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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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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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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03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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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14장-약속約束 (12)

DUMMY

축축하고 음산한 분위기가 물방울이 되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금방이라도 썩은 물이 차오를 것처럼 습하고 소름끼치는 공기가 독무처럼 번지고 있었다.

번진다?

그 표현에는 조금 어폐가 있다.

이 끈적한 분위기는 무언가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다.

배가 움직이며 주위로 물을 밀어내듯, 거대한 영체가 움직이며 도시 안에 스며들어있던 마력을 거칠게 휘젓는 것 뿐이다.

유적의 가장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제기랄. 몇백 년 묵은 괴물따위 반갑지도 않다고. 그것도 하필이면 이런 때에······."

"몇백 년 묵은 괴물이라니, 반갑지도 않다고."

칼로스가 긴장된 목소리로 검을 뽑았다.

얼마나 굶주려 있었던 것일까.

이제까지 노래만 부르던 '그것'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밀물이 몰려들듯, 가까스로 발목을 적실 정도로 밀려오던 마력이 점차 전신을 뒤흔들 정도로 모여들다, 마침내 그조차도 넘어 본체의 마력 자체가 공간을 뒤덮어갔다.

너무나 짙어 순간적으로 숨이 막힐 정도로 짙은 마력.

시원의 용인 칼라가스에는 아직 견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미 그 마력은 인간으로서는 측정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팔선급의 마력이었다.

게다가 그 속성은······.

"이렇게나 소름끼치는 거였나. 내가 쓸 때는 전혀 못느꼈는데."

칼로스가 전에 없이 긴장한 얼굴로 바르르 떨리는 칼끝을 노려보았다.

녹슨 못으로 코 안을 마구 찔러대는 것만 같은 강렬한 피비린내가 유적 안을 가득 채웠다.

마치 피의 호수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진한 피냄새에 세 사람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조심해라, 칼로스. 이건 내 기준으로 봐도 괴물이야.

혈속성의 대정령 카즈리엘조차 지금의 이 마력에는 동요하고있었다.

본래 이 정도의 마력이 한데 모이면 생령이 태어나기 마련이다.

어떤 이유에서 새로운 생령이 태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마력에 굶주린 생령이나 마령들이 이토록 진한 마력을 모른척할리가 없다.

혈정령은 그들을 먹을 수 없을지언정, 그들은 얼마든지 혈마력을 마실 수 있으니까.

그러니, 원초적인 본능밖에 남지 않은 마령들조차 이 안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을 뜻할 것이다.

들어서면 누구 하나 살아남을 수 없다는, 그 한없는 갈망보다도 더욱 강렬한 죽음의 기척.

"빌어먹을······. 이 쪽으로 똑바로 오는거야? 뭐 이렇게 빨라? 우리는 티엘이랑 로비 찾느라 그렇게나 개고생을 했는데?"

"······미안하지만 나 때문일걸. 굶주린 혈정령에게 또다른 혈정령과 혈마법사는 더없이 훌륭한 먹이니까."

"그럼 칼로스의 기척을 숨긴다면?"

"이미 늦었지. 너라면 굶어서 눈이 뒤집혔는데 눈앞에 있던 빵조각을 치워버리면 어쩔래? 이 유적을 다 뒤집어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래서야 숨는 의미도 없어."

칼로스는 불쾌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목을 톡톡 건드렸다.

그리고 이내 발끝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곁눈질로 조금 떨어진 지점을 가리켰다.

조금 전 티엘이 결계에 접속을 시도했던 마법진이 그대로 방치된 채 조금씩 말라가는 것이 보였다.

"주위의 마력도 불안정한걸 보니 저게 원인일 걸. 저게 있는 한은 결계 접속은 꿈도 못 꿔."

"안되면 그냥 죽을까? 해야지. 티엘 너는 마력 아껴. 한 방에 끝내자."

"너도 뒤로 빠져! 다리가 그모양인데 어딜 끼려고!"

칼로스는 품을 뒤져 주머니 하나를 티엘에게 던지며 리아를 가로막고 앞으로 나섰다.

손 안에 감춰질 정도로 조그만 주머니 안에는 은은한 광택을 띄는 알약이 몇 개 들어있었다.

마력중화제, 그것도 최고급품이다.

"비장미 풀풀 날리는건 감당할 여유 있을때나 하라고. 당장은 얌전히 후방 지원이나 해."

언제 꺼냈는지 중화제를 생으로 씹던 칼로스가 문득 칼집 옆에 함께 차고 있었던 특이하게 생긴 막대를 뽑았다.

그냥 보기에는 조금 이상하게 생긴 지팡이처럼 생겼던 막대는, 놀랍게도 완만하게 휘어있던 검의 칼자루에 결합되어 순식간에 거대한 낫의 자루로 변했다.

커다란 낫은, 사실 무기로서의 가치는 낮다. 움직임이 한정적인데다 느리고, 무엇보다도 쓸데없는 움직임이 많다.

하지만 칼로스는 오히려 검보다 낫을 다루는 쪽이 더 익숙한 듯 어렵잖게 낫을 휘둘러 자세를 잡으며 몸을 낮추었다.

"왔다!"

철그럭, 키기기기긱.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뾰족한 무언가가 바닥을 깎아내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제기랄!"

그러나 발자국을 대신하듯 점점 다가오는 소리는 공교롭게도 세 사람보다는, 올로비스가 만들었던 화염의 우리 쪽에 더 가까운 방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칼로스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투기장 앞을 가로막기 위해 바람처럼 달렸다.

하지만 겨우 세 발을 떼기도 전에 먼저, 올로비스가 만들었던 투기장 쪽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둥그렇게 휘감기던 불길이 마치 바람에 휩쓸리듯 거칠게 흔들렸다.

방해를 허락지 않는 불길은 한층 더 맹렬하게 타오르며 형체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우악스러운 혈정령의 마력은 채 몇 초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카즈리엘! 네아 비 미렌-"

칼로스는 불씨를 보호하기 위해 바람벽을 치듯, 투기장을 가로막는 피안개를 불러내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칼로스를 놀리기라도 하듯 붉은 기운이 스며든 바닥이 쩍쩍 갈라지며 멋대로 단층을 일으켰다.

막 걸음을 내딛으려던 칼로스는 갑자기 솟아난 돌부리에 걸려 자세를 흐트러뜨렸고, 그 바람에 막 펼쳐지려던 방어주문도 덧없이 깨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견디다못한 화염의 벽이 기어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버렸다.

"로비!"

장막이 걷히자 놀란 것은 안에서 사투를 벌이던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악문채 전신에 벼락을 두르고 있던 올로비스는 깨져나간 주문에 당황하고 있었다.

동료들이 주문을 깨뜨렸다면 스스로가 건 제약에 따라 마력을 소실해야 할테지만, 여전히 그의 각인은 뜨겁게 맥동하며 마력을 빨아올리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외부로부터의 개입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그의 주문이 압도적인 마력에 짓눌려 억지로 깨져버린 것 때문인가?

애석하게도 화염의 우리는 바깥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조차도 철저하게 가로막았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순간, 상황을 따라잡지 못한 손 끝이 힘을 잃었다.

빈틈을 보였다는 것 조차 순간적으로 잊은 것일까.

'기회다!'

아시에 역시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최소한 올로비스가 보인 결정적인 빈틈을 노릴 정신은 챙기고 있었다.

이대 일 까지라면 몰라도, 이대로라면 사대 일이다.

이 짧은 틈을 타 올로비스를 죽인다고 해도 삼대 일, 불리한 상황에 머리를 들이밀 필요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 아시에는 있는 힘껏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란세어가 일으킨 짙은 안개가 그녀의 모습을 감춰주었다.

순간적으로 시야를 가렸다면 그 이상의 은신은 필요하지도 않았다.

심장을 받아가는 것은, 찰나의 시간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했던 아시에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올로비스가 어째서 황급히 전투를 멈추었는가.

어느새 그는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듯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빈틈을 보였다는 것은 그녀만의 착각.

그는, 무언가를 보고, 달아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 뿐이었다.

"피?"

붉은 빛의 무언가가 허리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맞닿아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가까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아시에를 바라보는 시선은 온통 붉기만 했다.

동공도 홍채도 흰자위도, 모두가 시뻘겋게 타오르는 핏빛이었다.

거기에 불꽃처럼 중력을 무시하고 휘날리는 머리칼 역시 선홍빛.

아름다운가?

아니, 적어도 그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없었다.

원형을 알아볼 수도 없이 낡고 닳아빠진 천 조각으로 간신히 감싸인 육신은 가뭄에 갈라터진 강바닥처럼 쩍쩍 갈라져있었다.

그러나 전신을 적신 피는 그 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메마른 육신의 곳곳에는, 마치 그 곳만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섬뜩한 상처가 쩍쩔 벌어져 있었다.

그 말라 비틀어진 육신에 아직 흘러내릴 피가 남아있는 것일까.

경악에 물든 시선에 대답하듯, 그 순간에도 상처에서는 진득한 피가 조금씩 흘러내려 그 육신을 적시고 있었다.

"아-"

탄식인가, 환희인가, 알 수도 없는 짧은 목소리가 아시에의 귀를 스쳤다.

석고상처럼 새하얀 얼굴에는 뜻모를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일그러진 가면의 웃음은 분명 인간의 표정을 닮았지만, 서툰 솜씨로 그려넣은 것처럼 오히려 인간과는 동떨어진 모습일 뿐이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포가 아시에를 덮쳤다.

네 명의 마법사를 상대로 싸움을 건 순간조차 여유있게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던 아시에였지만, 그 순간에는 저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 아시에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 위로 툭툭 탁한 핏방울이 떨어져내렸다.

떨어진 핏방울이 마력으로 승화하지 않으니 분명 생령이나 마령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이질적인 마력과 뒤틀린 모습이다.

괴물.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신화시대의 괴물.

"아, 아아, 안, 안돼. 안돼. 그, 그만······!"

이미 칼로스에 대한 것은 잊어버린 것일까.

괴물은, 마치 인간을 처음 보는 것처럼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시에의 얼굴을 살폈다.

아무런 때가 타지 않은 천진무구한 표정이지만, 동시에 그 것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개미를 밟아 죽이는 어린아이의 얼굴과도 닮아있었다.

순간, 아시에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이 흉물이 들고있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답고 거대한, 하지만 끈적하게 썩은 핏덩이가 뒤엉켜 마치 이 세상 모든 저주라도 뒤집어 써버린 듯한 검.

살해당한다.

저 녀석이 관심을 잃는 순간 죽는다.

아시에의 뇌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필사적으로 바닥을 더듬던 오른팔을 뻗은 아시에는 창을 끌어당기며, 한 평생 쌓아올린 마력을 한가득 끌어올렸다.

"라, 란세-!"

휘리리릭!

문득, 아시에의 머리칼이 거칠게 휘날렸다.

무엇이 일어난 것인지, 감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던 아시에는 가까스로 눈동자만을 굴렸다.

하지만 떨리는 눈이 무언가를 찾는 것 보다 먼저, 오른쪽 어깨에서 퍼져오는 뜨거운 열기가 현실을 알렸다.

창을 내지르려던 오른 팔은 더이상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의 팔이 어깨에서부터, 무딘 검으로 뜯어내듯 통째로 잘려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시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망연히 '붉은 것'을 바라보았다.

"그럴-"

팔을 잃은 것 뿐만이 아니었다.

바람처럼 빠르게 아시에의 팔을 절단한 검 끝에는, 놀랍게도 얼음으로 뒤덮인 거대한 전갈이 칼날에 꿰뚫린 채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미 육신을 완전하게 구성해낸 기사급의 생령은 당연하게도 미친듯이 몸을 뒤틀며 자신을 꿰뚫은 칼날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그 검은 미늘이라도 달린 것처럼 란셰어의 몸을 놓아주지 않았다.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출현한 몇 개의 얼음이 이형의 육신을 꿰뚫었다.

그러나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저항을 받아들이던 '붉은 것'은 돌연 입을 쩍 벌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인간을 닮아있었던 모습은 그 순간 의미를 잃었다.

그것의 입은 거의 목 아래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구멍이었다.

줄지어 세워진 톱날같은 이빨은 순식간에 얼음으로 된 비늘을 부수고, 마력으로 짜올린 혈육을 찢으며, 마침내 심장석에까지 닿았다.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하던 란셰어의 목소리가 단숨에 끊어졌다.

단 한 번의 입질로 기사급의 생령이 소멸해버리는 모습을 그대로 보게 된 사람들은 부들부들 떨며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란세어를 집어삼킨 '그것'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자신의 발치에 쓰러진채 꿈틀거리는 아시에와, 자신이 베어버린 그녀의 팔을 발견했다.

피에 젖은 뒤틀린 팔이 잘려나간 팔을 집어들었다.

끔찍스럽게도, '그것'은 장난감을 찾은 어린아이처럼 그 팔을 주물럭거리다 입으로 가져갔다.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은 인육을 먹어치웠다.

"그그그극, 그, 그으으······. 그아아아아아아아아아!"

포효인지 비명인지, 아니면 환호성인지 알 수 없는 날카로운 외침이 귀를 찢었다.

그와 함께 핏빛의 사슬이 '그것'의 그림자로부터 십여 개나 뛰쳐올라 말 그대로 모든 방향을 향해 미친듯이 뻗어나갔다.

텅 비어 뚫려있던 유적을 한 순간만에 가득 뒤덮어버리는 사슬은, 마치 스스로 피와 살을 탐하여 살아있는 자들을 한 곳으로 몰아가는 것처럼 맹렬한 기세로 공간을 파고들었다.

물론, 무수한 사슬의 대부분은 사람이 없는 텅 빈 유적을 향해 날아갔다.

그 모든 사슬이 포식을 즐기기에는, 이 유적에 살아있는 사람이 너무나 적었으니.

하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아시에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빠져나갈 곳 따위는 없다.

부상을 입어 무력화된 먹이를 노리듯, 십여 갈래의 사슬이 동시에 원을 그리며 쏟아져내렸다.

피할 수도, 그렇다고 막을 수도 없는 공격.

아시에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칼라가스!"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아시에의 얼굴로 싸늘한 냉기가 훅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그 냉기는 아시에의 목숨을 앗아가는 대신, 반대로 그녀를 덮치려던 사슬들을 가차없이 끊어버리며 아슬아슬하게 빈틈을 만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어느 순간 아시에의 전신을 칭칭 휘감은 수 많은 은사들이 짧은 시간 뚫린 포위망 사이로 그녀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왜······?"

당황한 시선이 티엘과 리아의 눈과 마주쳤다.

"좋아서 살려준 거 아니에요. 살아남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당신도 도와요!"

리아는 최소한의 운신밖에 할 수 없는 상태, 올로비스 역시 마력을 대부분 소진하여 장기전은 할 수 없다.

그나마 움직일 여유가 있는 사람은 칼로스와 티엘 뿐.

도망치는 것조차 여의치 않다.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부상입은 자들을 미끼로 버리고 그저 달아나거나, 그들을 일으켜 세워서라도 저 괴물을 쓰러뜨리거나.

하지만, 애초에 버린다는 선택지 따위는 머릿속에 들어있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방금 전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던 적이라도 끌어안고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앉아서 죽을래요, 아니면 싸울래요?!"

아시에는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누가······, 멋대로 죽어준대?"

상황을 판단하는 데 긴 시간은 필요 없다.

아시에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허공에서 요령좋게 균형을 잡아 착지했다.

"요령좋게 빗겨치는 재주는 없으니 알아서들 피하는게 좋아!"

바닥을 적신 아시에의 피가 일순간 칠흑으로 물들었다.

"갈라티에!"

검게 물든 피가, 순간 칼날처럼 빠르게 일어나 괴물의 몸에 휘감기듯 엉겨붙었다.

열, 스물, 순식간에 늘어난 족쇄가 순식간에 백을 넘는 수로 그 육중한 검을 옭아맸다.

그러나 괴물은 곧바로 그에 대항하듯 핏빛 사슬을 일으켜 자신을 묶는 마력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악!"

이름없는 짐승이 포효하는 순간 리아아가 덧씌운 은사와 아시에의 속박이 동시에 썩은 새끼줄처럼 허망하게 끊어졌다.

그러나 주문이 깨진 순간, 곧바로 칼로스와 티엘이 저마다의 주문을 펼쳐 다시 한 차례 괴물의 움직임을 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 괴물은 팔선급의 마력을 지닌 대정령이라는 지위에 비해서 순간적으로 발휘하는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애초에 혈속성의 마력이 파괴에 특화된 것도 아니며, 저 괴물이 싸움 자체에 익숙한 것도 아니다.

비록 영맥에 묶인 채 기나긴 세월을 살아왔다고 하나, 혈정령의 특성상 일반적인 마력은 흡수할 수 없으며 오로지 자신의 기운을 느끼고 태어난 또다른 혈속성의 생령을 잡아먹는 것으로밖에 성장의 기회가 없었던 것도 조금은 영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괴물'이 약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생채기도 나지 않으며, 설령 타격을 주는데 성공했더라도 정신나간 재생력으로 순식간에 수복해버린다.

속박을 걸면 한 호흡이 끝나기 전에 끊어버리고, 설령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묶여버린 몸을 스스로 뜯어내며 재생하는 등, 일반적인 생령이나 마령의 범주는 아득하게 넘어서는 괴물이다.

지금 상황만으로도 버거운데, 만약 몸에 거두어들인 '산 자의 육체'가 썩어들어가며 육체능력이 큰 폭으로 깎여나가지 않았다면 과연 어땠을까.

"레나타!"

막 괴물이 검을 내려치려는 순간, 리아는 괴물의 발치에 있는 돌무더기를 강제로 무너뜨렸다.

체중을 실은 순간 발판을 잃은 괴물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 순간, 아시에와 티엘, 그리고 리아는 동시에 마력을 퍼부어 괴물의 전신을 찍어눌렀다.

어둠과 얼음, 그리고 암반.

코끼리라도 으깨버릴 정도로 무거운 굴레가 가까스로 괴물의 움직임을 억눌렀다.

"파이드모스, 솔페이람!"

올로비스는 재빨리 암석과 얼음을 타고 괴물의 가슴이 있는 곳까지 뛰어올랐다.

화염과 폭풍을 휘감은 창날이 아직 인간의 형체를 유지하던 육신을 향해 망설임없이 뻗어나갔다.

그러나 철갑조차 꿰뚫을 기세로 내지른 창은, 한 순간 나타나 두텁게 몸을 휘감은 사슬에 막혀 굉음과 불꽃을 튀기며 허망하게 미끄러졌다.

'막혔다!'

사슬은 찔러들어오는 창날을 막을 뿐만 아니라, 아예 창대까지 휘감아 다시 뽑아내는 것까지 가로막았다.

올로비스는 즉시 창을 포기하고 뛰어내리려 했다.

그러나 이미 사슬은 그의 발목까지 휘감아, 뛰어내리는 것마저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제길!"

속수무책으로 발이 묶여버린 올로비스의 눈 앞으로 마치 단두대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칼날이 떨어졌다.

"칼라가스! 겨울의 성채여!"

아슬아슬한 순간, 도약주문으로 거리를 좁힌 티엘이 황급히 빙벽을 세워 검을 막았다.

그러나 얼음벽은 겨우 속도만 조금 늦추었을 뿐, 괴물은 어마어마한 힘으로 칼날을 찍어 누르며 순식간에 얼음을 가르기 시작했다.

"카즈리엘! 카즈라 파르스, 레즈샤인데!"

순간 얼음 위로 새빨간 조약돌이 날아들었다.

칼로스가 급하게 짜낸 혈정석은 그대로 얼음에 스며들며 빙벽 위로 핏줄같은 문양을 띄우다, 나뭇가지처럼 펼쳐지며 괴물의 검을 얽어맸다.

그 것을 본 티엘이 함께 얼음을 조작해 검을 가로막는 사이, 올로비스는 리아가 던져준 검으로 사슬을 끊고 황급히 몸을 굴려 자리를 벗어났다.

겨우 잡은 먹이가 도망친 것에 노호성을 내지른 괴물이 칼날을 거칠게 당겼지만, 티엘과 칼로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단단히 고정된 검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분노한 괴물은 또다시 수많은 사슬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폭풍처럼 주변을 휩쓸 생각인 것일까.

"드라그하일, 갈라티에!"

그 순간 아시에가 포효하며 창이 사슬 뭉치의 뿌리 부분을 꿰뚫었다.

사슬을 타고 빠르게 번져나간 어둠이 괴물의 몸을 다시 한번 휘감았다.

검을 묶은 빙결과 혈주문. 그리고 몸을 억누르는 육중한 돌과 얼음의 굴레에 더해, 다시 그 몸을 휘감는 은사과 어둠.

역시 세 겹으로 둘러친 속박은 쉽게 끊어낼 수 없었던 것일까.

마침내 힘겹게 버티던 괴물이 허물어지듯 한 쪽 무릎을 꿇었다.

"큭······! 로, 로비이!"

하지만 놀랍게도, 오히려 힘에 부치며 점점 끌려가는 것은 괴물을 묶어두는 네 사람 쪽이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요동치는 마력은 금방이라도 본체를 묶어두는 족쇄들을 끊어버릴 것처럼 사납게 날뛰고 있었다.

다음 순간, 칼로스가 비명같은 외침을 내질렀다.

"다들 마력저항 최대로 올려!"

"크와아아아아악!"

티엘을 제외한 네 사람이 흘렸던 피.

군데군데 떨어져 말라가던 핏방울들이 갑자기 부글부글 끓다 맹렬하게 폭발했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피 또한 피해갈 수 없었다.

칼로스의 외침 덕에 가까스로 마력저항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지만, 한 순간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로 전신이 뜨거워지며 시야가 시뻘겋게 물들어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핏속의 마력이 새로이 파고드는 이질적인 마력과 반발하며 거칠게 끓었다.

이미 한계까지 끌어다 쓰던 마력이 반발을 일으키며 기어이 전신의 마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빠져나갈 곳을 찾다못한 마력이 제멋대로 육체를 찢었다.

막 피가 말라가던 상처를 뚫고 분수처럼 피가 치솟았다. 어느새 눈가에서는 혈루가 흘러내려 옷깃을 적셨고, 긁힌 상처조차 없던 곳에서도 군데군데 피부가 찢어지며 뜨거운 피가 흘렀다.

한 순간, 칼로스를 제외한 네 마법사가 동시에 전신에서 피를 뿜으며 휘청이고 말았다.

"이거······, 아프잖······아······."

그 중에서도 가장 위급한 것은 리아였다.

그렇지 않아도 출혈이 심했던 다리에서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많은 피가 터져나왔다.

이미 빈혈을 일으킨 상황에서, 한 방울이라도 더없이 아까운 그 피가 지글지글 끓으며 지면을 미끄러져 붉은 괴물에게로 향했다.

제물을 흠향하는 만신(蠻神)처럼 두 팔을 들어올린 괴물은 그 일그러진 몸을 숙여 반 이상 타버린 피를 할짝이다, 문득 그 시뻘건 눈을 들어올렸다.

초점을 잃은 눈에는 리아의 창백해진 얼굴이 또렷하게 비쳤다.

괴물은 그런 리아를 집어삼키려는 듯, 흉흉하게 뒤틀린 팔을 길게 뻗었다.

"상대, 여기다!"

순간 집채만한 폭염이 그 주위를 휘감았다.

사슬을 휘감더라도 불꽃은 막지 못한다.

올로비스가 전력으로 폭발시킨 불꽃이, 미처 마력을 두르지도 못한 괴물의 팔을 완전히 휘감았다.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괴물이 주춤하는 틈을 타 전력으로 달려 리아에게 접근한 티엘은 서둘러 얼음으로 상처를 감쌌다.

"야아······. 이럴 필요 없는데······."

"시끄러워요! 칼로스! 출혈 막을 방법은 없어요?! 리아가······!"

"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했다고!"

끝없이 혈문자를 전개해 주문을 날려보내는 칼로스의 얼굴도 납처럼 새하얀 빛이었다.

이미 그 역시 빈혈로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 모습을 힘없이 눈짓으로 가리킨 리아는 옷자락을 찢어 상처 윗부분을 단단히 묶었다.

"신경쓰지 말고 저 자식부터 해치워!"

"그래도-"

"어차피 실패하면 나만 죽는거 아니잖아, 멍청아! 자꾸 일 순서 잊어먹을래?!"

남은 마력을 모조리 토해내려는 듯 막대한 마력을 삼킨 은사가 지면을 힘껏 내리쳤다.

거대한 돌기둥들이 새장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괴물과 그 괴물을 둘러싼 불의 우리를 에워쌌다.

그리고 그 위로 다시 아시에의 생령이 검은 빛의 사슬을 몇 겹으로 휘감아 구속을 강화했다.

티엘에게 맡겨진 역할이 무엇인지는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칼라가스! 새벽의 창이여!"

어금니를 꽉 깨문 티엘의 손이 시위에 눈부신 빛의 화살을 걸었다.

어둠 속에서 한 발의 섬광이 번득였다.

아스트라는 아시에와 리아, 올로비스 세 사람이 전력을 다해 펼쳐둔 구속을 가볍게 찢으며 날아든 괴물의 가슴을 꿰뚫고, 뒤이어 맹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혹한의 바람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가운데, 폭염과 풍압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얼음이 비죽비죽 자라나 아득히 높은 천장까지 이르렀다.

얼음을 뿌리치려 허우적거리던 괴물의 모습은 순식간에 빙무 속으로 삼켜지고, 마지막까지 구속을 끊으려던 칼날 역시 두터운 얼음 속으로 잠들었다.

싸우는 내내 귀를 찢을 듯 했던 비명소리는, 그제서야 잠들 듯 사그라들었다.

겨우 끝났다.

그렇게 안도하려는 순간이었다.

문득 리아는 티엘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제서야 한 가지 사실이 뒤늦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칼라가스의 숨결을 담은 화살이, 저렇게 거대한 빙산을 만들어낸 적이 있었던가.

"다들, 피해요!"


작가의말

죄송합니다.... 오늘은 영 글이 거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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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시, 얼음의 용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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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15장-귀향歸鄕 (3) 19.11.12 68 3 24쪽
144 15장-귀향歸鄕 (2) 19.11.11 66 4 25쪽
143 15장-귀향歸鄕 (1) 19.11.10 67 6 24쪽
142 14장-약속約束 (18) 19.11.09 72 4 35쪽
141 14장-약속約束 (17) 19.11.08 66 4 29쪽
140 14장-약속約束 (16) 19.11.07 56 4 24쪽
139 14장-약속約束 (15) 19.11.06 60 4 35쪽
138 14장-약속約束 (14) 19.11.05 55 4 26쪽
137 14장-약속約束 (13) 19.11.04 54 3 27쪽
» 14장-약속約束 (12) 19.11.03 49 3 25쪽
135 14장-약속約束 (11) 19.11.02 57 4 27쪽
134 14장-약속約束 (10) 19.11.01 68 4 26쪽
133 14장-약속約束 (9) 19.10.31 65 3 26쪽
132 14장-약속約束 (8) 19.10.30 62 3 31쪽
131 14장-약속約束 (7) 19.10.29 59 3 27쪽
130 14장-약속約束 (6) 19.10.28 58 2 27쪽
129 14장-약속約束 (5) 19.10.27 64 4 28쪽
128 14장-약속約束 (4) 19.10.26 72 4 31쪽
127 14장-약속約束 (3) 19.10.25 62 3 30쪽
126 14장-약속約束 (2) 19.10.24 55 3 26쪽
125 14장-약속約束 (1) 19.10.23 65 3 27쪽
124 13장-인도引導 (15) 19.10.22 72 3 36쪽
123 13장-인도引導 (14) 19.10.21 61 3 26쪽
122 13장-인도引導 (13) 19.10.20 59 3 24쪽
121 13장-인도引導 (12) 19.10.19 54 3 26쪽
120 13장-인도引導 (11) 19.10.18 59 4 23쪽
119 13장-인도引導 (10) 19.10.17 64 3 33쪽
118 13장-인도引導 (9) 19.10.16 62 3 32쪽
117 13장-인도引導 (8) 19.10.15 62 3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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