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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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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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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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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06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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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5쪽

14장-약속約束 (15)

DUMMY

제도 로셀의 중심, 황궁.

그 안에서도 가장 깊은 방이 오래간만에 사람들을 맞아들이고 있었다.

궁인들이 청소를 하러 들어오는 일 조차 없도록 바람의 마법으로 미세한 먼지마저 밀어내는, 말 그대로 허락되지 않은 자는 결코 들이지 않는 방.

고풍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고위 귀족들의 취향처럼, 이 방 역시 이피안 어로 이루어진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오르밀라 유름, '지배의 숲'.

당연한 제약이며, 당연한 이름이다.

이 방을 드나들 수 있는 것은, 한 시대에 단 일곱 명 뿐이니까.

유리처럼 매끄러운 검은 화강암 조각들을 짜맞춰 만든 바닥이 그 자체로 하나의 진을 이루고 있었다.

자연석을 깎아 만든 원형의 벽도, 천장에 은으로 그려넣은 섬세한 문양도 모두 하나의 술식을 새기기 위한 것.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조차 눈으로 쉽게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짜여진 주문은 문을 경계로 안과 밖을 완전히 격리된 세계로 만든다.

허나 그 대의회가 열린 것조차 대체 얼마만의 일인지, 기억하는 이도 거의 없을 것이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이 방에 들어온 이들조차도, 본래 그들만이 들어설 수 있는 이 방에서 생각 이상의 낯설음을 맛보고 있었다.

올파인 마야드 샤르세인, 더 흔히 불리기로는 샤르세인 대공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마 다시 들어설 일 없으리라 생각했던 방으로 돌아온 그는 생각 이상의 낯설음을 삼키며 물끄러미 방의 중심을 응시했다.

그 곳에 놓인 것은 원형의 돌탁자와 원형으로 둘러 놓인 일곱 개의 자리였다.

설령 황제와 그 제후로 나뉜다 한들, 마음만큼은 함께 황야를 달리던 시절과 다름없이 평등하리라던 대제의 유산.

그 자리에 앉은 이들이 완전히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원탁.

우스운 일이다.

저것을 만들었던 대제 엔지칼은 오늘날 황제의 자리가 무의미해진 것을 알게되면 뭐라고 말할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바람처럼, 황제는 대공들의 위에 서지 않았다. 아니, 설 수 없었다.

스스로 친우였던 여섯 대공과 같은 반열로 내려섰던 대제와는 달리, 그의 뒤를 이은 수많은 황제들은 여섯 대공들에게 끌려다니는 삶을 살아야 했다.

문득 샤르세인의 손끝이 떨렸다.

여섯 대공이 지배하던 제국도 이제는 옛 말이 되었다.

비어있는 자리, 아직까지 오지 않은 유일한 대공, 레가야의 주인인 르비아.

얼마 전 그가 미라야의 수도인 밀리아에 저질렀던 그 끔찍한 대학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카르티치스. 그대의 뜻을 꺾을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라도 영혼을 팔 수 있을 듯 하군.'

황제 아쉬칼페인의 계획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더이상 르비아가 활개치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다섯 대공은 엔지칼 대제의 시절 그랬듯, 다시 한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실패했을 때는 과연 무엇을 대가로 바쳐야 할 것인가.

그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리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다른 네 명의 대공들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물론 수도의 삼분의 일이 날아가는 막대한 피해는 미라야 외에는 겪지 않았다.

그러나 물밑에서부터 서서히 목을 죄어오는 레가야의 손길을 의식하지 못하는 대공국도 없었다.

그것을 뿌리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상대는 단신으로 하나의 국가를 상대할 수 있는 최악이자 최강의 마법사다.

대공국 하나의 힘을 모두 기울여 쓰러뜨린다고 해도 고작해야 레가야 공 한 명의 목숨을 빼앗는 것에 불과하며, 더욱이 어처구니 없는 것은 그 조차도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리라.

'실패 따위는 용납할 수 없다.'

오늘의 한 수를 위해, 대체 몇 사람이나 손을 잡은 것일까.

샤르세인은 황제가 말했던 또다른 협력자의 손길을 떠올리며 초조하게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마침내 문 밖에서부터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섯 대공들의 얼굴이 굳었다.

일부러 안에 있는 사람들의 긴장을 끌어올리듯, 발소리는 느릿하게 가까워져왔다.

길어야 몇 분, 고작 그 정도뿐일 시간이 엿가락처럼 한없이 늘어졌다.

수십 년 같은 시간이 흘러간 뒤에야, 마침내 굳게 닫혀있던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기 시작했다.

"신, 레가야 공 르비아 시스피케라 카르티치스, 황제 폐하께 문안드리옵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밖에서 무릎을 굽힌 르비아가 황제에게 배례했다.

"어서 오게. 별 일은 없었던 것 같으니 기쁜 일이로군."

단순히 보기에는 그야말로 충성스러운 군신관계로 보였다.

그러나 마치 연극처럼 과장된 르비아의 움직임은 필요 이상으로 고압적이었다.

어디까지나 '황제'와 '대공'의 직책에 걸맞는 행동을 보일 뿐이다.

대공국의 주인들이 '대공'이라기보다는 '대공왕'으로 불리는 이 나라에, 황제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르비아의 얼굴에 드리워진 감정없는 음영에는 그런 잔혹한 계산까지 드러나고 있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을텐데 자리에 앉는게 어떤가?"

"······그렇군요. 아무래도 저 혼자 늦어진 것 같으니 송구스럽습니다. 무슨 일로 신들을 소환하셨는지 알려주셨더라면 조금 더 서두를 수 있었을 것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명목상으로는 구 제국 익티아누스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아무 이유도 없이 제국간에 전면전이 일어날 일도 없고, 사소한 국지전이라면 북방의 세 대공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이다.

날 부른 본심이 뭐냐.

르비아는 그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대의회의 소집이 갑작스러웠다는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네. 다른 대공들도 도착한지는 오래 되지 않았으니 괘념치 말게나."

그러나 황제는 르비아의 시선에 물러서는 대신, 마찬가지로 무거운 시선을 들어 그를 마주 노려보았다.

문득, 르비아의 눈꼬리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이미 다른 대공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듯한 눈초리였다.

그러나 르비아는 더이상 입을 여는 대신 천천히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끝이 바닥에 닿는 순간 대리석으로 짜여진 마법진이 반응하며 짧게 빛을 뿜기 시작했다.

'······큭. 이미 적의를 숨길 생각도 없는건가.'

샤르세인 대공이 소리없이 신음을 삼켰다.

외부와 내실을 차단하는 마법진이 필요 이상의 마력에 비명을 흘리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펼쳐져있던 샤르세인의 마력도 마찬가지로 난폭하게 억눌려 위축되고 있었다.

단단하게 경직된 근육이 제대로 움직일 수 없듯, 이렇게나 위축된 마력은 간단한 원소 생성조차도 할 수 없다.

이 반응이 무엇인지, 샤르세인은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이사의 날개! 그걸, 네 놈이 가지고 있었더란 말이냐!'

그 파편만으로 마력의 흐름을 묶어버리는 강력한 유물.

물론, 본래 하나의 탑을 이루었던 이사의 날개를 소지하고 다닐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한 파편 하나만으로는 이 정도로 샤르세인을 억누를 수 없다.

하지만 탑의 중심, 술식의 심장이라 할만한 핵만을 가공해 가져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샤르세인은 손조차 써보지 못한 채 고스란히 자신의 가장 큰 무기를 빼앗겨버린 것이다.

샤르세인은 태연한 얼굴로 자리에 앉는 르비아를 보며 이를 갈았다.

뭔가 눈치챈 것이 아니라면, 굳이 샤르세인을 견제하기 위한 특수영장을 가져올리가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다섯 대공을 전부 상대할 생각이었던가. 하기야, 그런 자이니 우리들이 이토록 허망하게 짓밟힌 것이겠지."

대공의 노련함으로도 미처 다 감추어지지 않은 동요가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르비아는 그런 샤르세인의 동요를 보며 날카로워진 신경을 조금 가다듬었다.

샤르세인처럼 완전히 힘을 잃은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 역시도 빠른 속도로 마력이 깎여나가고 있었다.

대령결계에 혼선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현 대공인 르비아에게서 결계를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전대 대공의 적자, 티엘 한 명 뿐.

미라야에서 사라진 뒤 다급히 아르타야로 갈 줄 알았건만 당돌하기 짝이 없는 동생이다.

일단 결계를 빼앗아간 이상 다시 되찾아가는 것 역시 대비했을 터.

적어도 란의 영지로 돌아가지 않고서 소유권을 되돌릴 방법은 르비아에게도 없다.

말하자면 르비아로서는 적진에 들어가며 스스로를 지킬 방패를 잃은 격.

미리 빼돌려놓은 이사의 날개를 가져온 것은 단순한 보험이었지만, 나름대로 훌륭한 임기응변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거기 까지다.

티엘과 샤르세인이, 그리고 황제가 손을 잡았다고 해도 이 자리에서 직접 르비아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자는 없다.

고작해야 휄카야에서 독을 풀거나 아르타야 공이 그 노쇠한 몸으로 암기를 날리는 등의, 암살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하등한 방식 뿐이다.

암습이라면 그의 곁에 있을 그란드리아가 살기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고, 독살이라면 적지에서 확증도 없이 마실 것에 입을 댈 르비아가 아니다.

남은 수단이, 더 있는가?

자리에 앉는 그 짧은 순간까지도, 르비아의 날카로운 시선은 방 안의 작은 움직임 하나마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예리한 선을 그렸다.

"그럼 본격적으로 대의회를 시작하도록 하지."

황제는 미리 준비되어 있던 밀봉된 병 하나를 들어올렸다.

포도주가 담긴, 투명한 병이다.

밀봉을 뜯자 찰랑이던 맑은 액체에서 은은한 향이 피어올라 방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방 안에는 포도주를 따를 잔 따위는 없었다.

대신 돌탁자를 깎아 만든, 탁자를 아우르는 작은 물길과 수반이 있을 뿐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앞에 위치한 수반에 조심스레 포도주를 따랐다.

잿빛의 탁자 위로 불그스름한 선이 그려지고, 다시 약간의 웅덩이를 만든 뒤 새로운 선으로 이어져갔다.

모두 가느다란 수로로 이어진 일곱 개의 수반이 이내 똑같은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당대의 수호자에게서 끝나는 이 선은 모두가 하나의 목숨을 나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의회에서 황제와 대공들은 각자의 앞에 고인 포도주를 손으로 떠서 마시는 것으로 그 오랜 맹세를 되새긴다.

르비아는 찰랑이는 술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독 따위를 타지 않았다는, 별 신용없는 보증을 위한 요식행위일 뿐 아닌가.

'독은 타지 않은건가?'

그는 티엘과는 달리 영구적으로 지속되는 해독주문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르비아는 술을 입으로 가져가면서도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이는 계약의 피이니, 우리들 하나의 목숨으로 살고-"

"우리들 하나의 이름으로 이 땅을 지키리라."

맹약을 마친 황제가 가장 먼저 수반의 술을 떠올려 입으로 가져갔다.

르비아는 독사같은 눈으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법사인 샤르세인과, 독이나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가장 낮은 미르다야의 무라사 라본 이카넬.

르비아를 노리는 독이라면, 그 둘에게 먼저 영향을 나타내거나, 하다못해 그 둘에게만 별다른 방책이 주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르비아를 제외한 여섯 명은, 모두 한 치의 거리낌도 없이 수반의 술로 입술을 적셨다.

더이상 미룰 수는 없다.

이대로 마시지 않는다면, 황제를 의심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반역죄로 뒤집어씌울 수도 있다.

그 따위 장난질이야 힘으로 꺾지 못할 것도 없지만, 시간을 지나치게 낭비하는 일.

르비아는 순순히 술을 떠올려 입으로 가져갔다.

농익은 포도의 달콤야릇한 향.

술의 향에도, 이상한 것은 섞여있지 않았다.

마침내, 한 방울의 술이 르비아의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이건······!"


* * *



티엘은 자신을 안아 일으키는 나셀을 보며 쓰게 웃고 말았다.

참, 지긋지긋하게도 반복된 상황이다.

미안하고, 또 고마워, 티엘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몇 방울 흘리고 말았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정말······."

몰래 눈가를 훔친 티엘이 힘없이 웃었다.

하지만 나셀은 대답 대신 입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티엘의 상처를 살폈다.

행상들의 호의에 기대어,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털어 늙은 한 마리를 산 나셀은 그 직후 온 제도를 돌아다니며 다른 네 사람의 흔적을 찾았다.

다행히도 몇 사람이 일행들의 인상착의를 대략이나마 기억하고 있었고, 그 사람들의 말을 쫓아 빈민가를 몇 번이고 배회하며 주가를 불렀다.

그러나 티엘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한 요행이었다.

아마 몇 분만 더 빠르게 지나쳐버렸더라면 티엘의 반응을 영영 놓쳐버렸을테니.

하지만, 그렇게 가까스로 손에 쥔 것을 정말 요행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나셀은 가라앉은 얼굴로 티엘의 손을 끌어 쥐었다.

시궁창에 떨어져버린 인형처럼, 티엘의 오른팔은 먹물처럼 새카맣게 변해있었다.

어느새 그 따뜻하던 체온도 사라져, 이미 죽은 자에게나 어울릴 싸늘한 손이었다.

치료를 위해 주가를 불렀지만 긁히거나 찢기고 멍든 상처들만 아물어갔을 뿐, 시커멓게 물든 팔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자연적으로 치유되지 않는 상처라면 독이나 마법에 의한 것이리라.

"신전으로 가면 되는거지?"

자세한 상황 설명을 들을 시간 따위는 없다는 것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응······. 부탁해······."

먼저 티엘을 말에 태우고 뒤이어 말에 오른 나셀은 고삐를 틀어쥐며 한 팔로 티엘을 단단히 감싸안았다.

물론 나셀은 승마를 배운 적은 없다.

말은 제법 비싼 짐승인데다가, 음유시인이 말을 타고 돌아다닐 만큼 급하게 어딘가를 오갈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 나셀이 그럴듯하게 말을 타고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다소 특이한 편법 덕분이다.

행상인들이 내어준 말은 체력은 비록 떨어져도 오랫동안 사람과 짐을 실어나른 경험 풍부한 말이었고, 주가를 응용해 어느 정도의 의사만 전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영리한 녀석이었다.

덕분에 늙은 말은 서툰 기수의 손길에도 충실하게 다리를 움직여주었다.

나셀은 말에게 조금 속도를 내어 로셀의 대성당으로 갈 것을 부탁하며 다시 주가를 불러 티엘의 치료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셀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티엘의 팔을 잠식해가는 저주는 멈춰주지 않았다.

어느새 검은 저주가 뺨을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티엘은 언제부터인가 오른팔에서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팔 뿐이 아니었다.

시야는 계속해서 흔들렸지만, 말이 땅을 박찰 때마다 느껴져야 할 충격이 조금도 전해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눈동자만이 허공에 떠있는 것처럼 아무런 실감을 느낄 수 없다.

그저 죽음이 어깨너머에서 서서히 미소짓고 있다는 것만이, 지독할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진다.

"나셀······. 나 추워······."

꺼질듯한 목소리에 나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원 한복판에서도 추위를 느끼지 않는 티엘이다.

갑작스러운 오한이 결코 반가운 소식일리가 없었다.

"그야 지금 제법 빨리 달리니까. 옷 좀 두껍게 입지 그랬어."

"후훗······, 그럴리가 없잖아."

지금 건네는 농담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셀은 말에게 조금만 더 서둘러달라고 외치며 이를 악물었다.

더이상 주가가 효과가 없다는 것은 알았다.

그의 품안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는 티엘의 얼굴이 점점 더 검은 얼룩에 먹혀가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버텨줄까.

앞으로 얼마나 견뎌줄까.

마법사들은 목숨을 대가로 있을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한다는데, 어째서 자신은 그것조차 할 수 없을까.

'왜 항상 넌 내 마음을 찢어놓는걸까. 어째서 언제나 네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하는걸까.'

몇 번이나 삼켜버린 뜨거운 한숨이 가슴속을 불태웠다.

나셀로서도, 이 모습은 지독할 정도로 반복되는 일이었다.

몇 번이나 되풀이되는 이 모습이 너무나 숨막힐 것 같았다.

이번에는 희생해줄 대정령도, 적을 무너뜨려줄 용도 없다.

무력한, 스스로도 조금도 안심시켜줄 수 없는 무의미한 위안만을 되풀이하는 바보같은 음유시인 한 명 뿐이었다.

"기운 내. 이번에 고생 많이 했으니까, 따뜻한 것좀 마시고 푹 쉬면 금방 괜찮아 질거야. 지금은 그저······, 지친 것 뿐이야······."

"응······, 그럴지도 모르겠네."

마치 잠이 들듯, 티엘의 두 눈이 감겼다.

편안한 얼굴이었지만,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만 같은 안타까운 얼굴이었다.

고삐를 쥐고있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결국 이대로 끝일까?

결국 이렇게 손 안에서 놓쳐버리는 걸까?

그 순간, 무언가가 나셀을 부르듯, 그의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얗게 바래버린, 지금은 그저 손에서 뺄 수 없을 뿐인 가느다란 팔찌.

한 때 그의 생명을 빨아들여 불사르던 귀물(鬼物)이자 죽음속성의 마석을 다듬어 만들었다는 치유계의 영장 '죽음의 눈동자'.

이 팔찌의 보석이 아직 검었을 때, 메이트리아크에게서 들었던 한 마디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 돌은 너나 다른 사람의 상처를 빨아들여 치료해줄 수도 있다. 그 대가는 결코 작지 않을테지만.'

대가.

'그 이상의 저주는 없고, 그 이상의 기적도 바라기 어려울테지. 허나 그 생명을 모조리 대가로 바쳐 발휘되는 저주라면, 아마도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이라도 한 사람만큼은 확실하게 구해낼 수 있을거다.'

짧은 섬광이 머릿속을 스쳤다.

있다.

목숨을 대가로 한다면, 나셀에게도 한 가지의 기적은,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티엘과의 약속을 깨는 일이다.

'너만은······, 너라도······. 내가 모르는 곳에서, 혼자 사라져버리지 말아줘······.'

어쩌면 슬프도록 우스운 일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그 약속은 지킬 수 없을테니까.

그러나 선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았던가.

이 검은 돌을 받고, 제국의 땅을 밟은 바로 그 순간부터.

"티엘. 잘 들어."

대답은 없었다.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부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저 실낱같은 숨소리나마 아직 들리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내가 가져온 팔찌······기억해?"

점차 희미해져가는 세상을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던 티엘은 뜻밖의 단어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것이 무엇인지 곧바로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나셀이 입에 담은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다.

나셀이 이 이상 말하게 두면 안된다는, 막연한 예감이 뒷덜미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안······, 돼······."

점차 하얗게 물들어가는 기억을 거슬러올라간 티엘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팔찌?

무슨 팔찌였지?

아니,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다.

나셀이 어느 순간 차고 왔던, 그 불길한 팔찌.

지금은 하얗게 죽어버린 상태였지만, 여전히 나셀은 그 팔찌를 차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불길한 팔찌를, 왜 아직까지?

"저번에, 네 머리칼이 하얗게 물든 날. 네 손으로 이 팔찌를 봉인한 날. 그 날, 우리가 무슨 약속을 나눴는지, 너는 기억하고 있어?"

기억나지 않는다.

이미 하얗게 지워져버린 일 따위, 기억해낼 수 없다.

그렇기에 불안하다.

이제까지 잃어버린 그 어떤 기억들보다도, 나셀이 말하려는 그 약속을 잊고 만 것이 더더욱 불안했다.

"하지······, 마······. 안돼. 나셀-"

"네가 기억하지 못해도, 난 기억하고 있어. 말없이 사라지지 않기로. 네가 모르는 곳에서, 혼자 사라져버리지 않기로. 우린 그렇게 약속했지."

그만.

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을, 힘없는 부정.

순간 티엘의 눈앞으로 짧은 환영이 지나갔다.

흔하디 흔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약속.

그러나 몇 번이나 죽음을 겪어오고, 지금도 죽음과 마주하며 살아가는 티엘에게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것.

함께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그 맹세에는 그만큼 강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스스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왔던 나셀이기에, 처음으로 자신을 속박하는 것을 허락할만큼 그 마음이 깊었으리라.

서로에게 빈 자리를 메워주는 두 사람이었기에 의미있었을 약속.

초라하게 지친 두 사람이 힘없이 웃으며 나누었던 시시하지만, 아름다운 감정들.

떠올린 순간 마치 만화경처럼 찬란한 색채를 품었던 그 기억들이, 다음 순간 이어질 말을 직감한 듯 허망한 무채색으로 바래갔다.

"그만······. 더 말하지 마, 나셀. 제발······."

막아야 한다.

더 말하게 두어선 안됀다.

차라리, 혀를 깨물어서라도 그가 말을 잇도록 내버려둬선 안됀다.

"아무래도 나, 네가 없는 거리는 견디지 못할 것 같은걸.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밖에 안될테지만······."

하지만 그 순간, 안타까이 웃으며 돌아보는 그 얼굴을, 티엘은 차마 가로막을 수 없었다.

내게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다시 한번 너에게로.

서글픈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다른 이를 위해 희생하려는, 가장 이타적인 이기심이었다.

나셀은 하얗게 바래버린 팔찌를 들어올렸다.

시원의 용, 칼라가스의 마력으로 짜올린 봉인은 분명 그 누구라 해도 깰 수 없을만큼 강력하다.

하지만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영장의 주인.

죽음의 눈동자의 소유자가 봉인을 걸었던 티엘보다 더 강한 의지로 부른다면, 봉인은 결국 깨진다.

마법은 본래 의지의 힘이기에.

결국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간절한 바람이기에.

이 모든 이야기를 해준 것은 다름아닌 티엘이었다는 사실에, 나셀은 조금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 티엘. 약속, 지키지 못할 것 같아."

쩌적.

팔찌의 표면에 금이 갔다.

하얗게 깨져나가는 껍질 사이로 섬뜩한 검은 빛의 돌이 다시금 빛을 되찾았다.

죽음에서 태어났으나 치유의 힘을 가진 모순된 돌.

산 자의 생명을 마시고, 죽어가는 자에게서 죽음을 거둬가는 잔혹한 등가교환.

이대로라면 티엘이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나셀이 팔찌를 사용하면 티엘의 저주를 빨아들이는 대신, 팔찌의 저주로 인해 나셀이 죽는다.

어느 한 명은 죽게된다면, 누굴 택해야 할까.

나셀은 기쁘게 웃었다.

이 서글픈 양자택일의 선택권은, 다름아닌 자신에게 있었으니까.

티엘이 반대하더라도, 결국 나셀이 원한다면 그녀는 살아남는다.

"안돼. 안돼, 나셀! 안돼! 하지마! 하지 마아아!"

쨍그랑!

팔찌의 하얗게 물들었던 표면이 완전히 깨져나갔다.

티엘의 봉인이 약했던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바람만으로 세계와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마법조차 넘어설 정도의 기적을 이끌어내는 나셀의 의지가 너무나도 올곧았던 것이다.

그러니 이 모습은 결국 언젠가 일어났을 일일지도 몰랐다.

"죽음을 비추는 눈이여, 죽음을······, 삼켜라."

"안돼애애애애애!"

메이트리아크에게 들었던 시동어가 조용히 돌을 깨웠다.

마지막 명령을 들은 검은 보석 위로 선명한 붉은색의 문장이 떠올랐다.

한 마리의 나비와, 자신의 꼬리를 문 채 그 나비를 감싸는 한 마리의 뱀.

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셀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알 수도 없을 것이다.

눈을 찌르는 붉은 섬광 속에서, 나셀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르비아는 흠칫 놀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막 입안으로 흘러들어온 술을 뱉어버리며 다급히 마력을 돌리려 했지만, 이미 입에 술이 닿은 순간부터 전신이 저리며 감각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눈으로 읽듯 선명하게 와닿던 마력의 흐름 역시도 안개속으로 숨듯 흐릿하게 변해버렸다.

환각계의 마력인가?

아니, 마력이 움직이는 것은 느끼지 못했다.

혹시라도 몸을 잠식했을 마력을 깨뜨리기 위해 자신의 마력을 끌어올리려던 르비아는 욕짓거리를 삼켰다.

반응이 늦다.

그의 마력이 전반적으로 둔해져 있었다.

당황하는 그의 눈에, 문득 샤르세인의 희미한 미소가 들어왔다.

이사의 날개에 짓눌리며, 자신의 마력조차 억눌려 식은땀을 흥건하게 흘릴 정도로 힘겨워하고 있었지만, 그 일그러진 웃음은 분명 회심의 미소였다.

그리고 그 미소가, 르비아를 덮친 무력감의 정체를 넌지시 알려주고 있었다.

'샤르세인, 자신을 미끼로 삼은거냐······!'

함정.

당연히 함정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기어이 빠지고 만, 몇 중으로 파둔 세밀한 함정.

본래 마법사인 르비아를 견제할 수 있는 것은, 같은 마법사인 샤르세인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랬기에 르비아는 이사의 날개, 그 핵을 가져와 샤르세인의 힘을 꺾어놓았다.

하지만 황제가 꺼내들었던 저 술은 제국에서도 오로지 비사야만이 소유하고있는 특별한 술이었다.

엘레나미스 대초원, 마령들이 전혀 나타나지 못하는 '성지'중 하나.

미라야의 두 날개와 무관한 '성지'는 더더욱 특별한 땅이다.

그 땅에서 서리를 맞은 뒤 수확한 포도로 담근 술은 엘레나미스 포도주라 불리며, 그 맛과 향이 지극히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오죽하면 아이넬라에게 바쳐지는 가장 고귀한 포도주로 이름이 높을까.

그러나 엘레나미스 포도주에는 치명적인 특성이 있다.

마법사가 그 엘레나미스 포도주를 마실 경우, 마치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상당한 기간동안 마력을 쓰는데 극심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

때문에 일부 마법사들은 엘레나미스 포도주의 향을 기억하고, 경계한다.

물론 르비아도 마찬가지다.

그런 그를 다시 한 번 속인 것은 무엇인가.

르비아는 술이 닿지 않은 수반의 끄트머리를 손끝으로 닦아냈다.

섬세하게 깎아낸 돌 탁자는 유리처럼 매끄럽다.

하지만 수반 안쪽은, 똑같이 매끄러운 감촉을 지니면서도 미세한 위화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미세한 향, 그리고 약간의 끈적거림.

그 미묘한 향은 다른 향과 섞이면 제 빛을 잃을 정도로 미약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포도주처럼 섬세한 향을 일부 죽이기에는 충분했다.

아마도 휄카야에서 만들어낸 특수한 진액이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야. 내 눈을 피해 손을 잡았다면 그 움직임을 놓칠 리-'

르비아의 손이 꿈틀거렸다.

그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자라면, 아르타야의 그림자 기사단이 있다.

암살과 은밀행동을 업으로 삼는 그들이라면 수천의 생령을 눈으로 삼는 르비아의 시야조차도 속일 수 있다.

가늘게 떨리던 손이 천천히 탁자의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뿌드득, 눈을 밟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마법 걸린 돌탁자가 손아귀에서 부스러졌다.

아직 수반에 고여있던 포도주가 마력의 영향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놀랍군요. 진심으로 놀랍습니다, 폐하. 눈속임으로 실을 움직이는 것에 흥미가 있으셨는지는 미처 모르고 있었군요."

불길을 품은 얼음이 방 안을 휘감았다.

르비아는 독기 어린 눈을 들어 좌중을 둘러보았다.

움켜쥐었던 손을 펼치자 잘게 부서진 돌가루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와 함께 르비아의 주위로 제어되지 않는 거친 마력이 난폭하게 날뛰었다.

설마 황제와 다섯 대공을 모두 죽일 생각인가.

하지만 마력이 휘몰아치는 그 가운데로, 순간 두 개의 그림자가 바람처럼 파고들었다.

아르타야 공 리카드라 솔 디안-실카르, 그리고 미르다야 공 무라사 라본 이카넬.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두 전사들의 검이 르비아를 겨누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일렁이던 마력이 마치 종잇장처럼 그들의 검에 깨끗하게 잘려나가고 있었다.

일반적인 철보다 옅은 붉은빛을 띄는 철은 분명 휄카야의 로파르미스 산맥에서 난 것이다.

그러나 폭이 좁고 칼 중심부분이 완만하게 좁아지는 모래시계형의 검은 분명 속검을 중시하는 미르다야의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

'그렇군. 나라는 적을 위해 다섯 대공이 모두 손을 잡았다?'

솔직히 말해, 이 정도까지 이르면 오히려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고작해야 몇 세대 가량, 그나마도 직접적인 항쟁만이 없었을 뿐 서로의 등에 비수를 꽂길 주저하지 않았던 여섯 대공국들이다.

서로 손을 잡는다는 것은 우스갯소리도 되지 않는다.

신과 천사들에게 매달릴 뿐인 미라야의 백마법도, 제국 최대의 평원지대에서 뽑아올리는 막대한 비사야의 재력도, 명예에 집착하는 미르다야 기사들의 얼빠진 검도, 기기묘묘하게 단지 적의 목숨을 끊는 데만 급급한 아르타야의 비열한 암습도, 알 수 없는 연구만으로 온갖 희귀자원을 낭비하는 휄카야의 독물도, 엔지칼 대제 사후 400여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단 한번도 진심으로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

그런 다섯 대공이, 단지 르비아 한 명을 상대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적의를 홀로 상대하는 르비아에게는 어쩌면 영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이리라.

"인정하지요. 당신을 얕보고 있었습니다, 폐하. 서로를 잡아먹으려드는 다섯 마리의 야수를 한 수레에 묶을 수 있으리라고는. 하지만 그래서? 이 자리에서 절 죽이지 않는 한,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애써 드러낸 이빨이 무색하게 될테지요. 그러나 절 죽이신다면? 절 죽이신다고 해도 계약한 생령과 마법사는 별개의 존재. 이미 그란드리아에게 말해두었습니다. 제가 살해당하거든 제도를 송두리째 날려버리라고."

르비아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첫 수에 목을 끊지 못하면 두 번의 기회는 없는 법입니다. 당신의 패배입니다, 폐하."

그래봐야 다섯 개의 대공국일 뿐이다.

손을 잡아봐야 조금 더 성가셔질 뿐, 마력을 회복할 동안만 버텨낸 뒤 하나하나 짓밟아버리면 전부 끝난다.

수도의 삼분의 일로는 모자랐다면, 그 다음은 각 영지의 절반을 불태우면 그만이다.

"아니, 패배가 아닐세."

그러나 황제는 르비아의 패배를 마무리짓듯, 한 장의 문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황실의 물건임을 상징하는 황금빛의 봉랍은 이미 뜯어져있었다.

저 것이 무엇이길래?

핏발 선 눈이 빠르게 문서 위로 미끄러졌다.

은으로 테두리를 장식하고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장엄한 글자체가 아로새겨진 일종의 계약서.

그 문서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모든 영광은 신에게로, 또한 모든 죄는 신에게로.

어리석은 이들이 되풀이하는 잘못을 벗어나기 위해 이 곳에 서약하니, 이는 제국의 검이며, 방패이며, 뜻이라.


그 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르비아는 신음처럼 그 물건의 이름을 외쳤다. 결코 생각지도 못했던, 마지막으로 그의 숨통을 물어뜯을 송곳니의 이름을.

"혈위종속계약······. 카제린의 맹약서!"

레가야의 첫 번째 대공이며,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최강의 흑마법사였던 카제린 이안 카르티치스.

단지 일개 왕국이었던 시엘리아를 제국의 반열에 올린 것은 엔지칼 대제의 역량이었으나, 대제 사후, 갈라지기 시작한 제국을 하나의 테두리 안에 묶어두며, 스스로 최초의 황제의 수호자가 되어 그 명맥을 지킨 것은 카제린의 힘이다.

그녀가 얼핏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체계를 강제로 덧씌울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당대의 가장 뛰어났던 흑마법사인 동시에, 이 시대는 물론, 이피안의 시대로 거슬러올라가야 할 만큼 강력했던 혈마법사이기도 했다는 점이었다.

그런 카제린이 남긴 몇 안되는 유물 중 하나.

개인이 아닌, 가문의 피에 걸고 강력한 규칙을 거는 서사급 주문.

그녀의 영지였던 레가야에조차 한 장도 남지 않은 그 주문서가, 하필이면 황제의 손에 남아있었단 말인가.


일곱 가문의 피에 걸고서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고한다.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선 자, 이 땅의 모든 영광을 거느리는 자이니

루앙의 좌의 이름에 걸고서, 여섯 자루의 검의 충의를 져버리지 않을 것이며

그 아래 선 여섯 자루의 검의 피에 걸고서, 그 칼날을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려 하나뿐인 주인에게 바칠 것을 선언한다.


제정신인가.

순간적으로 르비아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여섯 대공들이 그동안 황제를 끌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다수라는 이점도 있었지만, 그 이전에 자신을 따랐던 여섯 기사를 신하가 아니라 형제나 친우처럼 여겼던 엔지칼의 고집과 유산의 덕이 더 컸다.

대공들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이상, 황제는 대공들의 권리를 빼앗을 수 없었고, 따라서 대공들은 그 힘을 제약없이 불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저 맹약서에 적힌 것은, 바로 그 대공들을 지켜준 가장 강력한 검이자 방패를 황제에게 넘겨주는 것을 의미한다.

즉, 더이상 제국의 진정한 주인이라 불리던 '대공왕'이 아니라, 황제의 신하인 '대공'으로 내려서겠다는 맹약이다.

물론 사후의 혼마저 속박하는 가장 강력한 속박 중 하나라고 해도, 기본적으로는 마법이다.

평소의 르비아라면 시룡의 강대한 힘과 레가야 전역에서 끌어올린 마력을 쏟아부어 계약에 묶이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계를 잃고, 마력에 제약이 걸린 지금은 다르다.

몇 중으로 깎여나간 마력저항의 틈으로 파고든 계약은, 한 번 완성된 이후에는 마력만으로 떨쳐낼 수 없다.

피부에 스며든 문신처럼, 그 혼에 직접 파고들어버린 것이기에.

"······설령 레가야를 제한 모든 대공이 모였다고 한들······, 레가야의 동의가 없다면 그 식은 발동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맹약에 이름을 적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니. 이미 끝이네. 그대 또한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황제는 양피지를 뒤집어 르비아를 향해 펼쳐보였다.

문서의 끝자락.

황제와 함께 일렬로 나열된 여섯 개의 이름들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적힌 하나의 이름.

"이스티엘······, 아르야 카르티치스······."

이 것이 황제가 준비한 마지막 비수였다.

적용 대상은 황제와 대공, 단 일곱 명 뿐.

그러나 그 속박은 핏줄을 통해 전해진다.

따라서, 가문의 일원이기만 하다면 그 어떤 사람이라도 이름을 써넣을 수 있다.

결계 반전으로 인해 대령결계의 소유권을 빼앗긴 시점에서 티엘이 관여했으리라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 여파가 이렇게까지 덮쳐올 거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르비아의 흔들림을 읽은 것처럼, 양피지에 내장된 마력과 일곱 사람의 피를 마신 맹약서에서 탁한 붉은빛의 불꽃이 확 피어올랐다.

일곱 개의 이름이 적힌 부분에서부터 시작된 불꽃은 빠르게 양피지를 휘어감아, 검게 불태우며 허공으로 홀연히 녹아들어갔다.

그러나 황제는 눈 안에는 이미 사라져버린 불꽃이 여전히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뒤집을 수 없는 확고한 승리 속에서, 황제는 담담하게 자신의 승리를 선언했다.

"제국의 황제가 그대에게 명한다. 르비아 시스피케라 카르티치스. 내 백성들에게, 더이상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지 말라."


작가의말

저 시점에서 사실 황제의 이름은 획 하나만 남긴 상태로 들고 왔답니다.

르비아가 엘레나미스 포도주까지 마셔서 확실하게 계약에 묶일 때를 노려야 하니까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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