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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화26 님의 서재입니다.

나는 이렇게 천마가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공모전참가작

장연화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5.08 11:58
최근연재일 :
2024.06.27 22:20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58,666
추천수 :
1,979
글자수 :
262,810

작성
24.05.10 21:50
조회
2,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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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글자
17쪽

개벽(開闢)

DUMMY

애월객잔은 5층짜리 누각이었다.


백무회를 앞두고 새로 지은 그 객잔은 밤이 깊어도 불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젊은 협객들은 혈기가 넘쳤다. 과시할 무용담은 끝이 없었다.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연회를, 인부들은 고초 속에서 지탱하고 있었다.


어제 있던 소동을 빌미로 그들 모두 갖은 겁박을 당해야만 했다. 이 겨울밤 객잔 밖에서 찬 바람 맞으며 대기해야 하는 건 기본이요, 안팎을 오갈 때마다 중한 몸수색을 받았다.


그러고도 요리 올리는 게 늦을 때마다 모욕과 조롱을 당했고, 개중에는 네놈도 자객 아니냐며 칼을 들이미는 자도 있었다.


암살이 두려우면서도, 자기 들이켤 술은 기어이 남이 따라 줘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인부들은 칼바람을 맞아가며 속으로 무사들을 씹어댔다.


그렇게 술 내음이 따스한 내부의 공기를 짙게 물들일 무렵.


“문을 닫아주게, 우.”


일 층에 두 남자가 나타났다.


“알겠소.”


삐걱대는 경첩 소리가 유난히도 컸다. 순식간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 늦은 시간에 나타날 사람은 없었다. 초대받은 자들은 이미 빠짐없이 도착했다.


그렇다면 저 두 기인은 누구란 말인가.


둘 중 한 명은 노인이었다. 너덜너덜해진 외투에 다 망가진 삿갓, 그리고 그 삿갓으로도 가릴 수 없는 너저분한 백발까지.


사실 그 노인은 평범해 보였다. 곁에 있는 자가 없었다면.


다른 한 명은 청년이었다. 아니, 청년처럼 보였다.


짙푸른 장포를 두르고 멱리(冪離)를 눌러 쓴 탓에 정확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다만 시커먼 천 사이로 보이는 입가의 낯빛이, 더없이 창백하단 것은 분명했다.


빠져버린 혈색이 옷감에 흘러들기라도 한 건지, 그의 행색에는 기이하게도 검붉은색이 감돌았다. 그에 더해 한 손에 웬 낫까지 쥐고 있으니 그 모습이 여간 흉흉한 게 아니었다.


굽은 날로 연신 바닥을 긁던 그것은, 그 형태 또한 괴상했다. 제법 값나가 보이는 곡검에 긴 자루를 달아 겸(鎌)으로 만든 것이.


불청객.


본래라면 내쫓았을 것이다. 바깥의 인부들은 막지 않고 무얼 했느냐며 불호령을 내렸으리라. 그러나,


닮은 데 하나 없는 그 둘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이··· 객잔에 있는 모든 이들을 침묵하도록 했다.


피 냄새.


술 내음으로도 차마 가릴 수 없던 말간 혈향이··· 두 사람이 들어온 순간부터 깔려 들고 있었다.


“문은 내가 지킬 터이니, 자네는 어디 마음껏 힘써보도록 하게.”


“······.”


무슨 의미일까.


노인이 한 걸음 물러나자,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나아갔다.


불길한 전조.


삽시간에 묵직한 긴장감이 대기를 짓눌렀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느낄 수 있었다.


지금부터 무언가 벌어지리란 것을.


모두가 감각을 곤두세운 가운데, 청년의 오른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올라가는 그 손이, 낫으로 그들을 겨눌 때.


“무(武)를 모르는 자만이.”


비로소 청년이 입을 열었다.


“살아남을 것이다.”


무사들은 답했다. 말이 아니라, 검집에서 칼이 튀어나올 때 발하는 금속음으로.


일 층에 모인 무사는 총 서른둘. 전원 최소 이류의 경지는 넘은 자들이었다. 낭인으로서 몸값 오십 냥은 넘어간다는 뜻이다.


이 강호에서, 칼로서 자기가 있을 자리 하나는 마련한 사람들이다. 생존을 통해 실력을 증명한 이들이다. 이곳에 있는 모두를 쓰러뜨릴 수 있는 자는 드물 것이다.


허나···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은 무어란 말인가.


“이야아압!”


결국 한 명이 참지 못했다.


기세 좋게 달려든 첫 번째 무사가 칼을 휘두른다. 재빠르게 내리치는 종 베기.


그러나 뚝, 검격이 끊긴다. 좌측에서 파고드는 겸의 인(刃)이 무사의 손목을 꿰어낸다.


‘이게, 무슨.’


전조가 없었다. 기척 또한 없었다. 무사는 잠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내 격렬히 치밀어 든 고통이 그를 이해시켜주었다.


“끄아아악!!”


칼날을 당겨낸다. 무사의 손은 거칠게 찢겨나간다. 순식간에 비명이 객잔을 가득 채운다. 쏟아지는 핏물을 나무 바닥이 빨아들였다.


붉게.


“흐압!”

“하압!”


이번에는 둘이다. 가장 가까이 있던 그 둘은, 합을 맞춰 동시에 달려들었다. 각자가 내지를 수 있는 최고의 초식을 서둘러 전개했다.


챙, 그리고 턱.


금속음, 그리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막힌다. 하나는 칼날이, 다른 하나는 자루가 받아낸다.


‘빠르다!’


직후 벌어지는 급격한 회전. 장병기에 힘이 실리고, 두 무사의 검날은 힘있게 밀쳐졌다. 그리고 파삭.


더불어, 피 끓는 소리.


둘 중 하나는 가슴팍에 칼날이 파고들어 절명한다. 남은 하나는 피했다. 비틀거리며 간신히, 보법을 밟으며 숙인다. 아니.


피했다고 생각했다.


실상, 그러지 못했는데.


홱, 밑에서부터 낚아채듯 청년의 손아귀가 그의 목을 거머쥐었다.


‘뭣-’


그것이 무사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본능적으로, 남은 자들이 뒷걸음질 친다.


이제 겨우 셋이다. 수적으론 여전히 이쪽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나 작금의 참살에···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무사들 사이를 떠돌고 있었다.


그 결과.


“으아아악!”


한 번 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만 이번엔 베어진 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었다.


공세가 끊기자 이번에는 청년이 먼저 움직였다. 겸이 움직이고, 핏물이 튀었다.


참수.


가장 가까이 있던 자를 노렸다. 깔끔한 절단에 머리가 구른다.


극도로 긴장된 이 상황에서, 그 광경을 본 누군가가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때부터, 억눌린 소란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죽어라, 이 악적!”


누군가는 청년을 향해 검법을 내질렀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어서!”


누군가는 계단으로 뛰어가 제 상관을 부르고자 했다.


“가까이 오지 마! 한 발짝이라도 오면 이놈을 죽여버리겠어!”


또 하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불운하게도 제때 나가지 못한 점소이 하나를 인질로 잡았다.


그 모든 것이 헛된 일이었다.


겸이 움직일 때마다 피 보라가 일었다. 그럼에도 장포의 푸른빛에는 붉은 얼룩 하나 지지 않았다.


살아남은 이들은 오로지 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뿐이었다. 단지 그들만이 노인을 지나 객잔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도망치는 행렬을 뒤로하고서, 청년은 계단을 올랐다. 삐걱대는 소리에 짙은 무게감이 담겨 있었다.


이 층.


무사 스물넷 중 열여덟이 죽었다. 살아남은 여섯은 창밖으로 몸을 던진 자들이었다.


삼 층.


가장 먼저 질풍검(疾風劍)이 쓰러졌다. 계단을 지키던 그는 양다리가 잘려 땅을 기다 죽었다.


공씨세가의 총관, 지주사(蜘蛛絲) 암영원이 협상을 시도했다. 청년은 칼날로 답했다. 입을 벌린 즉시, 파고든 궤적이 머리를 가로로 잘라냈다.


사 층.


연씨세가 대주는 청년을 보자마자 창날로 맞이했다. 내공을 묵직하게 담아낸 그 청강을, 굽이진 칼날이 낚아챈다.


허무하게 비틀린 궤적. 그는 곧 심장이 꿰여 죽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 층.


“나와라!”


공헌명은 소리쳤다.


“나를 모욕하지 마라, 이 악적! 괜히 머뭇대지 말고 승부를 내자!”


사층에 정적이 내려앉은 지 벌써 일각 남짓 흘렀다. 하지만 그 흉수의 모습은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공헌명은 제 뒤에 연은청을 세우고, 계단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언제 나타나도 대처할 수 있게끔.


“공 소협···.”


“절대 떨어지지 마시오, 연 소저. 만약 일이 잘못되면 이 공헌명, 용감히 싸우다 죽었다고 알려주시오.”


몸은 떨렸지만 머릿속은 침착했다. 설령 여기서 자신이 죽어도 연은청만 살려 보낼 수 있다면, 세가는 언제든 재기할 수 있다.


‘악적으로부터 목숨 바쳐 소저를 구한 공자.’ 세가가 남궁의 눈에 들기에는 충분할 거다. 그러나···.


아래층에서 흘러나오는 피 냄새에, 칼끝이 흔들리는 걸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었다.


“···! 누구냐!”


등장은 느닷없었다. 어둠 속에서 겸이, 푸른 장포가 나타났다.


곧장 칼을 내뻗는다. 거듭 반복한 수련으로 뼈에 새겨넣은 초식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되려 실책이었다.


빙글, 몸을 돌리며 검을 흘려내는 즉시 꼬나 쥔 대낫이 들이닥친다. 가까스로 손을 빼낸다. 팔이 잘려 나가는 건 피했나 싶던 그때.


“크아악!”


“공 소협!”


확, 얼굴 좌편이 뜨겁다. 사선으로 내리찍는 궤적에 시야가 절반으로 줄어든다.


세로로 그어진 옅은 자상. 그것은 안구를 파괴하기에 충분했다.


찰나 간에 애꾸가 되어버린 공헌명. 그는 남은 한쪽 눈으로 겨우 청년을 쫓았다.


익숙했다.


멱리를 두르고 장포로 감싸도, 익숙했다. 눈에 익은 체구, 어제 맞서본 검로. 그제야 공헌명은 상대를 알아본다.


본래라면 지금, 감옥 속에서 죽을 때나 기다려야 했던··· 그 평민을.


“너, 그 칼은···?”


공헌명의 목소리가 떨린다. 강우는 답하지 않는다.


노인과 함께 공씨세가의 가주를 죽이고 빼앗은, 세가에 가보로 내려오던 곡검.


곱게 쓸 생각은 없었다. 아니, 되려 망가뜨리고 싶었다. 날만을 빼내어 다른 자루를 달았다.


귀하게 간직된 검(劍)을, 흉물스러운 겸(鎌)으로 새로이 벼려냈다.


강우는 말없이 공헌명을 바라보았다.


더는 눈을 감을 필요도 없었다. 허공에 그려지는 하얀 궤적 다섯 개, 이제부터 공헌명이 그려낼 검의 경로를 포착한다.


위에서 하나.

옆에서 둘.

그리고 앞에서 둘.


선명하고 곧았던 그 궤적은, 어제와 달리 구불구불했다. 동요 섞인 그의 마음을 여과 없이 내비치듯.


불안감, 그에서 비롯된 공포를 밝혀내자··· 강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측으로 파고들어 찌르기를 흘린다. 콱, 잡아챈 어깨를 뒤튼다. 억세게 붙든 찰나, 무릎으로 명치를 찍어 올린다.


“컥!”


비틀거리는 공헌명. 놓치지 않고, 장대로 얼굴 좌편을 후려친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상처가 핏방울을 흩뿌렸다.


그 별것 아닌 폭력에, 정말 기분이 좋았다.


“여길 봐라!”


느닷없이 앳된 목소리가 끼어든다. 보다 못한 연은청은 확, 연검을 빼 들었다.


하찮았다.


철편처럼 휘몰아치는 검로가, 뻔했다. 강우에게 있어 그것은 휘휘 저으면 흩어질 연기나 다름없었다.


겸의 배면으로 퉁겨낸다. 시답잖은 방해 따위 무시하며, 공헌명에게 집요하게 달려든다.


사각이 된 좌측으로 들어와, 사각.


“끄윽···!”


이번에는 정강이다. 바짓단을 찢고 살갗을 그어낸다. 공헌명은 발악하듯 횡 베기로 대항한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빗나간다. 그저 뒤로 펄쩍 뛰기만 해도 충분했다. 그 간합의 조절은 일류만큼이나 절묘했다.


“헉···, 흐억···.”


공헌명은 진땀을 흘렸다. 핏물이 땀방울과 섞여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이다. 자그마한 승산을 발견한다.


‘꼴에 아녀자는 해치지 않겠단 거냐.’


놈은 지금 나만을 노리고 있다. 공헌명은 그리 확신했다.


방금, 마음만 먹었다면 연은청을 벨 수 있었겠지. 허나 그러지 않았다.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 증거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공격 모두 그 깊이가 얕았다. 실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단칼에 죽일 의지가 없는 거다.


더 많은 고통을 주기 위해. 더 오랫동안 괴롭히기 위해.


‘소저, 잘 들으시오.’


공헌명은 부축을 위해 바짝 붙어온 연은청에게 말했다. 소리도 없이, 자그맣게 입만을 움직이며.


‘놈은 오직 나만을 노리고 있소. 그를 잡아둘 테니, 때를 노려 소저가 놈을 베어내시오.’


‘하지만 자칫하단 소협께서···.’


‘나는 신경 쓰지 마시오. 그대만 살아남는다면 이 공헌명, 아무 여한 없을 거요.’


빠르게 생각을 주고받았다. 강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을 감춘 멱리에 어디를 보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일체를 알 수가 없었다.


상관없다.


“덤벼라!”


일규도전(一揆刀銭), 지금 이 거리에서 낼 수 있는 최속의 초식. 공헌명은 노성을 지르며 거센 일격을 발한다.


캉! 막힌다. 빠를지언정 정직하다. 되려 좋다. 놈은 지금 나만을 상대해야 할 거다. 그때를 노려서,


“하압!”


연검이 닥쳐온다. 꿈틀대는 이무기처럼, 힘있게 굽이치는 검격이 놈의 뒤를 노린다. 바로 그때.


서늘했다.


틈새 사이로 설핏 드러난, 놈의 눈과 마주쳤다.


조소(嘲笑).


창백한 낯빛에 새겨진, 더없이 비릿한 그 표정에··· 일순간 정신을 빼앗긴다.


그 틈을 타 자루로 가슴팍을 밀쳐낸다. 팍, 찔러 드는 일격에 공헌명은 몇 발짝 뒤로 밀려난다. 뒤이어.


아래에서 위로 감아올리는 겸이, 그 굽어진 칼날이 연검을 잡아낸다.


홱 당기는 손짓에, 연은청의 손에서 자루가 빼앗긴다. 그녀의 표정에 황망함이 번진다.


그 얼굴에, 낫을 찍어버린다.


고운 낯짝을 피로 분칠한다.


“소저!”


연은청의 죽음에 공헌명은 격노한다. 감정에 사로잡혀 칼날을 휘둘렀다.


상관없다.


검면을 후려진다. 장병기 특유의 무게감에 공헌명의 자세가 흐트러지고, 강우는 다시금 거리를 벌린다.


어릴 적 있었던 그 비무 때처럼.


“아.”


이런 기분이었구나.


그저 약간의 내공이 더해졌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이토록 달랐다.


푸핫,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절제할 수가 없었다. 허리를 숙이고 낄낄대는 웃음을 게워냈다.


“뭐가 그리 유쾌한 거냐, 이 악적!”


분노 서린 공헌명의 고함에, 강우는 뚝 웃음을 그쳤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들었다.


서로의 시선이 서로를 마주했다.


공헌명은 헛숨을 삼켰다. 푸르게 발광하는 눈알 아래에,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처참한 미소.


우는 건지 우는 건지 분간할 수 없는 그 처절한 미소가··· 달빛 아래에 걸려 있었다.


“너는, 여태껏 이런 세상에 살고 있었구나.”


“무슨 헛소리를···!”


공헌명은 이를 악물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그는 필사적으로 승리를, 생존을 쫓았다.


그러나 흘끔, 계단 맡을 내려보자 웬 노인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 거죽 없는 얼굴이 퇴로를 차단했다. 아들의 뒤를 봐주는 아비처럼.


공헌명은 도로 강우를 노려봤다. 깊게 숨을 들이켠다.


이겨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이 순간, 공헌명은 미래를 포기했다. 지금만을 거머쥐어야 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수명의 기운. 그를 억지로 쥐어 짜낸다. 천명에게 구걸한다. 머리칼에 색이 빠지고, 눈가가 깊게 패인다.


그렇게라도 내공을 쥐어짠다. 그렇게라도, 이긴다.


저놈을 쓰러뜨리고 싶다. 죽이고 싶다. 이길 수 있다. 나라면.


지금의 나라면!


“역전몽참(逆轉夢斬)!”


공헌명은 진격했다.


흡사 가로로 작렬하는 벼락처럼, 강렬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작은 돌풍이 실내에 일었다. 전광석화(電光石火), 그 네 글자를 온몸으로 실현하며 공헌명은 쾌검을 내질렀다.


분명, 그것은 절정의 경지였다.


그러나.


“사람 베는 칼질에,”


꼴같잖았다.


“그깟 이름, 필요 없어.”


살갗을 갈라내는 소리는, 허무하기까지 했다.


정직한 경로, 단지 초월적인 힘을 실었기에 기술로서 성립하는 그 쾌검을··· 강우는 정면에서 베어냈다.


제풀에 못 이긴 공헌명은 두 조각으로 갈라진 채 쓰레기처럼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격한 움직임은 철퍼덕,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그쳤다.


절묘한 각도 탓일까.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조차 그 시체를 비추지 않았다.


***


“헌데, 어째서 낫인가?”


막 내려앉으려는 침묵을 노인의 목소리가 밀어낸다.


“그대로 검으로 써도 되었을 것을, 굳이 그리 바꿔낸 이유가 있는가?”


노인의 물음에, 강우는 그제야 공헌명의 사체를 돌아보았다.


“저들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


그의 시선은 죽어서도 놓지 않은 검에 메여 있었다.


작금의 사투에도 상한 데 없는 맑은 도신. 그리고 그 자루에 감겨 있는 망집 서린 손아귀.


“검을 쥐면, 저들처럼 될까 봐. 그래서 그랬소.”


가라앉은 목소리와 그늘진 표정. 허나 “그리고,” 하며 운을 떼는 순간.


“사람 같지 않은 것을 베는데, 어찌 사람 베는 날을 쓰겠소?”


굳어있던 그 얼굴에, 도로 웃음이 번진다.


강우의 대답에 노인 또한 웃음으로 답한다.


“젊은 나이에 고약한 심보가 들렸구만.”


둘의 대화는 퍽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치 아비와 아들처럼.


“노사만 하겠소, 하하.”


두 남자의 웃음소리가 텅 빈 객잔을, 밤의 정적을 채웠다. 나지막한 그 웃음은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곧 그친다. 언제나 그랬듯 평범한 밤이 흘러간다.


그 뒤로 하성에서 강우를 본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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