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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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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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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4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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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14장-약속約束 (2)

DUMMY

티엘은 황제의 시선을 쌀쌀맞게 받아쳤다.

"어느쪽으로 가든 결과가 같으리라 생각했으니까요."

레가야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는 르비아를 암살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단순하다.

지금 레가야가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식으로 나서며 다른 다섯 대공국을 몰아붙일 수 있는 것은 르비아 개인이 지닌 무력이 그만큼 강대하기 때문이며, 역으로 르비아의 힘이 없다면 레가야는 다른 대공국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암살은 가장 어렵고 험난한 선택이기도 하다.

시원의 용과 계약하고 막대한 양의 마력을 지배하는 그를 향해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자는 채 한 줌도 되지 않는다.

같은 시원의 계약자를 제외한다면.

더군다나 현재 르비아에게는 후계자가 없다.

그 공백을 중심으로 어떤 혼란이 시작될지도 알 수 없는 이상, 레가야 공의 자리를 어떻게 할 지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한 수단.

멀리 갈 것도 없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시원의 용과 계약했기에 르비아와 맞겨룰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며, 레가야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기에 지나치게 힘이 집중된 레가야의 권좌에 앉아 혼란을 틀어막을 수 있는 사람. 더군다나 선대의 핏줄로서 정당하게 복수를 주장할 수 있는 단 한 명.

이스티엘 아르야 카르티치스.

거절한다면 다소 불쾌한 방법을 써서라도 손에 넣기를 고려해야하는 비장의 한 수일 것이다.

이 경우 티엘에게 써먹기 좋은 훌륭한 채찍도 충분히 갖춰져 있다.

곁에 있는 동료들의 목숨과 스스로의 자유를 저울에 달면, 과연 어느쪽으로 바늘이 기울 것인가.

더럽다.

더럽고 치졸한 방식이다.

알아서 충성하는 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채찍에 신음하는 노예가 될 것인가.

그러나 벗어날 힘이 없다면, 숙이고 따를 수밖에 없다.

"목줄과 채찍. 과연 제국의 지배자 다우십니다."

"그대는 내가 그대를, 레가야 공을 찌르기 위한 비수로 쓰고자 한다고 생각한 것인가? 미안하지만, 그대의 생각은 나와 조금 다르군."

하지만 황제는 뜻밖에도 티엘의 독설에 고개를 저었다.

"그것을 자신감이라고 하는가, 아니면 오만함이라 하는가. 그대가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다 하나, 그렇기에 오히려 그토록 허술하게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황제는 길게 탄식했다.

조금 이상한 말이다.

물론 상대는 이 시대 최강의 마법사로 불리는 레가야의 주인이다.

그러나 정면대결이 아닌 이상, 티엘이 기습을 걸어도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잠시 의구심을 품은 채 황제를 관찰하던 티엘은 한 박자 늦게 또다른 가능성을 머리에 떠올렸다.

노리는 것이 르비아 자체가 아닌, 그가 지닌 힘 뿐이라면?

"······그를 직접 노리진 않는건가요?"

"그대의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는 나보다 그대가 더 잘 알테지. 그런 자의 손에서 빠져나가 기어이 해룡의 기를 빼앗은 자를 암살하기란 쉽지 않아. 아마도 정면대결 이상의 피해를 낳을 터. 위험은 최소화하는 것이 좋겠지."

황제가 한 자루의 단검을 꺼냈다.

티엘의 눈이 금새 그 검을 알아보았다.

시엘리아 제국의 역사를 간략히 도식화한 아름다운 문양이 부드럽게 휘감은 칼.

금으로 아로새겨진 문양으로 보아, 분명 실전용이라기보다는 의례용으로 제작된 장식검이다.

그러나 그 검의 가장 큰 특징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황제는 눈여겨 보라는 것처럼 천천히 칼집을 벗겼다.

아름다운 물결무늬가 파도치는 은빛 칼날.

너울거리는 빛에 번득이는 칼날은, 단순히 장식을 위한 검 치고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 매력적인 칼날에는 커다란 흠이 새겨져 있었다.

강한 힘에 부러진 듯 거친 단면을 보이며 끊어져있는 칼 끝.

"설마?"

한 면이 깨져나간 수정 왕홀과 함께 제국의 모든 힘을 상징하는, 여섯 자루의 부러진 단검.

이 일곱 개의 신물은 황제의 즉위식에서 공개되어, 제국의 힘이 황제에게 모인다는 상징으로 새 황제를 치장하는 물건이다.

비록 오늘날에는 실제로 검을 벼리는 대신 그 형상을 새긴 장신구 정도로 대체하는 경향이 크지만, 여전히 검과 왕홀을 바치는 의미 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때문에 즉위식이 끝난 후 황제의 손에 남아있는 것은 신에게 통치를 인정받았다는 것을 상징하는 왕홀 하나 뿐이다.

단검은 그 칼날로 제국을 떠받치겠다는 의미에서 여섯 대공들이 나누어 받으며, 그들의 손에서 지켜진다.

굳이 옛 관습을 되살려서까지 검을 만든 황제다.

이제 와서 대공들이 지켜야 할 검을 남겨둘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저 검은, 어느 대공의 손에서 돌려받은 것일까.

그 의문에 답하듯, 황제는 칼날을 돌려 자신을 향하고 있던 면을 보여주었다.

칼날의 뿌리부근에 작은 흠집 같은 것이 눈길을 끌었다.

아니, 단순한 흠집이 아니다. 바늘 끝으로도 새기기 어려울 정도로 가느다란 선이 익숙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티엘이 있는 위치에서는 조금 멀어 잘 보이지 않았기에, 보다 가까운 곳에 앉아있던 올로비스는 일부러 목소리를 조금 높여 그 곳에 새겨진 이름을 읽었다.

"레가야."

"무어라 말 한 마디 없이 되돌아와 있더군. 흥미롭지 않은가?"

르비아의 손에 있어야 할 검.

그는 분명 황제의 즉위에 맞추어 정식으로 대공위를 이어받았으며, 황제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 가장 강력한 수호자로 남아야 할 사람이다.

수호자가 검을 돌려주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황제의 검이 되기를 거부한다는 것.

아무리 형식적인 의식이라지만 사실상 반역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그 이전에, 주군이 하사하는 검을 아무 이유없이 거부했다는 것만으로도 예사 일은 아니다.

때문에 올로비스와 리아 역시, 그 검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로도 아연실색한 눈빛을 주고받고 말았다.

"황제 폐하······라면 대공가에 제제를 가할 수는 없어요? 아무리 이름뿐-아차······. 죄, 죄송합니다······."

"괜찮네, 공화국의 여기사여."

리아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눈길에 우물쭈물 고개를 숙였다.

그러던 중 신음소리가 새어나온 것을 보면 아마도 누군가가 그녀의 발이라도 밟은 듯 했지만, 황제는 그 것은 못본 척 해주기로 했다.

적어도 선황이 황위를 지키던 시절이었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

황제의 권위가 낮다고 하나, 공식적으로는 여섯 대공이 황제에게 몸을 숙이는 존재였다.

즉, 한 명의 대공으로서는 감히 황제의 머리 위에 설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이 오면 다른 대공들이 함께 움직여 균형을 무너뜨렸을 뿐.

그러나 어디나 예외는 있다.

황제를 넘어서, 다른 대공국들의 연합마저 깨부숴버릴 정도로 강대한 힘이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황제는 쓰디 쓴 자조를 삼키며 르비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제부터 꿰인 것인지 모를 수많은 실들이 대공들의 팔다리를 얽메고 있었다.

르비아가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에 따라, 수많은 이들이 그의 눈앞에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춘다.

한탄하는 자도, 반항하려는 자도, 심지어는 현실을 깨닫고 빠져나가려는 자도, 거미줄같은 그의 손길을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미 레가야는 선을 넘어섰다. 영지를 몰수하고 경제를 봉쇄하더라도, 더이상 레가야 공에게는 의미가 없지. 그의 힘은 영지도, 무역을 통해 쌓은 재력도, 강대하게 육성한 병력도 아니야. 단신으로 하나의 국가를 멸망시킬 수 있는 비상식적인 마법이 그의 무기지.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의 힘을 깎아낼 것인지, 그것을 생각해야하지 않겠는가."

거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황제는, 대뜸 그 검을 티엘을 향해 검을 밀었다.

탁자의 거친 표면 위에서도 용케도 미끄러진 검이 아슬아슬하게 티엘의 손이 닿는 거리 안으로 들어섰다.

"그 검은 내가 쥘 수 없는 검이지. 따라서 지금 내게 레가야의 검은 없다."

"······그게 무슨······?"

미묘한 빛으로 단검을 살피던 시선이 황제에게로 향했다.

말장난을 하려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갈고 닦아온 비수를 처음으로 손에 쥐는 듯한 무겁고 오래된 희열.

황제의 눈 깊은 곳에서부터 그동안 억눌러온 열기가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순간, 조금 뒤에서 부복하고 있던 에젤린드가 얇은 상자 하나를 황제의 곁으로 가져왔다.

걸쇠가 벗겨진 상자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조금 전 황제가 티엘에게 건넨 것과 똑같이 생긴 다섯 자루의 검이었다.

"그러나 그 한 자루를 제외한 다섯 검은, 이미 내게 모여있다."

"그런!?"

티엘은 눈을 크게 떴다.

고작해야 몇년 전, 티엘이 쫓겨났던 항쟁만 해도 겨우 두 개의 대공국이 손을 잡았을 뿐이다.

그 것만으로도 물밑에서 얼마나 많은 밀약이 오갔을지는 짐작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물며 레가야를 제외한 다섯 개의 대공국이 모두 손을 잡았다?

그것도 황제를 중심으로?

검과 기사의 나라 미르다야, 철과 독으로 쌓아올린 휄카야, 풍요의 항아리를 품은 비사야와 비열한 그림자로 다시 벼려진 아르타야, 그리고 신앙과 마법의 중심 미라야.

대제 엔지칼 이후로 결코 손을 잡을 수 없었던 여섯 자루의 검이다.

그 가운데, 무려 다섯이나 되는 검이 수백 년 만에 하나의 주인을 향해 그 머리를 맞댄다.

마치 영웅들이 대지를 달리던 그 시절의 재현이었다.

본래 시엘리아 제국은 강대한 적을 향해 일어선 일곱 명의 기사들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들의 핏줄은 오늘날까지 끊어지지 않았고, 하나의 황가와 여섯 대공가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그랬기에, 어쩌면 이 또한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와서 부상당한 이들끼리 손을 잡는다고 해도, 하늘 저편으로부터 날아오는 시룡에게 닿을 수 있을 것인가.

이피안들의 시대에 비해 쇠퇴하였다고 하나, 여전히 강력한 마법사는 하늘을 가르고 산을 무너뜨리는 이치를 벗어난 존재들이다.

가장 강력한 백마법사중 하나인 샤르세인조차도 르비아의 발목을 잡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이미 황제 자신의 입으로 말했다. 정치적으로도 이미 르비아를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물리적인 병력으로도 레가야를 억누르는 것은 어렵다고.

여기에 티엘의 힘을 더한다고 해도 판세 자체는 움직이기 어렵다.

암살이 아닌 이상, 대체 무엇을 위해 티엘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것인가.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 뿐이다. 그대의 핏줄."

한 장의 오래된 양피지가 탁자 위로 내려앉았다.

몇 년이나 묵은 것인지 가장자리 부분은 헤져 너덜거리고 있는데다, 묵은 곰팡이 냄새 같은것까지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중앙, 한때 양피지를 봉하고 있었을 찢겨진 인장을 본 순간, 기어이 티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눈꽃을 떠받치며 꿈틀거리는 한 마리의 해룡.

그리고 그 아래 파도처럼 몰아치는 한 줄의 서명.

카제린 이안 카르티치스.

레가야의 첫 번째 주인이자 당대 최강의 흑마법사가 남긴 유산이었다.

떨리는 손길이,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듯한 양피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빽빽하게 새겨진 이사드와 마력의 움직임을 비트는 문양들.

가로지르는 직선, 에워싸는 곡선, 그리고 그 모두를 얽어매는 사슬같은 약속의 말.

주문서. 그것도 이 시대에 남아있으리라고는 생각지조차 못한 오래된 계약의 주문이었다.

"설마······!"

비명처럼 말꼬리를 삼키는 목소리는 티엘의 것이 아니었다.

여지껏 얼굴을 가리고 있던 칼로스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들릴 만큼 쉰 목소리로 내지른 것이었다.

그러나 티엘은 그의 심경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느낀 충격이, 칼로스가 느낀 것에 결코 덜하지 않았을테니.

"······그렇군요. 제가 필요한 이유는······."

티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주문서라면 분명 르비아의 움직임에 족쇄를 채우는 것이 가능하다.

모두의 목숨을 위협하던 재앙도 힘을 잃을것이고, 자신은 동료들과 함께 공화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지금까지 그래왔듯 대륙의 일에는 눈감고 살면 그만이다.

하지만 문득, 가슴 속이 뜨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인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은 듯한 느낌.

티엘은 부러진 검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등잔불이 일렁이며 순간 칼날 속의 얼굴에 불길이 튀었다.

"한 가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대화의 중심이 제국의 사정으로 옮겨지며 소외되어있던 나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까다로운 황실 예법에는 맞지 않았지만, 다행히 황제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기탄없이 말해 보게."

나셀은 조금 전 티엘이 펼쳤던 양피지를 가리켰다.

물론 그에게는 그 안에 담긴 주문이 어떤 것인지 알아볼 지식이 없다.

그러나 앞선 대화에서, 저 주문서를 이용하는 것으로 불리한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지금 반드시 답을 들어야 할 질문이 있었다.

"저걸 사용한다면 폐하께서 모든 전황을 손에 쥘 수 있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그 힘으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저 르비아를 꺾고, 그 자리를 대신해 제국의 진정한 지배자가 되는 것을 원하는가.

아니면 다른 목적을 위해 힘을 원하는 것인가.

힘을 목적으로 삼는가, 도구로 삼는가.

제국인 가운데 전자를 택하는 이는 결코 적지 않다.

무언가를 잃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일수록,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힘을 기르다 결국 그 힘에 먹혀버리기 쉬운 법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 것을 입 밖으로 내비치는 자는 드물다.

그럴듯한 목적을 앞세워 자신의 치부를 가릴 뿐.

"무엇을 할지 묻는가······."

황제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느리고 신중하게, 스스로의 마음을 비춰보고 있었다.

그것은 나아갈 길을 찾아 방황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흔들림 없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에, 오히려 그 과정이 왜곡되지 않았는지 하나하나 짚어보는 것이었다.

무엇이, 그의 이상인가.

티엘은 그토록 경멸해온 자의 대답을 기다리며, 남몰래 마음을 졸였다.

황제가 다시 고개를 든 것은, 그리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대는 뛰어난 음유시인이라고 들었다. 그러니 이 흉중에 있는 것이 거짓인지 정도는 읽을 수 있겠지. 그러니 그대의 눈을 믿고, 내가 진심이라 생각하는 바를 말하겠네."

황제는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짚으며 나셀과 시선을 맞췄다.

"이 땅을 적셔온 피를 끊어내고, 또다시 항쟁이 이 땅에서 자행되지 않기를. 오로지 그 그릇된 만행을 바로잡고, 온 백성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을 되찾도록 이끄는 것에 내 전부를 바칠 생각이네. 지금이 아니면, 다시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일. 이 땅에서 피로 피를 씻는 일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게 만들 것이야. 이것이 내가 바라는 전부일세."

아득하게 깊은 곳으로부터 불길이 피어올랐다.

매를 닮은 날카로운 시선이 음유시인의 고요한 눈을 비추었다.

거짓은, 없다.

나셀은 조용히 티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티엘은 보일듯 말듯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질문은 티엘이 먼저 꺼내고 싶었던 말이었다.

르비아를 막는 것에 이견은 없지만, 결국 그 자리를 황제가 대신해버리면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미 떠나버린 고향이라도, 쳇바퀴처럼 한없이 슬픔을 되풀이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대공위를 받아 황제를 보필할 가능성을 가차없이 거절해버린 티엘로서는, 이제와서 황제의 움직임에 관여할 수 없었다.

'고마워. 내 대신 말을 전해줘서.'

그렇지 않아도 익숙치도 않은 교섭에 지쳐가고 있었던 티엘은 황제의 눈을 피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여전히 눈치가 빠른 나셀은 남몰래 눈을 깜빡여 티엘의 미소에 화답한 뒤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어차피 여기서 따로 말 꺼내봐야 의미 없잖아?'

리아는 제법 오랫동안 곁가지로 밀려나있는데도 능글능글하게 웃고 있었다.

올로비스 역시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칼로스에 이르러서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푹 숙인 상태였다.

길은 정해졌다.

"알겠습니다. 무례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이어지는 행동에서도 최선을 다해 협력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고맙군. 서로 마지막까지 웃을 수 있는 계약이길, 나 역시 바라겠네."



* * *



며칠이 후, 제도 로셀.

하얀 원피스로 차려입은 티엘은 한가로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 땅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답게도 사람도, 물건도 흘러넘치도록 풍족한 거리가 눈길을 끌었다.

대로 뿐만 아니라, 비교적 좁은 곁길로도 마치 거미줄처럼 이어지는 복잡한 풍경이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는 평범한 또래 소녀의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일부러 별의 서도, 활도 놓고 나온 것이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커다란 영장들을 몸에 달고서는 제대로 걸어다니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몸이 가벼워진만큼 발걸음도 가벼웠고, 얇아진 옷자락이 사락사락 스칠 때마다 마음도 조금씩은 들뜬다.

평소 치장에 관심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티엘 역시 소녀다.

거추장스럽지만 않다면 예쁜 옷으로 차려입는 것이 싫을 리가 없다.

공교롭게도 차려입은 모습을 칭찬해줬으면 싶은 사람은 함께 오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풀이 죽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마냥 즐겁다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었다.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해도, 곳곳에 세워진 깃대가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채 막을 수 없는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여섯 자루의 검과 성배를 그린 시엘리아 제국의 기 바로 아래, 해룡과 눈꽃을 그려넣은 레가야의 기가 바람결에 나부끼고 있었다.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저주처럼 들러붙는 고국의 이름.

레가야가 이번 대의 '수호자'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이야기로만 들었을 때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마치 레가야의 수도, 란에 들어와 르비아의 눈 앞에 덜컥 던져진 듯한 싸늘한 기운이 뒷덜미에 녹아내렸다.

아니, 단순히 기분 때문만은 안리 것이다.

본래 황제의 직할령은 당대의 수호자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법이니.

'과민반응이야.'

티엘은 괜히 기분이 나빠지려는 것을 스스로 달래며 일부러 조금 짓궂은 생각을 떠올렸다.

레가야의 기를 몇 개 정도 떨어뜨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생각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하필이면 깃대가 마력을 잘 머금는 알게이드강(鋼)이었던 탓이리라.

이미 고갈된지 오래인 아르타야의 강철이지만 유서깊은 제도에는 과거에 만들어진 물건들이 상당수 남아있다.

물론 우룬의 사슬같은 마법금속만큼 마력에 민감하지는 않겠지만, 못된 장난을 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단지 우울한 생각에서 눈을 돌릴 생각이었지만, 막상 떠올리고 나니 유혹을 억누르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다.

역시 기분이 들떠 있다.

평소 알게 모르게 조금씩 억눌러온 탓인지, 지금의 티엘은 얌전한 소녀 기사보다는 말괄량이에 가까운 성격을 보이고 있었다.

"어이. 뭐하는 거야?"

그 순간 이상한 차림새를 한 사람이 티엘을 불렀다.

뭔지 모를 향초 냄새가 짙게 풍기는, 새의 부리를 본딴 듯한 뾰족한 가면.

아르타야 지방의 방랑의사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는 차림새였다.

그 많은 인파 속에서도 단숨에 눈에 띈 그는 티엘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착각일까.

아니, 인파에 휘말려 제 갈길을 가려는 듯 보였지만, 그 미세한 움직임들은 틀림없이 티엘을 향하는 선 위에 놓여있었다.

티엘은 조용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광범위에 피해를 주는 주문은 안된다. 기껏해야 작은 단검을 만들어 위협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근력을 강화해서 뿌리치는 것이 가장 나을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온 그 기괴한 가면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들린 것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익숙한 목소리였다.

"맨 얼굴로 돌아다녀도 되는거냐? 들키면 어쩌려고?"

"칼로스?"

방랑 의사는 정답이라고 외치듯 슬쩍 어깨를 추어올렸다.

티엘은 짧게 한숨을 쉬며 끌어올린 마력을 다시 풀어두었다.

"괜히 사람 놀라게 만드는건 그만두는게 좋아요."

확실히 방랑의사의 복장은 눈에 띄긴 하지만, 동시에 어디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독특한 위장이다.

혹여 시비가 걸릴 일이 있더라도 아르타야인의 거친 성정을 아는 이들이라면 소리없이 피해가니, 이렇게 혼잡한 거리에서는 오히려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맨 얼굴을 드러내놓은 티엘은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 있느냐는 듯 칼로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짙은 갈색이었다. 보기 드문 자색의 눈동자를 내놓고 돌아다닐 만큼 바보는 아니었으니.

"이미 사라진 지 수 년 된 사람, 그것도 바깥으로 거의 드러내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라면 아는 사람도 드물거에요. 눈 색만 바꾸면 굳이 숨기려 드는게 수상하겠죠. 로셀쯤 되면 공화국인도 많으니, 머리색도 문제될 건 없을거고요."

설마하니 오 년 전에 항쟁에서 쫒겨난 대공녀를 제도 한복판에서 찾는 얼간이가 있으랴.

설령 초상화까지 들고 나왔다고 해도, 이미 그 시절과는 인상이 많이 달라져 오히려 더 놓치기 쉬울 것이다.

"좋은 배짱이네. 보통은 벌벌 떨면서 나올 생각도 못할텐데. 항쟁에서 밀려나면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눈에 띄면 위험하잖냐. 특히나 넌 눈이 너무 인상적이라서. 환영 풀리면 볼만 하겠지."

사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듣던 티엘은 좋은 기분에 초를 치지 말라는 듯 조용히 눈을 흘겼다.

"그건 말 안해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는 당신은 뭐 하러 거리에 나온거에요? 따로 찾아볼 일이 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내 할 일도 있고, 너네 할 일도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려고. 난 그렇게 시간이 빡빡하진 않거든."

"어쩐 일로 그런 생각을 다."

이번에는 불신의 눈초리다.

칼로스는 조금 당황하는 목소리로 손사래를 치기 시작했다.

"워워워, 너무 날카롭잖냐. 그런 태연한 얼굴로 독설 퍼붓지 말아달라고. 그나저나 정말 무슨 일로 나온건지 정말 말 안해줄거야?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건데요."

수상쩍은 가면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아도 무슨 표정을 짓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하하하하······.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그렇게 못믿는거야? 어째 나 아는 사람들은 다들 그러던데."

"카즈리엘이 말 안해주던가요? 몇 번이고 타일렀다고 하던데."

"그, 그걸 납득을 못하는거라고!"

납득을 못하기는, 안하는 거지.

그래도 찔리는 것이 있는지 당황하는 모습이 결국 티엘의 웃음보를 터뜨렸다.

역시 조금 개방적인 기분이 되며 심술궂은 면도 생긴 모양이다.

억누르려고 해도 쿡쿡 새어나오는 웃음은 참기가 어려웠다.

결국 티엘이 웃음을 멈춘 것은 칼로스가 '나 그렇게 못된 녀석인가?'라는 투로 과장되게 좌절한 뒤의 일이었다.

찔끔 새어나온 눈물을 훔친 티엘은 조금 전보다 부드러운 얼굴로 칼로스를 달랬다.

"농담이에요. 그렇게 풀 죽지 말아요."

"나셀 녀석한테는 그런 짓 하면 안됀다, 너. 분명 상처입을거야."

가벼운 지분거림에 맞춰 슬쩍 눈을 흘겨준다.

이 정도면 장단을 맞춰주는 것은 충분할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별 거 아니에요. 조금 기분전환도 할 겸 해서 촉매나 마도구나 몇 가지 구하러 나왔어요."

"마도구?"

칼로스의 시선이 티엘의 허리춤과 등 뒤를 한 번씩 훑었다.

물론 활도 놓고 나온 티엘이 마도구를 챙겨나왔을 리는 없지만, 애초에 티엘은 완전무장을 하더라도 따로 들고다니는 물건은 별로 없었다.

활과 별의 서를 빼면, 고작해야 몇 가지 상비약이나 붕대, 부싯돌 정도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전부.

도약주문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닐 땐 방해가 된다며 화살조차 챙기지 않는 녀석이 이제와서 마도구를 찾는다니, 이상하게 생각할만도 했다.

"너, 책은 어쩌고?"

게다가 티엘은 올로비스나 리아처럼 여러 개의 가방을 달고 다니며 마법의 촉매나 시약까지 챙겨 다닐 필요도 없다.

아스트라에 익숙하다는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별의 서가 주문까지 담을 수 있다는 것이 더 크다.

발동이 느린 주문들은 마법서에 저장해뒀다 사용하는만큼ㅡ 주문의 구현을 보조해주는 촉매나 시약을 따로 들고다닐 일이 없었던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굳이 촉매까지 필요할만큼 평범하지 않은 물건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촉매라······. 특별히 찾는 게 있는가본데. 흐음, 솔직히 말 해. 내가 도와줄 지도 모른다고?"


작가의말

떠오르는 불신의 아이콘 칼로스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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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시, 얼음의 용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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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15장-귀향歸鄕 (4) 19.11.13 57 4 28쪽
145 15장-귀향歸鄕 (3) 19.11.12 68 3 24쪽
144 15장-귀향歸鄕 (2) 19.11.11 66 4 25쪽
143 15장-귀향歸鄕 (1) 19.11.10 67 6 24쪽
142 14장-약속約束 (18) 19.11.09 72 4 35쪽
141 14장-약속約束 (17) 19.11.08 66 4 29쪽
140 14장-약속約束 (16) 19.11.07 56 4 24쪽
139 14장-약속約束 (15) 19.11.06 60 4 35쪽
138 14장-약속約束 (14) 19.11.05 55 4 26쪽
137 14장-약속約束 (13) 19.11.04 54 3 27쪽
136 14장-약속約束 (12) 19.11.03 48 3 25쪽
135 14장-약속約束 (11) 19.11.02 57 4 27쪽
134 14장-약속約束 (10) 19.11.01 68 4 26쪽
133 14장-약속約束 (9) 19.10.31 65 3 26쪽
132 14장-약속約束 (8) 19.10.30 62 3 31쪽
131 14장-약속約束 (7) 19.10.29 59 3 27쪽
130 14장-약속約束 (6) 19.10.28 58 2 27쪽
129 14장-약속約束 (5) 19.10.27 64 4 28쪽
128 14장-약속約束 (4) 19.10.26 72 4 31쪽
127 14장-약속約束 (3) 19.10.25 62 3 30쪽
» 14장-약속約束 (2) 19.10.24 55 3 26쪽
125 14장-약속約束 (1) 19.10.23 64 3 27쪽
124 13장-인도引導 (15) 19.10.22 72 3 36쪽
123 13장-인도引導 (14) 19.10.21 61 3 26쪽
122 13장-인도引導 (13) 19.10.20 59 3 24쪽
121 13장-인도引導 (12) 19.10.19 54 3 26쪽
120 13장-인도引導 (11) 19.10.18 59 4 23쪽
119 13장-인도引導 (10) 19.10.17 63 3 33쪽
118 13장-인도引導 (9) 19.10.16 62 3 32쪽
117 13장-인도引導 (8) 19.10.15 62 3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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