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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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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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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04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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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14장-약속約束 (13)

DUMMY

잊고 있었다.

처음 칼로스를 만난 날, 그가 혈마법을 이용해 공간을 뒤틀던 모습을.

설령 아스트라 자체의 궤적을 꺾을 수는 없을지라도, 화살에 꿰뚫릴 몸을 조금이라도 비틀어 몸을 지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지간한 건물보다 두텁게 휘감긴 얼음 위로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거대한 칼날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마치 물살을 가르듯 어렵지 않게 검을 내리쳐 자신을 묶어두는 거대한 족쇄를 단숨에 뿌리쳤다.

"이런, 미친!"

날았다.

그 거체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게 도약한 괴물은 놀랍게도 뜯겨나간 살가죽을 피막으로 엮고, 아스트라에 짓이겨진 뼈를 꺾어 날개살을 만들어, 마치 박쥐라도 된 것처럼 힘차게 날개짓을 하고 있었다.

"티엘, 발판!"

순간 올로비스가 화살처럼 뛰쳐올랐다.

두 동강이 난 채 반쯤 부스러진 빙산을 밟고 뛰어오른 그는 티엘이 재차 날려올린 아스트라를 딛고 다시 한 번 도약해 괴물의 심장을 노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괴물은 그런 올로비스를 향해 쥐고 있던 검을 집어던졌다.

맞는다면 날에 베이는 것보다 충격만으로 사람을 박살낼 수준의 맹투(猛投)였다.

"솔페이람!"

광풍령의 폭풍이 가까스로 칼의 궤도를 흐트러뜨리고, 뒤이어 힘겹게 휘두른 창이 간신히 칼날을 완전히 흘려냈다.

그러나 올로비스는 여전히 하늘에 머무르는 괴물을 향해 저주를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도약이 끝나는 순간을 노리고 뻗어나간 속박주문들은 괴물의 발치 아래의 허공을 움켜쥐었을 뿐, 아무런 효과도 없이 허망하게 사그라들고 말았다.

"아아-, 아아아아-!"

또다시, 피를 끓어오르게 만드는 노랫소리가 폭발했다.

하지만 짧다.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방해할 정도로 짧은, 단순한 견제에 가까운 마력폭발이었다.

약해진 걸까.

아니, 다분히 의도적인 수단이다.

허공에서 몸을 돌린 괴물은, 순간적으로 올로비스와 티엘의 움직임이 멈칫거리는 틈을 타 허공을 박차고 날렵하게 내려앉았다.

먹이를 노리는 솔개처럼 내려앉은 괴물의 눈 앞에는, 다름아닌 칼로스가 있었다.

"칼로스! 피해요!"

'그럴 수 있었으면 진작 피했지.'

칼로스는 쓰게 웃었다.

혈마법은 마력과 함께 피를 소모한다.

이미 한계에 다다를 정도로 피를 짜낸 칼로스는 주문으로 자신을 보호하기는 커녕, 몸을 움직여 달아나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였다.

그런 사실을 알아챈 것처럼, 떡 하니 눈 앞으로 다가온 괴물을 보니 억울한 감정이 왈칵 치밀어올랐다.

역시 혈마법사와 혈정령이 더 탐나는 먹이였던 걸까. 아니면 단순히 약한 놈을 먼저 노리는 사냥 본능일까.

어느쪽이든, 칼로스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제기랄, 움직여! 움직이라고!'

하다못해 이사드라도 새길 수 있다면.

그러나 자신을 향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도, 칼로스의 마력은 움직이지 못했다.

이미 한참 전부터 메말라 있었으니까.

그가 얼어붙은 사이, 이미 괴물은 그의 머리를 향해 팔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피에 젖은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끝인가. 제기랄!'

"안돼!"

은사를 뻗기에도, 빙벽을 세우기에도 늦고 말, 지나치게 먼 거리.

칼로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이렇게 무력하게 죽음을 바라봐야 한다는 말인가.

마치 주마등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한없이 시간이 느려져, 닿지 못했을 구원이 닿을 정도로.

'응······? 닿았어?'

순간, 칼로스는 흠칫 놀라며 막 감아버리려던 눈을 다시 크게 떴다.

잠을 깨우는 듯한 싸늘한 냉기가 얼굴을 슬며시 쓰다듬고 있었다.

티엘이 짜올린 빙벽이었다.

"뭐, 뭐야. 이, 이거 무슨 일이야?"

그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괴물은 들어올린 팔로 칼로스를 내려치는 대신, 그의 앞을 얼음과 암벽이 가로막을 때까지 얼어붙은 것처럼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괴물은, 마치 얼음 너머에 있는 칼로스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조심스레 들어올린 손으로 벽을 쓰다듬고 있었다.

결코 굶주린 마령이 보일만한 행동이 아니다.

마치, 오랜 추억에 잠겨버린 인간과도 같은 모습.

지금까지 우악스럽게 마력과 육체를 휘둘러오기만 하던 괴물이 왜 이제와서 저런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 정체모를 관용을 언제까지나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칼로스는 이를 악물며, 삐걱이는 몸을 억지로 잡아 끌었다.

"칼, 이거 받아!"

순간 올로비스와 리아가 제각기 칼로스가 만들어주었던 혈정석을 던져주었다.

붉은 돌을 잡아챈 칼로스는 곧바로 발끝을 움직여 이사드를 그리고, 그 위로 혈정석 하나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의 혈정석을 이로 물어 깨뜨리며 수인을 맺었다.

"카즈리엘!"

붉은 섬광이 폭발했다.

빛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진 칼로스는 섬광과 함께 티엘의 곁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어지간히도 무리한 것인지 더이상 고개를 들 기력도 없을만큼 지친 상태였지만, 그는 머리를 바닥에 쳐박으면서도 기어히 한 팔을 뻗어 괴물의 발치를 가리켰다.

그 곳에는 아직 핏빛의 이사드 하나가 급하게 그려넣은 마법진과 함께 남아있었다.

"레즈샤, 베른 라엘리카 팔(열어라, 혼돈의 문을)!"

마지막 혈정석이 저절로 깨졌다.

그리고, 깊고 깊은 지하 한가운데의 유적에 하늘이 열렸다.

괴물의 발밑과 머리 위에 동시에 펼쳐진 거대한 마법진 사이로 눈을 태워버릴 듯한 진홍빛 벼락이 소나기처럼 휘몰아쳤다.

비명소리마저 삼켜버린 벼락은 돌과 바위마저 부수며 소름끼치는 포효를 내질렀다.

혈정석에 담긴 피와 마력을 매개로 펼친, 아끼고 아낀 최후의 공격주문.

사실상 수명까지 털어넎어 억지로 발동시킨 주문은 기사단에서도 흔히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뇌격을 쉴새없이 뿌렸다.

그 시점까지 조금이나마 몸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티엘과 아시에 뿐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은 채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울부짖는 벼락폭풍 사이로 미친듯이 공격을 퍼부었다.

여기서 끝내지 못하면 결국 괴물을 쓰러뜨릴 수 없으리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천 년은 이어질 것만 같았던 벼락이 겨우 잦아들었다.

"해치운거야?"

"빌어먹게도, 아닌 것 같은데."

칼로스는 지친 얼굴로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사실상 그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공격이었다.

그러나 주문의 효력이 다하며 사그라드는 벼락 사이에는, 여전히 일그러진 괴물의 그림자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하아아아아······. 그으윽, 흐아아아아아······."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뜨겁고 고통스러운 숨소리가 듣는 이의 목을 죄어왔다.

물론 괴물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벼락을 받아낸 것으로 보이는 두 팔은 검게 타버렸고, 그르렁거리는 숨소리 역시 한 눈에 알 수 있을 만큼 거칠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조금 전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고서도 저 정도밖에 소모되지 않았다면 더이상 시도해볼 수 있는 공격조차 크게 의미가 없었다.

유일하게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것은 다시 한 번 칼라가스의 숨결로 소멸시키는 것.

그러나 이미 한 번은 실패해버린 지금, 또다시 숨결을 쓰는 것은 뒤를 남기지 않는 선택이다.

여기서 티엘이 마력을 전부 써버린다면 더이상 결계에 접속해볼 기회조차 남지 않는다.

"망할······. 대체 뭐가 어떻게 된 놈이야? 엘린드라의 소나기는 성체 용조차도 버티기 어려워. 저 놈, 정말 마령이 맞는건가?"

"아마 저 녀석의 마력이 가진 특성때문일테지."

한 팔이 잘려 위태로울 정도로 피를 흘려 창백해진 아시에가 말을 받았다.

쌍창중 하나를 지혈대로 변형해 겨우 출혈을 막았지만 역시 마령과의 전투로 빨려나간 피는 막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시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비틀거리려는 몸을 억지로 바로 세운면서도 여전히 괴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란세어가 소멸할 때, 흐릿하지만 속성을 읽었어. 단순한 혈정령이 아냐."

"그게 무슨 소리야?"

"한 가지 속성이 더 있어. '고독한 속죄'. 무슨 의미인지 알아? 비정상적인 내구성은 아마 후자의 속성 때문이다."

고독한 속죄?

그것은 부활계에 속하는, 특이한 성질의 마력 속성이었다.

강력한 재생능력을 부여하지만,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한없는 고통을 맛보게 되는, 차라리 저주에 가까운 속성.

"잠깐, 혈정령이 이중속성일리가 없잖아!"

그러나 칼로스는 기가 막히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혈속성을 지닌 생령은, 절대로 다른 속성을 함께 지닐 수 없다.

혈마력은 마력이면서도 육신을 가진 자들의 피에 밀접하게 연관된 속성이기 때문에 결코 다른 속성의 마력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억지로라도 뒤섞는다면, 혈마력 자체의 고유성을 잃고 단순히 무색의 힘으로 변해 뒤섞인 마력의 성질을 따르고 만다고 했던가.

물론, 아시에는 아시에대로 얼굴을 찌푸리며 칼로스의 말에 날카롭게 반응하고 있었다.

"팔 하나 대가로 얻어낸 정보를 그 따위로 취급하는 건가? 이래서야, 저걸 처리하고 난 뒤에는 내 목이 떨어지겠군. 더 협력할 필요도 없겠어."

"기가 막히는군. 먼저 공격한 쪽은 그쪽일텐데?"

"시시비비 따질 여유가 있는건가? 애석하게도 난 그럴 여유따위는 없고, 여기서 죽어서 저 더러운 게 날 먹도록 내버려두고 싶지도 않아. 분명히 말하지. 저건 혈정령이 아니야."

"제기랄! 지금 서로 싸울때야!?"

이미 희망이 꺾여버린 탓일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겨우 뭉쳤던 사람들이 다시 갈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티엘은 그들을 말리려는 대신, 이전에 칼로스에게 들었던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오늘날 백마법사들은 혈마법을 전혀 구현할 수 없으며, 흑마법사라 할지라도 마법사 본인의 고유 속성과 계약한 생령의 속성이 혈속성일 때만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나마도 혈속성 자체가 엘드리안에게서 기원한 것이 아니기에 마법사든 생령이든 혈속성을 지니는 경우가 매우 드물고, 결과적으로 이 시대의 혈마법사는 손으로 꼽을만큼 드물 수밖에 없다.

물론, 혈마법사가 일반 생령과 절대로 계약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칼로스는 단지 카즈리엘을 제외한 생령과는 계약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재능이 없었을 뿐, 티엘이 빌려주었던 파드마를 다루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했다.

'혈속성의 마법사와 다른 속성의 생령이 뒤섞인 거라면······. 아냐. 그렇다면 혈마력이 아니라 생령쪽의 마력이 강하게 나타났을거야. 하지만 '고독한 속죄'라고······?'

그것이 마법사 쪽의 속성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마법사는, 언젠가 금기를 범해 천 년도 넘는 기나긴 속죄에 묶이게 될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금기······. 하나의 육에 둘의 영······.'

그 순간, 기원석에 새겨져 있던 글귀가 머릿속을 스쳤다.

저 마령이 단순히 자연발생한 것이 아니라, 티엘과 마찬가지로 강령을 시도했고 그 결과로 영락한 모습이라면.

그렇다면 두 속성의 마력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생령이자 마법사이기에. 둘이자 하나이기에, 원래 뒤섞여 녹아내렸어야 할 마력이 아직까지 안정되지 않은 것이리라.

"칼로스! 고대 이피안에서의 혈마법사는, 지금처럼 사용에 제약을 가지고있진 않았겠죠? 지금처럼 반드시 혈속성의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혈정령과 계약이 가능했겠죠?"

"몰라! 근데 아마도 그렇겠지."

티엘의 눈에, 어렴풋한 동질감이 맺히기 시작했다.

정말 저 존재가 자신처럼 강령을 시도한 끝에 뒤틀린 자라면, 아득한 세월을 사이에 둔 또다른 자신의 그림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리한 강령으로 인해 마법사도, 생령도, 서로의 영향으로 순식간에 깎여나가 결국에는 뒤틀려버린 비참한 괴물.

천 년을 넘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가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린 채로 고독하게 묶여, 스스로가 지었다는 것도 잊어버린 죄의 용서를 비는 안타까운 죄인.

그제서야 '붉은 것'의 육체가 몇 개나 되는 사슬로 칭칭 휘감겨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핏빛 사슬은 육신을 꿰뚫은 채 필사적으로 '괴물'을 묶어두고 있었다.

본체가 무기처럼 휘두르는 일도 있었지만, 그 역시도 근본적으로는 본체를 휘감기 위한 움직임.

지금 이 순간에도, 사슬은 주인의 움직임이 빈틈을 보일 때마다 다시금 그 주인의 살을 파먹으며 더욱 무거운 속박을 강요하고 있었다.

비참한, 그리고 비극적인 모습이었다.

"자신의 마력으로 스스로를 얽어매는 저주······."

이제는 이름조차 사라진 죄인이 다시금 포효를 내질렀다.

어느새 회복된 두 팔은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거칠게 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것일까.

한탄하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깨끗한 죽음이 잃어버린 명예를 대신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령을 믿고, 자신의 몸에 강령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티엘은 상대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감정에 휩쓸려 행동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때다.

그러나 저 자에게 안식을 줘야만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고, 내면의 또다른 자신은 그렇게 부추기고 있었다.

한 발, 단 한 발의 아스트라면 된다.

칼라가스의 숨결을 담아, 단 한 발의 아스트라로 소멸시키면 된다.

그것으로 저 죄인은 안식을 얻고, 일행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아니야.'

순간 '붉은 것'이 이제껏 보여왔던 행동들이 티엘의 머리를 스쳤다.

아시에도 그랬고, 칼로스도 마찬가지였다.

가까이 접촉한 사람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지나치게 거칠고 격렬해 눈치채기 어려웠을 뿐, 올로비스를 향한 공격을 제외하면 이제껏 괴물이 선제공격을 시행한 경우는 없었다.

괴물의 움직임은 시간을 들여 상대를 살핀 뒤, 원하는 무언가를 찾지 못해 격분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무엇을 찾는가?

"티엘······?"

자신을 끌어안은 채 울부짖는 괴물의 비참한 모습을 보던 눈동자가 한 순간 흐릿하게 물들었다.

소리없이 흘러내린 열기가 발치로 떨어져 안타깝게 부서졌다.

안타까웠다.

가슴이 미어질 듯한 강렬한 애수가 심장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것은 티엘의 감정이 아니다.

헤아릴 수 없는 기나긴 시간을, 무엇 하나 잊지 못한 채 살아가야만 하는 하얀 날개의 용.

티엘은,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하나를 대신해 울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눈물이 티엘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티엘 역시도 울부짖는 괴물의 모습을 보며 함께 따라 울고 싶은 기분이었으니까.

무언중에 허락과 동의가 이어졌다.

티엘은 다시금 머릿속에 새하얀 폭풍이 휘몰아쳐오는 것을 느끼며 죄인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티엘, 뭐하는거야! 위험해! 티······."

티엘의 머리칼이 순간 무릎에 닿을 정도로 길어지며, 끝에서부터 새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내딛은 발걸음마다 소리없이 맺힌 서리가 은은하게 반짝였고, 바람도 없이 흩날리는 머리칼 주위로는 면사포를 연상시키는 엷은 안개가 휘감겼다.

얼어붙은 듯 고요하게 앞을 바라보는 눈동자 역시 짙푸른 칼라가스의 눈동자로 변해있었다.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눈앞이 하얗게 타올랐다.

기억들이 사라져간다.

오래된 다리의 이끼처럼, 깨끗한 물에 떨어진 독약처럼, 티엘이었던 것을 지워버리는 새하얀 공백이 퍼져간다.

강령을 통한 침식은 단순히 마력을 빌리는 것과 비할 수 없을만큼 빠르다.

그러나 티엘은 이를 악물며 눈을 떴다.

걱정스러워하는 칼라가스에게 괜찮다는 허세를 부리며, 천천히 '붉은 것'에게로 다가갔다.

괴물은, 뜻밖에도 티엘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한 걸음씩 다가오는 설원의 새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티엘의 걸음이 멈췄다.

작게 속삭이는 말소리까지 서로에게 들릴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티엘은 그 상태로 무기를 들어올리는 대신, 아무것도 들지 않은 맨손을 들어 괴물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아, 아아아······."

일그러진 채 가늘게 떨던 괴물의 손이 마찬가지로 티엘의 뺨에 닿았다.

들끓던 마력이 순식간에 잦아들고 이글이글 타오르던 눈빛 역시 고요하게 사그라들었다.

다른 네 사람이 놀라워하는 것을 뒤로한채, 티엘은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모았다.

죽은 자를 애도하듯, 혹은 짊어진 죄을 용서하듯.

차르르륵!

사슬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느새 죄인의 검이 사슬에 이끌려 곁에 와 있었다.

죄인은 두 손으로 검을 들어 티엘에게 내밀었다.

티엘은 가느다란 검의 칼날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시간에 지쳐서인가, 아니면 이런 모습이 되었기에 이 감옥에 갇힌 것인가. 가련하고 잊혀진 죄인이여."

"네······네데, 베일······린, 사에······, 유르마엘 로신 텔림······. 렌, 우루넬 아, 아슈빌레림······. 코즈엘 레비안······,에데······."

그대와 만난 것은 여신의 인도인가, 아니면 우룬의 장난인가. 답을 찾는 자여.

피와 눈물로 바닥을 적시던 죄인이 흐느끼듯 말을 받았다.

"말을······했어······?"

리아의 억눌린 목소리를 흘리며, 티엘은 천천히 죄인이 내민 검에 손을 가져갔다.

칼끝에서부터 타고 올라간 손끝이, 마침내 손잡이를 잡았다.

검의 길이는 무척이나 길어, 검신의 길이만 해도 이미 티엘의 눈높이에 이를 정도였다.

그 무게 또한 결코 가볍지 않아 들어올리는 것만도 버거울 정도였다.

그러나 티엘은 마력을 팔에 두르면서까지 묵묵히 검을 들어올렸다.

이름을 잃은 죄인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거대한 칼날이 가볍게 죄인의 양 어깨와 머리를 스쳤다.

"여태껏 이 순간을 기다린 것인가, 오래된 도시의 수감자여. 이미 그대를 가둔 자들은 모두 안식에 든지 오래이거늘."

문득 티엘의 입술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음색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알 수 없는 기묘한 울림이 섞인 목소리는 분명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티엘의 몸을 빌린 칼라가스는 측은한 표정으로 검을 끌어내려, 자유로워진 손 끝을 죄인의 심장 앞에 두었다.

"시원의 용, 칼라가스와 그 계약자, 설원의 새벽 이스티엘의 이름으로 선언한다. 망각의 죄인이여, 그대의 죄가는 끝났다. 돌아가라, 이피안의 땅으로."

티엘의 손이 죄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종이를 찢듯 거침없이 육신을 침범한 손이 무언가를 움켜쥐고, 힘을 주어 뽑아냈다.

그 순간 죄인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한없는 고독과 고통을 끊고, 마침내 자유로워진 자이기에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안식.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만큼, 아름답고 황홀한 미소였다.

"카즈이다 오를, 메이브······."

"······그래. 긴 방황은, 끝났어."

모든 짐을 덜어놓은 끝에 해방된 눈에서 이글거리던 불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철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온 몸을 휘감았던 사슬들도 힘없이 부스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함께 죄인의 몸 역시도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메마른 육신은 잿가루로 흩어지고, 땅을 적셨던 핏방울조차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모래로 변해갔다.

마치, 수 천 년을 미뤄온 시간을 다시 빠르게 감는 것처럼.

죄인은 쓰러져가며 티엘의 귀에 입을 가져갔다.

티엘은 그 마지막 속삭임을 들어주며, 스러져가는 육신을 꼭 안아주었다.

마침내 죄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먼지로 흩어져버린 육신은 바람을 타고, 천 년을 갇혀있던 어두운 감옥을 빠져나갔다.

"천 년 후의 자매에게 여신의 축복과 우룬의 가호가 있기를······, 인가요······."



* * *



완전히 탈진해버린 티엘은 황급히 강령을 해제하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강령 자체는 이제 낯설지 않았지만 심신의 소모가 너무나 컸다.

이번에는 또 얼만큼의 기억을 날려버린 것일까.

제 색을 되찾아가는 머리칼에 재빨리 환영을 뒤덮으면서도 팔다리의 떨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거의 바닥나버린 체력과는 달리 마력에는 아직 약간의 여유가 남았다는 것이었다.

한가득 끌어올렸던 칼라가스의 마력이 강령 상태를 해제한 뒤로도 아직 몸 안에 남아있어, 곧바로 결계에 재접속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생각해볼 일은 자연스레 정해진다.

티엘은 아시에에게 눈을 돌렸다.

이미 리아와 올로비스에게 앞뒤로 포위당한 상태로 카르나의 사슬에 묶여있던 그녀는 다 포기했다는 듯 조용히 무릎을 꿇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싸움, 의사 있나?"

올로비스가 창을 단단히 쥐며 물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신뢰할 수 없을테지. 죽여. 그럴 각오는 돼 있었으니."

아시에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이미 한 팔을 잃고 제압당한 상황에서, 발버둥을 쳐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미 받아들인 것이었다.

리아는 어떻게 하겠냐는 듯 티엘에게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표정은 조금 애매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적을 등 뒤에 두고 중대사를 실행하는 우를 범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알량한 양심을 위해, 또다시 동료들의 목숨을 걸어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뜻밖에도 티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아시에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설마 직접 하려고?'

리아가 조금 놀란 눈빛을 보냈다.

우연이든, 아니면 티엘 자신의 고집이든, 이제껏 인간을 직접 죽여본 일은 없는 티엘이다.

그런 티엘이 직접 처형을 맡을 정도로 깊은 원한을 짊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아시에······라고 했죠. 정말로 괜찮다고 생각하는건가요?"

하지만 티엘의 목소리에는 뜻밖에도 원한이나 증오가 섞이지 않았다.

그저 조용하고 담담한, 오히려 연민까지 품은 듯한 목소리였다.

오히려 아시에조차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려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검을 드는 것은 적의 목숨을 거둘 것을 선언하는 것이며, 동시에 적의 검에 쓰러지는 것을 허락하는 일입니다. 특히나 이 땅에서는. 당신도 아실테지요. ······공녀님."

아시에 비르겐 리그마이어.

티엘은 그녀를 알지 못했다.

기억을 잃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잃어버린 이름을 부르는 상대를 보면서도, 티엘의 가슴은 조금도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티엘도 리그마이어라는 이름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카르티치스 대공가와 아르야 백작가에 이어 강력한 흑마법사를 다수 배출해낸 명가.

그러나 같은 백작가라고 하더라도 대공국의 국경을 지키는 변경백 아르야와는 이야기가 다르다.

중심을 지키며 쉽게 흔들리지 않는 변경백과는 달리, 일반적인 백작가는 대공가 내의 항쟁이 일어날 때면 가장 크게 휘청이기 마련.

4년 전의 항쟁에서, 그녀가 어디에 서고 싶어했는지는 알 수 없다.

"고개 들어요. 당신도 큰 부상을 입었고, 더이상 싸울 수는 없겠죠. 가요. 가서, 돌아오지 말아요."

"잠깐, 티엘?"

아시에를 꽁꽁 묶고 있던 은사가 휘리릭 풀렸다.

옷자락을 약간 찢어낸 티엘은 아시에가 창을 변형시켜 만들었던 임시 지혈대까지 떼어낸 뒤 그녀의 잘린 팔을 단단히 묶어 지혈했다.

"한 번 당신을 노렸던 사람인데도, 놓아줄 마음이 드는겁니까?"

자신의 피를 노린 자라면 아무리 하잘것 없는 자라도 용서없이 부순다.

그것이 제국인의 상식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티엘의 행동은 분명히 어리석었다.

적을 굳이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고 목적을 이룬 후에 끌어들였던 적을 숙청하지 않는 것도.

언제든지 상대를 제압할 자신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호의에 가까운 지극히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티엘에게서 아쉬워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 가지, 여쭐 일이 있군요. 어째서 절 살리시는 것인지. 조금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이유가 있습니까?"

"······당신은 이 곳에 내려오고 난 뒤, 기척을 숨긴 채 기습적으로 공격해왔죠. 그 때 처음으로 내민 창 끝이 어째서 절 향하지 않았는지, 대답할 수 있나요?"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저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분명 올로비스는 초격을 막아내기 직전까지 그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암습이 자신이 아닌,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던 티엘에게 향해졌더라면 분명 제 때 막아내진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올로비스와 접전을 벌일 때도, 티엘을 노리는 듯 보였던 빙결령의 공격은 그 횟수나 위력이 전력을 다했을 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스스로의 죄가 아닌, 그 아비와 오라비의 항쟁에 휘말려 쫒겨난 소녀를 동정하고 말았던 것인가.

무르고, 애처로운 사람이다.

아시에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고, 티엘은 그 침묵으로 답을 들었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돌렸다.

무슨 자신감일까.

아무리 부상을 입었더라도, 이 순간 창을 뻗는다면 충분히 티엘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데.

그러나 막 창으로 손을 뻗으려던 아시에는 쓰게 웃으며 다시 손을 거두었다.

죽일 수도 있었던 적에게 온정을 베푼 자를, 그것도 정면이 아닌 등 뒤에서 찌르는 것.

그녀 역시도, 제국의 땅에서는 지나치게 뜨거운 심장을 지녔던 것일까.

아시에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지팡이 삼아 짚던 창조차 버려둔 채로, 불안정하게 비틀거리며 일어선 그녀는 유적의 바깥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한 번 검을 마주한 자를 믿는 사람은, 바보밖엔 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빼앗는 것보다 지키는 쪽이 가치있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이 이상의 답이 필요한가요?"

"적어도 이 땅에서는, 그 것만으로는 모자랄겁니다."

한 풀 기세가 꺾인 아시에는 힘없이 유적의 입구를 향해 힘없는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길은 채 몇 걸음도 이어지지 않았다.

다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본 아시에는 천천히, 몸을 굽혀 티엘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하지만 대공녀 이스티엘 저하, 당신을 주인으로 모셨더라면, 당신을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사년 전 그날 밤, 어쩌면 조금은 다른 결과를 맞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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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15장-귀향歸鄕 (4) 19.11.13 57 4 28쪽
145 15장-귀향歸鄕 (3) 19.11.12 68 3 24쪽
144 15장-귀향歸鄕 (2) 19.11.11 66 4 25쪽
143 15장-귀향歸鄕 (1) 19.11.10 68 6 24쪽
142 14장-약속約束 (18) 19.11.09 72 4 35쪽
141 14장-약속約束 (17) 19.11.08 66 4 29쪽
140 14장-약속約束 (16) 19.11.07 56 4 24쪽
139 14장-약속約束 (15) 19.11.06 60 4 35쪽
138 14장-약속約束 (14) 19.11.05 55 4 26쪽
» 14장-약속約束 (13) 19.11.04 55 3 27쪽
136 14장-약속約束 (12) 19.11.03 49 3 25쪽
135 14장-약속約束 (11) 19.11.02 57 4 27쪽
134 14장-약속約束 (10) 19.11.01 68 4 26쪽
133 14장-약속約束 (9) 19.10.31 65 3 26쪽
132 14장-약속約束 (8) 19.10.30 62 3 31쪽
131 14장-약속約束 (7) 19.10.29 59 3 27쪽
130 14장-약속約束 (6) 19.10.28 59 2 27쪽
129 14장-약속約束 (5) 19.10.27 64 4 28쪽
128 14장-약속約束 (4) 19.10.26 72 4 31쪽
127 14장-약속約束 (3) 19.10.25 62 3 30쪽
126 14장-약속約束 (2) 19.10.24 55 3 26쪽
125 14장-약속約束 (1) 19.10.23 65 3 27쪽
124 13장-인도引導 (15) 19.10.22 72 3 36쪽
123 13장-인도引導 (14) 19.10.21 61 3 26쪽
122 13장-인도引導 (13) 19.10.20 59 3 24쪽
121 13장-인도引導 (12) 19.10.19 54 3 26쪽
120 13장-인도引導 (11) 19.10.18 59 4 23쪽
119 13장-인도引導 (10) 19.10.17 64 3 33쪽
118 13장-인도引導 (9) 19.10.16 62 3 32쪽
117 13장-인도引導 (8) 19.10.15 62 3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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