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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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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작성
19.10.16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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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2쪽

13장-인도引導 (9)

DUMMY

문득, 그림자 사이에서 희미한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나무나 바위의 뒷편, 혹은 건물의 천장 위.

사각에서 소리없이 흘러내린 안개는 흩어져 사라지기는 커녕, 진흙처럼 덩어리져 조금씩 나셀에게 미끄러졌다.

마치 안개 자체가 악의를 품은 생물인 것처럼.

그것을 눈치챈 나셀은 리아의 검을 지팡이삼아 몸을 일으켰다.

진통제의 약 기운 때문에 긴장이 누그러진 탓이었을까.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흑마법사가 풍기는 특유의 감각이 뇌리를 건드리고 있었다.

뒤늦은 적의 기척에 이를 악문 나셀은 잘 쓰지도 못하는 검을 뽑아 엉거주춤 치켜들었다.

하지만 얇은 칼날은 투박한 손놀림에도 달이라도 베어낼 듯 하늘을 향했다.

그러자 마치 나셀을 칭송하기라도 하듯 메마른 박수 소리가 주위에 울려퍼졌다.

"천 길 벼랑 끝에서 잠든 날개를 펼치니, 바람을 찢은 새여, 하늘 끝까지 품으리······. 생각과는 달랐지만, 이 또한 마음에 드는 흐름입니다."

갑자기 허공에 파문이 일었다.

뒤이어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얼어붙고, 이내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환영을 이루던 주문이 깨진 것이었다.

눈을 가리던 환영의 뒤편에서는 모습을 드러낸 것은 큰 키에 후리후리한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

과장되게 몸을 숙이며 연극 배우처럼 인사하는 그 남자는, 이런 수상한 곳에서 만난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 정체를 헤아리는 데 어려움이 없을 듯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색을 맞춘 검은 옷과, 그의 왼쪽 가슴을 장식하는 세 장의 큼직한 깃털이 그의 별명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레이븐······."

"그 외에 또 어떤 이름이 필요하겠습니까."

그 이름이 가짜 티엘이 나타났던 사건의 흑막을 칭한다는 것은 티엘에게 익히 들어 알고있었다.

지금 이 도시를 환영으로 뒤덮은 것이 그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모습을 드러낸 레이븐에게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흑마법사로서의 존재감만 있을 뿐, 주변을 뒤엎어버릴 것만 같은 거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막대한 양의 마력으로 주문을 유지하면서도 그의 주위로는 모래알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반대일지도 모른다.

쓸데없이 힘을 흩뿌리지 않고 정교하게 마력을 분배해 사역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강력한 마법사임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실제로 레이븐은 나셀이 세워든 검에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채 여유로이 두 팔을 펼쳐보였다.

눈 먼 칼날 따위에 맞아줘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듯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지요. 당신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겁니다. 그 지친 몸을 이끌고 괜히 명을 줄일 필요는 없겠지요."

나셀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천천히 숨어있던 틈새에서 걸어나왔다.

어차피 발각된 이상, 날아오는 공격을 피할 수 없는 좁은 틈은 오히려 나셀에게 불리한 조건이다.

레이븐의 말투는 자신의 절대적인 우위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셀 역시 그 사실을 반박할 수 없었다.

마법사는 맨손이라고 해도 결코 무력하지 않고, 오히려 잘 쓰지도 못하는 알량한 칼 한자루만 쥐고있는 나셀쪽이 단언코 약자다.

게다가 뽑지만 않았을 뿐, 레이븐의 허리춤에는 장검 한 자루도 걸려있다.

무엇 하나, 나셀에게 유리한 부분은 없었다.

레이븐의 말처럼, 대화에 응해 시간을 끄는 편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나셀은 마음을 굳히며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섰다.

레이븐은 진한 미소를 지으며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사실, 전부터 라미타이라의 일 이후로 꼭 만나보고 싶었지요."

"······제 위치는 어떻게 안 겁니까?"

"간단한 일입니다. 제 마력이 뒤덮은 곳에 사람 한 명 분의 공백이 생겼다는 걸 눈치챘을 뿐이죠."

나셀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신음을 삼켰다.

달이 없는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라도, 별을 가리는 그림자의 움직임을 통해 무엇인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은 알아낼 수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마법은 결코 만능의 도구가 아니니까.

만일 나셀이 팔찌로 자신의 기척을 감추지 않았더라면, 레이븐은 그를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저 환각에 빠져버린 일반인중 하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철저한 준비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씁쓸한 자조감이 혀끝을 감돌았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고작 그 뿐이다.

나셀은 그 이상의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흔들리기를 기대했던 레이븐쪽이 가벼운 탄성을 흘렸다.

"의외로군요. 포기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왜 포기할거라 생각하시죠?"

"도망치지 않는겁니까? 방해하지 않는다면 굳이 무고한 피를 받아낼 생각은 없습니다."

레이븐은 손을 내밀어 나셀이 세워쥔 칼 끝을 살짝 어루만졌다.

예리한 칼끝이, 피부가 움푹 들어갈 정도로 그의 손가락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마법사의 손가락은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모습으로 나셀을 향했다.

설령 레이븐이 나셀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셀은 그에게 상처입힐 수 없다. 그런 말을 전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셀은 시선 한번 떨지 않은 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남은 평생을 후회에 쫒기고 싶진 않습니다."

레이븐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비웃음은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만족스럽게 웃고있었다.

"설마 절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죠. 죽을겁니다."

뜻밖에도 나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븐은 더욱 진한 웃음을 품었다.

인간의 각오란 멋진 것이다.

불가능을 알면서도 도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그렇기에 기적은 그 어리석은 자들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법.

무력한 소년이라고 하나, 마음이 꺾이지 않은 채 당당하게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결코 우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용기는 찬사를 받아야 마땅한 일이리라.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웃음기라고는 전혀 섞여있지 않은, 무겁고 진중한 목소리였다.

"당신이 목숨을 버릴 정도의 가치가 있는 사람은 아닐겁니다. 대공녀라는 지위도 버리고, 마법사로서도 불안정해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나약한 소녀일 뿐입니다. 외모가 아름답다고 한들 그조차도 언젠가는 스러져버릴테지요. 당신에게 안식을 얻어가는 주제에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는 그녀입니다. 대가없는 사랑이란 아름다운 것이지만, 동시에 남는 것 없는 공허로 끝날 수도 있는 것. 그런 그녀가 무엇이길래, 당신은 그렇게까지 목숨을 거는겁니까? 단순히 연인을 위해 희생한다는 영웅심입니까?"

이제까지와는 달리 조금도 꾸미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였다.

마치 적대해야 할 나셀에게 무언가 충고하려는 듯한 분위기까지 풍기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레이븐이 나름대로 경의를 표하는 것이리라.

때문에 나셀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의 질문에 가볍게 대답해버리면, 그것은 그에게 경의를 표한 레이븐과, 그가 지키려 한 티엘을 동시에 모욕하는 일이 될 것만 같았으니까.

그리 짧지 않은 침묵이 흐른 뒤, 나셀은 가까스로 자신의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물론, 돌아서는 일은 없다.

나셀은 길게 숨을 들이쉰 뒤 검을 세우며 입을 열었다.

"곁에 서서 걷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을 뿐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킬 화려한 미사여구는 없었다.

적의를 꺾을만한 논리도, 하다못해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한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그 대답은, 그런 것들이 처음부터 필요없다고 말하는 듯한 일침이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셀만의 길이고, 나셀만의 선택이며, 그 책임을 지는 것 또한 나셀 뿐이다.

"······갈망을 위해 목숨조차 져버리는, 그것이 인간. 좋습니다. 그 눈, 그 자세, 정말로 마음에 듭니다."

레이븐은 조금 전보다 더욱 깊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최대의 경의를 바치겠습니다."

분위기가 반전했다.

조용하게 짓누르던 레이븐의 마력이, 순간 폭풍을 알리는 듯한 음험하고 날카로운 바람이 되어 주위를 가늘게 할퀴었다.

그 음산한 바람 한 가운데서, 레이븐은 하늘 높은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일그러진 달을 한가득 움켜쥔 마법사는 그 광기어린 빛을 찬미하듯 밤하늘을 향해, 밤을 끌어내린 생령의 이름을 불렀다.

"크루아가흐!"

하늘이 길게 울었다.

아니, 하늘 뿐만이 아니라 나셀을 둘러싼 세계 전체가 둔중하게 울부짖었다.

도시 전역을 안개로 뒤덮었던 대정령 크루아가흐가 더더욱 막대한 마력을 불태우는 소리였다.

-원래의 목표는 그 자가 아닐텐데. 한눈 팔 여유는 있는가보군.

"실의에 빠진 주연에는 흥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보다는, 눈앞에 나타난 새로운 주연을 맞이하는게 옳은 일일테지요."

레이븐은 흐느끼는 듯 메마른 달빛으로 몸을 적시며 웃었다.

그러자 그에 호응하듯 일대의 공기가 규칙적으로 일렁이는 움직임을 보였다.

아마도 도시의 하늘과 일체화한 생령이 웃은 것이리라.

-그렇군. 그의 단말마로 또다른 주연을 초대할 생각인가. 확실히 감미로운 공연을 만끽할 수 있겠군.

"그렇다면 광대의 왕이여, 옥좌로. 악몽과 한탄을 빚어, 이곳에 개연의 때를 알리십시오!"

광대의 왕이라고도 불리는 대정령 크루아가흐.

그는 레이븐과 계약한 생령중에서도 정점에 서는 자였다.

그만큼 그의 움직임으로 소모되는 힘은 적지 않지만, 레이븐은 오늘만큼은 크루아가흐에게 어떤 제약도 두지 않았다.

레이븐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이야기를 짜내는 것을 좋아하는 크루아가흐에게 지금처럼 마음에 드는 무대는 좀처럼 찾아오기 힘든 것이었다.

산 자를 현혹하고 죽은 자의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최강의 환각령은 안개로 이루어진 거대한 손을 들어 환영을 향해 교묘한 손짓을 보냈다.

몰려든 안개를 지휘하는 듯한 그 움직임에 과연 몇 개의 사건이 얽혀있는지는 레이븐조차 알지 못했다.

때문에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세워져있던 도시가 어마어마한 지각변동을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는 그조차 감탄과 놀라움을 숨길 수 없었다.

"당신도 제법 흥이 오른 모양이군요."

눈앞의 모든 것들이 통째로 바뀌고 있었다.

평범했던 도시가 조각조각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끓어오르는 탁한 바다가 몸부림치며 밀려들었다.

삽시간에 멜람이라는 도시가 얹혀있던 대지는 갈갈이 찢겼다.

눈 앞에 신음하던 도시는 아우르는 것은 파도가 넘실거리는 깎아지른 절벽이나 아찔한 벼랑길이 즐비한 마경으로 변했다.

제 모습을 가까스로 품고있는 불규칙적인 대지에서는 기이하게 뒤틀린 거대한 가시나 온갖 기기괴괴한 모습을 한 괴물들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셀이 서 있는 곳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레이븐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도, 수 많은 역경이 그에게 가는 길을 가로막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셀은 레이븐과 함께, 유일하게 변화하지 않은 심장부에 머무른 상태였다.

'이건 도망치는 자를 막으려는게 아냐······.'

나셀은 내심 탄식을 삼켰다.

띄엄띄엄 펼쳐진 안개벽도, 거칠게 포효하며 발광하는 괴물들도, 아찔한 절벽과 가시나무의 숲도 나셀을 막는 것이 아니다.

이미 레이븐은, 그리고 크루아가흐는 나셀이 도망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세세하게 펼쳐둔 시련은, 오로지 외부에서 중심으로 오는 자를 향한 것이었다.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누군가 올 때 까지 살아남는다면 당신의 승리. 그 전에 숨이 멎는다면 당신의 패배."

물론 봐 주는 일은 없다.

경의로서 대하기로 선언한 이상, 미끼로 남기기 위해 살려둔다는 어설픈 짓은 하지 않는다.

옥좌에, 왕에게 이르기 위한 시련은 거칠기 마련.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무력한 소년은 이 시련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하지만 그 시련은 나셀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만전의 상태로도 뚫고 들어오기 어려운 시련을, 무력해진 소녀는 어떻게 헤쳐올 것인가.

절망감에 빠져 포기해버린다면 광대의 왕은 더이상 주연으로의 가치가 없어진 배우를 집어삼킬 것이다.

그러나 이 역경조차 뿌리칠 수 있다면, 이 두 사람은 필시 기적보다 더 위대한 기적으로 레이븐의, 그리고 크루아가흐의 심장을 꿰뚫으리라.

"인간의 혼은 고난이라는 숫돌에 깎여나갈 때 가장 밝게 빛난다고 하지요. 자아, 당신이 품은 빛을 부디 보여주시기를."

옛 제국을 떠돌던 어느 성자가 남겼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나셀은 자신에게 쇄도해오는 적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전신을 난자하려는 까마귀의 발톱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수많은 자들이 칭송해 마지않은 아름다운 칼날이 무참하게도 바위를 내려찍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그 검을 알아보았더라면 흠집이라도 나면 어쩔 생각이냐고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자리에는 그것을 지적할 사람은 없었고, 그랬기에 그같은 행동은 이미 백이나 이백으로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수히 되풀이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칼날에 닿는 것은 무엇이라도 얼려버린다는 희대의 마검 우라실이라도 맨손으로 바위를 찢을 힘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마력조차 제대로 머금지 못한 칼날은 헛되이 암석의 표면만 긁을 뿐이었다.

손에서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찍고 또 찍어도 가느다란 흠집을 내는 것 말고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티엘은 잠시도 쉬지 않은 채 무의미한 칼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 이상은 네 몸이 못버텨. 그만두는게 좋아."

보다못한 카즈리엘이 또다시 검을 내려치는 티엘의 손을 잡아챘다.

"싫어요."

"이미 손바닥이 찢어져서 검을 제대로 쥐지 못하면서 고집만 부리는구나."

카즈리엘의 말처럼, 더러움조차 묻지 않는다던 우라실의 칼자루는 이미 티엘의 피로 흥건하게 젖어 미끌거리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제대로 칼을 휘두르지도 못하는 판에, 이래서야 제대로 힘이 실릴 리 없다.

카즈리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티엘의 손목을 꽉 조였다.

검을 놓지 않으면 손을 부러뜨릴 것만 같은 악력에 이를 악물며 저항하는 것도 잠시 뿐이었다.

피부 위로 핏줄이 툭툭 불거지며 억지로 혈액의 움직임이 뒤바뀌었다.

혹독한 통증이 악문 이 사이로 숨막히는 신음을 짜냈다.

이대로 버텨봐야 말 그대로 뼈와 살이 찢겨나갈 뿐이다. 하지만 카즈리엘은 정말 그렇게 해서라도 티엘을 말릴 생각으로 힘을 늦추지 않았다.

"윽······! 크흐윽!"

결국 한 발 물러난 것은 고통을 이기지 못한 티엘 쪽이었다.

하얗게 질린 티엘의 손에서 단검이 떨어졌다.

예리한 단검은 제 무게과 떨어질 때의 충격만으로도 절반 가까이나 지면을 파고들었다.

무언가 갈라져 터지는 소리와 함께 우라실이 꽂힌 지면에서 큼지막한 빙화가 피었다.

티엘은 입술을 깨물며 그 얼음꽃을 응시했다.

'마력을 쓸 수 있다면 이런 감옥도 빠져나갈 수 있을텐데.'

하다못해 스스로의 마력만이라도 제어할 수 있었더라면.

카즈리엘이 그녀의 몸 안에 새긴 것은 어디까지나 마력이 멋대로 날뛰지 않도록 억누른 것 뿐이다.

마력이 폭주를 멈추고 그녀 스스로의 의지를 따른다면 그런 어중간한 제약은 충분히 풀어낼 수 있다.

즉, 지금의 이 무력함은 티엘의 자승자박이나 다름없다.

티엘은 답답한 가슴을 꽉 움켜쥔 채 환기구로 나 있는 작은 구멍에 매달렸다.

하늘은 이미 한밤중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어둡게 변해있었다.

얼마나 오래 갇혀있었던 것인지, 갇히기 직전에는 하늘 가장자리에 머물러있던 달은 머리 위로 드높이 떠올라 있는 상태였다.

"카즈리엘. 제발 부탁이에요. 도와주세요. 이대로는-"

"나갈 생각이라면 접어두라고 했어."

"제발, 카즈리엘!"

티엘은 카즈리엘을 두 손으로 붙들며 매달렸지만, 카즈리엘은 이마를 살짝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티엘의 손을 풀어내며 왼손을 강하게 튕겼다.

순간 티엘의 전신이 무언가에 억눌리듯 부자연스럽게 멈춰섰다.

보이지 않는 팔을 뿌리치려는 것처럼 손끝은 바들바들 떨리고, 이는 바스러지도록 악문 채 신음을 애써 삼켰다.

이번에는 손 뿐이 아니라, 전신에 제압이 걸렸다.

다행히 조금 전과 비교하면 그리 강한 압박은 아니었다.

하지만 붉게 충혈된 눈은 물기와 원망을 한가득 담은 채 카즈리엘을 향했다.

"지금의 네 힘으로는 풀 수 없다. 밖이 아닌 안에서 네 몸을 움직이고 있으니."

티엘의 몸을 억지로 움직이려는 것은 그녀 자신의 피였다.

강대한 대정령인데다가, 한 번 티엘의 피와 직접적으로 접촉한 적이 있는 카즈리엘은 마력을 쓰지 못하는 티엘 정도라면 꼭두각시처럼 마음대로 다룰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연스레 혈관을 흘러야 할 피를 억지로 잡아채 움직이는만큼 티엘의 의지와 부딪힐 수록 티엘의 몸은 확실하게 망가져간다.

지금도 최대한 티엘이 다치지 않도록 조절하고는 있었지만 어느새 몸의 곳곳에 핏줄이 터지며 붉고 푸른 멍자국이 생기고 있었다.

차라리 정신을 잃는다면 고통받는 시간이 줄어들었을 것을.

그러나 티엘은 정신이 나갈 정도의 격통 속에서도 혀를 깨물며 악착같이 의식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만, 여기까지다."

슬프게도 언제까지라도 버티려던 마음과는 달리, 이미 쇄약해질대로 쇄약해진 몸은 쉽게도 꺾이고 말았다.

견디다 못한 티엘은 카즈리엘의 의도대로 무릎을 꿇었다.

카즈리엘은 더이상 티엘이 저항할 수 없게 되자 곧바로 힘을 풀었다.

억지로 몸을 세우던 힘조차 사라지자 너덜너덜해진 몸은 그대로 지면에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사지가 찢겨나가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아마도 안쪽은 처참한 꼴일 것이다.

엎어진 몸을 뒤집지도 못한 채 경련하는 모습이 애처로워, 카즈리엘은 한숨을 쉬면서도 티엘을 자신의 무릎에 눕혔다.

하지만 놀랍게도 티엘은 그 지경이 되어서도 엉망이 된 팔을 뻗으려고 하고 있었다.

눈의 실핏줄이 터진데다 혀를 깨문 탓에 뺨이나 턱이 온통 피로 물들어있는데도 그 의지만은 놀라울 정도로 살아있었다.

카즈리엘은 두 손으로 티엘의 눈을 가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만일 내가 문을 열어준다고 해도, 지금의 넌 나가면 반드시 죽게 돼. 지금 바깥의 환영을 유지하는 놈의 속성은 환각계 중에서도 최고위에 속하는 '안개밤의 광연'이다. 계약자가 멋대로 풀어놓은 이상 빙룡을 다룰 수 있었더라도 정면대결로는 상대가 되지 않아."

"하, 하지,마안-"

"또 누군가를 잃는 건 용서할 수 없다고?"

티엘의 말허리를 끊은 카즈리엘은 뜻밖에도 티엘과 비슷한 얼굴을 한 채 손가락으로 티엘의 머리카락을 빗겨주었다.

강철보다 예리한 손톱이 조금 전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져 고운 묶음으로 가다듬는다.

마치 딸이나 동생을 대하는 듯한 부드러운 손놀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손가락 사이로 머리채를 미끄러뜨리던 카즈리엘이 손끝을 살짝 움직였다.

매끄러운 머리칼의 일부가 면도날같은 손톱에 끊어져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네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이제와서 한 가지 죄를 더하느냐 마느냐의 차이라면······, 거기에 의미가 있을까."

카즈리엘이 꺼내놓은 말은 갑작스러운 만큼 더욱 싸늘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분명 나셀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카즈리엘이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겨우 한 순간 전까지만 해도 자애로 가득하던 그녀의 얼굴이 먹이를 노리는 독사처럼 싸늘해졌다는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부정하겠다면 답은 간단하지. 자결해. 지금, 이 자리에서."

빈 말이 아니었다.

흠칫 놀란 티엘의 눈앞으로 우라실이 날아들었다.

제 자리에 앉은 채 마력으로 단검을 끌어당긴 카즈리엘은 금방이라도 티엘의 심장을 찌르려는 것처럼, 거친 호흡으로 오르내리는 가슴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정도의 높이에 칼날을 멈춰두었다.

그토록 험하게 다루었는데도 이 하나 빠지지 않은 아름다운 칼날에서는 싸늘한 한기가 흘러내려 가슴을 시리게 했다.

그 빛이, 마치 진한 술처럼 정신을 흐리게 만들 것만 같았다.

"스스로를 부정하기 위해서 굳이 나갈 필요는 없겠지. 반면 네가 사라진다면, 최소한 나는 나셀이나 칼로스를 도와주러 갈 수 있어. 다시 말해 네가 바라는대로,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다. 나가봐야 도움은 커녕 짐덩이 밖에 되지 않을 네가 가는 것보다는 훨씬 확실한 방법이지."

칼끝이 몸의 윤곽을 따라 느릿하게 올라오다 목 언저리에서 멈췄다.

"자, 알아들었으면 검을 잡아. 네가 그렇게나 증오하는 사람을 네 손으로 죽여 없애."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

너 따위는 필요 없으니 죽어 버리라는 말.

참으로 지독한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 티엘은 그녀의 말을 '지독하다'고 생각한 것에 다소 의아함을 느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대로 티엘이 나가서 설쳐봐야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리는 없고, 차라리 방해가 되지 않게끔 죽어버린다면 나셀이든 다른 세 사람이든 어느 한 쪽은 확실히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한 말인데도, 어째서 그걸 부정적으로 느낀 것일까.

눈을 커다랗게 뜬 티엘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떨리는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독약처럼 달콤하고 치명적인 속삭임이 흐려진 머리를 꽉 메웠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도 상관없다.

우라실의 칼날은 깊이 찌르지 못하더라도, 그저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심장이든, 목이든, 저항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의 몸 정도는 간단하게 부숴줄 것이다.

엉망이 된 손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게 움직여 매끄러운 손잡이에 감겼다.

이대로 당기면, 끝이다.

"아······."

하지만 순간 티엘은 다시 한 번 팔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카즈리엘의 힘 때문이 아니었다.

파르르 떨리는 칼끝은, 다름아닌 티엘 스스로가 찌르기를 주저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티엘은 이를 악물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죽어야 한다는 각오가 굳어질 수록, 그녀의 손은 살고 싶다고 외치듯 더더욱 크게 떨며 그녀를 방해했다.

왜?

왜, 이제와서?

"으, 으아아아아아아!"

가로막는 것을 뿌리치려는 것처럼,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손에 쥐여진 단검이 하늘 높이 세워졌다.

하지만 그 검이 다시 아래로 떨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검을 치켜 든 손의 떨림조차 미처 숨기지 못한 티엘은 그대로 얼어붙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히, 각오한 일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도 손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아니, 칼날을 자신을 향해 돌려세우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왜 그러지? 찌르지 못하겠나? 그렇게나 미워하는 사람인데도 차마 죽일 수 없는건가? 아니면 역시 죽는것은 두려운건가?"

"그런 건-!"

막 반발하려는 순간 무거운 한숨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그 순간, 카즈리엘은 재빨리 손을 내밀어 티엘의 손목을 움직일 수 없도록 움켜쥐었다.

그리고 일그러진 티엘의 얼굴을 똑똑히 마주보았다.

섬뜩한 핏빛 눈동자와 보석같은 자색의 눈동자.

둘 다 인간에게서는 나타나지 않는 특이한 색의 눈빛이 서로를 거울처럼 비췄다.

"전제부터 틀렸어. 너는 목숨을 버린다는, 그런 종류의 각오는 할 수 없는 인간이다."

"그건 제가 나약하다는······, 그런 뜻인가요?"

"아니. 너처럼 무언가를 짊어진 자는 스스로를 버리는 것을 할 수 없다는 뜻이지."

은근한 열기가 손목에서부터 전신으로 조금씩 퍼졌다.

카즈리엘이 쥔 부분에서부터 혈관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섞여드는 듯한 기분이다.

따스하게 데운 술을 한 모금 마신 것처럼 체온이 오르며 조금씩 몸을 쑤시던 가벼운 통증들을 부드럽게 녹여냈다.

하지만 대정령은 여전히 차갑고 무거운 얼굴로 다소 싸늘하게 식어있던 티엘의 뺨에 예리한 손톱을 올려놓았다.

조금 차가웠다.

그러나 살을 베어내는 일은, 없었다.

"각오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포기한다는 말이지."

카즈리엘의 눈 깊은 곳에서 흐릿한 불길이 타올랐다.

"무언가를 잃어도 좋다는 그 결의는 분명 강한 것이지만, 결국 짊어진 무언가를 내던진다는 행위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아. 그러니 넌 네 목숨을 버릴 수 없어. 널 위해 죽어간 사람들이 그 가슴에 무엇을 품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속죄를 바라면서도 끝없이 살아남고, 거기에 다시 죄의식을 쌓는 악순환이 되고 만 거겠지."

"······마치 본 것처럼 이야기하시네요."

"말했을텐데. 난 너와 계약한 생령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직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의 목숨을 건네받았다는 중압감에 눌리고, 그 상처를 돌봐줄 사람 하나 없이 몇 년이나 홀로 썩어가는 마음을 끌어안고 버텼으며, 그랬기에 아직까지도 그 흉터가 아물지 못했다는 것까지. 그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하다못해 한 명이라도 마음을 터놓을 상대가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너덜너덜해지진 않았을 것도. 이렇게까지 뒤틀리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대정령은 티엘의 뺨에 얹었던 손을 내려, 이번에는 그녀의 가슴을 덮었다.

통,통, 하며 손 아래에서 뛰는 심장의 고동이 그 손을 조용히 두드렸다.

그 곳에 얼마나 많은 앙금이 가라앉았더라도, 그 고동만은 한결같이 뛰고 있었다.

카즈리엘은 귀를 기울여보라는 듯한 얼굴을 했다.

조금 표정을 흐리던 티엘은 숨을 참고 몸 안쪽으로 주의를 기울였다.

카즈리엘의 손을 통해 전해진 약한 진동이, 조금씩이나마 그녀에게도 느껴졌다.

"감정은 이 곳에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쏟아내야 하는 것. 스스로를 지나치게 억누르면 자기 자신마저 모르게 되지. 그러지 마. 그렇게 해서 누구 한 사람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나? 아니야. 털어 내.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바라는 것······."

그것은, 비유하자면 호수에 던져진 조약돌 같은 말이었다.

티엘이라는 호수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정도의, 대수롭지 않은 몇 마디의 말일 뿐이다.

그와 비슷한 말이라면 이미 수십 수백 번은 넘게 동료들이나 나셀에게 들어왔을 터였다.

하지만 카즈리엘의 말은 약간 다른 점이 있었다.

한 순간의 실수가 죽음을 부르는 사선을 함께 나눈 자도, 혹은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지키고 싶은 자도 아닌, 그저 우연히 마주친 여행자로서의 말이라는 점이다.

그 작은 차이는 파문이 멀리 퍼져나갈 수록 더욱 큰 영향을 미쳐, 자괴감 안에 갇혀있던 티엘의 의식을 두드렸다.

티엘이 흔들리는 것을 눈치챈 카즈리엘은, 오랫동안 아껴왔던 이야기를 마저 꺼내놓기로 결심했다.

"모처럼이니 너의 계약령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도록 할까."

카즈리엘은 천천히, 티엘이 그녀 앞에서 이름을 말한 적 없는 생령들의 이름까지 나열하기 시작했다.

티엘이 괴로워하거나 슬퍼하는게 싫다며, 항상 혼자서 전부 짊어지려 하는 계약자를 제발 좀 말려달라던 슈니엘과 애냐.

눈을 떼면 불안해서 어쩔 수가 없다며, 혹시라도 자신이 없을 때 죽어버리거나 했다면 용서하지 않을거라고 했다는 파드마.

그리고 티엘이 스스로를 무가치하다 말하는 것에 화를 내면서 슬퍼하다는, 흰 날개의 용 칼라가스까지.

교감이 끊어진 것은, 그들이 그 외에 티엘을 지킬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코 티엘의 나약함을 원망하거나,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새 티엘의 뺨에는 희미한 이슬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티엘의 손에서 단검을 빼앗고 손목을 놓아준 카즈리엘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티엘을 똑바로 앉히며 살짝 안아주었다.

"감정은 이 가슴에 담아두는게 아니라 쏟아내야 하는 거다. 넌 스스로를 지나치게 억누르고 있어. 이제 그런 가면은 필요 없잖아. 봐. 네 지인들도, 네 계약령들도, 그 누구도 너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아. 이스티엘이라는 인간을 미워하는건, 오직 너 하나 뿐이잖아."

그녀의 말 가운데는 나셀이 했던 이야기가 그대로 녹아들어있었다.

마법을 모르는 자와 태생부터 마도에 속한 자.

어찌보면 상반된 그 두 사람이 같은 점을 짚었다는 것이야말로, 그 둘이 티엘을 정확하게 보고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하지만 제가 실수해버린다면 그때는 더 큰 희생이 일어날거에요. 그걸-"

"그 또한, 너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지. 잊었나? 마법사와 생령의 계약은 동등한 관계에서 시작된다. 널 부수지 않기 위해 흰 용이 스스로를 깎아냈다면, 그를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너 역시도 스스로를 깎아냈지. 그렇다면 무리한 계약이 불러오는 결과 또한 너와 흰 용이 나누어 짊어지는 것이 당연해. 홀로 짊어지지 마.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오만이니까. 스스로를 단죄하지 마. 네가 감당해선 안될 오만이니까. 네가 해야 할 것은 네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바라는지를 똑바로 직시하는 것, 단지 그 뿐이야. 그러니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묻겠어.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크게 흔들리던 눈이 얇은 눈꺼풀 뒤로 숨었다.

부드럽게 몸을 옭죄는 카즈리엘의 온기에 기대어, 어지러운 머릿속을 조금이라도 정리하려는 것이었다.

안개가 낀 것처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던 실마리는 어느새 손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그 실마리를 푼 뒤 위태로운 줄타기를 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대로 시들어버릴 것인지.

그러나 티엘도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에 단검을 겨누는 것을 망설인 그 순간부터,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는 것을.

"······사과 파이······."

"흐음. 잘 못들었는데. 뭐라고 했지?"

본인의 귀에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인간보다 몇 배는 더 날카로운 감각을 지닌 카즈리엘이 그것을 듣지 못했을리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반복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아마도 티엘이 좀더 분명하게 자각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어느새 딱딱하던 얼음가면은 완전히 녹아 없어졌다. 남은 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아닌, '이렇게 하고싶다'는 바람.

티엘이 잃어버린 가장 커다란 것을 되찾는 것.

망설이던 목소리가, 마침내 다시 크고 분명하게, 자신의 소망을 입에 담았다.

"돌아가서, 모두와 함께 돌아가서, 사과파이라도 구워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저······, 그것만으로도 더 할 나위 없이 행복할거에요."

그 기대에 부응하듯, 더이상 무력한 죄인이 아니게 된 소녀는 분명하게 자신의 소망을 입에 담았다.

얼핏 듯기에 웃음이 나올 정도로 덧없고 소박한 이야기였다.

강대한 힘을 손에 넣고 싶은 것도 아니고 막대한 부를 누리는 것도 아니다.

고작해야 직접 만든 음식을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소박하고 일상적이라고 해서, 과연 그 소망이 가벼운 것인가.

오히려, 그런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행복을 맛보는 것이 아니던가?

"그래. 그걸로 충분해. 그 바람이야말로, 네 전부다."

한 결 더 부드러워진 그녀의 얼굴을 지켜보던 카즈리엘은 바닥에 굴러다니던 티엘의 활을 주워 그녀에게 내밀었다.

티엘은 본래 마력을 쓰지 않는 순수한 완력으로는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자신의 활을 말없이 응시하다, 이내 망설임을 버리며 활몸을 움켜쥐었다.

처음으로 마력을 다뤘던 날처럼 신중하게,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해 외치며 단숨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손을 무디게 만들었던 사슬이 이제서야 풀려난 것일까.

마치 왜 이리 늦었냐며 타박하듯,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가 날카롭게 울었다.

그토록 티엘의 손을 거부했던 활이, 거짓말처럼 몸을 굽혀 자신을 허락하고 있었다.


작가의말

이스티엘 리턴즈! 까마귀 둥지에 붙잡힌 낭군님을 구해라!


ps. 오늘도 새로 구독해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감사합니다! :D

요즘 행복하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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