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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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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
추천수 :
664
글자수 :
2,473,044

작성
19.11.1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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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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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15장-귀향歸鄕 (1)

DUMMY

달그락, 달그락······.

조금은 경쾌한 소리가 가볍게 흔들리는 하늘과 맞물리며 규칙적으로 귓가를 간지럽혔다.

마치 평화를 연주하는 악기 같다.

그리 섬세한 악기는 아니지만,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는 묘하게 가슴을 누그러뜨리는 힘이 있었다.

운좋게 짐마차를 얻어탈 수 있었던 티엘은 따스한 햇살에 푹 익어 따끈따끈한 짚단에 몸을 기댔다.

이렇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간만에 맛보는 이 고독감을 달래기가 힘들다.

얼마만에 이렇게 혼자 떨어져나온 걸까.

티엘은 무심결에 손가락을 짚어가며 기사단에 입단한 날을 세 보았다.

이젠, 그마저도 제법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군데군데 구멍난 기억을 더듬다보면 놀랍게도 겨우 일 년도 되지 않은 일이다.

검은 제복을 걸치고 활을 들어올린 것도, 잊어버린 것까지 감안해봐야 많아도 스무 번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기사단에 들어가 전, 오갈 데 없이 홀로 뒷골목을 전전하며 살아왔던 시간은 얼마였더라······.

'그건 헤아릴 것도 없을까?'

혼자 상처를 웅크린 채 숨어지내던 시절은, 하루하루가 그리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 타성에 젖은 나날이다.

이제는 기억나는 것보다 기억나지 않는 것이 더 많다고는 해도, 띄엄띄엄 이어지는 기억조차 하나같이 비슷한 장면 뿐.

차라리 기억이 아닌, 날짜로 헤아리는 것이 나을까.

한참이나 머릿속을 이리저리 맞춰본 끝에 겨우 손에 꼽은 시간은, 약 삼 년 정도다.

신기한 일이다.

누군가와 함께 지냈던 시간은 혼자 지새우던 시간에 비해 삼 분의 일 정도밖에 안된다.

그런데도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이렇게 무겁게 느끼고 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맞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짧을지언정, 그 일 년이라는 시간동안 겪은 것들은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리라.

홀로 조용히 썩어들어가는 대신, 동료들을 만나고 나셀을 만나, 많은 일들을 겪고 봐 오며 차곡차곡 쌓였을테니까.

분명 그 시간은, 홀로 지낸 삼 년 보다도 더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막연히 기억을 더듬던 티엘은 문득 하늘로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마음 속으로 떠오르는 얼굴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씩 손가락을 접었다.

'처음엔 리아랑 올로비스······였던가? 그 다음엔······, 인형을 쓰는······. 이름이······.'

기사단과 처음 엮였던 순간부터 한 명씩 알게 되었던 동료들.

단장인 메이트리아크를 제하면, 평기사의 수는 고작해야 티엘 자신을 포함해 스물 한 명 뿐인 작디 작은 기사단이다.

떠올리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어야 했다.

하지만 더이상 이름을 떠올릴 수 없게 되었을 때, 티엘의 두 손에는 아직 접지 못한 손가락이 남아있었다.

단 스무 명 뿐인데도,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반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억은 점멸하듯 빠르게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길 반복했고, 그나마도 침식의 진행속도는 하루하루 빨라져가기만 한다.

떠오르지 않는 이름과 얼굴들을 생각해내려 애쓰던 티엘은 얼마 후 손등으로 이마를 짚으며 몸을 뒤로 기울여버렸다.

씁쓸한 체념이 혀끝을 맴돌았다.

'왠지······맥주가 그립네.'

공교롭게도 지금 티엘이 기댄 짚단은 밀이 아닌 보리 짚단이었다.

아니, 그래서 맥주를 떠올린 것일까.

술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맥주만은 조금 다르다.

항구도시 유엘에서의 첫 임무가 끝난 직후 일어났던 작은 소동 때문이었다.

'무슨 일로 혼났더라······.'

기사단으로 복귀했던 티엘은 진심으로 화를 내는 메이트리아크에게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혼이 났었다.

그러나 엉망진창이 되어 단장실을 나온 직후,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은 첫 임무를 무사히 해낸 것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조촐한 파티를 열어주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티엘은 문득 슬며시 웃었다.

말이 파티였지, 사실은 그저 온갖 술을 잔뜩 싸들고 와 떠들썩하게 돌려마신 것 뿐이다.

술에 약한 티엘은 그 날 처음으로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의 숙취'를 경험했다.

**란이 한 잔, 리아가 한 잔, *델이 한 잔, 아메**가 또 한 잔······.

아직 그리 친해졌다고 할 수 없었던 동료들도 이 기회에 벽을 허물자는 듯 거침없이 술을 권했고, 티엘은 순진하게도 주는 잔을 차마 마다하지 못해 연거푸 마시고 말았다.

그나마 올로비스와 ***가 뒤늦게 동료들을 말리긴 했지만, 이미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취해버린 티엘은 귀엽게 주사를 부리다 리아의 뺨에 입까지 맞추고 말았다.

결국 어느새 잠들어버린 다음 날 아침에야 고양이처럼 잔뜩 웅크린 자세로 눈을 뜬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릴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했다.

그런 부끄러운 상황을, 다른 사람도 아닌 리아 본인이 자지러지게 웃으며 들려주었을 때는 그 얼마나 창피했던지.

그 후로 티엘은 가끔 누군가 술자리를 마련하려 할 때면 재빨리 빠져나오려 온갖 잔머리를 굴렸다.

이에 질세라 동료들은 어떻게든 티엘을 끌어들이려 애쓰기 시작했고, 과도한 경쟁의 결과로 단장인 메이트리아크가 직접 주연을 연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솔직히 지긋지긋할 정도의 악연이다.

술 특유의 냄새에는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었고, 그저 분위기에 휘말려 눈을 질끈 감고 잔을 비웠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때의 맥주가 그리웠다.

흠집 없이 떠올릴 수 없는 얼마 안되는 추억이기 때문일까.

다시 그렇게 떠들썩하게 어울리며, 지금이라면 티엘도 더없이 즐겁게 그 연회를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돌아간다면······.'

무사히 돌아간다면 무엇인들 할 수 없을까.

동료들과 추억을 쌓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그리고······.

물 흐르덧 흘러가던 사고가, 그 곳에서 갈 길을 잃고 멈춰서고 만다.

'이름······, 적어둘 걸 그랬을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은 또다시 그 반.

티엘은 힘없이 떨어뜨린 손을 꾹 말아쥐었다.

단순히 이름을 잊어버린 거라면 다시 외우면 된다.

하지만 잃어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잃어버린 추억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아니, 그것을 안타까워 할 시간조차 길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생각하자면, 더없이 슬펐다.

짚단 위로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칼은 이미 반은 희게 물든 상태였다.

눈빛은 점점 물이 빠지듯, 붉은 기가 없는 선명한 푸른색으로 물들어간다.

때때로 피부는 도자기처럼 새하얗게 질려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로워보이기 까지 했다.

거울을 보지 않은 지도 얼마나 되었을까.

점점 자신의 모습을 잃어가는 또다른 자신의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볼 자신은,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은 남아있어.'

문득 미끄러져 내려온 손길이 가슴을 덮었다.

아직 그 아래의 고동은 멈추지 않았다.

이름도,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동료들이지만, 그래도 그들을 걱정하는 마음은 아직 그 곳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나셀······, 티엘이 직접 끊어버린 인연이라지만, 그를 걱정하는 마음 또한, 아직까지 남아있다.

여기 '이스티엘'이 있다는 자기증명은, 그 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사히 돌아갔을까.'

무심결에 나셀에 대해 떠올린 순간, 티엘의 얼굴이 조금 흐려졌다.

더이상 르비아가 나셀에게 손을 대는 일은 바라지 않는다.

나셀에게서 자신의 기억을 지우고, 피앙투스로 돌아가라는 암시를 새겨넣은 것은 더이상 그가 자신을 움직일 미끼가 되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르비아의 초대를 직접 받아들인 이상, 그가 나셀을 건드릴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건드리지 못할 이유를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때문에 티엘은 최대한 자신을 숨기려던 이전과는 반대로, 자신의 모습을 거리낌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은 여기 있으니, 더이상 죄 없는 자들을 끌어들이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인 셈이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렸다고 해서, 티엘 자신의 마음까지 뒤바뀐 것은 아니다.

그리운 마음, 그리고 안타까운 죄책감.

감히 나셀이 무사하기를 바랄 수도 없다고 자책하면서도, 티엘은 그가 팔람의 거리로 돌아가 평화롭게 노래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워, 워, 워! 이놈아, 갑자기 왜 이러냐! 워워!"

그 때 갑자기 마차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길을 이탈하거나 거친 산길로 접어든 것이 아니었다.

마차를 끌던 말들이 평정심을 잃고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짐마차를 몰던 마부가 큰 목소리로 말들을 진정시키려 시도하고 있었지만, 무엇인가에 겁 먹은 말들은 거칠게 투레질을 하며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티엘은 조금씩 흐트러지는 건초더미 사이에서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마차의 흔들림이 심해 중심을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짧게 혀를 찬 티엘은 마부석의 등받이를 부여쥐며 건초를 묶어둔 밧줄에 발을 걸었다.

거칠게 흔들리던 몸이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일어섰다.

늑대나 들개 떼라도 몰려든 것일까.

티엘은 살짝 발돋움을 하며 주위를 빠르게 살폈다.

그러나 잔뜩 겁을 집어먹은 말이 멈춰설 지경이 되었는데도 막상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짖는 소리나 모습을 숨길만한 수풀도 없다.

그러나 오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야릇한 위화감이 뒷목을 건드리고 있었다.

'조용히 넘어가면 좋았을텐데······.'

티엘은 조용히 한숨을 삼키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물들며 짐승처럼 동공이 세로로 찢어졌다.

칼라가스를 직접 강령시키지는 않았지만, 점차 칼라가스와 동화해가는 몸은 어느 정도 의식하는 것만으로 이미 생령의 일부를 재현해내고 있었다.

물론 몸에 가해지는 부담은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런 상태라도, 소소한 장점은 있었다.

칼라가스의 눈과 동화된 시야는 희미하게나마 마력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찬찬히 주위를 살펴 상황을 읽은 티엘은 탐색령의 마력을 불러들이며 활시위를 당겼다.

"슈니엘."

그리 어렵지 않게 겨냥한 금빛 화살이 텅 비어있던 허공을 꿰뚫었다.

순간 파앙, 하며 바람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동시에 무언가 탄탄한 것이 꿰뚫리는 소리가 들렸다.

"캬아악!"

조금 거친 비명소리가 울리며 아무 것도 없던 들판 위에 옅은 금색으로 물든 반투명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환각계의 마령.

그것도 제법 훌륭하게 기척을 숨길 줄 아는, 어느 정도 지성이 남아있는 마령이다.

티엘은 칼라가스의 마력을 다시 흩어버리며 재차 활을 당겼다.

마령은 한 번 은신을 깨뜨린 덕분인지 더이상 거칠게 날뛰는 마력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투명화를 완전히 풀며 본격적으로 싸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스트라를 막은 팔은 갑옷처럼 검고 단단한 갑피 일부에는 커다란 흠집이 남아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마령 본체는 그리 타격을 입지 않은 듯 했다.

몸을 뒤틀며 머리를 흔들어대는 통에 거대한 엄니 사이로 검붉은 타액이 튀었다.

타액이 튄 잡초가 탁한 푸른빛으로 타들어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저, 저건 마령! 어, 어이쿠!"

"쿠아아아악!"

상처입은 마력이 거칠게 포효하는 순간, 완전히 공황에 빠진 말들이 제멋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마부가 손을 뻗어 다시 고삐를 잡아챘지만, 한 번 통제를 잃어버린 말들은 그의 명령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다.

"속도를 줄이겠소!"

조금 전 뒤쪽에 타고 있던 소녀가 마령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은 마부도 직접 눈으로 보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흔들리는 도중에 제대로 조준을 할 수 있을리가 없다.

고민하던 마부는 제동장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계속 달려요."

그러나 티엘은 격렬하게 달리는 마차 위에서 침착하게 활을 들어올렸다.

가로눕혀 시위를 당긴 활 끝은 놀랍게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난폭한 운전으로 인해 전신이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는데도 활 부분만은 공중에 얼어붙은 것처럼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깨끗한 자세를 취한 티엘은 다시 시위를 백색으로 물들이며 아스트라를 메겼다.

"파드마."

또다시 활이 조용한 포효를 내질렀다.

시위에서 뛰쳐오른 아스트라는 허공에 매끄러운 선을 그리며 단숨에 그림자를 꿰뚫었다.

수호의 속성을 가진 파드마의 마력은 칼라가스의 마력처럼 그 자체로 강력한 공격성을 지니지는 않는다.

하지만 본래 방벽을 치는 데 쓰는 힘을 응용해 물리적인 폭발력으로 구현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게다가 그것이 기사급의 마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멧돼지를 단숨에 쓰러뜨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아스트라에 꿰뚫린 직후 막 수복에 들어가 아물어가던 마령의 상처가 갑자기 폭발했다.

화약이라도 삼킨 듯, 마령의 머리를 이루던 것들이 처절한 단말마를 배경삼아 사방으로 흩날렸다.

"멈추지 말아요! 계속 달려요!"

안도하려는 마부를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마령에게도 머리를 잃는 것은 그리 가벼운 부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치명상이라고도 할 수도 없다.

두부를 완전히 손실한 마령은 그 상태로도 미친듯이 버둥거리며 바위같은 몸을 바로세웠다.

마령의 상처 부위에서는 다시금 마력이 뭉쳐 잃어버린 육혈을 재생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서 빠른 속도로 날아든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이 마령의 몸을 꿰뚫었다.

한 발의 아스트라가 꽂힐 때마다 한 아름은 될 듯한 커다란 구멍이 뻥뻥 뚫리며 찢어질듯한 비명과 함께 마령의 몸이 너덜너덜해졌다.

다행히 그리 강한 마령은 아니다.

티엘에게 속수무책으로 두들겨 맞으면서도, 마력을 쏘아보내거나 억지로 밀고 들어와 공격하는 등 반격하는 것은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몸을 웅크리는 것만으로 몸을 보호하려는 모습이 조금 안쓰러웠지만, 티엘은 입술을 깨물면서도 시위를 당기는 손을 늦추지 않았다.

다섯 번째 화살이 기어이 마령의 가슴을 완전히 날려버렸다.

이미 움직이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파헤쳐졌던 마령의 움직임이 그제서야 비로소 멈춰섰다.

휄카야의 특제 폭약에 비견될만한 공격을 수 차례나 몸으로 받아낸 뒤에야 겨우 숨이 끊어진 마령이 서서히 바람결에 부스러져가기 시작했다.

"돼, 됀거요?"

"네. 끝났어요."

티엘은 활을 거두며 마차 위에서 뛰어내렸다.

이 이상 흔들리면 멀미가 일어날지도 모르거니와, 어차피 단시간 내에는 말들이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들이 많이 흥분했어요. 이러다 다칠지도 모르니까, 잠깐 쉬었다 가는게 어떨까요?"

"고, 고맙소! 어여여여여여! 다 끝났다, 이놈들아! 정신 차렷!"

잔뜩 흥분한 말들은 쉽게 진정하지를 못했다.

사실 그들을 진정시키려는 마부도 아마 아직까지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마부는 각설탕을 꺼내 말들을 달래며 그들의 콧잔등을 두드려주는 등의 노련미를 보여주었다.

죽은 마령에게서 가까스로 남은 심장석을 뽑아온 티엘은 그런 마부의 모습을 지켜보며 조용히 웃었다.

말은 영리한 짐승이다.

달콤한 간식거리와 애무가 더해진다고 하더라도, 친밀하게 교감해온 사람이 아니라면 이 정도로 안정을 되찾기는 어려웠으리라.

"후우······. 이 녀석들도 너무 놀라 날뛰느라 진이 다 빠진 모양이오. 먼저 쉬어가자고 말해줘서 고맙구려."

마부는 연신 말들의 콧잔등을 두드려주며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티엘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괜히 서두르다 여정이 늘어지는 것 보다는, 잠시 쉬어가며 평범하게 달리는 편이 좋다.

어차피, 그녀를 기다리는 자는 언제까지 오라는 말도 없었지 않은가.

다시 마차의 짐칸으로 훌쩍 올라탄 티엘은 문득 가방을 뒤져보았다.

밑바닥에 야스티안 잎이 몇 장 정도 남아있었다.

어디서 손에 넣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기름먹인 종이로 꼼꼼하게 포장해둔 것이라 습기는 그리 많이 먹지 않은 상태였다.

호흡을 안정시키고 혈액 순환을 돕는 효과가 있으니 지친 말들에게 조금이나마 활력을 되찾아줄 수 있으리라.

티엘이 내민 주머니를 받아든 마부는 특유의 알싸한 향을 킁킁 맡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웬 거요?"

"말들에게 먹여두면 도움이 될 거에요."

야스티안은 피앙투스 고유종이다.

제국에서는 이름을 알아도 구할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이니 마부가 신기해 할 만도 했다.

조금 전 티엘이 마법을 쓰는 것을 보고 조금쯤 티엘을 무서워하던 마부가 금새 다시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사람 사이의 간격은, 일시적인 정도라면 조그만 관심거리만으로도 충분히 가까워진다.

마부가 다시금 편안한 기색으로 자신을 대하기 시작하자, 티엘은 지나가는 말처럼 한가롭게 미뤄두었던 질문을 던졌다.

"사실 조금 전엔 깜짝 놀랐어요. 원래 마령이 이 근방까지 나타나는 일이 잦은가요?"

"마령은 무슨. 이 근방은 들짐승도 별로 없는 안전한 곳이었다오."

예상한 대로의 답이었다.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마령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만큼 위험한 일인지 모르는 이는 없다.

애초에 짐마차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다.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진 말들이 하루 종일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을리 없고, 사실상 어느 정도 이상의 규모를 이룬 들개나 늑대 무리를 뿌리치는 것조차 힘들다.

그러니 마령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을 마차 한 대 달려 통과할 만큼 간 큰 사람이 있을리는 없다.

반대로 말하면, 이렇게 짐마차 한 대로 덥썩 들어올 수 있는 구간이라면 강도를 만나는 일은 있을지 몰라도 마령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다는 소리다.

"그나저나 아가씨 덕분에 살았구려. 마법사인 줄은 모르고 있었구만. 나이도 어려보이는데 대단하오?"

"운이 좋았던 것 뿐이에요."

"겸양할 것 없다오, 아가씨. 레가야 국경에 슬슬 가까워지거든. 사제님들이 주신 물병이라도 운 없으면 큰일난다는데. 생각보다 일찍 만났지만, 그래도 아가씨 덕분에 무사하지않소?"

레가야의 국경.

마부의 이야기는 국경 근방에서 마령이 더 자주 나타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범위 내의 이야기다.

생령의 폭주를 억제하는 대령결계라고는 해도, 근본은 마력으로 친 장벽이다.

내부라면 마령화를 억눌러 마령 자체가 드물겠지만, 외부에서 그 마력에 이끌린 마령들이 배회하는 일은 막을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진지한 얼굴로 걱정을 끌어안는 마부와는 달리, 티엘은 슬슬 마령에 대해서는 걱정거리가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이 정도 수준의 마령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처치할 수 있고, 오랫동안 굶주렸거나 너무 어린 시점에 마령이 된 녀석들이라면 마부의 말대로 아이넬라의 사제가 축성한 성수를 뿌려두는 정도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을것이다.

또한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경수비대 내에도 마법사들이 여럿 배치되니,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오히려 마령들이 달라붙기 전에 토벌되리라.

운이 따라준다면 마력을 얼마쯤 더 아낄 수 있을 터였다.

티엘은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기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국경까진 얼마나 남았죠?"

"빠르면 내일 저녁, 늦으면 모레 오전쯤에는 통과할 것 같구려. 부디 그 안에 더 만나는 일은 없으면 좋겠는데 말이오."

근심 가득한 목소리다.

확실히, 용병을 구하거나 하기에는 장소가 너무 어정쩡하다.

이미 마령 출몰 지대에 들어와버렸다면 대부분은 안전한 곳에서 용병을 사서 들어온 사람들일 테니, 거래처를 찾아 헤매는 용병들을 찾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돌아가자니 납품 기한을 어기게 되니, 벌써부터 마령들이 돌아다닌다면 여러모로 곤란한 일일 것이다.

마부의 그런 고민을 눈치챈 티엘은 가볍게 웃으며 자신의 활을 툭툭 쳤다.

"아직 미숙하지만 마령을 쫓아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위험하다고 슬쩍 내빼진 않을게요."

"이거 미안하구려. 이따 저녁이나 한 턱 내는 것 밖엔 할 수 있는게 없지만, 고맙구려."

티엘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다행히도 그 날 더이상의 습격은 없었다.

하기야, 마력천이라도 형성되어 대규모 마령강림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면 마령 자체의 출현율은 그리 높지 않은 것이 정상이다.

어떤 의미로는 마부가 운이 없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던 티엘은 문득 하룻밤 묵을 마을로 들어서며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마을을 둘러싼 제법 튼튼한 목책 사이사이에는 뜻밖에도 상당한 수의 유리병이 안에 박혀있거나, 때로는 끈으로 묶인 채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아마 마령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성수를 구해 벽에 박아넣어둔 듯 했다.

게다가 간단한 가죽갑옷에 횃불과 짧은 창 정도로 무장한 사람들도 제법 많이 보였다.

자경대로 보이는 그들은 예닐곱 명씩 모여 목책 위나 마을 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뭇 진지한 분위기 덕에 아직 약간의 불안함을 품고 있었던 마차 주인의 표정도 이내 풀렸다.

공화국과 비교해 유동하는 마력이 더 많은 레가야쪽이 더 빈번하게 마령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렇다면 목책이 아니라, 조금 무리하더라도 제대로 된 벽을 세우는게 나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뭔가 마령들을 자극하는 것이 이 근처에 나타난 것일까?

하지만 굳이 확인해볼 정도로 궁금한 일은 아니다.

어차피 그저 스쳐 지나가는 곳.

티엘은 살짝 떠오르는 의구심을 다독이며 목책에서 눈을 돌렸다.

끝끝내 한 턱 내겠다는 마부를 만류한 뒤, 티엘은 여인숙에서 가장 작은 방 하나를 빌렸다.

뭔가 배를 채울 것을 대강 챙겨 방에 들어선 티엘은 가장 먼저 방과 창을 잠갔다.

그리고 허리춤의 작은 가방에서 우룬의 사슬로 촉을 만든 펜을 꺼내들었다.

마력을 듬뿍 먹여 벽을 따라 펜을 움직이자 가느다란 마력의 선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티엘이 그리는 선은 하나 뿐이 아니었다.

바깥에서부터 차례로 슈니엘과 애냐, 파드마의 마력으로 그려넣은 선들이 어둠 속으로 서서히 녹아들었다.

슈니엘의 마력으로는 경보(警報), 애냐의 마력으로는 다른 두 생령의 마력을 감추는 은닉, 마지막으로 파드마의 마력으로 방어결계까지.

삼중의 결계가 제대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티엘은 그제서야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기댔다.

몸이 무거웠다.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팔다리나 눈꺼풀이나 어느 하나 말 할것 없이 무거워 곧바로 잠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피곤한 몸을 뿌리치며 재차 몸을 일으킨 티엘은 억지로 별의 서를 펼쳤다.

몰려오는 잠을 쫒기 위해 혀끝을 깨물어가며 힘겹게 눈을 뜬 티엘은 조금 비워진 마법서에 꼼꼼하게 마력과 주문을 흘려넣었다..

로셀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지 오늘로 이레 째.

티엘은 어제까지 여섯 번의 밤을 그렇게 지새웠다.

아니, 마력의 기록이 끝나더라도 티엘의 밤은 끝나지 않는다.

피로한 몸을 쉬게 해주는 대신, 활과 단검을 품에 안은 채 뜬 눈으로 새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모자란 잠은 낮동안 마차에서 선잠으로 보충했다.

물론 피로가 제대로 풀리지도 않고, 점점 정신적으로도 지쳐만 가는 좋지 못한 방법이다.

그러나 동료라고는 한 명도 없이 홀로 도망치듯 빠져나온 후에는, 좀처럼 불안해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곯아 떨어질 듯 졸려오지만, 이대로 눈을 감아봐야 채 일 분도 잠들지 못한 채 악몽을 꾸다 깨어날 터였다.

하지만 한동안 마력을 기록하던 티엘은 어느 순간 신음을 흘리며 급히 고개를 하늘로 들어올렸다.

아찔한 현기증이 눈 앞을 가리는 동시에, 코에서도 검붉은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진 탓이었다.


작가의말

귀향편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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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시, 얼음의 용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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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15장-귀향歸鄕 (4) 19.11.13 57 4 28쪽
145 15장-귀향歸鄕 (3) 19.11.12 68 3 24쪽
144 15장-귀향歸鄕 (2) 19.11.11 66 4 25쪽
» 15장-귀향歸鄕 (1) 19.11.10 68 6 24쪽
142 14장-약속約束 (18) 19.11.09 72 4 35쪽
141 14장-약속約束 (17) 19.11.08 66 4 29쪽
140 14장-약속約束 (16) 19.11.07 56 4 24쪽
139 14장-약속約束 (15) 19.11.06 60 4 35쪽
138 14장-약속約束 (14) 19.11.05 55 4 26쪽
137 14장-약속約束 (13) 19.11.04 54 3 27쪽
136 14장-약속約束 (12) 19.11.03 49 3 25쪽
135 14장-약속約束 (11) 19.11.02 57 4 27쪽
134 14장-약속約束 (10) 19.11.01 68 4 26쪽
133 14장-약속約束 (9) 19.10.31 65 3 26쪽
132 14장-약속約束 (8) 19.10.30 62 3 31쪽
131 14장-약속約束 (7) 19.10.29 59 3 27쪽
130 14장-약속約束 (6) 19.10.28 59 2 27쪽
129 14장-약속約束 (5) 19.10.27 64 4 28쪽
128 14장-약속約束 (4) 19.10.26 72 4 31쪽
127 14장-약속約束 (3) 19.10.25 62 3 30쪽
126 14장-약속約束 (2) 19.10.24 55 3 26쪽
125 14장-약속約束 (1) 19.10.23 65 3 27쪽
124 13장-인도引導 (15) 19.10.22 72 3 36쪽
123 13장-인도引導 (14) 19.10.21 61 3 26쪽
122 13장-인도引導 (13) 19.10.20 59 3 24쪽
121 13장-인도引導 (12) 19.10.19 54 3 26쪽
120 13장-인도引導 (11) 19.10.18 59 4 23쪽
119 13장-인도引導 (10) 19.10.17 64 3 33쪽
118 13장-인도引導 (9) 19.10.16 62 3 32쪽
117 13장-인도引導 (8) 19.10.15 62 3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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