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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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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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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5
추천수 :
664
글자수 :
2,473,044

작성
19.11.1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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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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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24쪽

15장-귀향歸鄕 (3)

DUMMY

어디 더 말해보라는 듯한 묘한 비웃음.

푸르른 심연 사이, 순간적으로 스친 금색의 섬광.

그리고,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되는 금기를 범하고 말았다는 아찔한 감각.

순간 티엘은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가 바스라질 정도로 꽉 악문 턱도,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말아쥔 주먹도, 금방이라도 부서질 정도로 얼어붙은 주제에 미친듯이 떨고 있었다.

입을 열 수는 없다.

몸이 굳어서가 아니다.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그 이름을 꺼내면 죽는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을 듯한 기분에, 티엘은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비웠다.

리이나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통제하려는 티엘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에 호의 따위는 없었다.

차를 건네던 그 상냥한 미소는 떠올릴 수도 없는, 한없이 무정하게 얼굴을 가리는 싸늘한 거짓 미소였다.

마치, 발버둥칠테면 얼마든지 발버둥 쳐 보라는 듯한 오싹한 얼굴이었다.

'안돼······!'

티엘은 의식이 아득히 멀어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여기서 꺾이면 더더욱 위험하리라는 직감이 애타게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아 시선을 돌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티엘이 힘겹게 시선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리이나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한껏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칼라가스의 마력은, 티엘의 의지에 대답하지 않았다.

칼라가스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계약한 생령들 전원이, 티엘의 부름에는 대답하면서도 마력만은 빌려주지 않았다.

아니, 빌려줄 수 없었다.

티엘은 얼마 남아있지도 않던 마력을 전부 긁어모아 온 몸으로 돌렸다.

하지만 칼라가스의 마력을 온 몸에 두르고서도 감당하기 버거울 위압감은, 티엘의 마력 정도로는 조금이나마 희석시키는 것 조차 힘들었다.

숲을 삼키는 화마(火魔)를, 겨우 종이 한 장으로 막으려 드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순식간에 마력은 고갈되고, 남은 것은 생령과 동화해가는 몸뚱이 뿐.

혼이 부서지는 것이 빠를까. 아니면 몸이 무너지는 것이 빠를까.

신음조차 흘릴 수 없었다.

더이상 눈을 돌릴 여유조차도 사라져버린 티엘은, 그 한없이 무거운 시선을 그저 자신이 끝장날 때 까지 견딜 수밖에 없었다.

"후후훗. 장난은 그만 두지요. 어차피 반쯤은 알아채달라는 거나 다름 없었으니까요."

순간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리이나는 섬뜩한 웃음소리를 뿌리며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하지만, 그래도 도망치거나 의식을 잃지 않은건 칭찬해줘야겠네요. 서리안개. 아니, 설원의 새벽."

따악!

손가락을 튕기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리고 그 직후, 금방이라도 가슴을 터뜨릴 것만 같았던 억제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콜록, 콜록!"

꽉 틀어막혔던 숨통이 트이자 억누를 수 없는 격렬한 기침이 터져나왔다.

이제까지 전력을 다해 버티던 티엘은 저항하던 힘이 사라지자마자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리이나는 그렇게 쓰러져 헐떡이는 티엘에게로 다가왔다.

문득 내밀어진 손이 제멋대로 흐트러지며 어깨 너머로 흘러내린 티엘의 머리칼을 한 줌 쥐었다.

본래의 짙은 검은색을 잃은데다가 거칠고 푸석푸석해진 머리칼은 안쓰러울 정도로 초라했다.

그야말로 타다 남은 잿더미, 혹은 어설프게 무너져가는 폐허.

머리칼을 어루만지던 리이나의 눈에, 뜻밖에도 조금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스며나왔다.

"이 머리칼, 본래는 검은 머리칼이었겠죠. 당신에게 어울리는 색이었을텐데. 안타까운 일이로군요."

티엘을 동정하는 말이라기에는 조금 어긋난 방향이었다.

손가락으로 몇 차례 성긴 빗질을 하던 리이나는 손 안의 머리칼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살짝 쥐고 손 사이로 미끄러뜨렸다.

"아······!"

순간 티엘은 무심결에 소리를 내고 말았다.

가느다란 손길이 스쳐지나간 머리칼은 놀랍게도 흑요석처럼 새카만 빛을 되찾은 상태였다.

마치 갑옷 위에 쌓인 먼지를 닦아낸 것 처럼.

게다가 단순히 색만 돌아온 것도 아니었다.

며칠간의 무리한 행군으로 메말랐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향유라도 바른 듯 매끄러운 윤기를 되찾으며 사락사락 부드럽게 물결치고 있었다.

겨우 몇 번의 빗질만으로, 어느새 티엘의 머리칼만은 침식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반짝이는 검은 폭포로 되돌아와 있었다.

"많이도 상했군요. 너덜너덜해진 몸에 조각난 혼. 이 지경이 되도록 물러서지 않는 이유가 뭔지······."

티엘은 마른 침을 삼키며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리이나는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다가와 있었다.

눈을 갸름하게 뜬 리이나는 티엘의 머리칼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 천천히 끌어올린 손가락을 티엘의 턱선에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목의 선을 따라 어깨까지 손끝으로 문지르듯 매끄럽게 훑어내렸다.

분명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지만, 어째서인지 뱀이 기어가는 듯한 차갑고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수치심과 공포가 탁하게 뒤섞여 가슴을 눌렀다.

당장이라도 리이나를 밀쳐내고 거리를 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손을 떨쳐내는 순간 곧바로 살해당한다는 예감이 그녀의 손발을 묶어버렸다.

수도복으로 몸을 감싼 주제에, 마치 유혹하는 악마같은 미소를 짓고있는 리이나는 그 동안에도 여전히 티엘의 몸을 핥듯 손을 움직였다.

허리를 넘어 무릎까지 이르른 손이 살짝 손톱을 세워 한 부분을 꾹 눌렀다.

"크읏!"

순간적으로 무딘 칼날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출혈도 없고, 아픔 자체도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것은 피부가 아닌 좀더 깊숙한 곳에서부터의 통증이었다.

마치 잔뜩 금이 가 있던 뼈를 작은 망치로 때려 완전히 부러뜨린듯한 통증이다.

그러나 손끝을 세운 리이나는 다시 손을 돌려, 이번에는 타고 내려온 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번에도 군데군데 멈춰서서 조금 전처럼 날카롭게 찌르는 행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조금 전 무릎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전신 곳곳에서 살을 헤집고 뼈를 들어내는 듯한 통증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근육은 끊어지고, 뼈에는 자잘한 균열이 가득하며, 혈관의 일부분은 이미 말라 비틀어지기 직전. 이런 상태로 잘도 걸어다니는군요. 아. 충고하는데, 고통을 이기겠다고 입술이라도 깨물고 버티면 후회할거에요. 제약은 다시 풀어줬으니 환각령이라도 부르는게 좋을걸요. 선택은 당신의 몫이지만요."

그 야릇한 움직임이 단지 치료를 위한 것이었다는 말을 믿어도 될까.

귀를 간지럽히는, 성직자에겐 걸맞지 않는 끈적한 시선과 목소리가 마치 달콤한 미약처럼 끝없이 티엘의 신경을 건드렸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티엘은 옷자락을 입에 물고 수치심과 고통, 그리고 신음소리를 참았다.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쿡쿡 짧은 웃음소리가 뇌리를 파고들었다.

"쿡쿡······. 분에 넘치는 힘을 그 몸에 담은 대가 치고는 가볍지 않나요? 감사하는게 좋아요."

리이나가 싸늘하게 웃은 순간, 갑자기 시야가 시뻘겋게 물들며 무언가가 주르륵 뺨으로 흘러내렸다.

"으윽, 으크흐으으윽!"

그리고, 두 눈이 타버린 듯한 통증이 뒤이어 찾아왔다.

결국 비명을 억누르지 못한 티엘은 두 눈을 감싸며 몸부림을 쳤지만, 리이나는 그저 비릿하게 웃으며 티엘의 뺨을 타고 흐른 핏방울을 손끝으로 받았다.

마치 눈물을 닦아주듯, 핏자국을 거슬러오른 손가락은 눈가를 한 번 어루만진 리이나가 겨우 티엘의 몸에서 떨어졌다.

"설령 당신이 그 파멸을 받아들였다고 해도, 저는 그걸 용서할 수 없으니까요. 이 정도 아픔은, 정말로 가벼운 벌이랍니다."

손에 묻은 핏방울을 핥은 리이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이렇게 가만히만 있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멋대로 움직이며 자신을 망쳐버리는 모습을 보고있자면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지요. 당신도 알고있겠죠? 애써 만들어둔 작품이 누군가의 손으로 망가져버릴 때의 분노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새로 만들고 싶다는 갈망을. 그러니 놀라워하세요. 이렇게나 사랑스러우며 증오하는 이 땅에 내려올 만큼,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에."

조용한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에 다시 몸이 떨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리이나는 그 이상의 분노를 터뜨리지는 않았다.

이제까지의 일은 모두 악몽이었다는 것처럼, 다시 상냥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돌아온 그녀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자아, 어떤가요. 그 몸, 조금은 편안해졌을테죠?"

티엘은 무심결에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더이상 아픈 곳은 없었다.

아니, 원래부터 고통을 느끼고 있던 것은 아니었으니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지금 티엘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푹 자고 일어난 듯한 상쾌한 기분이 든다는 사실이었다.

핏덩이에 가까울 정도로 피를 쏟아냈던 눈도 무리없이 앞을 볼 수 있었다.

결계를 치고 별의 서를 채워넣느라 바닥났던 마력도 완전히 회복되어있었고, 따라서 마력고갈과 수면부족으로 조금씩 몰려오던 졸음기마저 깨끗하게 사라졌다.

시험삼아 살짝 마력을 끌어올렸을 때의 반응도 기대 이상이다.

가볍게 약간만 일으킨 마력이 마른 모래에 물을 떨어뜨린 것처럼 빠르게 전신을 휘감았다.

마력을 모은 손끝을 살짝 튕기자 제법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응집된 마탄이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날아간 마탄은 리이나가 쳐둔 결계까지 날아가, 생각보다 제법 큰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마력의 응집속도, 위력, 모두 몸 상태가 최고조일 때와 비슷했다.

"있어야 할 것은 있어야 할 모습으로."

리이나는 조금 전 마탄이 부딪힌 방향을 보며 미간을 조금 좁혔다.

"정말이지 가련한 존재들입니다. 더 높은 완성을 추구해도 모자를 당신들은, 어째서인지 무언가를 파괴하고 깎아내리는 것에 더욱 관심을 두지요. 그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얼마 전, 당신이 했던 선택이었답니다."

"······제가 한 선택이라면······."

"당신의 그, 음유시인에 대한 이야기랍니다."

인간의 모습을 한 뱀이, 다시금 소름끼치는 미소를 그렸다.

"당신이라는 사람을 마지막까지 지지해줄 최후의 쐐기이자 마지막 안식처. 그 사실은 당신도 알고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런 인연 마저도 잘라내고, 스스로를 불사우며 당신이 태어난 땅, 당신을 죽이려 한 땅으로 가고 있지요."

리이나는 조금 전 티엘의 피를 받았던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눈을 갸름하게 떴다.

마치, 그런 행동은 이해할 수도, 이해해서도 안된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자멸이란 본래 당신들조차도 두려워 마지 않는 것. 그러나 구태여 스스로를 버린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무언가를 쥐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스스로의 안식을 버렸고, 남은 것들마저 내려놓기 위한 여정을 이어가고 있지요. 그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잘못된건가요?"

"자기애가 없는 희생이라는건 단순한 위선, 아니, 그보다 못하겠네요. 자기에게 필요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줘버리는 것이니, 어찌보면 쓰레기를 버리는 것과 다름없을지도. 역겨운 일이지요. 누구 멋대로 그 자신을 버리는건지, 정말로 오만하고 역겨운 일이야."

차갑게 끊겨버리는 말꼬리가 낯설지 않았다.

싸늘하게 식은 눈은, 어느새 적의에 가까운 빛을 품고 티엘을 향했다.

다시금 몸이 떨렸다.

혼이, 근원된 존재에 거스르는 것을 어리석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티엘은 이번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물러난다면 그녀의 말을 더이상 부정할 수 없기에.

"그렇다면 역으로, 스스로를 지키는 대신 썩어들어가는 것과, 스스로를 버리고 자신을 되찾는 것.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옳다고 말하실건가요?"

"어느 쪽이든 스스로를 죽이고, 또 스스로를 살리는 길이군요. 어리석은. 결국 그건 무의미한 제자리걸음일 뿐. 아아, 그렇군요. 그 질문의 답이, 지금의 이 자멸로 이르는 순례행인가요."

리이나의 손가락이 티엘의 심장을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심장이 아닌, 그 보다 조금 위다.

각인이 위치한 자리였다.

"제가 조금 전 손을 본 것은 당신의 육체 뿐, 이미 이루어진 침식은 그대로입니다. 유예를 되감은 것도 아니며, 따라서 육체의 붕괴도 막을 수 없지요. 빙룡의 마력을 쓰기 시작한다면 순식간에 그 몸은 다시 무너져갈거에요. 당연히, 침식 역시도 점점 빨라지죠. 스스로의 선택에 긍지를 가지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곧 그 긍지를 말하던 마음조차 바람결에 사라질거에요. 그렇게 된다면 당신에게 무엇이 남나요? 당신의 혼조차, 시원의 용이라는 거대한 존재에 먹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질텐데. 그렇더라도 나아갈 생각인가요?"

"혹여 사라지더라도, 내가 있었다는 사실만은 남을거에요."

조용히 움켜쥔 주먹이 가슴에 닿았다.

"멈춰선다면, 돌아선다면, 조금쯤 더 오래 세상을 볼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인형처럼 기다리기만 하진 않을거에요. 설령 눈앞에 파멸만이 보이더라도 내 의지로 선택한 길이라면, 기쁘게 맞아들일거에요. 후회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더욱 후회스러울테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고 사라진다고, 리이나는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 도망쳐버리는 것이야말로, 티엘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죽음일 것이다.

그저,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지키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그저, 함께 있어줘서 기쁘다고 느껴졌다. 그랬기에, 더이상 잃고싶지 않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이 마음이야말로 닳아가는 기억 속에 자리잡은 이스티엘의 근원.

절대로 버릴 수 없는 마지막 표지였다.

티엘은 심호흡을 한 뒤, 마지막으로 어금니를 깨물며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도망치고 싶어질 자신에게, 다시 한 번 쐐기를 박듯이.

"살아갈 이유조차 잃어버린 인형이 되는 대신, '이스티엘 아르야 카르티치스'로서 최후를 맞이할 거에요."

이제는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는 누군가가, 언젠가 말했다.

너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라고.

들러붙는 과거를 떨쳐냈다고 생각해도, 결국 티엘이라는 화살을 쏘아올린 시위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티엘은 그 사람이 바랐던 대로, 그리고 그녀 스스로가 바라는 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그것이야말로 이스티엘의 길이라고.

깊어가는 밤에 삼켜질지언정, 돌아서진 않겠다고.

"어리석군요."

리이나는 한 점의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는 눈으로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이내 그녀는 '그렇게 나왔느냐'는 듯한 얼굴로 옅게 웃음을 띄웠다.

"하지만······, 그래요. 조금쯤은, 인정해줄까요."

소리없이 몸을 일으킨 리이나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나무로 된 창을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어슴푸레한 빛이 방 안으로 조금 스며들었다.

달빛을 온 몸으로 받으려는 듯 창턱에 몸을 기댄 리이나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에 걸린 별자리는 신어궁, 바다를 가르는 해룡의 모습을 본뜬 성좌였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빙룡 칼라가스에 대응하는 성좌이기도 했다.

"876년 전 북부 빙원을 개척해낸 어느 왕. 405년 전 대륙을 지배하던 패자를 상대로 망설임 없이 반기를 들었던 일곱 명의 기사들. 어느 시대에나 자신이 속한 세계의 중심이 되는 사람들이 있지요. 느끼고 있나요? 이 시대의 중심점은 바로 당신들 두 사람이라는 것을."

빙원의 왕과 일곱 기사는 익티아누스와 시엘리아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들과 나란히 칭해진 두 사람은, 분명 르비아와 티엘, 두 사람이었다.

"성좌를 타고났다고 한들, 시원의 용이 깨어나는 일은 드뭅니다. 그러나 이 시대, 두 시원의 용이 깨어나 서로를 마주보고 있지요. 시간의 흐름을 지켜보기만 하던 세 자매가 인도자가 되고, 나아갈 길을 이끌 검은 사제들이 여정을 멈출 것을 경고하는 뒤틀린 시간. 알고 있겠지요. 느끼고 있겠지요. 바로 얼마 후면, 하늘의 성좌 중 하나가 다시 잠들거라는 것을."

밤하늘의 해룡을 가리키던 성직자의 손가락이 큰 호를 그리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이번에 그 손이 멈춰선 곳은 검은 까마귀 자리였다.

흑익궁, 즉 시룡 그란드리아에 대응하는 성좌.

"당신의 적은 강해요. 당신이 남은 생명을 다 태워버려도 닿지 못할만큼."

"상관없어요. 이번에는 어떻게든, 반드시 지켜낼거니까."

티엘은 이제껏 쥐고있던 주먹을 펼쳤다.

그 안에서 한 쌍의 귀걸이가 수줍게 빛을 뿌렸다.

"지켜내서······, 반드시 돌아가, 그에게 사과하고, 안아줄거에요."

"······주어진 틀을 벗어나 답을 찾는 자, 과거에서 벗어나 앞을 바라보는 자. 어느쪽이든, 당신들은 그야말로 '그'의 아이들이로군요."

몸을 돌려 창틀에 걸터앉은 리이나는 이제 만족했다는 듯 이전과는 다른 부드러운 미소로 티엘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역광으로 알아보기 어려워야 할 여사제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부드러운 빛에 휘감긴 듯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한 순간의 반짝임에 불과하더라도, 그 길을 걸어가는 모습은 분명 또 하나의 영원. 흔들림없이 나아가는 그 모습을 구도로서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니 한 가지, 선물을 드리지요."

바람이 불어와 사제의 옷깃을 흔들었다.

머리를 묶었던 끈으로 손을 가져간 리이나는 손쉽게 매듭을 풀어버렸다.

가지런히 묶여있던 머리칼이 바람을 타고 흩날리며 달빛을 머금었다.

묘하게 아름다우면서도 눈부신 그 광경은, 얼핏 보기에 천사의 후광처럼 보이기도 했다.

"당신의 소원은, 무엇이죠?"

덧없는 인간에게 자비를 내리는 듯한 오만하면서도 고귀한 말.

이제껏 티엘을 옭아매오던 직감이, 이번에는 다른 것을 고해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것을 말하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질거라는 것을.

그토록 티엘을 두렵게 만들던 리이나는, 처음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더없이 따사롭고 부드러운 얼굴로 티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티엘은 조용히 그 부름에 답하기로 했다.

"제 동료들, 그리고 제가 떠나온 사람들이······, 무사하길 바라요."

자신의 삶에, 지금 이상의 거대한 기적은 감히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주위 사람들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소박하면서도 간절한 바람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티엘의 소원을 들은 리이나는 뜻밖에도 조금 놀라워하고 있었다.

"의외로군요요. 보통은 과거로 돌려달라거나, 누군가를 살려달라는 소원을 빌텐데."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사제의 입술이 다시금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티엘 역시, 사제를 따라 희미한 곡선을 그렸다.

"그런 소원을 빈다면, 들어주실건가요?"

"어리석다는 말은 취소해야겠군요. 당신의 생각대로, 그 것만은 이루어줄 수 없는 바람입니다."

그래, 알고 있다.

일곱 개의 신언으로도, 열 두 시원의 용의 숨결조차도, 완전한 사자의 부활, 시간의 역행은 불가능하다.

이 세계에 허락되지 않은 기적은, 애초에 기대조차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무욕한 사람이로군요. 하다못해, 자신을 낫게 해달라는 소원도 있었을텐데요."

"말씀하신대로 분에 넘치는 힘을 함부로 사용한 대가라면, 그 값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겠죠."

리이나의 몸을 휘감고있던 빛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저 평범한 사람처럼, 달을 배경삼아 검은 그림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는 몸을 옆으로 살짝 돌렸다.

달빛에 젖은 옆 얼굴에는, 뜻밖에도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당신같은 사람이라면 싫지는 않군요. 정 그렇다면 나아가세요. 그 앞날에 가호를 내려줄 수는 없겠지만, 축복이라면 건네드릴테니."

부드러운 미풍이 티엘을 에워쌌다.

스스로의 피로 씻어낸 눈은, 이전처럼 맑은 자수정의 빛을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불어오는 바람결이, 조금씩 지쳐버린 의식을 조용히 흩어놓은 것일까.

맑았던 두 눈에, 어느새 다시 꿈의 장막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좋은 꿈 꾸세요. 오늘 밤, 더이상 당신을 괴롭힐 것은 없답니다."

사제는 어느새 다가와 무너지는 티엘의 몸을 받쳐안았다.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티엘은 꿈조차 꾸지 않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어리석고도 안타까운 존재들이지요, 저들은."

이른 아침, 막 떠나가는 마차를 내려다보며 뜻모를 미소를 짓던 리이나는 마주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가슴을 펴며 눈을 감았다.

"어디까지고 발버둥치고, 괴로워하며, 그러면서도 각자 뜻하는 바를 향해 걸어가는 가련한 이들. 낙원의 땅을 벗어나 내일을 찾길 바라는 이들이란, 그 얼마나 어리석고 슬픈 존재들인지. 마음 가는대로 따라주지 않는 이들을 보며 애끓는 가슴을 삭이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무언가의 미련을 털어내듯 바람을 한가득 안던 리이나는, 서서히 잦아드는 바람에 다시 눈을 떴다.

바람은 아쉬워하듯 그녀의 곁을 맴돌았지만, 동시에 그녀의 귀에 떠나야 할 시간이라며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리이나는 머리를 묶었던 끈을 찾아 길게 풀어내렸던 머리를 다시 감아 묶고, 흐트러진 사제복을 다듬었다.

그러나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던 리이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알고 있답니다. 떠나야 한다는 것은."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리이나가 거울을 살짝 흘겨보자 청동을 매끄럽게 연마해 만든 거울이 제 자리에서 휙 돌아섰다.

하지만 더이상 리이나의 모습을 비출 수 없게 된 거울은, 오히려 그 뒷면에 새겨져있는 부조로 리이나의 눈길을 끌었다.

광휘를 두른 아름다운 여신과 여섯 장의 날개를 펼친 검은 용이 마주하고 있는 장면.

창세신화 아이넬리아누스의 한 장면이었다.

리이나는 거울을 끌어당겨, 애틋한 손길로 검은 용의 조각을 쓰다듬었다.

"당신이라면 안주하지 않고 끝없이 변화하는 그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라 말했을테죠. 동의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의지는 이 땅에 뿌리내려 있네요. 방황하던 저 혼이, 당신에게로 되돌아가고 있으니."

전에없이 쓸쓸한 목소리였다.

오래 전 잃어버린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외롭고 쓸쓸한 얼굴이었다.

"당신을 다시 눈 뜨도록 불러도 좋을지, 아니면 조금 더 지켜봐야 하는지, 아무리 저라고 해도 알 수는 없군요. 이피안, 그 괴이한 자들이라면 혹여 내다 보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새겨진 용은 대답하지 않는다.

아니, 이미 잠들어버린 용은, 조각이 아니어도 대답해주지 않았으리라.

"당신 역시, 좋은 꿈 꾸기를.'

쓸쓸한 목소리로 내려지는 축복.

순간, 사제의 모습 위로 긴 은빛의 머리칼과 타오르는 금안을 지닌 여신의 잔영이 희미하게 겹쳐졌다.

그러나 그 것은 말 그대로 한 순간의 일일 뿐이었다.

찰나의 시간이 지난 후, 홀로 남은 리이나의 모습이 다시 한 번 바뀌기 시작했다.

옅은 잿빛을 띠던 머리칼은 끝에서부터 짙은 황갈색으로 물들고, 물의 색을 머금었던 눈동자는 삽시간에 검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눈은 무언가를 붙잡는 대신, 곧바로 눈꺼풀 뒤로 몸을 숨기고 말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감상에 젖어 쓸쓸하게 중얼거렸던 것조차 잊은 듯, 주인도 없는 침대 위로 힘없이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이내, 길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마도 사제의 머릿속에는, 지난 며칠간의 여정따위는 남아있지 않으리라.

본래 이 땅으로 올 예정 따위는 없었다는 사실도.

검은 머리의 소녀를 만났다는 사실도.

그리고,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대신해 움직였다는 사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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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시, 얼음의 용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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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15장-귀향歸鄕 (4) 19.11.13 55 4 28쪽
» 15장-귀향歸鄕 (3) 19.11.12 68 3 24쪽
144 15장-귀향歸鄕 (2) 19.11.11 66 4 25쪽
143 15장-귀향歸鄕 (1) 19.11.10 67 6 24쪽
142 14장-약속約束 (18) 19.11.09 71 4 35쪽
141 14장-약속約束 (17) 19.11.08 66 4 29쪽
140 14장-약속約束 (16) 19.11.07 56 4 24쪽
139 14장-약속約束 (15) 19.11.06 60 4 35쪽
138 14장-약속約束 (14) 19.11.05 55 4 26쪽
137 14장-약속約束 (13) 19.11.04 54 3 27쪽
136 14장-약속約束 (12) 19.11.03 48 3 25쪽
135 14장-약속約束 (11) 19.11.02 57 4 27쪽
134 14장-약속約束 (10) 19.11.01 68 4 26쪽
133 14장-약속約束 (9) 19.10.31 62 3 26쪽
132 14장-약속約束 (8) 19.10.30 62 3 31쪽
131 14장-약속約束 (7) 19.10.29 59 3 27쪽
130 14장-약속約束 (6) 19.10.28 58 2 27쪽
129 14장-약속約束 (5) 19.10.27 64 4 28쪽
128 14장-약속約束 (4) 19.10.26 70 4 31쪽
127 14장-약속約束 (3) 19.10.25 61 3 30쪽
126 14장-약속約束 (2) 19.10.24 54 3 26쪽
125 14장-약속約束 (1) 19.10.23 64 3 27쪽
124 13장-인도引導 (15) 19.10.22 72 3 36쪽
123 13장-인도引導 (14) 19.10.21 61 3 26쪽
122 13장-인도引導 (13) 19.10.20 59 3 24쪽
121 13장-인도引導 (12) 19.10.19 54 3 26쪽
120 13장-인도引導 (11) 19.10.18 59 4 23쪽
119 13장-인도引導 (10) 19.10.17 62 3 33쪽
118 13장-인도引導 (9) 19.10.16 62 3 32쪽
117 13장-인도引導 (8) 19.10.15 62 3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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