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 (6월 1일 수정)
존댓말, 존칭 없습니다. 어른과 아이에 대한 구분도 모호한 세상, 위계가 흐릿한 기원전 4만년으로 안내합니다.
기원전 4만년, 러시아 중남부, 알타이스키 크레이 지역, 비욜예 호수(이야기 속 인물들은 에르호라 불렸다.) 인근 숲
#프롤로그
손발이 묶여 있었고 젖 비린내 비슷한 향이 코 끝에 아른거렸다.
‘사슴?’
‘아기 사슴!’
아기 사슴을 쫓아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랜만에 만나는 숲이 좋았다. 그녀는 아이들과 숲에 있었다.
피 냄새, 희미하게 느껴지는 어린 동물의 향내.
가늘게 울고 있는 사슴이 보였다. 새끼 사슴이었다.
어미는 죽었는지 쓰러져 미동도 없었다.
아이들과 떨어져 새끼 사슴에게 다가갔다.
어른들은 숲 속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어른들이 부르면 바로 달려 나올 수 있을만큼, 창을 던졌을 때 닿을 수 있는 거리만큼만 들어가라고 했다.
그래도 혼자 들어가는 것을 무조건 안된다고 했다.
그 거리를 훨씬 넘겼다. 어른들은 특히 뱀을 걱정했다.
이난나는 적어도 세 명 이상은 같이 다니라는 말, 창이 닿을 수 있는 거리, 이 모두를 어긴 셈이었다.
아기 사슴 소리가 애처로웠다.
되돌아 가려다 말고, 아이들을 불러야겠다 마음먹은 찰나였다.
갑자기 왼쪽 어깻죽지 부근에서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악! 수드라!'
이난나는 분명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친구를 불렀다. 소리가 안 나왔다.
***
딱 거기까지만 기억났다. 웅성이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는 어딜까? 일단 죽지는 않았구나.
이난나는 여전히 의식이 몽롱했다.
# 큰 머리 인간 진영
올간은 그날도 어른들과 함께 사냥에 나섰다.
강 너머 해지는 숲을 돌아다니는 중에 우연히 작은 머리 인간의 무리를 발견했다.
앞서 가던 세바히쿠도 본 듯하다.
그가 갑자기 멈췄다.
작은 머리 인간들이 우리를 발견했을 리 없다. 그들은 우리보다 시력이 훨씬 나쁘니까.
세바히쿠는 몸을 숨길 수 있는 데를 찾았다.
“쟤네들은 여기까지 왜 왔지?”
“쉿!”
올간은 뒤따라오던 무치에게 말을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작은 머리 인간 중에는 드물긴 해도 귀가 극도로 예민한 사람도 있었다.
올간은 할머니 얘기가 떠올랐다.
작은 머리 인간은 늑대보다도 교활하다고 했다.
한 명 한 명 마주치면 한주먹거리도 안되지만 뭉쳐다닐 땐 조심하라고 했다.
늑대는 적어도 함정은 못 판다.
올간은 무치와 함께 있다면 늑대무리쯤은 걱정도 안했다.
무치는 올간이 긴장하는 게 이상했다. 두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작은 머리 인간을 처음 본다면 모를까 그들은 작은 머리가 익숙했다.
올간의 할머니가 생각 났을까? 그녀는 작은 머리 인간이다.
그녀는 큰 머리 인간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했다.
여러모로.
할머니가 젊을 때는 다른 동굴에서 그녀를 보러 일부러 찾아올 정도로 예뻤다고 한다.
이모, 삼촌들이 한 얘기라 정말 그랬는지는 모른다.
단순히 미모만 따지자면 올간 엄마나 누이, 사촌들이 더 유명하다.
할머니가 예뻤다는 말은 아마 작은 머리 인간들 기준이지 않았을까.
할머니는 꽤 오래 살았다.
할머니가 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라서 할머니가 유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작은 머리 인간들은 힘이 약한 것 빼고는 비교적 건강한 편이다.
그들은 아마 맹수들과 다툴 일이 많지 않아 그렇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이다.
“세바히쿠, 쟤네들 왜 여기까지 왔는지 알아?”
“아니, 갑자기 그건 왜?”
'이 새끼 또 무슨 꼴통 짓을 하려고.'
“잠시만 기다려. 곧 다녀올게.”
“뭘 하려고?”
무치가 올간의 팔을 잡았다.
“숨바꼭질?”
올간은 무치를 향해 살짝 윙크를 했다.
'지랄한다. 새끼 또 뺀질거리네.'
어른들도 올간이나 무치정도 되니까 애들이지만 사냥에 흔쾌히 끼워줬다.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는 녀석들이었다.
무치는 왠만한 어른과 견줘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장사였다.
올간은 힘만 따지면 무치랑 비슷하거나 조금 밀리는 정도지만 순간적인 재치는 어른들도 혀를 내두른다.
녀석의 나무타기 실력은 저 녀석이 원숭이인가 싶을 때도 있다.
숲에는 몸을 숨길 만한 나무가 충분히 많았다.
세바히쿠의 허락을 받기도 전에 올간은 이미 저 멀리 나무를 타고 있었다.
모두가 어이없어 쳐다만 볼 뿐이다.
“저 자식은 늘 제 멋대로야!”
'한대 확 패버릴까보다.'
“놔둬, 궁금한 게 많다잖아~!”
세바히쿠가 하르게를 진정시켰다.
“올간이면 들켜도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작은머리들이 올간을 따라잡을 수도 없을테고, 나도 무치처럼 궁금하긴 해, 작은머리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 사람도 우리 중엔 올간이 유일하잖아?”
잠자코 있던 테오로도 한 마디 보탰다.
# 작은 머리 인간 진영
발륵치는 발자국을 쫓고 있었다.
“오늘 가다가 송진 좀 모아 볼까?”
나무를 유심히 살피던 초초이카는 마치 발륵치가 들으라는 식으로 크게 말했다.
'창하고 무슨 원수졌나, 자꾸 창 타령이야.'
발륵치는 숲을 지나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마 전에도 이 숲에 호랑이가 많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더 심했다.
창 만들기에 좋은 자작나무가 이 숲 속에 있다고 초초이카가 한사코 우기는 통에 할 수 없이 들어왔다.
에르호로 가는 지름길은 맞지만, 고예호수로 가는 길로 따지면 오히려 돌아가는 셈이었다.
“그런데 창만 가지고 산군한테 당해낼 수 있을까?”
“창만으로는 힘들겠지. 그래서 아므하를 찾아가려는 거야. 예전에 아므하가 만든 창을 본 적이 있어. 조금은 가늘고 짧은 창이라고 해야하나? 창으로 쓰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아므하 말로는 때에 따라 창보다 나을 수도 있다고 했어. 어떻게 쓰는지를 모르니 똑같이 만들어도 소용이 없는 게 문제야. 매머드나 코뿔소 같은 건 무리고, 오록스도 힘들다고 했고···”
“에이, 그게 뭐야? 오록스도 힘들면 산군은 어림없지, 미쳤어?”
“사슴 정도는 거뜬하다고 했어. 매머드나 그런 애들은 가죽이 두꺼운 게 문제지, 산군은 걔네처럼 두껍지 않아. 흉포스러운 게 문제지.”
“그런데, 왜 그렇게 산군한테 집착해?”
발륵치는 이번 여정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먹을 게 지천에 깔렸는데, 산군이 무서우면 숲에 안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초초이카나 여울이 바람잡이를 하지 않았다면 다들 남쪽 초원에서 편하게 영양이나 들소를 잡고 있을 때였다.
“솔다따스가 세상을 지켜보고 있을 땐 괜찮아. 솔다따스가 겨울잠을 자러 가는 이유가 뭔지 알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산군의 힘이 쎄질 때가 있는데, 그게 겨울이라는 거야. 솔다따스는 약해질 때지. 지난 해 갑자기 겨울이 길어졌잖아?”
“그게 산군 때문이야?”
“그렇데, 나도 닐푸루에게 들은 얘기야.”
“닐푸루? 그 무당 할머니 말야?”
“말 조심해, 아므하 엄마한테 무당 할머니라니”
“하여간 아므하는 겁나 무서워해”
“쯧!”
초초이카는 그만하라는 듯 혀끝을 찼다.
"닐푸루처럼 오래 산 사람이 어디있다고. 다 솔다따스가 아끼니까 그렇게 오래 사는 거라고."
“닐푸루는 솔다따스의 말을 전달하는 사람이야. 너 그러다 봉변당한다.”
“그건 그렇고, 산군이 무슨 재주로 솔다따스를 해코지할 수 있지? 산군이 솔다따스를 무서워해야 정상 아닌가? 제가 사는 숲을 옮겨버리면 어쩌려고”
발륵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므하라면 사죽을 못쓰는 초초이카다.
아므하한테 가면 또 무슨 쓸 데 없는 말로 피곤하게 할지 몰랐다.
“이건 닐푸루한테 들은 말이야. 얼마 전에 산군에게 어마어마한 망령 덩어리들이 들러 붙었데. 솔다따스도 산군이 사는 숲을 어찌 못하게 된 거지”
“그럼 산군이 신령이 됐다는 얘기야?”
발륵치는 여전히 발자국들을 살피며 말했다.
“얘끼 이 사람아. 망령들이 쳐 붙었다고 다 신령이 되냐?”
“그럼?”
“거 머시다냐. 공덕을 쌓아서 신계로 들어가야 신령이 된데”
“공덕이 뭔데?”
“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몰라, 나중에 닐푸루 만나면 물어봐!”
“왜 짜증을 내고 그래···근데, 초초이카, 잠깐만."
발 밑을 살피던 발륵치는 갑자기 소리를 죽이고 멈춰서서 작은 소리로 초초이카를 불렀다.
발륵치가 뭔가를 발견한 것이 분명했다.
"이거 호랑이 발자국인데? 설마, 산군?"
흐릿했지만 그건 분명 검치호랑이만이 남길 수 있는 발자국이었다.
발륵치는 혼잣말을 하다가 고개를 들어 초초이카를 쳐다봤다.
초초이카도 발륵치만큼은 아니어도 동물의 발자국을 알아보는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초초이카도 발륵치를 쳐다봤다.
갑자기 등줄기에서 한줄기 소름이 솟아올랐다.
“창!창! 창 들고 모두 모여! 호랑이다!”
- 작가의말
이 당시, 호모 사피엔스나 네안데르탈인은 모두 수렵채집인으로서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 살았습니다. 대화에 존칭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존칭이 보인다면 습관이 되다보니 생긴 오타입니다.
주석
작은 머리 인간 : 호모 사피엔스
큰 머리 인간 : 네안데르탈인
솔다따스 : 작은 머리 인간이 믿는 신, 곰의 모습을 갖고 있다.
산군 : 작은 머리 인간들이 검치호랑이를 부르는 말
오록스 : 야생 소, 거대 황소로 가축화 된 소의 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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