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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화26 님의 서재입니다.

나는 이렇게 천마가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공모전참가작

장연화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5.08 11:58
최근연재일 :
2024.06.27 22:20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58,622
추천수 :
1,979
글자수 :
262,810

작성
24.05.17 21:50
조회
1,472
추천
54
글자
13쪽

경(憬)

DUMMY

어젯밤.


“가도 좋아.”


연씨세가의 토벌대가 쳐들어오기 하루 전.


“가서 무얼 하든 해하진 않을 테니.”


강우의 그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이연석은 잠시간 그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주방에서 하릴없이 불이나 쬐던 중 벌어진 일이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것만으로도 놀랄 일이었으나, 그 말 또한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어찌 대꾸해야 하는가.


짧게 고민했다. 저게 참인가. 저 말에 담긴 저의(底意)는 무엇인가. 이리저리 머릿속에서 셈해보았다.


그러나, 곧 그만두었다.


저 무심한 낯빛을 보니··· 이런 궁리 일체가 전부 헛된 것 같아서.


“되었소.”


이연석은 코웃음 쳤다. 될 대로 되라지.


“기루에 이리 손님이 머물고 있는데, 점소이가 되어서 홀로 훌쩍 떠나면 되겠소?”


화로를 향해 도로 시선을 옮겼다. 부지깽이를 들고서 몇 차례 괜히 장작을 헤집는다.


“착각은 마시오. 좋아서 여기 있는 것은 아니니. 그저 달리 갈 데도 없는 처지라 이리 머물고 있을 뿐이오.”


이쯤 하면 되었겠지.


“······.”


이리되니 머쓱한 것은 강우였다. 그는 잠시 말없이 이연석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인간이다.


그의 마음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짙은 원한이 한 차례 가슴을 불사른 탓에, 오직 뜨거움 서린 잿가루만이 가득해서.


표출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오롯이 무림을 향한 증오로 돌리고 있어서.


그렇기에··· 무림인이 아닌 자에겐 별다른 감흥 하나 느낄 수 없었다.


복수를 대행한다니, 원한을 대신 풀어준다니. 아직, 그런 생각은 제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하지만.


“물어도 되나.”


강우는 거진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어째서 갈 곳이 없는지, 내가 물어보아도 괜찮나.”


의념을 읽어내는 이 시선 속에서, 눈앞의 이 사내는 자신과 비슷했다.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뚜렷하게 달랐다.


자신이 품고 있는 끈적하고도 검은 화마와 달리, 깊은 우물처럼 푸르고도 어두운 기운.


그도 자신과 같은 일을 겪지 않았을까, 막연히 추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지금이 아니면 어쩐지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사람 잔뜩 썰어 죽인 흉수가 이런 데선 또 조심스러워하는 거요? 허, 이것 참.”


자연스러운 척.


이연석은 강우의 표정을 살폈다. 겉으로는 자못 황당한 듯 가장하며.


···비싸게 굴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굳이 숨길 것도 없는 사연이다. 괜히 말을 아꼈다가 칼침 맞을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혈혈단신 홀몸이요. 정인은커녕 마음에 둔 여인 하나 없소. 어머니도 어렸을 적 돌아가셨지. 그나마 아버지가 계셨으나, 그분도 몇 해 전 눈을 감으셨소.”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이연석은 포착했다. 그 두 단어를 입에 담을 때 흉수의 무표정한 얼굴이 잠시나마 흔들렸음을. 아무래도 그쪽을 중심으로 말을 이어봐야겠다.


“아버지는 병약하셨소. 기침 멎은 모습을 본 적 한번 없었지.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는 통에 텃밭 하나도 겨우 가는 신세였소.”


나이가 조금 차고 머리가 굵어질 즈음 깨달았다. 제 밥벌이는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선 별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칼을 잡은 것도 그때부터였소.”


당신한텐 애석한 일일지 몰라도, 그 당시 내겐 그 무재(武才)라는 것이 유일한 구명줄이었거든.


미묘해지는 낯빛. 그러나 벨 기미는 없는 듯 보였다. 이연석은 마저 이야기했다.


“딱히 적을 둔 곳은 없었소. 돈만 주면 누구든, 무엇이든 따랐지. 낭인이란 게 으레 그러하듯 말이오.”


아무런 뜻이 없었다.


소작농이 될 수도 있었고, 막일을 잡을 수도 있었다. 그때부터 진즉 점소이가 됐을 수도 있었지.


그 많고 많은 밥벌이 중 칼이었을 뿐이었다.


단지 제 앞가림을 하고, 병든 아버지를 부양할 수단으로써.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을까.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내 아버지도 아들이 험한 일 하는 건 원치 않으셨지. 하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소. 아들이 하는 그 험한 일로 겨우 입에 풀칠하고 계셨으니, 무작정 하지 말라고 말할 순 없던 모양이오. 그래서.”


그래서, 아버지는 언제나 이리 말씀하셨다.


‘부디 이 아비보단 오래 살아다오.’


부탁이다.


“···그게 끝이오.”


느닷없는 종결에, 강우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하지만 정말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차라리 무슨 극적인 사연이 있었다거나, 특별한 날을 앞두고 돌아가셨다면 좀 더 슬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아버지는 자는 듯 편히 돌아가셨소. 내 마음에 어떠한 응어리도 남기지 않고. 칼을 놓은 것도 그때부터였소.”


이미 부닥치고 있던 실력의 한계.


명령하는 말씨가 고상하냐 천박하냐만이 다를 뿐, 단지 사람을 해하는 일만 거듭할 뿐인 강호 생활.


그를 더 이상 감수할 이유를 잃자··· 아무런 미련 없이 칼자루를 놓았다.


“뭐, 그 이후로는 뻔한 이야기지. 그날 당신이 길바닥에서 저 의원 나으리한테 한 소리 들었던 것처럼, 나도 똑같은 말을 들었소. 그땐 퍽 솔깃하게 들리더군.”


이연석은 턱짓으로 문가를 가리켰다. 분명 창연을 말하는 것일 테지.


강우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합비에 온 첫날, 굳이 그가 자신을 붙잡고 소상히 이야기해준 이유를.


아마도 과거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본 것이리라.


“여기 루주를 위해 칼질 좀 해준 인연으로 이리 한 자리 구했지. 뭐, 이제 다 지난 일이지만.”


단지 그뿐인 이야기요.


잘 들었느냐고 눈치 주듯 말을 맺으며, 이연석은 화로에 장작 두어 개를 집어넣었다.


그런 이야기였구나. 강우는 말없이 이연석의 사연을 곱씹었다.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리는 말이 있었다.


부디 이 아비보단 오래 살아달라고.


강우는 생각했다. 부모님의 최후. 두 분의 마지막 모습.


오 년 전, 목을 맨 채 힘없이 흔들리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달포 전, 길바닥에서 잠든 듯 얼어있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분명 평생토록 새겨두겠지.


기억 속에 각인된 천붕(天崩, 부모가 돌아가심)의 순간은, 장작이 되어 원한을 타오르게 하였다.


하지만···.


‘두 분은··· 지금의 날 어찌 생각하실까.’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 처참한 최후가.


그 순간 느꼈던 비탄이··· 너무나도 깊어서.


그 이상의 생각이란 건,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런 이성적인 접근은··· 할 수 없었다.


“······.”


우두커니 서서 단지 침묵한다. 바닥에 뿌리내린 것 같았다. 화로를 살피는 척 줄곧 곁눈질하던 이연석은, 복잡한 심경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그의 안색을 포착한다.


생각지 않은 건 아니다. 이토록 잔혹한 행보를 보이기 위한 원동력이 무엇인지. 그가 무엇을 장작 삼아 이렇게 날뛰고 있는지.


도대체 뭣 때문에, 그토록 무림인을 혐오하는지.


도대체 무엇이··· 이 흉수를 만들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알아채 버렸다.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낼 때부터 변화하던 안색, 그를 보고도 모른 척할 순 없었다.


‘원한이로군.’


무림에 의해 부모를 잃었다.


빠르게 나온 추론에, 괜히 입맛이 씁쓰름했다.


“무를 모르니까.”


이연석은 거진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나를 살려두었다고 하였소?”


이것이 객기나 다름없음을 알고 있다.


이 자가 결국, 살육에 미쳐 날뛰는 광인에 불과하단 것도 알고 있다.


“그럼 무를 깨우친 자는 전부 죽이겠단 뜻이군.”


그럼에도.


설령 이 말이, 한껏 불타오르는 업화에 장작을 넣는 일이 될지라도.


“어디 뜻대로 해보시오.”


말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작은 후회 한 점조차 남지 않게끔, 그 모두를 베어보시오.”


비록, 이 말을 한 것에 언젠가 후회하게 될지라도.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결국 후회하게 된다면··· 적어도 무언가를 한 쪽을 택하는 게 낫겠지.


“······.”


강우의 낯빛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눈은 휘둥그레 커지고, 입은 반쯤 벌어지고.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마치 얼굴이 깨진 것 같았다.


단순한 멋쩍음일까, 아니면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걸까.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은 충동에, 이연석이 무어라 운을 떼려는 순간.


“그러지.”


한발 앞서 강우가 말을 꺼냈다.


“고맙다.”


그 말에, 이번에는 이연석이 놀랄 차례였다.


“기대해본 적 없는데···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어.”


무슨 뜻인가.


어쩐지 알 것 같았지만, 정확히 묻고 싶었다. 그는 지금 무엇에 방점을 찍은 걸까.


허나 그에 앞서 물러난다.


이연석이 차마 붙잡기 전에, 강우는 이미 주방을 떠난 상태였다.


***


다시, 현재.


“한낱 운과 한낱 감 따위로··· 감히 무림에 발을 들일 자격이 생겼다 믿었느냔 말이다!”


“자격이라.”


피식.


“그따위 것··· 누가 필요로 한다고.”


연도근의 대갈에, 강우는 단지 싸늘한 비웃음으로 화답했다. 웃지 않고선 도저히 배길 수 없었다.


그는 떠올렸다.


무림에 기껏 몸을 담았음에도, 지독한 염증에 시달려 끝내 제 발로 걸어 나온 이연석을 떠올렸다.


무림 그 자체의 파멸을 소원하며, 자신에게 간절히 머릴 숙이던 창연을 떠올렸다.


무림에 모든 것을 빼앗겨, 끓어오르는 원한에 악귀나 다름없게 된 스스로를 떠올렸다.


연도근의 공격을 차례대로 받아내며··· 생각했다.


결국 사람을 죽이며, 사람이 죽는 마굴에 불과할 진데.


그 무림이란 것에 무슨 자격이 필요할까.


이 합비라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머문 것은 이 며칠이 전부. 분명 긴 시간은 아닐 테지. 하지만 그 며칠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너무나 자명했다.


이어지는 흉년.


내리지 않는 세금.


금을 산처럼 쌓아둔 곳으로 가면, 적어도 굶주릴 일은 없으리라는 믿음.


희망.


그 가녀린 동아줄을 따라온 이들을, 이 도시는 단지 집어삼킬 뿐이다. 그리고.


그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은, 단지 무림인.


“꼴같잖군.”


“···뭐라?”


느닷없는 말에 연도근은 반문한다. 의아함과 분노, 두 감정이 뒤섞인 그 한마디가 말의 물꼬를 텄다.


“그게 당신들의 본질이지. 검과 권을 앞세워 사람을 해하는 주제에, 애써 혀를 놀리며 스스로를 포장하기에 급급하지.”


인(仁).


의(義).


그리고 협(俠).


어질고, 의로우며, 기세가 좋은 적극적인 마음.


“아니잖나.”


무림이란 건, 그따위 것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잖나.


진실로 무림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단지···.


폭력에서 비롯된 원망(恨)과,


원망에서 자라난 증오(憎)와,


그 증오가 불러낼, 재앙(禍).


“···!?”


그 순간, 연도근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생사를 가르는 전장. 단 한 순간도 주저해선 안 되는 이 장소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에 몸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꺼림칙함이.


닿아선 안 될 듯한 혐오감이···.


참척(慘慽)의 분노조차 넘어서서, 온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감히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존재와 마주하는 것 같았다.


‘끝을 내야 한다.’


지금 당장.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확 정신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의식이 집중되었다. 악착같이 끌어모은 난폭한 공력을, 예리하게 정렬한다.


이 한 방으로 끝을 봐야 한다.


의식적인 생각보단 생존본능에 가까운 그것이, 연도근의 몸을 지배했다. 이 순간, 결판을 내기 위한 최고의 초식을 낼 수 있도록.


철검십이식(鐵劍十二式).


남궁의 방가로서, 유일하게 익히고 쓰는 것이 허용된 본가의 무공.


상대가 무슨 기교를 부리든 상관없이, 압도적인 힘으로 철거해버린다. 그야말로 오대세가의 으뜸에 걸맞은 강검(强劍).


“제일식(第一識), 개―”


그러나.


미처 초식을 사용하기도 전에, 강우가 움직였다.


지금껏 정면으로 받아내던 공격을 확, 피해낸다.


흘려낸다.


사각으로 파고든다. 그 순간.


“그러니 이제부터,”


강우가 배후를 차지함과 동시에, 연도근의 입에 칼날이 들이닥친다.


‘잠ㄲ···!’


겸(鎌)의 인(刃).


자루와 거진 직각으로 연결된 그 칼날을··· 입에 물린다.


곧이어 선언한다.


“그대들에게, 나의 이 깨달음(憬)으로 답하리라.”


더불어 당겨낸다.


얼굴 가죽과 함께 수직으로, 위턱을 찢어낸다.



처절한 단말마가 온 거리를 뒤덮었다.


작가의말

憬: 깨달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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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자(諮) +6 24.05.12 2,144 67 13쪽
6 람(爁) +10 24.05.11 2,807 83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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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틀 전. +7 24.05.08 3,123 96 13쪽
1 칠 년, 그리고 사흘 전. +10 24.05.08 4,664 113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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