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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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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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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09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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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5쪽

14장-약속約束 (18)

DUMMY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사방에서 울려, 정확한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이미 황성을 떠났을 르비아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티엘은 당황하는 대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몸을 돌리며 손을 뿌렸다.

어느새 손 안에서 자라난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먹이를 노리는 제비처럼 날렵하게 어둠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상대는 상대는 제법 예리한 파편을 피하지도 않았다.

날벌레를 쳐내듯, 그 투박한 투검을 손등으로 가볍게 쳐낸 르비아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몸을 바로세웠다.

르비아가 기대고 있던 벽의 그림자에서 걸어나오는동안, 티엘 역시 조용히 몸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던 얼굴은 이미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을까.

마치 장난을 치듯, 칼로스가 떠나는 순간부터 넌지시 인기척을 흘렸던 르비아가 어두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위험하지 않느냐."

"농담은 그만 둬요. 애초에 꿰뚫어 볼 수 있을정도로 약한 환영이면서."

티엘의 눈동자는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삼아 황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탐색령의 마력을 빌린 일시적인 마안(魔眼)이다.

물론 '환혹의 그림자' 속성을 지닌 환각령 유라칼드는 르비아가 가장 처음으로 계약을 맺어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생령이다.

르비아가 전력으로 펼친 환각이었다면 아직 정령이라 하기에도 조금 힘이 모자란 못한 슈니엘로는 대항할 수 없다.

티엘은 여차하면 칼라가스를 불러들일 준비를 하며 주의깊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르비아는 그 모습을 보며 진정하라는 듯 비어있는 두 손을 들어올렸다.

"위험하다는 것은 날 눈치채고도 등을 보인 것을 말한 거다. 내게 그리도 날을 세우면서 보일 태도는 아니지. 반격은 나쁘지 않았지만, 승리를 자신할 수 없는 상대라면 작은 빈틈도 위험하다."

서로의 거리, 그리고 바람소리 때문에 대화를 나누기에는 적절치 않은 장소였지만, 르비아의 목소리는 그리 높지 않았다.

표정도 지극히 평화로웠고, 복장 역시 방어와는 거리가 먼 단순한 옷이다.

물론 환영으로 빚어낸 모습이니, 갑옷을 걸치던 평복만을 걸치던 의미는 없다.

하지만 단지 환영을 투사하는 것 뿐만은 아니었다.

아직까지 본체쪽에서 제어할 수 있는 거리 안에 있는 것인지, 마력의 사용에 별다른 제약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선제공격은 하지 않는다는 것은, 최소한 지금 당장은 공격할 의지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당연히 티엘은 경계심을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르비아가 그 상태로 한 걸음 다가오자 신중하게 거리를 유지할 뿐이었다.

다시 한 걸음 다가오고, 물러난다.

가장자리에 다다른 티엘은 다음에는 그대로 뛰어넘을 생각인 듯, 허리 높이의 벽에 망설임없이 손을 짚었다.

선풍의 질주가 있는 한, 이 높이에서도 떨어져 죽을 일은 없다.

불현듯 얼어붙는 몸을 스스로 채찍질한 티엘은 그대로 벽 위에 올라섰다.

르비아는 혀를 차며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지금의 이 거리가 두 사람에게 있어서 최대한의 양보였다.

"날카롭군. 강하고, 아름다워. 네가 이리도 성장한 모습을 보니 기쁘구나."

"조롱하는건가요?"

"그 정도로 썩지는 않았다. 히니에가 만발했던 정원에서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니까."

티엘의 표정이 한층 더 쌀쌀하게 얼어붙었다.

그녀의 주위로 공기중의 수분이 영겨붙으며 밤송이처럼 뾰족뾰족한 얼음결정으로 변했다.

문득, 한 줄기의 마력이 바닥을 타고 흘렀다.

두 사람 사이의 중앙까지 달려간 마력은 단번에 솟구쳐오르며 여러 개의 날카로운 창살로 변해 긴 선을 그렸다.

솟아오른 고드름의 행렬은 르비아에게까지는 닿지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놓여진 감정의 골을 나타내기에는 충분했다.

"그 날 똑똑히 말했을텐데요. 우리 사이에는 이미 치울 수 없는 칼날이 있다고."

티엘은 괴물의 이빨처럼 날카롭게 세워진 벽 너머로 적의를 흩뿌렸다.

"하지만 그 날, 너는 듣지 못했지. 난 널 죽이고싶지는 않다."

"그 말, 지금 믿으라 하신 건 아니겠지요."

르비아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걷혀있었다.

진심이라는 것을 믿어달라는 듯, 어둠 속에서 검푸르게 보이는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아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믿을 수 있으랴. 이스티엘이라는 한 사람의 대부분을 파괴해버린 뒤에, 죽일 생각은 없다고?

목줄이라도 채워, 애완동물로 삼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아니, 진심이다. 네 죽음을 원한 적은 없어."

"······간사하군요. '개인적'으로 원한적은 없다는 말이니.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을지 몰라도, 죽여야 할 이유가 있다면 당신은 그렇게 하겠죠."

"그렇다면 어쩔테냐. 찌를테냐?"

르비아는 양 팔을 벌린 채 다시 몇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어차피 환영일 뿐이지만, 그 태도만큼은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찌를테면 찔러라.

티엘은 섬광처럼 빠른 손으로 우라실을 꺼내들었다.

우라실의 칼날에 깃든 강력한 빙결주문, 그리고 티엘과 칼라가스의 고유 속성. 셋 모두, 하나의 속성으로 겹쳐진다.

그 중첩은 짧지만, 술식이 없는 마력방출만으로도 기사급 생령과 대치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을 낼 수 있다.

순간적으로 우라실의 칼날에 얼음이 엉겨붙으며 한 자루의 가늘고 긴 검으로 변했다.

티엘은 이제까지 팽팽하게 유지하던 거리를 깨고 단번에 르비아와의 거리를 좁혔다.

피하지 않는다.

르비아는, 정말로 검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입가에는 여전히 그 뻔뻔한 미소를 담은 채로.

티엘은 뿌득 이를 악물며, 있는 힘껏 발을 내딛어 칼날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검은, 뜻밖에도 르비아의 심장 바로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찌르지 않는거냐."

거리가 모자랐던 것은 아니다.

겨우 손끝만 움직이더라도 충분히 심장을 찌르기엔 충분한 거리였다.

그러나 칼날은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자세 역시 미동조차 없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휘말린 티엘의 머리칼이 조용히 나부끼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시간이 멎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만큼.

르비아는 가슴을 내어준 그대로, 그 자리에 못박혀 움직이지 않는 티엘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네 말대로, 이유가 있다면 내키지 않는 피라도 기꺼이 묻힐 책임과 의지가, 내겐 있다."

한숨같은 고요한 목소리는 비웃음을 머금고 있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그 목소리에 스며든, 안타까워 하는 탄식을 삼키는 감정은.

"하지만 너는 어떻느냐. 환영이기에 찌르지 않은 것이 아니다. 넌 이곳에 내 진짜 심장이 있었더라도 찌르지 않았을테지. 어째서지? 겨우 그 정도의 분노였느냐? 겨우 그 정도의 각오였느냐? 네가 잃은 것들은, 고작해야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하찮은 것들이었느냐?"

뿌드득.

어금니가 바스라지는 듯한 소리가 몇 번이고 들렸다.

물론, 과거의 기억을 잃어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하찮다고 모욕하는 것을 허락할 리는 없다.

떠올리지 못하더라도, 가슴은 분명 미친듯이 울고 있으니.

"여기서 당신을 찌른다면 분명 내 안의 뭔가가 깎여나갈테죠. 원망, 분노, 그 많은 것들을, 겨우 그림자 따위에 무의미하게 던져버리고 싶진 않아요."

가까스로 대답을 꺼낸 티엘의 목소리는 일부러 공격을 멈췄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매서운 살기가 묻어났다.

그러나 이내 파르르 떨리는 손을 억지로 끌어내려 검을 치운 티엘은 뜨거워진 숨을 토하며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차라리 죽고 죽이는 걸로 끝날 수 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텐데요. 그렇지 않나요?"

"그랬겠지. 서로 납득하지 않고서는 끝날 수 없는 이야기였지."

르비아는 소리없이 웃었다.

모든 것을 버려가며 이 자리에 선 그와, 버려지려는 것마저 끌어안고 걸어온 티엘.

정 반대의 궤적을 그리면서도 결국 서로에게 되돌아오고 마는 것은, 그야말로 거울과도 같지 않은가.

"네 삶은 무겁구나. 그걸 모두 짊어지고, 어찌 걸어나가겠다는 것이냐."

"앞으로 희생될 것들이 더욱 무거우니까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아니. 알고 있다. 지나치게, 사무칠 정도로······."

잘못 들은것일까.

순간 티엘은 르비아가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고개를 든 르비아는 티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공격? 아니면 저주?

주문을 자아낼 틈도 없이, 수호령 파드마의 마력이 티엘의 전신을 갑옷처럼 둘러쌌다.

그러나 르비아는 마력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저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티엘의 얼굴을 쓰다듬듯, 허공을 어루만지며 잔잔한 미소를 던졌을 뿐이었다.

"정말이지, 너는 예전부터 변하는 일이 없구나, 우리 사이에 이렇게까지 많은 피가 흘렀는데도 이곳에 있는 것은 옛날의 너로구나."

순진하고, 정에 약했던, 다정한 어리광쟁이 소녀.

그로부터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르비아의 눈에는 이미 티엘 자신조차 떠올릴 수 없는 과거의 모습이 남아있는 것일까.

"······어리다고 비웃는건가요."

"무르다고 비웃는게 아니다. 분명 겉은 차갑고, 날카로워졌지. 너의 용이 두르는 얼음처럼, 아름답지만 가까이 할 수 없어. 하지만 그 껍질 안은 여전히 애정깊고 여려. 네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간 날 보면서도, 얼음속에 온기를 품고있지. 부정할 수 없을테지? 그걸 누군가는 약함이라고, 어리석음이라고 부를테지만······, 난 아직까지 물들지 않은 너의 순수함이 부럽구나. 떠나는 날 잡고 돌아오길 약속하라던 네 모습은······, 아직까지도 잊지 않았으니까."

티엘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언제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약속.

얄궂게도, 르비아가 미라야로 떠나던 날 나눴던 약속은,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올릴 수 있었다.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

언젠가 돌아와, 곁을 지켜주겠다는 약속.

하지만 그 천진난만한 약속은 훗날 항쟁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 순간 무언가 소중한 것이 깨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건드려서는 안되는 한 점 더러움 없는 성역을, 피와 죽음에 물든 손으로 함부로 더럽혀지는 참혹한 기분.

억누르던 분노가,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

티엘은 손 안에 든 우라실을 있는 힘껏 쳐올렸다.

순간 투명한 호선이 달빛에 번뜩이며 칼끝을 따라 얇은 얼음이 파도치듯 넓게 펼쳐졌다.

흩뿌린 물결처럼 일어난 파도가 삽시간에 얼어붙어 투명한 반월의 칼날로 자라났다.

르비아는 파도처럼, 혹은 채찍처럼 흩뿌려지며 밤의 어둠을 갈르는 얼음 칼날을 피해 재빠르게 몸을 틀었다.

면도날처럼 예리하고 얇은 얼음이 아슬아슬하게 르비아의 얼굴을 스쳤다.

하지만 르비아는 주머니에 찔러넣은 손을 빼지도 않은 채 여유롭게 티엘의 공격을 피해버렸다.

촤아아악, 파사삭!

등 뒤에서 얇은 얼음이 단단한 돌을 가르며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르비아는 성벽에 난 상처를 흘끗 바라보았다.

성벽에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 깊이의 커다란 흠집이 패여 있었다.

칼날이 닿지도 않은 목을 어루만지던 르비아는 조금 흐려진 눈을 들었다.

"과거의 추억을 더럽히지 말라는 뜻이냐."

"그 시절은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소중한 추억이에요. 과거에 사로잡히긴 싫어도, 그런 식으로 흙탕물에 던져버릴 기억은 아니에요."

티엘은 빗나간 칼날의 궤적을 살피며 담담하게 말했다.

겨우 검격 한 번으로 뜨거워진 분노를 가라앉힌 것인가.

르비아는 잠시 경의를 표하듯 고개를 숙였다.

과거라는 상처에 물 한 방울만 닿아도 되살아난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녀가, 이제는 검을 휘두르면서도 동시에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 성장의 과정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 어떻게 그 모든 일을 헤쳐온 것인지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기회를 던질 때가 왔다.

르비아는 짙은 아쉬움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애석하게도 달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곳곳에 비어있는 하늘로는 반짝이는 별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지난 번, 그 음유시인을 통해 초대장을 보냈었지. 넌 거부했지만, 결국 이 자리에 나와있어. 내 마음대로 널 휘두를 수는 없겠지만, 너 역시 내 손을 완전히 벗어날 순 없지."

무엇을 할 생각이지?

극도로 감정을 억누르던 티엘의 얼굴에 희미하게 의문의 빛이 스며나왔다.

마치 철의 성벽에 작은 균열을 만든 느낌이었다.

르비아는 그 티엘의 얼굴을 덮은 얼음 가면이 깨지면 어떤 표정이 드러날 지 기대하며 마지막으로 준비해둔 포석을 깔았다.

"곧 바람이 불거다. 변화의 바람, 광기의 바람이 불거야. "

"······무슨 생각이죠?"

"황제가 족쇄를 걸었지만 내가 할 일은 바뀌지 않아. 이미 필요한 것은 전부 손에 넣었다"

르비아는 어둠속에 잠겨있는 지평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너머에 있을 무언가를 움켜쥐듯, 그의 손가락이 힘있게 꿈틀거렸다.

"멜람에선 꽤 애를 썼겠지만, 이미 축적된 마력은 이미 인간의 인지를 벗어날 지경이지. 원한다면 수십 체의 용도 탄생시킬 수 있을 만큼······. 그래, 무엇이든 이뤄낼 수 있는, 그러나 어떤 의지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신화적인 힘. 그렇다면 내가 이 힘으로 무엇을 할 것 같지?"

마력천. 그리고 대륙을 아우르는 거대한 마법진.

순간 티엘은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로셀에서의 그 모든 움직임은 그가 마법진을 완성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

그런데, 정작 르비아는 이미 마법진을 완성시켜 발동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단 말인가?

"아직도 목마른건가요? 얼마나 더 많은 생명을 삼켜야 만족하거죠? 얼마나 더 많은 죽음을 쌓아야 만족할거냐고요!"

한 줌의 흙은 개울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폭우로 밀려든 흙모래라면 개울의 흐름을 바꾸고, 바다를 메울 흙이라면 개울따윈 애초부터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시원의 용만 해도 이미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힘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단신으로 하나의 국가조차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성좌의 주인, 시원의 계약자다.

그런 르비아가 '신화적'이라고 말할 정도의 마력이라면, 그리고 그 마력으로 움직일 마법진이라면, 그 기동만으로도 여파는 상상할 수 없었다.

무수한 죽음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이다.

흑마법사인 르비아로서는 아무리 막대한 마력이 있어도 그것을 온전히 창조의 힘에 쓸 수 없다.

열을 만들어낸다면, 그 대가로 스물을 망가뜨릴 뿐.

단순히 마력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마력을 이기지 못한 지맥은 뒤틀리고 깨질 것이다.

응집된 마력은 기후조차 바꿔버리고, 자칫하다간 제어를 벗어나 전 대륙을 집어삼킬지도 모른다.

삼월의 자매가 보여주었던 그란드리아의 폭주가 눈앞을 스쳤다.

마른 침을 삼킨 티엘은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우라실을 더욱 그러쥐었다.

그런 티엘의 반응을 고요한 눈으로 살피던 르비아는, 티엘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는 것처럼 단순한 어조로 대답했다.

"간단해. 이 세상 전부. 그 말고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태연자약한 목소리가 전혀 뜻밖의 이름을 불러냈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티엘은 화를 낼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세계정복이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가 이뤄낼 무언가는 이 세상 전부를 희생할만큼 값진 무언가란 말인가?

"티엘, 너는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경악한 티엘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것과는 반대로, 르비아는 옛날 이야기라도 들려주려는 것처럼 느긋한 얼굴이었다.

"여신 아이넬라가 만들고 마신 엘드리안이 멸한다. 그렇다면 여신은 어째서 이 세상의 혼돈을 바라보고만 있을까. 명백히 질서에 어긋나는 작태들, 수많은 악행들, 너는 한 번이라도 여신이 그것에 개입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무슨······. 지금, 무슨 말이 하고싶은 거죠?!"

"단순한 이야기다. 신을 직접 이 세계에 불러내, 그 과오를 묻겠다는 이야기다."

티엘은 반사적으로 각인이 있는 자리를 움켜쥐었다.

심장이 거칠게 뛰며 각인을 달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흑마법사인 르비아가 신을 부른다면, 그것은 분명히 멸신, 마신룡 엘드리안이다.

세계의 마지막 날 강림하여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린다는 혼돈과 소멸의 강림.

엘드리안이 강림한다면 티엘 따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니, 티엘 뿐만이 아니다.

그 누구라도 세상을 만들고, 거두는 존재들을 막을 수는 없다.

무력하게, 모든 것이 사라질 뿐이다.

티엘은 격렬한 거부를 담아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아그르르르, 크아아아아악!"

한 순간 르비아의 그림자에서 시커먼 형체가 튀어나왔와 톱날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아라그낙스의 사냥개······.'

포악한 이계의 엽견들은 순식간에 벽을 타고 뒤를 돌아 티엘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티엘은 제자리에서 몸을 돌리며 역수로 쥔 우라실을 그었다.

소환된 사냥개는 두 마리.

한 마리는 피할 새도 없이 우라실의 칼날에 찔려 절명했고, 다른 한 마리는 간신히 동료의 몸을 방패삼아 몸을 틀었다.

"유라칼드."

순간 두 번째 사냥개의 모습에 나셀의 모습이 덧씌워졌다.

재차 찔러들어가던 단검이 움찔 놀라며 물러섰고, 그 틈을 타 사냥개는 티엘의 사각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칼라가스!"

그러자 티엘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얼음기둥을 강제로 폭발시켰다.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터지며 흩뿌린 무수한 파편이 두 번째의 사냥개를 덮쳤다.

지근거리에서 칼날같은 얼음조각의 세례를 받아버린 사냥개는 비명조차 남기지 못한 채 순식간에 소멸해버렸다.

파편을 피하기 위해 몸을 숙였던 티엘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칼날을 세차게 흩뿌렸다.

칼날에 묻어있던 사냥개들의 잔해가 바스라져 떨어지며 달빛에 어슴푸레한 빛을 뿌렸다.

"끝까지 내게 검을 겨누지는 않는것이냐."

처음부터 사냥개들이 티엘을 건드리지도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가 다소 소름끼쳤다.

어디까지나 여흥이라는 것인가.

신이라도 되는 양, 자신을 시험하려는 것인가.

우라실을 쥔 손에 다시 쓸데없이 힘이 들어가려는 것을 막은 티엘은 그 투명한 칼날을 다시 칼집으로 되돌렸다.

본체가 아닌 그림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리하게 검을 뽑아들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의 변덕에는 어울려주지 않겠다는 듯한 반응에, 오히려 르비아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휘리리리-

바람이 방향을 바꾸었다.

르비아를 중심으로 스멀스멀 피어난 마력이 성벽의 돌을 조금씩 바스라뜨리며 티엘에게 팔을 뻗었다.

티엘의 주변에서도 그에 대항하듯 싸늘한 한기가 흘러나왔다.

일렁이며 혀를 날름거리는 흑과 백의 마력이 서로 부딪히며 소리없는 전쟁을 시작했다.

밀고, 당기고, 휘몰아치다, 흩어지며, 수만의 군세끼리 격돌하는 모습을 축소시킨 것처럼 역동적으로 날뛴다.

르비아는 재미있는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점점 마력의 양을 늘려나갔다.

마찬가지로 조금씩 마력을 올려가던 티엘의 눈이 한 순간 푸른 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만-"

아슬아슬하게 주고받던 힘겨루기의 판도가 단숨에 꺾였다.

놀랍게도 균형을 깨뜨리고 우세를 점한 것은 칼라가스의 마력이었다.

갑작스레 밀려닥친 한파가 성벽 위를 휩쓸며 주위로 새하얀 서리꽃을 피워냈다.

마지막까지 꿈틀거리며 저항을 시도하던 르비아의 마력이 순식간에 짓눌려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티엘의 마력도 언제까지나 성벽 위에 남아있지는 않았다.

일부러 마력을 짧고 강하게 분출해 쓸데없는 힘싸움을 끊어버린 티엘은 섬광처럼 뽑아든 우라실을 르비아의 발치로 던졌다.

투명한 칼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히 박힌 단검은 한참이나 바르르 떨며 얼마나 강한 힘으로 던져진 것인지를 열변하고 있었다.

"물러나요. 그저 하룻밤의 여흥이라면 충분했을테니."

"확실히 어린애같은 짓이었다는건 인정하지."

티엘의 말을 간단히 수긍해버린 르비아는 한가롭게 뒷짐을 진 채 그녀에게 등을 보였다.

단순한 환영이라고 해도, 마치 도발하는 듯한 움직임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바라보는 것은 먼 남쪽의 하늘이었다.

어찌보면 레가야의 하늘을 보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알고 있겠지. 이 것으로 매듭짓기에는, 너나 나나 너무 많은 길을 걸어가버렸어. 끝을 내기 위해서는 결국 끝을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이 필요해."

둘 중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결착.

티엘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르비아는 이미 자신이 원하는 대로 끝맺음을 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약간의 슬픔 속에서, 티엘은 침묵으로 그의 말에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것은 또 하나의 약속이었다.

'금방 올거야.'

'그럼 약속해!'

언젠가 나누었던 약속.

원하지 않았던 모습으로 이루어진 그 약속 위로, 한때는 결코 바라지 않았을 새로운 약속이 새로이 자리잡는다.

"하지만 그 결말은 여기서 맺을 수는 없을테지. 너도 알고있겠지?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야말로, 모든 것을 마무리 지을 곳이라는 걸."

"······란."

레가야의 수도.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자, 그렇기에 모든 것이 끝나게 될 곳.

르비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달빛에 젖은 제도를 두 팔로 가득 안은 르비아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눈을 돌렸다.

"오거라. 레가야로, 그리운 란으로. 우리 이야기의 끝은, 그 곳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으니."

순간 갑자기 불어온 돌풍이 눈을 가렸다.

티엘은 전신에 마력을 끌어올리며 순간적으로 덮쳐올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그녀가 시야를 다시 회복했을 때는 이미 르비아의 환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르비아가 완전히 떠난 것을 확인한 티엘은 그제서야 허물어지듯 쓰러지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악!"

티엘은 몸을 웅크리며 고함을 질렀다.

서러움과 분노에 젖은 절규과 함께 마력으로 가득한 주먹이 성벽을 강하게 후려쳤다.

손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 * *



늦은 밤.

방으로 돌아온 티엘은 이제 막 쓰기를 끝낸 편지가 마르도록 가볍게 손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편지를 받아볼 사람들을 대신하기라도 하는 걸까.

잉크는 마치 티엘을 잡아두려는 것처럼 쉽게 마르지 않았다.

편지가 마를 때 까지만 남아있을까 하는 유혹이 살짝 머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은 티엘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레가야 항쟁을 첫 번째 초대로 본다면, 이번의 초대는 세 번째가 된다.

팔티누스 대제의 선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더이상 피할 기회는 남아있지 않았다.

티엘은 편지가 제멋대로 도르르 말리거나 날려가 번지지 않도록 빈 찻잔으로 편지를 잘 눌러두었다.

"애냐."

다행히 일행중에는 탐색계 생령을 가진 사람은 없다.

정령 중에서도 이제는 제법 강한 축에 들게 된 애냐의 마력이라면, 달리 주위를 경계하고 있지 않는 동료들의 귀를 가리는데는 충분했다.

더 이상 소리에 신경쓸 필요가 없어진 티엘은 조금은 마음을 편하게 먹자고 생각하며 자신의 짐을 모두 챙겼다.

어차피 그리 많지도 않았다.

활과 별의 서, 그리고 우라실.

그 외에 중요한 것은 몸에 지니고 있는 귀고리와 정화석 팔찌 정도 뿐이다.

눈에 띄는 제복은 놓고 갈 생각이니, 사실상 무장과 여비를 챙기면 모든 준비는 끝난 셈이었다.

채비를 마친 티엘은 애냐의 마력을 좀 더 끌어올려 자신의 몸을 덮었다.

이제 애냐의 마력은 소리 뿐만 아니라 티엘의 모습까지 감춰주기 시작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황궁의 모든 경비가 지금 황제가 있는 회장을 중심으로 다시 펼쳐져있는 상태였기에 궁 안을 몰래 돌아다니는데 걸리적거리는 것은 상당히 적었다.

마법으로 세워진 경보장치도 슈니엘의 힘으로 피한다면, 조용히 궁을 빠져나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금 멀리 돌기는 했지만, 조금씩 도약주문을 섞어가며 어둠을 가르길 몇 분.

티엘은 이내 궁 바깥으로 가는 길 위로 내려설 수 있었다.

그러나 막 뛰쳐나가려던 티엘은 그늘 안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좁은 복도 형식의 통로 끝, 길을 막아세우듯 벽에 기대 있는 사람의 윤곽은 너무나 익숙한 사람의 것이었다.

'나셀?'

처음 만났을 때 처럼 챙 넓은 모자와 잿빛의 로브 차림이다.

얼굴은 가려져있지만,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그 체구나 자세 등을 알아보지 못할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왜 여기 있는 것일까.

나셀은 벽에 기대 선 채로 졸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티엘은 그 앞을 함부로 지나가는 것이 꺼림찍했다.

나셀이 이 곳에 나와있는 것이, 그리고 하필이면 이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 단순한 우연일리 없기 때문이었다.

'우회할 수도 없는 길인데······.'

차라리 조금 돌아선 뒤 벽을 넘어 도망칠까 고민하려던 참이었다.


네 노래 강물에 보내며

네 웃음 달빛에 새기며

하늘에서 내려온 별빛

땅의 포근함에 안겨 잠드네."


문득, 나셀이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노래, 기억난다.

아니, 머리보다 몸이 먼저 떠올리고 있었다.

나셀과 처음 만났던 유엘 항에서 티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노래, 그리고 아첼과 마지막으로 함께 불렀던 이별의 노래.

'······그래. 들킨거네.'

티엘은 이미 나셀이 자신을 눈치챘다는 것을 깨닫고 말없이 몸에 걸어둔 환영을 지웠다.

예상대로, 티엘의 모습이 드러나자마자 노래를 멈춘 나셀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들었다.

평소보다 딱딱한 눈매에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든 티엘은 배시시 웃으며 먼저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안 거야?"

"내가 너를 몰라? 두 시간 전부터 고민 가득한 얼굴인걸 봤는걸. 혹시 했더니 역시 밤중에 몸까지 숨기고 어디로 가는거야?"

"······그래서 주가를 썼구나?"

하아, 하고 저도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주가는 일반적으로 마법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대신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훨씬 다양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을 반대로 뒤집어보면, 사용자에 따라서는 마법에 가까울 정도로 강력한 힘을 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 정도로 집중된 주가를 사용하다보면 심적으로 어마어마한 피로를 느낄테지만, 나셀은 피로따위는 전혀 모른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티엘에게 따져 물어야겠다는 듯 성큼성큼 다가와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이봐요, 이스티엘경. 대체 무슨 이유로 야반도주를 하는 건지는 말 안해줄겁니까?"

"······산책이라고 해도, 어차피 안믿어주겠지?"

티엘은 혀를 살짝 내밀며 살며시 웃어버렸다.

"눈치 없기는. 이럴 때는 눈감아 주는거잖아."

"로셀의 밤거리로 나가는 산책이라면 눈감아 줬겠지만 위험한 곳으로 몰래 숨어드는건 두고 볼 수 없잖아. 그렇지 않아?"

티엘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침묵이 긍정이 되는 법.

나셀은 긴 탄식을 흘리며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티엘의 머리칼은, 얼룩이라도 진 것처럼 군데군데 흰 빛이 머물러 있었다.

어차피 나셀은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의 앞에서는 환영조차 씌우지 않았던 것이다.

머리칼에 걸어둔 마력을 흩어버린 티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채를 쓸어넘겼다.

"보다시피 약간 문제가 있어서. 잠시만 못 본척 해 주면 안돼?"

"안돼. 이 이상 힘을 쓰면, 그땐 정말 위험해."

"하지만 혼자 가야 하는걸. 이런 진절머리나는 싸움에도 예의라는게 있으니까."

"죽을 생각이야?"

"그러고 싶진 않아."

하지만, 죽지 않으리라는 보장 따위는 없다.

"······이대로 보내주진 않을거지?"

"나 끈질긴거 알잖아."

나셀의 너스레에 결국 티엘도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따라올 생각이야?"

"날 쓰러뜨리고 가라······,는건 좀 아닌 것 같으니까. 싫다고 하면 내 맘대로 따라다니지 뭐."

"아하하하, 뭐야, 그게."

꺄르르 웃음을 터뜨린 티엘은 문득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셀의 품에 뛰어들었다.

얼떨결에 답싹 안겨든 티엘을 붙든 나셀은 뭐하냐는 듯 티엘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러나 정작 일을 저지른 티엘은 생글생글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얘가 이렇게 실없는 애는 아니었는데?

티엘이 뭔가 조금 이상한 것을 깨달은 나셀은 천천히 말로 풀어보기 위해 숨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려는 그 짧은 순간, 티엘은 나셀의 목을 끌어안으며 살짝 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드럽게 포갰다.

미묘한 향기.

서로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그리고 달콤한 부드러움.

처음으로 마주친 입술의 열기에 섞인 서로의 심장소리가 유난히 가깝게 들렸다.

어깨를 부여잡으려던 두 손이 한결 부드럽게 내려앉아 가벼운 포옹으로 바뀌었다.

잠시 후, 나셀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까치발을 들었던 티엘은 쑥쓰럽게 웃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달뜬 숨결에서 그의 향기가 묻어날 듯만 같았다.

그러나 티엘의 눈은 입맞춤의 달콤함 대신 쓸쓸한 아쉬움에 젖어있었다.

불현듯 치솟아오르는 불안감.

그 순간 티엘은 손 안에서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작은 불씨 같았다.

"티······."

하지만 티엘의 두 어깨를 붙잡으려던 나셀의 손은, 그것을 말리려는 티엘의 손에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다.

아니, 이번에는 달랐다.

부드러운 입술을 넘어, 교묘하게 파고든 혀가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을 그의 목으로 밀어넣는다.

반항할 새도 없이, 나셀은 그것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큿!"

나셀은 뒤늦게 티엘을 밀쳐냈다.

제법 거칠게 떠밀렸지만, 티엘은 예상했다는 듯 가벼운 몸놀림으로 몸을 바로 세웠다.

반면 나셀은 가슴을 움켜쥐며 방금 삼켜버린 것을 뱉어버리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속을 뒤틀리게 만드는 이상한 기분만이 남아있을 뿐, 목으로 넘어간 무언가는 순식간에 녹아버린 듯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 뭘 한거야······?"

나셀은 몸 안을 감도는 이물감에 진저리를 쳤다.

마치 독약처럼, 어느 구석에서부터인가 천천히 번져가며 그 곳에 있던 것을 잠식해간다.

그러나 독에 물들어가는 것은 몸이 아니다. 영혼, 기억, 그런 추상적인 것들이 조금씩 알 수 없는 것에 젖어가고 있었다.

"미안, 나셀. 나, 아무래도 약속 못지킬 것 같아."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서글픈 미소, 싫다.

"함께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때가 있는거야. 언제 사라져버릴 지 모르는 흑마법사니까. 그러니 마음가는대로, 이기적인 선택을 해버리는거야. 나는 괜찮다고, 자신을 속여서까지 말이야."

"티엘······너 정말······?"

티엘의 뺨을 타고 한 줄기의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그녀가 입맞춤과 함께 나셀의 입으로 전해준 마법의 촉매였다.

오래된 나무의 수액이 변해 만들어진 호박석에 이사드를 새기고 마력을 채운 것.

일부러 가장 작고 강력한 매개를 찾아내, 그녀가 가진 전력을 다해 의례술식을 완성해냈다.

그 간절함은 곧 의지, 따라서 의지가 곧 위력이 되는 마법으로서는 이 이상이 없을 정도로 강력하리라.

마력을 가진 마법사라면 지금이라도 저항해 주문을 깰 수 있겠지만, 마력을 다룰 줄 모르는 나셀이라면 자력으로 풀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망각의 주문을 걸었어. 나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잊게 될거야. 응······. 나셀 아윌로스는, 흑마법사이자 레가야의 대공녀인 이스티엘을 모르는, 평범한 음유시인으로 되돌아가겠지."

"어째서······? 어째서 그런 짓을······?!"

"미안. 내 욕심인걸. 몇 번이고 목숨을 던져 날 구해준 너를······, 다시 위험속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어. 내가······사랑하는 사람이니까."

"티엘!"

티엘은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나셀은 그녀를 붙잡으려 급히 걸음을 딛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발동된 주문은 조금씩 나셀의 기억을 조금씩 왜곡해갔다.

두 번의 입맞춤으로 각각 마력과 주문식을 새겼다.

점점, 나셀의 기억은 티엘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그녀와 관련된 기억이 온갖 방향으로 연결되며 '이스티엘'이라는 사람을 우회해 갈 것이다.

나셀은 빠른 속도로 흐릿해지는 기억들에 휘청이기 시작했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나.

나셀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빠른 속도로 지워가는 티엘의 기억에 이를 악물었다.

"잊지 않을거야······. 절대로 너를, 잊지 않을거야······!"

"아니, 잊을거야. 잊어줄거야······. 하지만, 모든 걸 잊고나서도 혹시 다시 만날 수 있다면······그 땐······."

가슴을 터뜨릴 것만 같은 격한 감정. 필사적으로 기억을 움켜쥐려는 나셀의 모습은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티엘의 심장을 잔혹하게 헤집었다.

각오한 아픔인데도, 너무나 아파 돌아서고 싶었다.

울며 매달려서라도 그 모든 것을 돌이키고만 싶었다.

하지만 이미 발동된 주문을 되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새로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서로에 대한 기억을 잊어간다.

티엘만이 기억하던 나셀은 새하얀 여백에 덮여가고, 나셀만이 기억하던 티엘은 떠올릴 수 없는 꿈 속으로 잠겨간다.

티엘은 가슴을 저미는 아픔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울음소리가 새어나오지 않도록.

스스로의 결심을 배신하지 않도록.

"안녕, 사랑하는 나셀······."


돌아서 멀어져가는 그대는, 어떤 얼굴일까요.

잡을 수 없는 걸음 세워 볼 수 없어

들리지 않는 울음만 덧없이 스러지지만


등 돌려 달아나는 내 얼굴은, 보이지 않겠지요.

마음을 찢는 그대 걸음을 두고 볼 수 없어

되돌아오는 걸음을 한없이 헤메이는데


돌아서버린 나의 뒷모습은 어떤 얼굴로 보이나요.

남겨져버린 그대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

멀어져버린 당신의 뒷모습만 그립니다.


마음 깊은 곳, 가장 소중한 인연 중 하나.

결코 끊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끈.

그러나 슬프게도,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만을 남긴 채 마지막 인연을 잘라낸 것은, 그녀 자신의 손이었다.


작가의말

약속편 종료입니다.

주변을 정리하며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마음이란, 과연 어떨까요.


다음편, 귀향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ps. 새로 선작해주신 분들, 반갑습니다.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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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15장-귀향歸鄕 (1) 19.11.10 67 6 24쪽
» 14장-약속約束 (18) 19.11.09 72 4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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