 발각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함부로 빛을 켤 수는 없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저 얼굴을 때리는 바람만이 그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안돼······. 더는······!'

티엘은 저리기 시작한 손발을 꽉 움켜쥐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강렬한 불쾌감이 가슴을 옭아맸다.

'큭······! 기억도 하지 못할 거라면, 이제와서 떨지 말란말야······!'

이미 떠올릴 수도 없는, 어느 과거의 흉터.

하지만 몸은 여전히 그 순간의 두려움을 간직한 채, 떨어진다는 행위에 얼어붙고 있었다.

더이상 참기 어려웠다.

잠깐이라도 멈춰서거나, 하다못해 발판이라도 딛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바닥에 부딪혀 죽어버릴 것만 같다는 근거없는 두려움을 억누를 수 없었다.

티엘은 부조리에 항의라도 하듯 각인이 뿌리내린 가슴을 힘껏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힘들면 여유있게 내려가. 먼저 가서, 살핀다."

그러나 역으로 올로비스는 벽을 박차며 오히려 낙하 속도를 끌어올리는 재주를 부렸다.

레나타의 힘이 과연 어디까지 닿았을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칫하면 생각보다 일찍 당도한 바닥에 충돌할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짓이다.

설마 바닥에 먼저 도착해 티엘을 받쳐줄 생각인 것일까.

하지만 당연히 주위 환경도 알 수 없는 상황에 개별적으로 진입하면 일종의 축차투입이나 다를게 없다.

올로비스를 혼자 위험에 처하게 둘 수는 없다.

이제까지 떨어진 시간을 헤아린 티엘은 리아와 칼로스가 있던 방향의 마력을 가늠해보았다.

조금 전과 같은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면 마력도 상당히 격렬하게 요동칠텐데도, 희미한 여파조차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지간히 강력한 공격주문을 쓰지 않는 한, 저 위에서도 이쪽의 마력 운용을 눈치채기 어려우리라는 뜻이다.

올로비스처럼 체술만으로 가속할 재주가 없는 티엘은 즉시 선풍의 질주를 발동해 올로비스를 따라잡았다.

"슈니엘!"

순식간에 손가락 사이로 짜올린 탐색령의 마력이 작은 보석으로 엉겨붙었다.

막 올로비스를 따라잡은 티엘은 있는 힘껏 활성화시킨 마정석을 아래로 집어던졌다.

쨍강!

두 사람보다 한참이나 앞서 내려가던 마정석이 한 순간 산산조각나며 사방으로 파편을 뿌렸고, 그와 함께 퍼진 순간적인 빛이 지면까지의 거리를 알렸다.

다행히도 바닥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남아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린 티엘은 적당한 높이에서 올로비스의 몫까지 선풍의 질주를 펼쳐 자유낙하로 인한 충격을 상쇄시키며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그리고 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미끄러지듯 몸을 움직이며 제 자리를 벗어났다.

혹시라도 적이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닐까.

마정석이 빛을 비춘 그 순간, 이미 두 사람의 위치는 어느 정도 드러난 상황이다.

혹시 소리로 위치를 파악당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에, 긴장으로 가쁜 숨조차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극도로 위축된 상태에서, 먼지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에도 반응할 정도로 예민하게 귀를 세웠다.

하나, 둘, 침착하게 다섯을 세고 난 뒤, 조심스레 몸을 똑바로 세워 또다시 다섯을 세었다.

열을 헤아리고도 시간이 남았지만, 공격은 날아들지 않았다.

"휴우······."

아찔했던 가슴을 쓸어내린 티엘과 올로비스는 각자 슈니엘과 파이드모스의 마력을 끌어올려 빛을 밝혔다.

두 사람이 내려선 곳은 운 좋게도 뻥 뚫린 복도였다.

단순히 어림짐작으로 땅굴을 팠을텐데도 상당히 정확한 위치 선정이었다.

"여기가 '노래'가 들려온다던 그 지하 유적인가······?"

무의미한 질문이다.

수로에서 여기까지 내려오며, 어림잡아도 일 분 이상은 넉넉히 소모했을 것이다.

하지만 복도라는 공간의 특성상,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일 분 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단조로운 풍경 뿐이었다.

또다시 내려가는 길을 찾거나, 힘으로 유적을 뚫고 내려가야 하는 것일까.

두 사람은 걱정스러운 눈길을 교환하며 무거운 걸음을 떼었다.

오래 묵은 지하의 공기는 상당히 탁했다.

곰팡이나 이끼가 잠식하지 않았더라도 한 곳에 지나치게 오래 머무른 공기를 마시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법이다.

게다가 얼마나 걷더라도 똑같은 석조 복도 뿐인 단조로운 풍경까지 가세하자 슬슬 폐소공포증 비슷한 것이 생겨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막 긴장이 흐트러지려던 순간, 이제까지처럼 대수롭지 않게 모퉁이를 돈 두 사람은 그 지겹던 복도가 끝났다는 것을 갑작스레 알게 되었다.

수십 개를 넘는 기둥들이 장엄하게 늘어선 거대한 회랑.

아니, 세웠다고 하기보다는, 깎아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기둥은 고개를 최대한 들어올려도 그 끝을 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곳까지 뻗은 채 천장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둥보다도 더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너머에 있는 또다른 풍경이었다.

완만한 경사를 그리며 아래로 뻗은 계단.

그리고 그 곳을 경계로 빽빽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모여든 돌의 무리.

그것은 벽이나 기둥 따위가 아니었다.

기둥을 세우고 벽을 둘러, 내부에 있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형태를 취한 것이라면, 그것은 더이상 일개 벽이나 기둥이 아닌, 건물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 살 만한 크기의 건물이 있었다.

가난한 이가 추위를 피해 겨우 몸을 녹일법한 작은 규모의 건물이 있었다.

현대와 같은 신을 모시는지는 모르지만, 한때는 종교적인 시설로 이용되었음직한, 종탑을 가진 건물도 찾아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회랑은 단순한 입구일 뿐이었다.

진짜는 그 앞.

얼마나 되는 세월을 잠들어있었을 지 모르는 거대한 지하 도시가 모처럼 찾아온 방문자들을 향해 가슴을 열어보이고 있었다.

"올로비스. 저희, 환각을 보는건가요······?"

"땅 밑의 도시······."

실제로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광신에 가까운 경건한 수행의 결과라고 여겨질 정도의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심지어 단순히 암반을 깎아 만든 도시라고 해도 놀라운 위업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을 놀라운 것은, 건물을 이루는 돌의 색이었다.

암반을 깎아 만든 어두운 청회색의 건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에 들어오는 건물의 절반은, 유적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녹색의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상식을 아득하게 벗어나는, 몽환적인 풍경이었다.

이토록 깊은 지하에 과연 무엇을 위해 도시를 만들어야 했던 것일까.

이미 대답할 이가 남아있지 않을 도시는, 수수께끼를 내밀듯 침묵을 지켰다.



* * *



다행히, 헛된 감상에 시간을 낭비할 정도로 무른 사람은 없었다.

올로비스는 재빨리 단검에 기름먹인 천을 감아 만든 임시 횃불을 티엘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창 끝에도 마찬가지로 횃불을 단 뒤 조명삼아 들고있던 불꽃을 없앴다.

마력을 아끼려는 행동이었다.

티엘도 금새 올로비스의 뜻을 눈치채고 슈니엘의 마력을 회수한 뒤 횃불을 높이 들어올렸다.

"일단 레가야에서 보낸 마법사는 더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노래. 어쩌면 저 앞, 노래 원인일지도."

상층에서 들었던 노래를 떠올리니 싸늘한 오한으로 몸이 떨렸다.

기사급에 근접한 생령들끼리 격렬하게 부딪히는 마력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머나먼 거리에서 그 정도로 강렬한 마력을 뿌리는 존재라면, 과연 가까운 거리에서는 얼마나 강렬한 힘을 발휘할지 모른다.

단순히 힘을 겨루는것 뿐이라면 칼라가스가 밀려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힘을 쏟아내고도 무사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은 조금도 없다.

'마력을 머금는 돌. 그리고 영맥. 확실해. 이 도시는 무언가를 가두기 위해 만들어졌어. 단순한 마령같은게 아니라, 더욱 더 무서운 무언가를······.'

갑작스레 공격을 받기 전 유적 전체를 뒤흔들었던 '부름'의 근원은 분명 저 도시의 어딘가에 있다.

처음부터 무언가를 봉하기 위해 만들어졌든, 아니면 다른 용도로 만들어진 도시에 어쩔 수 없이 그 것을 가두어 둔 것이든, 이 도시가 품은 최후의 목적은 아마도 그 '부름'을 가둬두기 위한 관이었으리라.

티엘은 길게 심호흡을 하며 각오를 다졌다.

수백 수천 년을 살아온 생령이라면, 성장을 위해 필요한 그 막대한 양의 마력을 얻기 위해서라도 영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마주칠 가능성은, 결코 적지 않았다.

"싸움은 요구하지 않아. 최대한 숨 죽여. 그리고 일 끝나면 도망에 이른다. 토벌, 아니니까."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있던 티엘의 어깨로 듬직한 손이 내려앉았다.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준 손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자신의 가슴을 향했다.

"일대 일 조건, 시간 버티는건 맡겨. 잘 할수 있어. 너는 분명해. 나가는 길에서 도약하는 주문은 쓸 수 있고. 많은 걱정 하지 마."

별거 아닌 격려라도 좋다.

아플 정도로 경직되던 어깨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고개를 끄덕인 티엘은 뒤늦게 떠올린 도약 주문서를 한 묶음 올로비스에게 내밀었다.

올로비스는 두 말 하지 않고 주문서를 받아 빠르게 꺼낼 수 있도록 조심스레 갈무리했다.

"그럼······, 가죠."

영맥이란 거대한 강과 같다.

작은 실개울이 모여 대하를 이루는 것처럼, 자연적으로 고인 마력들이 제각기 흐르다 한데 모여 땅 속을 흐르는 거대한 물길을 만든다.

때문에 마법사는 영맥에 가까워질 수록 피부를 휩쓰는 마력의 감촉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다.

처음 칼로스의 말을 들었을 때는 설마 영맥이 있는 지점까지 유적이 이어지겠냐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전신이 모래바람을 맨몸으로 견디는 것처럼 따끔거리는 이상, 저 지하도시 안에 거대한 영맥의 지류가 흐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유적을 헤치고 들어가자 영맥이 흐른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또다른 증거가 나타났다.

도시 전체에 마력을 공급하기 위해 흔히 설치하는 마력로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함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침입자를 공격하는 뇌인(雷刃)이나 화염벽, 혹은 영원한 백일몽 등의 함정은, 아직까지도 곳곳에 살아남은 채 희생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력로도 없고, 일일이 마석이나 마정석을 설치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수의 마법 함정들이라면, 아마도 영맥으로부터 직접 마력을 공급받는 것이 분명했다.

"조용해. 기분 나빠."

그러나 이상하게도, 숨이 막힐것만 같은 무거운 정적이 유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상층 유적에 머물 때는 상당히 짧은 간격으로 연속해서 들려왔던 노래가, 지하도시로 들어온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들려오지 않았다.

단순히 잠들거나, 더이상 노래를 부를 기력이 없는 것이라면 환영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본능은 결코 그럴리가 없다며 신경줄을 타들어가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의 정적은 미끼다.

'무언가'가 먹잇감이 도망칠 수 없도록 숨을 죽인 채,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깊숙히 들어오길 기다리는 것일 뿐이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그들의 직감은 그럴리 없다며 한없이 경종을 울렸다.

한 걸음, 앞으로 한 걸음만.

언제부터인지, 티엘은 마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이 죽어버린 도시 어딘가에 있을 '그것'과 마주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내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내딛는 걸음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아아아아아아아아-!

두 사람의 발걸음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유적의 안쪽으로부터, 마침내 '노랫소리'가 터져나왔다.

수천 년간 비어있던 도시를 울리는 노래는 놀랍게도 인간의 목소리와 닮아있었다.

어둠 속에 홀로 선 채, 고독하게 노래하는 처연하고 애틋한 목소리.

그렇기에 더더욱 음산하고, 소름끼친다.

그것은, 저승의 바람처럼 심장을 싸늘하게 얼리는, 인간이 들어서는 안될 저주받은 노래였다.

손에 들려있던 횃불이 힘없이 굴러떨어졌다.

티엘은 이상할 정도로 느릿해진 손을 들어 두 귀를 꽉 틀어막았다.

그러나 노랫소리는 그런 티엘의 무력한 저항을 비웃으며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만······. 그만해······. 부탁이니까, 제발······!'

눈앞이 아찔거렸다.

턱이 덜덜 떨리고, 다리는 힘없이 꺾여버린다.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뒤섞인 목소리가 전신에 녹아들며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이 왜곡된 색채가 눈 앞에서 어지럽게 휘몰아쳤다.

본능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려 저항을 해 보아도, 밀려드는 파도를 두 손으로 막으려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목소리는 티엘을 비웃듯 온 몸으로 스며들었다.

몸 안쪽이 점점 뜨거워지고, 녹아내려, 이내 파열할 듯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혼미해진 정신도, 진흙탕같은 심연에 삼켜져갔다.

점점 스스로가 누구인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모조리, 질척거리는 진흙탕처럼 녹아내려, 뒤섞인다.

'시, 싫어······. 싫어어······!'

약하고, 힘없는 거부.

의미를 둘 수조차 없는 덧없는 저항.

티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나름대로 각오는 했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허망하게 당해버리는 건가?

이럴 줄 알았더라면 또다시 기억을 잘라내더라도 칼라가스의 마력을 불러두는 편이 좋았을지도 몰랐다.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빠르게 흐려져가는 의식이 때늦은 후회를 곱씹었다.

"······미안. 티엘. 이후, 사과한다!"

눈이 감기려는 순간, 올로비스의 고함소리와 함께 왼쪽 어깨에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파고들었다.

"으큭, 아아악!"

뜨겁고, 아프다.

그 순간적인 고통이 몽롱하던 머릿속의 안개를 단숨에 걷어냈다.

"오, 올로비, 스?"

동시에 어깨의 통증도 한꺼풀 가림막을 벗기는 것처럼 더더욱 선명해졌다.

티엘은 고통에 몸서리를 치며 어깨를 살폈다.

조금 전 티엘이 떨어뜨렸던, 횃불 대용으로 사용하던 단검이 깊숙히 박혀있었다.

마찬가지로 올로비스의 팔뚝에도 아직 뜨거운 피가 뿜어져나오는 깊은 상처가 새겨져있었다.

흐려진 의식을 고통으로 억지로 깨운 것이었다.

"정신 회복? 일어나는 수 있어? 우선 물러나야 해. 여기, 위험해."

올로비스 덕분에 정신은 차렸지만, 여전히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저리는 다리를 애써 딛으려 해도, 한 순간도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 채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올로비스가 티엘보다는 영향을 덜 받았다는 것일까.

올로비스는 제대로 걷질 못하는 티엘에게 어깨를 빌려주며 조금 큰 걸음으로 도시 외곽을 향해 움직였다.

아예 지표까지 도망치지 않는 이상 노래의 영향권을 완전히 벗어나긴 어려울테지만, 조금이라도 멀어진다면 결계를 펼쳤을 때 와 닿는 부담을 크게 줄일 수는 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치는게 아닌 한, 지금은 이렇게 거리를 벌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작가의말

오늘, 처음으로 후원이라는 것을 받아보았습니다.

최근 몇 가지 일로 조금 심란하던 차에, 제 글을 그렇게까지 재미있게 읽어주신 분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정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혹시 이름이 노출되면 부담스러우실까봐 여기에 적지는 않겠습니다만,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새벽의 시, 얼음의 용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도 앞으로도 더더욱,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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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15장-귀향歸鄕 (2) 19.11.11 66 4 25쪽
143 15장-귀향歸鄕 (1) 19.11.10 67 6 24쪽
142 14장-약속約束 (18) 19.11.09 71 4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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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14장-약속約束 (16) 19.11.07 56 4 24쪽
139 14장-약속約束 (15) 19.11.06 60 4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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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14장-약속約束 (13) 19.11.04 54 3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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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14장-약속約束 (11) 19.11.02 57 4 27쪽
134 14장-약속約束 (10) 19.11.01 68 4 26쪽
» 14장-약속約束 (9) 19.10.31 63 3 26쪽
132 14장-약속約束 (8) 19.10.30 62 3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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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14장-약속約束 (1) 19.10.23 64 3 27쪽
124 13장-인도引導 (15) 19.10.22 72 3 36쪽
123 13장-인도引導 (14) 19.10.21 61 3 26쪽
122 13장-인도引導 (13) 19.10.20 59 3 24쪽
121 13장-인도引導 (12) 19.10.19 54 3 26쪽
120 13장-인도引導 (11) 19.10.18 59 4 23쪽
119 13장-인도引導 (10) 19.10.17 62 3 33쪽
118 13장-인도引導 (9) 19.10.16 62 3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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