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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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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작성
19.10.2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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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6쪽

13장-인도引導 (15)

DUMMY

정신없이 잠들었던 티엘이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이미 해가 한참 기울어버린, 늦은 오후의 한복판이었다.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은 욕망에서 겨우 눈을 돌린 티엘은 불그스름한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방의 풍경을 보며 말없이 눈을 깜박거렸다.

아직 피로감이 다 가시지 않은 탓일까.

꽤 오래 잠들어있었던 것 같은데도 머릿속은 여전히 몽롱하기만 했다.

멍한 눈길이 머리맡의 협탁 위에 놓여있던 별의 서와 우라실을 지나 침대 옆에 세워진 이란데의 날개로 향하고, 다시 정면-그러니까 천장으로 향했다.

천장의 잔잔한 나뭇결을 보고 있자 조금씩 차분한 기분이 들며 흐릿하던 기억들을 조금씩 돌이킬 수 있게 되었다.

사투 끝에 레이븐을 쓰러뜨렸고, 나셀도 구했다.

그리고······.

"읏······."

돌아오는 길에, 그의 무릎을 베고 곤히 잠들었다는 사실까지 떠올린 티엘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잠결에 흘려들었지만 아무래도 칼로스와 리아에게 그 꼴을 보이고 만 것 같다.

새삼스레 얼굴이 달아오르며 자괴감 가득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나셀과 그런 사이라는 것은 새삼스레 비밀로 삼을만한 일도 아니었지만, 그냥 알고 있는 것과 눈앞에서 달달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울상을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자신을 확인하는 과정이 길군. 좀더 시간이 필요한가?"

그 때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티엘의 혼란에 강제로 종지부를 찍었다.

뜻밖의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어올린 티엘은 타오르는 선홍색의 눈동자에 가벼운 놀라움을 표했다.

"카즈리엘? 여기엔 어쩐 일로······?"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지쳐도 움직임에 지장이 없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정확히는 피로로 인해 술독에 빠진 얼간이가 둘, 그 사이에 휘말린 희생자 하나, 그리고 그 곁에서 홀로 남아 쩔쩔매며 집중공격을 받고있는 예비 희생자가 하나다.

물론 마지막 한 명은 이 방에 남아있겠다고 주장했지만, 카즈리엘은 조금 억지를 부리면서까지 그를 내보냈다.

지금쯤이면 티엘의 쾌유와 전원의 무사를 축하하며 유쾌하게 잔을 부딪히고 있을것이다.

티엘이 깨어나면 곧 데려갈테니, 우선 깨어있는 사람들부터 피로를 풀고 있으라는 그럴듯한 이유에서였다.

완전한 거짓은 아니다.

그러나 완전한 진실도 아니었다.

일부러 홀로 남아, 티엘이 눈을 뜰 때 까지 말없이 기다린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까.

티엘이 꺾여버린 마음을 회복했다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이들에게, 지금부터 입에 담을 이야기를 들려줄 수는 없었다.

"우선, 살아남았다는 걸 축하해줘야겠지. 수천 년을 인간들의 곁에서 보냈지만, 너처럼 무모한 도박을 성공시킨 이는 한 손에 꼽을 정도니까. 아, 그다지 움직이지 않는걸 추천해. 그 정도로 피를 흘리고도 곧바로 걸어다니려 하다니, 조금쯤 몸을 생각하는게 좋아."

피에 관해서라면 카즈리엘만큼 정확한 자도 없을 것이다.

그렇잖아도 아직 현기증을 느끼던 티엘은 카즈리엘이 권하는대로 얌전히 침대에 몸을 눕혔다.

털썩, 몸이 베개 위로 떨어지며 부드러운 충격이 가볍게 티엘의 몸을 흔들었다.

그 바람에, 문득 귀 뒤로 넘겨두던 앞머리 일부가 흐트러지며 눈 앞으로 주르륵 쏟아졌다.

강령을 풀며 머리의 색은 이미 되돌아왔지만, 한 번 길어진 길이는 그대로였다.

그야말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머리가 굉장히 성가셨다.

아무도 잘라주지 않은 것일까, 조금 섭섭해하던 티엘은 무심결에 머리를 쓸어넘기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한 티엘은 쓸어넘기려던 머리칼을 눈앞으로 재차 끌어당겼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강물 사이로 이질적인 흰 빛의 실선이 가늘게 뒤엉켜있었다.

"이건······."

카즈리엘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흰 머리칼은 이슬이라도 머금은 듯 서늘하고 매끄러운 감촉이었다.

역류가 진행중이거나 칼라가스를 강령시켰을 때와 완전히 동일한 촉감에 손끝이 조금 떨렸다.

그것이 강령으로 인해 가속된 침식의 흔적이라는 사실은 아플 정도로 명확했다.

각오는 했지만 막상 눈앞으로 들이밀어진 현실에는 적지 않은 충격이 티엘을 덮쳤다.

하지만 티엘은 이내 다른 것을 떠올리며 황급히 카즈리엘의 소매를 잡아챘다.

"다른 사람들은요? 혹시 눈치채진 않았어요?"

"다행히 눈치채진 못했어. 하지만 언제까지고 숨기긴 어렵겠지."

카즈리엘의 얼굴에 문득 피로가 드러났다.

생령은 인간처럼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지만, 아무래도 정신적인 피로까지 뿌리치지는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티엘을 향한 연민이 그녀를 지치게 만든 것일까.

티엘은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레이븐과의 격전으로부터, 길어야 겨우 몇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 사이, 대부분의 시간은 잠들어 있었으니 다른 기억이 끼어들 일도 없다.

그러나 그 얼마 안되는 과거조차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커다란 여백이 군데군데 생겨나있었다.

고작해야 몇 시간조차 흐르지 않은 기억이 그럴진대, 그보다 더 오랜 과거의 기억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단 한 번의 싸움을 위해 대가로 바쳐야 했던 시간은 얼마나 되는 것인지, 감히 헤아려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앞으로 얼마나 남은건가요."

하지만 티엘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담담하기만 했다.

어차피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울고 괴로워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남아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의미있게 채우고 싶은 것이리라.

티엘의 속내를 읽은 카즈리엘은 문득 내심 인간들처럼 술에 취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의미한 대답밖에 줄 수 없는 이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기에.

"내게 앞을 내다보는 힘은 없어. 10년일지, 1년일지, 아니면 그조차도 남지 않았을지······. 하지만 침식을 늦추고 싶다면, 흰 용의 마력을 빌리는 것은 최대한 자제하는게 좋아. 너도 조금씩이나마 성장하고 있으니, 운이 따라준다면 선을 넘기 전에 균형을 맞출 수 있을 수도 모르니까."

운이라.

스스로 말하고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결국 사람도, 생령도 손이 닿지 않는 그 애매한 영역에 기대야 할 정도로 어두운 상황이라는 뜻이지 않은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것이라고는 티엘의 죽음이 재앙의 씨앗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 뿐, 고대의 혈정령과 시원의 용의 힘으로도 그녀의 짧은 생을 붙들어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티엘은 그거면 됐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걱정해도 달라질 게 없다면 걱정해 무엇하겠냐는 투였다.

그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이 방으로 올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카즈리엘. 나셀입니다. 티엘은 어때요?"

예상대로 나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막 일어난 참이니 잠시 기다려."

카즈리엘은 재빨리 몸을 숙여 티엘의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

지나치게 긴 머리를 손톱만으로 잘라내고, 하얗게 세 버린 머리칼은 교묘하게 숨겨 드러나지 않게 꾸몄다.

아직 조금 창백한 안색도 혈정령인 그녀가 조금 힘을 불어넣으면 조금 더 생기를 띈다.

마지막으로 실내용 덧옷을 가져와 티엘의 어깨를 감싸준 카즈리엘은 얼굴에 은근한 미소를 띄우며 티엘의 귀에 속삭였다.

"연인과의 시간을 더 빼앗진 않겠어. 좋은 시간 보내."

"······고마워요."

미풍처럼 멀어진 카즈리엘은 문 밖의 나셀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칼로스가 있는 곳으로 떠났다.

그 뒤를 교대하듯 방으로 들어선 나셀은 조금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방을 가로질렀다.

그 신중한 걸음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손에 갖가지 음식이 담긴 큼직한 쟁반이 들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수프가 들었음직한 뚜껑달린 작은 단지와 부드러운 갈색의 빵 한 덩어리, 그리고 입맛을 당기는 조금 새콤한 치즈 몇 조각.

옆에는 수면제 대용으로 보이는, 물에 희석한 포도주가 작은 잔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하루종일 잠들어 있었으니까, 배가 고플거라 생각해서."

"후후, 반가운 이야기네. 그런데 네 건?"

두 사람이 먹기엔 꽤 모자란 양이었다.

그러나 나셀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아와 칼로스 상대해주면서 적당히 먹었어."

"그럼 고맙게 잘 먹을게."

나셀은 친절하게 티엘의 등에 베개를 받쳐 일으켜준 뒤 쟁반을 티엘의 무릎 위까지 가져다 주었다.

닭고기와 야채를 듬뿍 넣고 끓인 수프에서 구수한 냄새가 한가득 올라왔다.

저도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어린아이처럼 조금 들뜬 손이 숟가락 가득 떠올린 수프를 재빨리 입안으로 가져갔다.

짭짤하면서도 감칠맛 풍부한 국물이 온몸을 따뜻하게 데우는 훈훈한 기분.

그 한 입으로 활기를 되찾은 티엘은 느긋하게 빵을 갈라 치즈를 듬뿍 얹어 깨물고는 행복한 얼굴로 맛을 음미했다.

대체 얼마만에 음식의 맛을 맛있다고 느끼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의 굴레를 덜어낸 차이는, 그녀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컸던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음식을 다 먹어버린 티엘은 그제서야 나셀의 시선을 눈치채고 조금 무안하게 웃었다.

"그렇게 빤히 보고있으면 부담스러운데."

"뺨에 빵가루가 묻었으니까."

"응? 어디?"

"거짓말."

"······나셀."

실없는 대화 끝에 피식거리는 웃음이 교차했다.

쟁반을 한 구석으로 치운 나셀은 침대 위에 팔을 괴며 조금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아까는 참 하고싶은 말이 많았는데······. 이렇게 마주보고 있으니 막상 생각이 안나. 그냥 다행이라는 생각밖에는."

얼굴은 그리 붉지 않았지만 그 숨결에는 약간의 술기운이 섞여있었다.

리아에게 끌려 몇 잔 정도 마신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숨결만으로도 주신(酒神)의 은총이 내린 것인지, 티엘 역시 평소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셀의 손을 잡았다.

티엘이 쥔 손은 왼손이었다.

살짝 끌어당기는대로 따라준 나셀은 티엘이 자신의 손목에서 흔들리는 팔찌를 보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옷자락으로 다시 가리는게 나을까 생각하던 나셀은 약간의 고민끝에 오히려 팔찌를 티엘에게 상세히 보여주었다.

뼈로 만든 것처럼 새하얗게 바래버린 죽음의 눈동자는 더이상 치유능력을 발휘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의 생명을 불사르지도 않았다.

단지 빼려고 하면 손에 걸리는 것처럼 덜컥 멈춰, 여전히 나셀에게 귀속되어있다는 특성이 살아있다는 것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거······, 왜 이렇게 변했지? 내가······, 봉인한건가?'

기억이 흐리다.

중요한 부분이 하얗게 덧칠되어, 명확한 모습으로 떠오르길 거부한다.

순간적이었지만, 티엘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티엘? 어디 안좋아?"

"······아니. 조금 피곤해서."

나셀의 눈이 의심의 빛을 띄었다.

한 순간이라고 해도 티엘의 흐트러진 얼굴을 눈치채지 못할 그가 아니다.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저 미소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티엘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내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알리고 싶지 않았다.

조만간 닳아버린 기억들로 인해 들키게 되더라도, 적어도 모두가 지친 오늘만큼은 누구도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티엘은 조금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희미하게 어두운 얼굴을 한 나셀의 팔을 힘껏 끌어당긴 것이다.

비스듬하게 몸을 기울이고 있던 나셀은 불시의 기습에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티엘의 옆으로 나란히 넘어지고 말았다.

"자, 잠깐. 뭐 하는 거야?"

"환자에겐 안정이 필요하잖아. 곰 인형 대용이야."

"그래도 같은 침대에선-"

"나셀은 환자한테 손 댈 사람이 아닌걸."

"티엘!"

나셀이 붉게 물든 얼굴로 소리를 질렀지만, 티엘은 꺄르르 웃으며 그런 나셀을 꼭 끌어안았다.

망가진 기억들 사이에서도 아직 남아있는 기억들은 있다.

악몽에 시달리던 어느 밤, 흐릿한 의식 속에서 손을 잡아주었던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잠들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 사람은, 열에 들떠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는 티엘의 이마를 몇 번이고 닦아주면서도 결코 손을 놓지 않았었다.

그 온기가 너무 따스했던 나머지 꿈조차 꾸지 않은 채 남은 밤 동안 편안히 잠들 수 있었던 것은, 지금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감사와 미안함을 담은 티엘의 입술이 발갛게 달아오른 나셀의 뺨에 조용히 닿았다.

"고마워. 그리고, 좋아해."

나셀은 티엘의 품에 안겨, 그리고 티엘은 나셀을 끌어 안아, 서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누구의 얼굴이 더 붉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 * *



인적 드문 황무지. 하루 전만 해도 막대한 마력이 잠들어있었던 이 땅은, 지금은 마력의 흔적만을 남긴 채 텅 비어 공허감을 퍼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 땅의 영맥이 다시금 마력으로 가득 채워지기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인가.

자연적으로 채워지길 기다리자면 아마도 십 년, 혹은 그 이상.

리벨른, 비르첼리 헬베르트, 혹은 레이븐이라고 스스로를 칭했던 남자는 조금 허탈한 기분으로 나무등걸에 등을 기댔다.

땀과 흙먼지가 뒤엉켜 밧줄처럼 굵게 덩어리진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두 팔은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억지로 일으킨 불꽃으로 상처를 지져 출혈만 막은 참담한 자신의 꼴이 참으로 우습다.

그러나 레이븐의 얼굴에 미련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는 눈에는 스러지길 기다리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육친의 피를 양식으로 삼는 이 땅에서 증오에 물들지 않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을겁니다. 하지만 그들이라면 어쩌면 그 험난한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 때는 분명,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 말할 수 있을겁니다."

술이라도 한 잔 걸친듯 감상에 젖은 말이 물 흐르듯 쏟아져나왔다.

"그 성장을 끝까지 지켜볼 수 없게 된 것은, 사실 조금 아쉽습니다. 하지만 뭐, 역할이 끝난 배우는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이 합당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무나 돌을 향한 질문이 아니다.

기척도 없이 가가왔던 그림자는 예상했다는 것처럼 조용히 검을 뽑았다.

시퍼렇게 날이 선 검신이 가슴 시리도록 길게 끄는 울음을 흘렸다.

그러나 레이븐은 차가운 칼날이 자신의 목까지 다가와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은 이미 결정된 결말이다.

패배한 이상 티엘이 손을 쓰건 쓰지 않건, 그의 목숨은 끝난다.

"그렇다고는 하나, 고립무원에 떨어진 이국인들을 방패삼고 마지막만 가로챈다니 기사의 명예는 바닥에 떨어졌군요. 하하하하!"

"······레가야의 검은 문, 그 여섯 번째 계위를 가진 마법사의 목이라면 얼마든지 불명예를 감수할만 하지."

레이븐의 웃는 얼굴이 한쪽으로 일그러졌다.

명예로운 판금갑은 흔해빠진 가죽갑옷으로 바뀌어있지만, 들고있는 검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장식들이 돋보이고 있었다.

속도를 중시하는 모래시계형의 유선형 칼날은 얼핏보기에 미르다야의 양식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칼날 부분에 국한된 것.

푸른 기가 감도는 검은색 코등이와 금색으로 새겨진 여섯 잎의 꽃 한 송이,, 여섯 겹의 끈을 나란히 둘러 감은 칼자루.

그것은 여섯 대공국을 모두 동등하게 바라보는 것을 상징하는 검이다.

제국의 힘이 대공국들에게 기울어버린 이 시대에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순진한 구닥다리 유물이며, 이런 물건을 아직까지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얼마 없다.

"세간에선 그런 자를 천박한 기회주의자라고 부른다는건 아실겁니다, 루앙의-"

"닥처라. 그 입에 함부로 담을 이름이 아니다."

"이런, 여전히 날카롭군요. 어차피 죽는 마당에 몇 마디 말 정도는 너그러이 용서해주실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죽음이 아니라 선물이라도 기다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킬킬거렸다.

기사는 당장이라도 목을 벨 듯 날을 세우다, 자신을 추스르며 다시 위협 수준으로 낮췄다.

"네 주인이 무엇을 하려는지 말해라. 설마 그런 규모의 마법진을 정말로 가동할리는 없겠지."

"심문입니까? 어차피 죽을 사람에게 묻는다고 대답할리 없겠지만, 이거 우습군요. 답을 부정하고 시작하면, 대체 무엇을 알고싶으신 것인지?"

"······뭐라?"

지금 이 자가 제정신으로 말한 것인가.

레가야의 대공은, 진심으로 그 규모의 마법진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는것인가?

레이븐은 기사의 경악을 비웃듯 아예 큰 소리로 대소했다.

"아하하하! 다른 시시한 자들과는 다르지요. 대륙 전체를 제물로 삼을지도 모른다? 웃기지 마시지요! 그런 것 따위는 알 바 아닙니다. 마법사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스스로가 원하는 바를 향해 끝없이 달리지 못하면 죽어버리는 운명인 것을. 그 길에 무엇이 흩뿌려지던, 멈출 우리가 아닙니다."

"미쳤는가! 한 사람의 갈망을 위해 무수한 희생을 치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인가!"

기사의 일갈에 레이븐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이제까지, 그저 사태를 관망하듯 여유로웠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목에 닿은 칼날에 스쳐 핏방울이 흐르는 것조차 무시한 채 고개를 돌린 레이븐은 광기마저 어린 싸늘한 눈으로 기사를 노려보았다.

"······당신들 기사들은 언제나 그렇지. 스스로 답을 찾기보다는 명확한 명령에 따르는 것에 익숙해. 그러니 눈앞의 단순한 길밖에 보지 못해. 그 꼭두각시같은 시야로 감히 세계에 도전하는 자를 가늠하지 마라. 너희들에게 세계를 논할 자격은 없으니까."

설령 적이라고 해도 결코 말을 낮추지 않았던 레이븐이지만, 이 때 만큼은 경멸을 가득 담은 평대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칼날에 베인 상처는 그리 가볍지 않아, 흘러내린 피가 순식간에 옷을 붉게 물들여가는데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가. 확실히 나의 주인은, 그리고 나는 악이겠지. 무고한 자들을 짓밟으면서까지 자신의 뜻을 펴고자 하니까. 하지만 그런 우리를 벤다고 해서 너희가 선인가? 너희도 다르지 않아. 목적을 위해 타인을 끌어들인 이상 너희는 또다른 우리다. 그저 주인에게 꼬리치는 것만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한심한 작자야."

"······이 피로 물든 땅 위에 악 아닌 자가 남아있는가? 우리는 그저 희생을 줄이고자 차악이라 생각하는 것을 택한다."

"차악이란 없어. 그건 순응이라는 이름의 타협일 뿐이다."

기사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 이상 이야기를 나누어보아도 결국 이야기는 한 걸음도 진행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상대의 목에서 검을 떼어낸 기사는 그것을 두 손으로 단단히 쥐고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자 레이븐도 조금 전까지의 날카로운 모습을 지우며 다시 능글능글한 미소로 되돌아왔다.

"날 죽인다고 해도 고작해야 시간끌기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고 있을겁니다. 이 곳에서 번 그 짧은 유예로 과연 검은 심장의 해룡을 찌를 수 있을지, 어디 한 번 기대해보지요."

대답은 필요 없다.

싸늘한 금속이 육신을 파고드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파드드득,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란 새들이 하늘로 날아오르며 검은 깃털 하나가 천천히 지면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소리없이 흘러내린 피웅덩이가 조용히 그 깃털을 적셨다.



* * *



꼬박 하루를 회복에 할애한 뒤, 리아는 저번과 같은 사람을 통해 의뢰인 쪽에 연락을 넣었다.

마력천에 고인 마력의 완전 정화와 레이븐의 배제를 확인한 의뢰인 측에서는 바로 돌아오는 새벽시간을 지정하며 새로 자리를 마련했다.

이전에 사용했던 헛간은 지하실쪽이 완전히 파묻혀버렸기에 더이상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새로운 회담 장소는 멜람을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버려진 목장이었다.

그 곳에는 겨우 외형만 갖춘 채 썩어가는 낡은 오두막이 있었다.

물론 구멍이 숭숭 뚫린 이런 건물을 회담장소로 쓰기에는 부적합하다.

잠시 바닥을 조사하던 리아는 혀를 차며 돌 바닥의 일부를 불쑥 들어올렸다.

겉으로만 봐서는 알아채기 어려운 다락문 아래로는 건초나 치즈 등을 보관하는 데 썼음직한 제법 넓은 창고가 나타났다.

"이런 데는 매번 어떻게 알고 지정하는지 신기하단말야."

"탐색령도 없이 비밀문을 찾아내는 사람도 신기한걸요."

슈니엘을 부르려던 티엘이 빙그레 웃었다.

아직까진 휴식을 취하는게 좋을텐데도 데려가달려고 강력히 요구하는 바람에 결국 따라오는 것을 허락받았다.

리아는 얄미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티엘에게 눈을 흘기면서도 이내 표정을 풀 수밖에 없었다.

창고 안에는 의자같은 것은 놓여있지 않았다.

올로비스는 칼로스를 데리고 벽에서 뜯어낸 선반을 잠시 손을 봐 그럭저럭 탁자 비슷한 것을 만들어낸 뒤, 나무통과 건초 약간을 이용해 간이 의자를 만들어 자리를 마련했다.

마지막으로 나셀이 가지고 다니던 다용도 천을 넓게 깔아 탁자보처럼 덮는 것으로 겨우 회의실이 완성되었다.

남은 천 조각을 찢어 기름에 적셔 등잔까지 만든 그들은 약간의 긴장과 기대 속에서 상대가 오는 것을 차분히 기다렸다.

다행히도 의뢰주 측은 두 번이나 늦는 실례를 범하지 않았다.

약속된 시간이 가까워갈 무렵, 두 번째로 열린 다락문을 통해 이전에도 보았던 대리인이 내려섰다.

"생각보다 일찍 만나게 되는군. 당신들의 노고에 감사드리지."

의뢰를 완수한 덕분인지 지난번보다는 비교적 부드러워진 태도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 뿐이다.

이번에도 찾아온 것은 그 혼자였다.

의뢰인은 끝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을 생각인걸까.

나셀은 내심 한숨을 쉬며 상세한 결과를 찬찬히 보고했다.

'미적지근한 반응이다. 하다못해 레이븐의 처분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을리가 없을텐데. 마치 알고 있는 내용을 되풀이해 듣는 것 같이.'

티엘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일부러 애매하게 둘러 말한 부분조차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오히려 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몇 번이고 캐물을 거라 염려하던 부분을 아무렇지않게 넘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창고를 가득 채우는 위화감 속에서 가까스로 보고가 끝났다.

"잘 알겠군. 거듭 감사드리오. 약속대로 로셀로 이동해, 이어지는 의뢰까지 부탁하도록 하지. 준비 기간은 사흘로 충분하겠소?"

"부상자도 있는데 사흘이라니, 너무 짧지 않습니까?"

"마냥 여유를 부릴 사안이 아니오."

그 순간, 잠자코 대화를 듣던 티엘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대화중인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오기에는 한참 모자란 작은 소리였지만, 그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자에게는 충분할 정도로 커다란 움직임.

리아는 씩 웃으며 왼손의 새끼손가락을 당겼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나셀과 입씨름을 하던 대리인은 흠칫 놀라며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그의 손은 칼 손잡이를 찾아 쥐고 있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요."

"어머나, 무슨 말씀이신지?"

"출구를 막는 행동 외에 지적할 만한 사항이 또 있소?"

대리인은 발검 자세에서 석상처럼 굳어진 듯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주인이 다른 거미줄에 떨어진 거미같았다.

섣불리 움직이면 자신이 다치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신중하고 적대적인 반응이다.

리아는 조금 음산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감이 좋은걸.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공간에서 금색의 불꽃이 가늘게 타올랐다.

어둠 속에 남아있던 거미줄이 불타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늘게 이어진 불길은 잠시 후 사그라들며 새파랗게 날이 선 은사로 뒤바뀌었다.

검을 뽑으려던 대리인의 주위 뿐만이 아닌, 문으로 이르는 공간 전부를 그물처럼 죄는 은사는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한 미로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대리인의 눈길이 황급히 확인한 것은 주위를 휘감은 은사가 아니었다.

그의 등 뒤로 한 걸음 물러선 자리.

은사와 마찬가지로 얼마 전까지는 찾아볼 수 없었던 한 사람의 그림자가 그 곳에 서 있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옷에 묻은 거미줄처럼, 그 자의 어깨에 닿아있는 카르나의 사슬이 금색의 빛을 뿌렸다.

검은 옷은 흥미롭다는 듯 은사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리아가 원한다면 그 행동만으로도 상대를 갈갈이 찢어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짓이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상대는 오히려 은사를 손으로 젖히며 등잔빛이 닿는 거리까지 성큼성큼 다가왔다.

"소리도, 모습도 감추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눈치챈 건지, 혹시 알려줄 수 있겠나?"

독특한 매력을 품은 단단한 울림.

그 목소리에는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서도 오만하게 느껴지지 않는, 쉽게 만날 수 없는 권위가 녹아있었다.

전장에 서서 무기를 주고받는 전사로서의 관록은 느껴지지 않지만, 조금 방향이 다른 '싸움'에는 익숙한 듯한 노련함도 조금쯤 엿보였다.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애석하게도 생령의 감각까진 속이지 못하셨을 뿐이죠. 탐색령이 있다는 것은 미처 모르셨나보죠?"

"생령인가. 사미라의 가루에만 생각이 미친 것이 화근이었군."

남자는 담담하게 웃으며 두 손을 들었다.

하지만 항복을 표한다기보다는 단지 적의가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자세인듯 했다.

깊이 눌러쓴 모자로 인해 표정은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철저하게 계산된 듯 웃음을 머금은 입모양만으로도 그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히 전해지고 있었다.

"귀공들의 뜻대로 의뢰인인 내가 얼굴을 보였네. 그렇다면 이 결계는 거두어주지 않겠나. 물론, 이쪽도 검을 거두겠네."

"하지만-"

"에젤린드."

막 항의하려던 대리인은 조금 망설이면서도 순순히 자세를 풀었다. 그리고 아예 칼집째 풀어낸 검을 탁자 한 가운데로 던지듯이 밀었다.

상대가 무장을 풀자 생긋 웃은 리아 역시 은사를 거두었다.

조금이나마 이완된 분위기를 타, 나셀은 재빨리 의뢰인을 향해 자리를 권하며 운을 띄웠다.

"우선은, 저희가 중도에 빠져나갈 수 없는 길에, 충분한 설명도 없이 올랐다는 점을 시사하고 싶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의뢰가 어떤 것이든, 한 배를 탄 이상 따르지 않을 수는 없죠.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저희는 다음의 의뢰가 어떤 위험을 가지고 있더라 해도 쉽게 발을 뺄 수가 없게 됩니다. 지금의 무례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니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네. 얼굴을 숨기고 대리인까지 세워, 몇 겹이나 스스로를 숨기는 자가 내미는 의뢰에서 불안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 허나."

의뢰인은 탁자 위에 놓인 검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투쟁에 미친 나라에서는 이름을 내거는 것만으로도 위험할 수 있네. 특히나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대공국의 수장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역시 이쪽의 뜻대로 따라와 주는 것은 바랄 수 없다.

"그렇다면 서로 패를 교환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신뢰란 어느 한 쪽의 권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나셀은 슬쩍 대리인, 에젤린드의 말을 돌려주었다.

에젤린드는 무언가를 참는 듯 무거운 신음을 흘렸지만, 얼굴을 남자는 고개를 끄덕여 오히려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나셀은 때맞춰 미리 준비해둔,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한 장의 양피지를 꺼냈다.

밀랍에는 가시나무와 까마귀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검은 가지 기사단을 상징하는 인장이다.

상대의 그늘진 얼굴이 조금 경직된 것을 눈치챈 나셀은 조심스레 그의 눈 앞에서 봉인을 찢고 두루마리를 일부만 펼쳐보였다.

양피지 위에 유려한 필체로 긴 글이 적혀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보다 먼저 눈길을 끈 것은 끄트머리에 적힌 핏빛의 서명이었다.

정말 피로 적은 것으로 보이는 글자들은 모두 살아있는 것처럼 맥동하는 빛을 뿌리고 있었다.

물론 나셀이 펼쳐보인 것은 리아와 올로비스의 이름 뿐이었다.

상대의 신분을 모르는 상태로 티엘의 신분을 노출시킬 수 없기에, 우연을 가장하여 그녀의 이름 부분만은 교묘하게 돌돌 말린 양피지 아래로 숨겨져있었다.

"마법사에게 마력이 어떤 의미인지는 아실겁니다. 지금 이 문서에는 저희들 가운데 세 명의 마법사가 이름을 적었습니다. 우리 다섯 중 누구라도 계약이 완수되기 전 임의로 파기하거나 비밀을 누설한다면 서명한 자 전원의 각인이 파기되고 다시는 마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됍니다."

각인을 매개로 하는 마력종속계약.

고대 이피안 시대, 피를 매개로 가문 전체를 얽어맸던 '혈위종속계약'과 비슷한 이 맹세는 이름을 써넣은 마법사 개인에게 행해지는 절대적인 구속이다.

마력종속계약을 깨뜨려 각인이 파괴된 경우, 이를 되살리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며 이는 마법사로서의 죽음이나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이들이라면 자연스레 알게되는 간단한 상식이었다.

의뢰인은 조금 의외라는 듯 천천히 양피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나셀은 섬뜩한 빛을 뿌리는 양피지를 재빨리 끌어당겼다.

의뢰인은 조금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환각주문으로 위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확인해야하지 않겠나?"

"그 정도로 신중하신 성격이라면 환각을 깨뜨릴 물건 정도는 가져오셨겠지요."

의뢰인은 손바닥 안에 들어갈만한 조그만 가죽주머니를 탁자 위로 던졌다.

안에 든 것은 맑은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었다.

온갖 환각을 깨뜨리고 진실을 보여준다는 대지, 생명, 치유의 대천사 사라엘의 성소에서 축성한 성수였다.

그러나 티엘은 서슴없이 병을 열어 안의 액체를 양피지 위에 부었다.

성수가 양피지를 흠뻑 적셨지만, 놀랍게도 잉크는 한 방울도 번지지 않았다.

오히려 종이를 적시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처럼 표면을 따라 빠르게 흘러내린 성수는 순식간에 말라 사라지며 양피지를 보송보송한 상태로 되돌려놓았다.

사라엘의 성수가 이 문서에 거짓이 없다고 판명한 것이다.

의뢰인은 무거운 한숨을 삼켰다.

"귀공들의 신의는 고맙군. 허나 애석하게도 이쪽에서는 따로 신의를 증명할 물건은 가져오지 않았네. 그러니 원하는 형식이 있다면, 말해보게나."

나셀은 내심 미간을 찌푸렸다.

무엇을 요구해야 확실하게 상대의 의중을 떠볼 수 있을까.

마력종속계약같은 강력한 강제력을 구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단순히 말이나 문자로만 작성한 맹약은 손익에 따라 버려질 위험도 감수해야한다.

나셀은 갑자기 들이닥친 난제에 말없이 일행들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그들이라고 뾰족한 답이 있을리 없다. 리아는 아예 시선을 피하고, 올로비스도 고뇌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단 한 명, 조금 다른 얼굴을 하는 자가 있었다.

눈가를 가리는 가면 아래로 조금 비틀린 웃음을 짓고 있던 한 사람.

비릿하게 웃던 티엘은 나셀이 입을 열기도 전, 대뜸 상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루앙의 좌에 걸고, 당신의 신뢰를 선언해 주시겠습니까?"

루앙의 좌?

나셀은 낮선 단어에 의문을 품었다.

리아나 올로비스도 지금 무슨 소리를 햐느냐는 듯한 눈으로 티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뢰인도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잘 모르겠군. 그건 무슨 의미-"

그러나 그 순간, 가면 아래에서 싸늘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며, 동시에 의뢰인 역시 말꼬리를 삼키며 대뜸 티엘의 가면을 노려보았다.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의 실수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공화국어를 쓰는 자들, 그리고 검은 가지의 인장. 뻔히 보이는 유도였지만 너무 방심하신 것 같군요. 그 반응을 보인 시점에서 당신의 패배입니다."

의뢰인의 주먹에서 우두둑 거리는 매서운 소리가 울렸다.

티엘의 웃음과 의뢰인의 반응을 지켜보던 에젤린드가 칼자루를 잡았다.

이렇게 된 이상 다 죽이겠다는 것인가?

올로비스는 에젤린드의 살기가 한 순간 폭발적으로 뿜어지는 것을 느끼며 긴장 속에서 솔페이람의 마력을 불렀다.

그러나 정작 에젤린드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티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살기를 알아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의뢰인이 자신을 죽이지 못하리라는 것을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티엘의 예상대로, 의뢰인은 내키지 않는 손짓으로나마 에젤린드에게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무, 무슨 의미야, 방금건?"

어리둥절해진 리아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티엘은 일부러 상대를 조롱하듯, 가벼운 목소리로 긴 설명을 붙였다.

"루앙의 좌란 제국민은 누구나 아는 단어지만, 동시에 그 어떤 사람도 그것에 대고 맹세를 할 수는 없는 아주 특별한 물건이에요. 흔히들 '절대 해낼 수 없는 것'을 의미할 때 '루앙의 좌에 맹세한다'는 관용어를 쓸 정도죠."

"불가능한 일······."

"그러니 단 한 사람을 빼고는, 저 질문에 대해 한 가지 대답밖에 할 수가 없어요. 반대로 말하면, 제국인인 이상 모르는게 더 이상한 대답이죠."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렴풋이 진실을 알게 된 세 사람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그리고 티엘은, 보기 드물 정도로 싸늘한 분위기를 그대로 드러내며 말을 끝마쳤다.

"루앙의 좌란 제국을 아우르는 하나뿐인 권좌를 이르는 또 하나의 이름이니까."

로브의 남자는 패배를 시인하듯, 느린 손으로 두건을 걷어냈다.

두터운 천조각이 사라지며, 한 마리 매를 연상시키는 얼굴이 빛 아래 드러났다.

무언가를 노리는 날카로운 야심이 살아있는 눈매, 먹이를 노리는 듯한 날 선 매부리코 등 그의 생김새도 한 몫 하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인상을 좌우한 것은 바로 그의 얼굴 전체에서 느껴지는 당당함이었다.

드높은 목표를 추구하며, 그렇기에 자신을 신뢰하는, 스스로를 '높은 존재'라고 믿는 강렬한 자신감.

티엘은 그가 얼굴을 드러내는 것에 맞추듯, 마찬가지로 가면을 홱 벗어 탁자 위에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대는-"

'의뢰인'도, 그를 지키던 기사도, 가면 뒤에서 나타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반대로 티엘은 피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모든 것의 원흉, 어쩌면 모든 것의 피해자.

자신처럼 운명에 휩쓸린 사람일 뿐이지만, 아무런 감정이 없을 수도 없었다.

이 한 마디가, 그들을 어디로 인도할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피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티엘은 내키지 않는 몸을 움직여 과장 가득한 몸짓으로 허리를 숙였다.

"신, 레가야 대공 카르티치스의 핏줄을 이은 자, 이스티엘 아르야 카르티치스가 제국의 주인이자 여섯 검의 주인, 파헬 산맥에서부터 로이아 해의 지배자이자 북의 빙원에서 남의 미투스에 이르는 모든 땅의 영주라는 허울좋은 이름을 가진 자, 아쉬칼페인 샤티네스 아르노 시엘 카이라 황제 폐하를 배알하나이다."

운명은 돌아설 수 없는 길로 그들을 인도하고 있다.

티엘은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자각하며 싸늘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작가의말

인도편, 끝났습니다.

끊기가 애매해서 또 마지막에 분량이 폭발해버렸네요.


내일은 다시 14장, 약속편으로 되돌아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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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15장-귀향歸鄕 (4) 19.11.13 57 4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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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15장-귀향歸鄕 (2) 19.11.11 66 4 25쪽
143 15장-귀향歸鄕 (1) 19.11.10 68 6 24쪽
142 14장-약속約束 (18) 19.11.09 72 4 35쪽
141 14장-약속約束 (17) 19.11.08 66 4 29쪽
140 14장-약속約束 (16) 19.11.07 56 4 24쪽
139 14장-약속約束 (15) 19.11.06 61 4 35쪽
138 14장-약속約束 (14) 19.11.05 55 4 26쪽
137 14장-약속約束 (13) 19.11.04 55 3 27쪽
136 14장-약속約束 (12) 19.11.03 49 3 25쪽
135 14장-약속約束 (11) 19.11.02 57 4 27쪽
134 14장-약속約束 (10) 19.11.01 68 4 26쪽
133 14장-약속約束 (9) 19.10.31 65 3 26쪽
132 14장-약속約束 (8) 19.10.30 62 3 31쪽
131 14장-약속約束 (7) 19.10.29 59 3 27쪽
130 14장-약속約束 (6) 19.10.28 59 2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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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14장-약속約束 (4) 19.10.26 72 4 31쪽
127 14장-약속約束 (3) 19.10.25 62 3 30쪽
126 14장-약속約束 (2) 19.10.24 55 3 26쪽
125 14장-약속約束 (1) 19.10.23 65 3 27쪽
» 13장-인도引導 (15) 19.10.22 73 3 36쪽
123 13장-인도引導 (14) 19.10.21 61 3 26쪽
122 13장-인도引導 (13) 19.10.20 59 3 24쪽
121 13장-인도引導 (12) 19.10.19 54 3 26쪽
120 13장-인도引導 (11) 19.10.18 59 4 23쪽
119 13장-인도引導 (10) 19.10.17 64 3 33쪽
118 13장-인도引導 (9) 19.10.16 62 3 32쪽
117 13장-인도引導 (8) 19.10.15 62 3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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