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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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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6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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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작성
19.10.17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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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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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3쪽

13장-인도引導 (10)

DUMMY

움직인다.

이름 없는 숲을 떠난 이후, 단 한 번도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던 마력이 마치 순한 고양이처럼 티엘에게 따라주었다.

카즈리엘은 스스로도 놀라워하며 가볍게 활을 당기는 티엘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물론 당장 나선다면 티엘 자신이 위험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카즈리엘이라고 해도 계약자도 아닌 티엘을 완벽하게 지켜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녀 자신의 바람이다.

얽메이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가라.

그것이야말로 엘드리안이 그의 자식들에게 남긴 유일한 바람이니.

"그럼 이제 가는건가?"

티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짊어지고 있던 것의 무게는 조금이나마 덜어냈다. 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그 뿐이다.

그저 목적지도 길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무엇을 향해 가고 싶은지만을 자각하게 된 것 뿐.

그러니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죽고 싶은 것도 아니다.

죽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지키고 싶다.

함께 웃고, 곁에서 걸으며, 내일로 나아가고 싶다.

그렇기에 이대로는 안된다.

지금의 불안정한 각성에 멈춰설 수 없다.

티엘은 우라실을 손에 들고 지면에 칼날을 가져갔다.

사각거리며 얇은 칼날이 얼어붙은 흙을 긁는 소리가 잠시동안 끊임없이 들렸다.

세 개의 원이 빠르게 새겨졌다.

첫 번째의 원. 겹쳐진 두 개의 육망성과 차고 기우는 달의 문양. 그리고 눈꽃의 인장.

두 번째의 원. 인연과 계약을 상징하는 주문식의 사슬과, 원을 따라 그려진 다섯개의 이사드. 빈, 릴, 나드, 크룩사, 옘.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의 원. 순환과 반복을 상징하는, 자신의 꼬리를 문 뱀의 형상.

순간 마법진을 지켜보던 카즈리엘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몇 개의 선과 도형, 상징이 달라지긴 했으나 기본적인 구조 자체는 생령과의 계약에 쓰이는 술식과 동일했다.

"이스티엘. 지금 하려는 일이 뭔지, 너 스스로도 알고 있겠지?"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카즈리엘이 넌지시 한 마디를 던졌다.

마법을 익힐 수 없는 생령이라도 계약술식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다.

더군다나 카즈리엘은 수천 년을 살아온 오래된 대정령이니 식이 완성되기도 전부터 이미 그 구조를 꿰뚫어보고 있었을 것이다.

계약의 마법진은 이 시대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오래된 술식이다.

대부분의 흑마법사들은 친화력을 높여 생령과 직접 계약을 나누지, 번거롭기만 한 계약진 따위를 그리지 않는다.

하지만 우라실을 거둔 티엘은 고개만 돌려 카즈리엘을 바라보았다.

"지금 제 목소리는 닿지 않아요. 이 방법 밖에 없어요."

"흰 용과 재계약을 할 생각인가? 그만 두는게 좋아. 방황하던 길을 찾았다고 해도 겨우 원위치일 뿐이지, 시원의 용의 침식에 견딜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야."

카즈리엘은 조용한 시선으로 물었다.

아직도 죽어서 구할 생각이냐고.

그러자 티엘은 꺼져버린 각인을 움켜쥐며 빙그레 웃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 하고 싶은 일을 떠올렸거든요."

얼마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해맑은 미소였다.

하지만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이미 티엘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티엘의 상태는 넘치기 직전인 물을 겨우 둑을 세워 막아놓은 것과 다르지 않다.

낚싯대를 던지거나, 멱을 감는 것은 불가능해졌지만, 그 것을 대가로 강이 범람하는 것을 틀어막은 상황이다.

그런데 아직 대비조차 하지 못한 상태로 그 둑을 허문다면 어떻게 될까.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다시 생령들과의 연결을 되찾아버리면 가까스로 유예해둔 침식은 다시 시작되어 티엘을 좀먹기 시작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눌러왔던 힘이 폭발적으로 역류해 단숨에 자아를 빼앗길 가능성도 있었다.

그랬기에 칼라가스는 수 년, 혹은 수십 년이 걸리더라도, 어쩌면 살아있는 동안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라도 티엘과의 연결고리를 억지로 끊어버렸다.

아마도 가슴을 저미는 심정으로, 티엘이 다시 그 매듭을 풀지 않길 바라며.

그러나 티엘은 그 마음을 알면서도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칼라가스의 배려를 거절했다.

"죽고 싶지도 않지만, 후회를 남기고 싶지도 않아요. 카즈리엘, 지금은 이게 제 진심이에요."

티엘은 망설임 없이, 손목에서 흔들리던 정화석을 던져버렸다.

그리고 마법진의 중심을 향해 자신의 팔을 뻗었다.


고한다. 이 자리에 선 자는 별의 이름을 잇는 자, 별의 뜻을 이끄는 자, 곧 성좌의 주인이니

답하라. 불리워진 자는 성좌를 지키는 자, 시원에서 태어난 얼음의 용, 곧 나의 반신이라.

깨어진 이치, 끊어진 인연을 다시 잇고자 한다면, 가로막는 사슬을 헤치고 나의 목소리에 응하라.


담담한 목소리가 주문을 외웠다.

마법진의 중심으로부터 날카로운 벼락이 튀어 티엘의 팔을 스쳤다.

하얀 피부가 찢어지며 핏방울이 흙을 적셨다.

마치 내민 손을 뿌리치는 듯한 날카로운 거절.

하지만 티엘은 입술을 깨물며 오히려 손을 더더욱 마법진 가까이 밀어넣었다.

"네가 필요해. 칼라가스."

한층 더 싸늘한 빛이 튀었다.

예리한 얼음 조각이 바람을 타고 흐르며 티엘의 팔을 베고, 찢었다.


그만둬!


사랑하기에 밀어낸다.

연민하기에 밀쳐낸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물러서는 자 없이 서글픈 줄다리기는 끊어지지 않았다.

티엘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었다.

그리고 이미 너덜너덜해진 두 손으로, 마치 칼라가스를 쓰다듬듯 계약의 진을 어루만졌다.

"도와줘. 더이상 잃고싶지 않아. 더이상,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도와줘."

소리없이 흘러내린 피가 마법진을 흥건히 적셨다.

그런 티엘을 말리지도, 도와주지도 못한 채 애만 끓이던 카즈리엘은 보다못해 티엘을 끌어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 순간, 피 웅덩이 한 가운데서 문득 새로운 문양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자그만 하얀 점에서 시작한 문양은 여섯 갈래로 뻗어나가다, 마치 꽃잎처럼 새하얀 날개를 펼쳤다.

눈물처럼 흐른 피 위에 피어난 것은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한 송이의 눈꽃.

티엘의 각인이었다.

한껏 그 여섯 장의 꽃잎은 새벽빛보다도 더 싸늘한 청백색의 마력으로 하얗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력을 불어넣은 티엘이 아닌, 부름에 응한 칼라가스의 마력이 피워낸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티엘은 자신의 눈에서 한결 더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달았다.

울고 있었다.

티엘이 아닌, 칼라가스가.

애냐가, 슈니엘이, 파드마가.

티엘을 상처입혔다는 것 때문에, 그리고 다시 티엘을 상처입히게 되리라는 것 때문에, 울고 있었다.

애초에 계약이 끊어진 적은 없었다.

본래라면 이런 소환의식따위 어린아이의 낙서만큼이나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굳게 닫혀버린 각인을 넘어, 칼라가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한 통로로서의 의미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가느다란 틈새로 새어들어오는 감정따위, 백분의 일도 되지 않을 작은 조각 뿐이다.

하지만 그 감정의 파편만으로도, 티엘은 가슴이 먹먹할 정도의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가지 마. 안돼. 또 무리하면, 이번에야말로 죽을지도 몰라.

네가 슬퍼하는 건 싫지만, 네가 사라지는 것도 싫어.

가지 마.


티엘은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가슴이 너무나 아린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똑같이 소중한 생령들에게 이런 슬픔을 강요해야한다는 것이.

하지만 티엘은 그런 슬픔을 억누르면서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얘들아. 들려? 억지 부린다는건 알고 있어. 하지만, 도움이 필요해. 힘을 빌려줘. 다시 나와 함께해줘!"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티엘의 애타는 목소리가 메아리마저 남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천칭의 반대편에 네 목숨이 놓인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방향을 짐작할 수 없는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낯설면서도, 동시에 익숙한 모순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것이 칼라가스의 목소리라는 사실만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항쟁의 날 처럼 위압감으로 혼을 짓누르는 목소리가 아니라, 그저 친한 친구에게 건네는 듯한 가벼운 말투였지만, 그 본질만큼은 바뀌지 않는다.

때문에 티엘은 상대가 이쪽을 볼 수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도,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선을 넘는다면 돌이킬 수 없어. 그렇다고 해도 마음을 바꾸지는 않겠지. 그런 너를 막을 수 없다는것도 알고 있고.

"미안해. 하지만 여기서 눈을 돌려버리면, 그건 분명 내가 아닐테니까."

-어쩔 도리가 없네. 너의 그런 면이 마음에 들었으니 계약했으니까······.

흰 용은 마치 울음을 참는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 들려온 목소리는, 억지로 감정을 지운 것처럼 희미한 떨림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응. 좋아. 네가 그걸 바란다면······, 좋아.

"미안. 그래고 고마워."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쓴웃음 뿐이라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티엘은 마법진의 바깥으로 물러나있던 카즈리엘을 돌아보았다.

"카즈리엘. 부탁이 있어요. 저와 칼라가스 사이에 혈마력으로 계약 하나만 맺어주시지 않을래요?"

"······계약? 내용은?"

티엘은 무심결에 곁눈으로 마법진의 중심을 흘끗 바라보더니, 마음을 정했다는 듯 두 손을 자신의 가슴에 덮었다.

"제가 완전히 침식되려 하면, 칼라가스의 손으로 직접 제 목숨을 끊어달라고."

"그게 무슨-! ······흰 용이여?"

카즈리엘은 당장에 칼라가스의 반발이 따라붙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칼라가스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당황한 카즈리엘은 다시 티엘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티엘은 그런 카즈리엘을 향해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건 벌이자 책무에요. 섣부르게 계약을 맺은 우리 둘에게 내리는 벌이자, 앞으로 나아가도록 돌아가는 길을 자르는 일이에요. 더이상 뒤돌아 도망치는 일 따위는 싫어요."

카즈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지독한 사람이로구나, 너는. 그런 잔혹한 제약을 스스로에게 걸겠다는거냐."

"아까도 말했지만 죽고싶은게 아니에요. 죽더라도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뿐이니까요."

"······멋대로 해."

그녀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말한 것은 카즈리엘 자신이다.

그러니 이제와서 티엘을 막을 명분 따위는 없었다.

카즈리엘은 어두운 얼굴을 하면서도, 마지못해 마법진에 자신의 마력을 흩뿌렸다.

깨끗한 청백색으로 타오르던 마법진에 검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퍼져 핏자국같은 흔적을 남겼다.

티엘이 요구한 것은 마법이라기보다는 피를 이용해 거는 저주에 가까운 술식이다.

물론 생령인 카즈리엘 혼자서는 본래 그 정도로 정교한 술식은 다룰 수 없다.

하지만 이 경우, 저주의 대상이 되는 티엘 스스로가 술식을 받아들이는 특이한 상황이기에 조금 달랐다.

스며드는 마력을 거부하지 않고, 스스로 굴레를 쓰는 것이니.

체념을 모르는 티엘의 눈에 결국 두 손을 들어버린 카즈리엘은 티엘의 각인에 손을 짚고 그 위에 새로운 문양을 새겨넣었다.

동시에 마법진을 통해, 칼라가스의 심장석에도 동일한 문양이 뿌리내렸다.

카즈리엘의 마력이 움직이며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짙은 피냄새가 주위를 휘감았다.

그러나 티엘은 혈향을 무시하며 다시금 마법진을 향해 손을 펼쳤다.


부른다. 그 자리에 선 자는 별의 이름을 아는 자, 새벽의 뜻을 밝히는 자.

이끌라. 다가서는 자는 성좌에서 태어난 자, 종언의 때를 기다리는 신어궁(神魚宮)의 주인.

세워진 이치를 고하며 여기 계약의 잔을 나누니, 설원의 새벽의 이름 아래, 우리들 삶과 죽음 또한 함께 나누리라!


한 소절의 영창이 끝날 때마다 마법진이 폭발적으로 빛을 뿜어내며 시야를 하얗게 불태웠다.

가슴의 각인이 뜨겁게 달아오르더니, 갑자기 오래된 상처가 터지듯 피부를 찢으며 뜨거운 피가 분출했다.

입가에서도 탁한 핏방울이 역류해 턱끝에서 후드득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아프지는 않았다.

아예 고통을 느끼는 신경이 괴사해버린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명백하게 몸이 부서져가는데도 통증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더욱 더 지독한 고통이 눈 앞에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질끈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 불티처럼 덧없이 흩날리는 무수한 기억들이 명멸했다.

하얗게 빛바래고, 흐릿하게 닳아가다, 잿가루처럼 바스라져 사라져가는 기억.

그 모든 것들은 '이스티엘'이라는 인간을 만들어온 무수한 시간들이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가슴을 앓게 하던 감정도,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해왔던 빛나는 추억도,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부끄러운 기억도,

처음부터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듯 무채색으로 변해 사라져간다.

그리고, 티엘이었던 것들이 쓸려나가버린 그 자리로 그녀가 알지 못하는 이질적인 기억이 비집고 들어와 이전의 것들을 새롭게 덧칠해버린다.

생령의 침식이란 그런 것이다.

서로의 자의식을 구분하던 경계가 허물어지고 서로의 존재가 뒤섞여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티엘이 지닌 것은 고작해야 17년의, 인간의 기준으로도 짧은 시간의 기억 뿐.

헤아리려 하는 것이 어리석을 정도로 무구한 세월을 살아온 용의 기억 앞에서는 그야말로 한 티의 불씨에 지나지 않는 찰나다.

칼라가스라는 시간의 격류 안에서 단숨에 삼켜질 모래알에 불과하다.

'그래도 멈추지 않아.'

그러나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은 알고 있었다.

시원의 용과 직접 맞닿고서, 티엘의 자아가 먼저 깎여나가는 것은 필연이다.

아니, 이렇게라도 버틸 수 있는 것은 칼라가스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힘을 억누르는 덕분이다.

하지만 칼라가스가 그렇게까지 해주는 이유가 자신을 믿어주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이상, 여기서 돌아설 마음조차 생기지 않는다.

티엘은 이를 악물며 손바닥 사이로 새어나가는 기억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아무리 힘주어 움켜쥐더라도, 마치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르게 흘러내려 사그라든다.

그것은 어느 만월 아래에서 나누었던 약속.

그것은 어느 거리에서 마주친 우연.

그것은 어느 항구에서 겹쳐진 인연.

그리고 그것은, 어느 날 운명처럼 이어진 계약이었다.

'정신차려, 이스티엘. 반드시, 반드시 돌아갈거라고, 약속했잖아!'

매정한 시간이 앞으로 얼마 만큼의 자신을 대가로 가져갈지는 더이상 헤아리지 않았다.

그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자신을, 이스티엘을 이루는 것을 하나라도 놓지 않으려 사력을 다했다.

단 한 가지라도 남겨져 있다면 그녀는 그녀 자신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테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티엘은 문득 입안에서 찝찔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몇 번이나 혀를 깨문 탓에, 상처에서 흐른 피가 입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겨우 자신의 감각이 정상적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며 힘겹게 눈을 뜨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머리가 쪼개질 듯한 날카로운 두통과 함께 평소와는 다소 달라진 주변의 풍경이 그녀의 뇌리를 엄습했다.

아직 눈을 뜨지도 않았는데도 사물의 윤곽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기이한 감각.

거기에 더해, 카즈리엘이나 티엘 자신은 윤곽 뿐만이 아니라 명확한 실체감이 느껴질 정도로 진한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역류가 절정에 달해, 칼라가스의 감각이 뒤섞였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그 범위는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녀를 둘러싼 그 조그만 감옥을 넘어 멜람 전역, 나아가 시야에 채 들어오지도 않을 먼 거리에 이르기까지 손바닥 안에 놓인 것처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생령처럼 주위의 마력을 자연스레 느끼고 있었다.

'이게 칼라가스의 감각이라면, '나'는 지금 어느쪽에 있는걸까?'

칼라가스? 이스티엘? 아니면 둘 다 맞는걸까?

걱정을 품은 채 눈을 뜬 순간, 가장 먼저 한 줌의 머리칼이 흘러내리며 시선을 끌었다.

역류가 일어날 때면 흔히 그러듯, 밤하늘 빛의 머리칼은 사라지고 갓 내린 눈의 깨끗한 흰 빛이 맺혀있다.

하지만 생령의 감각과 머리칼을 제외하면, 의외로 달라진 것은 그리 많지 않은 상태였다.

마력량은 평소보다는 조금 더 여유로운 편이었지만 칼라가스의 마력과는 별개로 몸 안쪽에 갈무리되어 있었고, 시험삼아 가볍게 일으켜본 주문도 그녀의 뜻대로 정확히 구현되고 있었다.

"내 이름은 이스티엘, 이스티엘 아르야 카르티치스."

쐐기를 박듯 그 이름을 스스로에게 들려주었다.

이물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칼라가스의 의식과는 별개로, 자신의 자의식이 살아남았다는 것을 확인한 티엘은 조마조마하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과 함께 뒤늦게나마 온 몸을 찌르던 통증이 되살아났다.

전신의 관절이 뒤틀리는 것처럼 아프고 심장도 터져버릴 것처럼 불규칙적으로 아프게 뛴다.

입안에 남은 피맛도 더욱 선명하게 되살아나며 비위를 뒤틀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너덜너덜해진 볼썽사나운 모습으로나마, 분명히 티엘은 이 곳에 남아있었다.

지금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티엘의 입에서 김빠지는 실없는 웃음소리가 쿡쿡 새어나왔다.

"제 이름은 아직 기억하는 것 같군. 나는 누구인지 알아보겠어?"

"그럼요, 카즈리엘."

카즈리엘은 가슴을 짚은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교롭게도 티엘의 눈동자는 여전히 맑은 보라색을 띄고 있었다.

하얗게 바래버린 머리칼에도 변하지 않은 그 눈빛 덕분에, 어쩐지 웃는 얼굴 하나만큼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어쨌건 지금 상태도 오랫동안 유지해선 안돼. 알고 있겠지?"

"네. 지금부터는 조금 빠르게 움직일게요."

티엘은 마법진이 기동한 여파로 여기저기 흩어진 영장과 화살들을 챙겨들며 그렇게 대답했다.

지금도 상태가 완전히 안정된 것은 아니다.

한 번 연결을 되살린 이상, 마력을 쓰지 않는 동안에도 칼라가스는 지속적으로 티엘의 자아를 물들여간다.

하물며 지금처럼 몸에 강령시켜 접촉점을 늘린 상태에서, 그것도 마력을 쓰기 시작하면 얼마나 빠르게 기억을 잃게될지 아무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입에 고여있던 핏물을 뱉어낸 티엘은 이란데의 날개를 들어올려 마력을 흘려넣었다.

활의 몸체를 따라 싸늘한 광채가 흐르며 우룬의 불꽃이 다시금 생명을 되찾았다.

티엘은 단숨에 활을 당기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조금 생소한 느낌이다.

평소의 마력이 손을 적신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손 안에서부터 파도쳐 흘러넘치는 듯한 기분이다.

이것이 칼라가스의 진짜 마력이라는 것일까.

조금 착잡해지려는 마음을 삼킨 티엘은 일부러 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용의 이름을 불렀다.

"칼라가스!"

호명과 함께 아스트라가 눈부신 새벽빛으로 물들었다.

한 호흡, 짧은 집중 끝에 목표를 겨눈 화살이 뛰쳐올랐다.

섬전처럼 빠른 빛살은 티엘을 가두던 돌격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거침없이 흙과 돌무더기를 헤쳤다.

단 한 발.

무거운 잡석과 흙무더기, 그리고 목재들을 바스라뜨리고 지표까지 깨끗한 구멍을 뚫어버린 것은 겨우 단 한 발의 아스트라였다.

속도도, 위력도, 모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티엘의 가슴 한 구석에 약간의 불안감이 소리없이 퍼졌다.

'괜찮아, 칼라가스.'

그것은 티엘의 몸에 강령된 칼라가스의 감정이었다.

대가없이 단시간에 성장을 이룰 수는 없는 법.

이미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도, 그나마 남아있는 것까지도 남김없이 깎아내는 대신 주어진 폭발적인 성장이라는 것은 티엘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티엘은 일부러 의연한 태도를 고수했다.

이제 후회할 시간조차도 아까웠으니까.

마음 속으로 칼라가스를 달래며, 그녀는 거침없이 자신이 열어젖힌 문으로 몸을 걸쳤다.

"무리하지 마! 힘에 부친다 싶으면 바로 말해!"

"부탁드릴게요!"

혈관을 따라 흐르는 마력이 전신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마력의 흐름과, 지상으로 올라온 뒤 눈에 들어온 풍경은 그런 티엘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상황은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다.

집단으로 환각에 빠진 주민들은 이제 자신들조차 구분하지 못한 채 횃불이나 농기구 등의 흉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아직까지 인명피해가 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리라.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흉기들은 금방이라도 서로를 공격해 무고한 피를 흘릴 것만 같았다.

'대체 무슨 환영을 보는 걸까.'

누군가는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끌어안고 있었고, 누군가는 비통한 얼굴로 눈물을 뿌리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티엘은 그 중에 동료들과 머물렀던 여관의 주인도 끼어있는 것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몽둥이를 휘둘러 자신을 향해 덤벼들던 청년 한 명을 쓰러뜨린 여관 주인은 뒤늦게 티엘을 발견하고 비통하게 절규했다.

"그래, 어디 나도 죽여봐라! 내 처자식을 죽인 그 칼로 나도 죽여보라고! 덤벼어어어어!"

악다문 이 사이에서 뿌득거리는 매서운 소리가 들렸다.

어린 시절 환영의 숲에 갇혀 본 일이 있었기에, 이미 저들에겐 어떤 말을 하더라도 닿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검을 들어 위협하더라도, 심지어 팔다리를 찔러 움직임을 막으려 해도 고통조차 느끼지 않을테니 의미가 없다.

곤란한 상황이다.

죽이거나, 하다못해 불구로 만들지 않는 이상은 끝없이 길을 방해할테지만, 그렇다고 죄없는 이들에게 검을 들이댈 수는 없다.

단순히 때리는 것만으로 기절시키는 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슈니엘의 힘으로 그들에게 걸린 환각을 깨기에는 적의 환각령과의 격차가 너무나 컸다.

하지만 의외로 해법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티엘과 나란히 달리던 카즈리엘이 광분하는 주민들을 향해 한 손을 뻗었다.

순간 눈에 들어오는 거리 안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 쓰러졌다.

십 수 명의 사람들이 나무토막이 된 것처럼 일제히 나동그라지는 모습은 우습다기보다는 무서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것은 말 그대로 찰나 뿐이었고, 그 직후 사람들은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몸을 끌어안았다.

"단순한 제압이라면 맡겨 두고, 넌 최대한 마력 사용을 자제해."

조금 전 티엘에게 그랬던 것처럼 전신의 혈액을 고정해 움직임을 틀어막은 것이었다.

하지만 티엘은 조금 걱정스러운 눈길로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카즈리엘은 말꼬리를 흐리는 티엘을 따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정령인 그녀에게는 생령이 만든 환각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도시를 뒤덮은 마력의 농도가 점점 짙어진다는 점, 그리고 티엘의 안색이 조금 나빠졌다는 점으로 인간에게는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비치리라는 것만 넌지시 짐작할 뿐이었다.

"카즈리엘. 보여요?"

"내겐 평범한 마을로 보이지만, 네 눈에는 어떻지?"

"······절벽이네요. 어지간한 빛으로는 바닥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통탄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것이 환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얼굴을 할퀴는 거센 바람이나 절벽 끄트머리가 부스러지는 소리는 질려버릴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티엘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 건너편에서 맞부딪히는 두 개의 기척이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하나는 일반인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옅고, 다른 하나는 리아나 올로비스조차도 압도할 정도로 짙다.

그 정도의 격차를 지닌 둘이 부딪힐 일이라면, 아마도 약한 쪽이 나셀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환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깨버릴 수 없는 강력한 환각이라면 슈니엘의 힘으로도 쉽게 깰 수 없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절벽이다.

항쟁의 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야만 했던 그 절박하면서도 절망적인 기분이 소름끼칠 정도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가슴이 옥죄어들며 격렬한 구역질이 치밀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며 당장이라도 그녀를 쫓아오던 병사들의 발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억이라면 사라져도 좋을 것을, 그런 편리한 교환은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우회로는 보여?"

"여기서는······, 안보여요."

카즈리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살폈다.

도시의 변두리 지역이기에 건물은 그리 많지 않아, 환각만 없다면 지나가는데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티엘의 시각으로는 우회로조차 보이지 않는 절벽인 이상 방향을 꺾어 멀리 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방향을 틀었을 때 그곳에 길이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외곽지역과 중심부를 동심원을 그리듯 완전히 격리해뒀다면 아무리 우회하더라도 안쪽까지 다다를 수는 없었다.

결국 환각지대를 넘어서는 방법 뿐이다.

"탐색령을 불러. 마력 소모가 커지더라도, 조금이라도 중화시키면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불안한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앞으로 겨우 세 걸음도 채 딛을 수 없는 깎아지른 벼랑.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불규칙적으로 흐트러진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다리가 얼어붙어 움직이질 않았다.

그 날, 절벽으로 몸을 던진 직후 티엘은 의식을 잃었다.

바닥 모를 심연으로 떨어지는 그 감각을 다시 맛본다면, 과연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티엘은 입술을 깨물며, 열에 들뜬 눈으로 절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카즈리엘. 분명히, 당신의 눈엔 평범한 마을로 보인다고 하셨죠?"

"음?"

공포로 얼어붙는 팔을 꽉 움켜쥔 채, 절벽을 바라보던 눈동자에서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설령 추락한다고 느끼더라도, 제 다리는 분명 땅을 밟고 있겠죠?"

"설마, 그대로 뛰어들 생각인가?"

폭풍이 불 때도 그 중심부만은 비도, 바람도 없는 잔잔한 날씨를 유지한다.

환각을 펼친 레이븐이 그 중심에 있다면, 분명 중간의 어느 선을 경계로 환영이 사라지거나, 최소한 운신에 불편하지 않을 지형이 펼쳐질 것이다.

그렇다면 접근을 가로막는 벽만 넘어서면 된다.

몇 시안의 마력을 빌리면 얼마만큼의 기억이 사라질지 모른다.

몇 초의 시간을 지체하면 얼마만큼의 자신이 사라질지 모른다.

그저 분명한 것은, 칼라가스를 강령시킨 상태로 마력을 쓰면 쓸 수록 티엘의 존재가 빠르게 깎여나간다는 것 뿐이다.

몇 차례 심호흡을 한 티엘은 절벽 끝까지 다가간 뒤 눈을 질끈 감았다.

발끝의 흙이나 자갈이 후두둑 굴러떨어지는 소리와, 긴장한 심장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괴로운 이중창이 되어 티엘을 괴롭혔다.

하지만 망설임은 겨우 한 순간 뿐이었다.

각오와 함께 크게 숨을 들이쉰 티엘은 망설이는 마음을 뿌리치며 한 발을 내딛었다.

발끝에 닿는 것은 없었다.

몸이 휘청이더니 단숨에 앞으로 기울었다.

의심할 수 없는 추락.

아득한 심연으로 끌려가는 아찔한 기분이 전신의 신경을 불태웠다.

얼굴에 닿는 바람은 금방이라도 단단한 바위로 바뀔 것만 같고, 몸은 당장이라도 산산조각으로 부서질 것만 같았다.

죽음이 눈 앞에서 비릿하게 비웃으며 손짓하는 기분.

내장이 뒤틀릴 것만 같았다.

"······앞으로."

하지만 막 무너지려던 티엘의 귓가에 쓰디쓴 목소리가 들렸다.

카즈리엘의 목소리는 환각 속에서도 조금도 흐려지지 않은 채 또렷하게 들리고 있었다.

"제대로 딛었어. 그대로 걸어가. 자, 앞으로!"

"앞으······로······."

추락과 동시에 하늘을 향한 다리는 완전히 얼어붙어 움직이려는 생각조차 없었다.

열 세 살의 과거와 현재가 무서우리만치 똑바로 겹쳐져 몇 배로 증폭된 공포를 뱉어놓았다.

그러나 티엘은 움직이지 않는 발을 끝없이 질책하며 기어이 두 번째 걸음을 내밀었다.

여전히 발에 닿는 것은 없다.

그녀의 오감은 몇 초 후 다가올 추락사라는 결과만을 보며 미칠 것만 같은 공포에 빠져있었다.

티엘이 나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것은 오로지 그녀가 느끼는 마력의 흐름과, 그녀를 인도하는 카즈리엘의 목소리 뿐이었다.

하지만 문득 티엘은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오감이 차단된 채로, 한 조각의 빛조차 없는 끝없는 어둠속을 한없이 헤메었던 기억.

절박하게 두드리는 것이 벽인지 바닥인지, 아니, 아예 자신이 어떤 자세로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채 보내야만 했던 끔찍했던 시간.

'그때 구해준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그 기억의 결말은 이미 티엘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단지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었다는 감각만이 손끝을 스쳤다.

하지만 티엘은 흐트러지려던 마음을 억지로 돌렸다.

애써 기억을 돌이킨 것은 감상에 젖기 위해서가 아니다.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둠 너머에서 달려와주었던 그 사람처럼, 이 환영 너머에는 분명 진실이 숨어있다.

더이상은 무리라고 외치는 몸을 억지로 움직인 티엘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세 번째 걸음을 딛었다.

지상에 서있었다면 휘청인다고밖에 할 수 없을정도로 불안정한 발딛음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발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구르다시피 앞으로 나아간 그 곳에는 더이상 끝없는 허공 대신 어느 숲의 입구가 펼쳐져있었다.

겨우 몇 초.

그러나 영원과도 같았던 그 몇 초 동안 과거로부터 층층이 쌓인 공포와 싸웠던 티엘은 더이상 견디지 못한 채 허리를 꺾었다.

"웨에엑! 쿠윽, 웨엑!"

게워낼 것도 없는 속에서 쓴 물이 왈칵 치밀어올랐다.

이젠 평범한 땅 위에 서 있는데도, 몸은 여전히 절벽에 떨어지는 것처럼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안쓰러운 얼굴을 한 카즈리엘이 헐떡이는 티엘의 등을 두드렸다.

"······아직 갈 길은 멀어. 괜찮겠어?"

"하아······, 하아······. 괘, 괜찮아······요."

티엘은 입가를 소매로 씻으며 새로이 앞을 가로막는 숲을 노려보았다.

물론, 그 역시 평범한 숲은 아니었다.

사람 한 명 조차 비집고 지나가기 어려운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둔 채, 면도날처럼 예리한 수백 개의 칼날이 서슬퍼런 빛을 흩뿌리는 칼날과 철사의 숲.

대동맥이나 얼굴 부근에 칼날이 밀집된 잔혹하고 집요한 설계에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티엘은 눈을 질끈 감으며 이번에도 역시 망설임 없이 칼날 사이로 몸을 던졌다.

첫 걸음부터 전신으로 칼날이 파고들었다.

"아흐윽-! 크흣, 흐으으윽!"

잔인하게도 이 길에선 멈춰서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주춤거리는 순간에도 매 순간 새로운 칼날이나 갈고리가 살을 찢는다.

겨우 한 호흡을 멈춰선 순간에도 예닐곱 군데의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보다못한 카즈리엘이 티엘의 어깨를 잡아챘다.

"그만. 이러다 네 마음이 먼저 부서져! 지금이라도-"

"카즈리엘!"

날카로운 고함이 카즈리엘의 말을 끊었다.

절뚝거리며, 온 몸의 상처를 끌어안은 채,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신음하면서도, 티엘은 다음의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아직, 아직이에요. 아직 포기할 수 없어요. 기억을 전부 잃어버리면, 그러면 끝이야. 싫어요!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다른 사람들 곁에 남아있고 싶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직 포기 못한단 말예요!"

헐떡이는 숨소리 사이로 힘겹게 내뱉은 그 말이, 수천 년을 살아온 대정령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사이 가까스로 칼날지옥을 빠져나온 티엘은 녹초가 된 채로 또 다음의 시련을 향해 힘겹게 나아갔다.

그것은 그야말로 죽음을 쌓아 만든 시련의 길이었다.

끝없이 바위가 굴러떨어지는 암벽에 정면으로 뛰어들기도 했고, 썩은 물로 가득한 바닥없는 늪에 가라앉기도 했으며, 때로는 끓어오르는 화염 속에서 전신이 새카맣게 타는 일도 있었다.

하나의 관문은 고작해야 서너 걸음이면 끝났지만, 역으로 말하면 그 짧은 간격으로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몇 번이나 맛봐야 한다는 말이다.

열, 스물, 평범한 인간의 정신이라면 순식간에 부서져버릴 지독한 시련의 연속.

겨우 몇 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티엘이 겪은 죽음은 서른 번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미 서른 번이 넘게 살해당한 소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부서져버릴 것만 같은 마음을 악착같이 움켜쥐면서.

쓰러지기에는, 잃어버릴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고, 무거웠다.


작가의말

......오늘은 왜 이리 피튀기는 고어 분위기일까요....


ps. 신규 구독자분들 환영합니다.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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