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장연화26 님의 서재입니다.

나는 이렇게 천마가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공모전참가작

장연화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5.08 11:58
최근연재일 :
2024.06.27 22:20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58,660
추천수 :
1,979
글자수 :
262,810

작성
24.05.15 21:50
조회
1,628
추천
55
글자
13쪽

모(侮)

DUMMY

적사회주 신천후.


그는 제 목줄기를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그는 적사회의 본거지 이룡각(螭龍閣)에 있었다. 남궁세가의 장원을 제한다면, 합비에 있는 그 어떤 누각보다도 드높고 화려한 곳이었다.


이곳의 양민이라면 그 누구도 함부로 걸음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혹여 나타날지 모를 알량한 도전자를 짓밟기 위해, 층마다 경비를 선 무사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정파의 남궁과 쌍벽을 이루는 거대 사파에 걸맞은, 거진 요새에 가까운 장소.


그 안에서도 가장 삼엄한 회주의 집무실에··· 지금,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들어와 있었다.


“이보게, 연 가주. 굳이 이렇게까지 할 건 없잖나. 응?”


억지웃음을 지으며, 신천후는 집무실 바닥에 자리 잡고 앉은 한 사내를 향해 말했다.


허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연씨세가의 가주, 연도근.


그는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 앞에 숫돌 하나를 가져다 놓고서, 핏물 털어낸 검을 세심하게 갈아낼 뿐.


느닷없는 방문. 그것은 습격이나 진배없었다. 각 층의 무사들은 겨우 일다경 남짓 만에 차례대로 격파당했다.


징조는 없었다. 무어라 용건을 담은 서신은커녕 경고의 말 한마디 없었다. 요구사항 하나 없는 일방적인 침략이었다.


본래라면 이런 만행,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겠지.


지금도 그렇다. 신천후는 턱밑까지 치밀어 드는 욕지거리를 참아내느라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뒷배만 믿고 설치는 무뢰배 같으니, 이래서야 네놈이야말로 사파에 걸맞지 않으냐.’


실력이라면 자신 있었다. 그 자신도 이미 오래전 절정의 영역을 정복했다.


애당초 그만한 무력이 없다면, 예법과 권위 따위 통하지 않는 이 흑도의 세계에서 지금 같은 자리에 올라서지 못했겠지.


그러나 신천후와 연도근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남궁세가.


진정한 안휘의 지배자인 그들과··· 어떠한 끈으로 닿아있는지.


“원하는 게 있으면 말로 해도 될 것 아닌가? 이리 칼부림을 벌이는 것보다 그편이···.”


“작금에.”


비로소, 연도근은 입을 열었다.


“합비를 들쑤시고 있는 그 흉수.”


그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다만 건조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말을 전하기보단, 중얼거리는 것에 가깝게.


“그 같은 자가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남궁께서 너희 것들에게 내려준 책무 아니었느냐.”


질책한다.


주인이 노비에게 그러하듯.


윗사람이 아랫것에게 그러하듯.


‘이··· 빌어먹을 놈이.’


신천후는 남몰래 이를 악물었다.


알고 있다.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한 것이다. 저 말은 한낱 명분에 불과하다. 마치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 것인 양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실상은 결국, 제 자식들의 죽음에 분풀이하는 것밖에 더 되겠나.


‘느이 아들딸 놈년들이 제멋대로 설치다 뒈진 것 아니냐. 왜 그걸 애먼 우리한테 화풀이하느냐. 그토록 노기를 주체할 수 없다면, 네놈이 직접 그 악적 놈을 잡아 죽이던가, 이 찌질한 놈아!’


신천후는 소리 없이 고함을 질렀다. 그 노성은 제 머릿속에만, 제 마음속에만 울려 퍼졌다.


마음만 먹는다면, 입 밖으로 낼 수 있겠지.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 저 제 손가락만 아픈 줄 알고 날뛰는 놈을 베어낼 수 있겠지.


그러나 그 뒤에는 무엇이 있던가.


그렇게 남궁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단지 죽느니만 못한 최후만이 기다리고 있지 않던가.


그렇기에··· 소리 내어 내뱉는 대신, 꾹꾹 억눌러 삼킬 수밖에 없지 않은가.


“···유감이오.”


존대를 갖추며 살짝 고개를 숙인다. 가식으로나마 안타깝다는 뜻을 지어낸다.


“가주의 심경을 결코 모르는 것이 아니오. 가슴이 찢어진단 말로 차마 담아낼 수 없겠지. 비록 세를 가늠하질 못해 크게 당하긴 하였으나, 우리도 그 흉수를 치기 위해 잔뜩 벼르고 있었다오.”


본심을 갖추고 비위를 맞추는 것. 연기라는 것은 저 밑바닥에 있을 적부터 신천후의 밑천이오 구명줄이었다.


연도근의 노기가 살짝 가시는 듯 싶자, 그는 살짝 은근한 투를 더해 말을 이었다.


“곧 독아단이 파견될 거요. 가주께서도 그 악명을 잘 알지 않소? 우리가 가진 가장 강한 패를 투입해서라도 반드시 그 흉수를 뿌리 뽑을 거요.”


“너희는.”


카각.


순간 들어간 팔 힘에··· 검은 한 차례 숫돌을 거칠게 물어뜯는다.


“이 참척(慘慽)의 한을, 내 손으로 풀 기회조차 앗아갈 작정이냐.”


나지막한 목소리에, 처음으로 무게가 실린다.


뼛속 깊이 새겨 든 원한.


말과 글로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분노.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그 감정에 조용히 경련한다. 휘몰아치는 내력이 새어 나오며, 방 안의 공기를 더없이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


‘이 미친놈이 정말 사달을 낼 셈인가!’


신천후는 황급히 제 품 안의 소도(小刀)를 갈무리했다.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 곧장 대응할 수 있게끔.


그러나 잔뜩 긴장한 그에게 날아든 것은, 칼날이 아닌 종이 두루마리였다.


“남궁의 명도 받지 않고, 내가 이리 쳐들어올 것이라 생각했더냐.”


겨우 펼쳐 든 그 두루마리에는, 남궁세가의 상징이 새겨진 인감이 찍혀 있었다.


“청월루를 점거한 흉수는 내가 직접 칠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남궁에서 온 영장(令狀), 그 안에 소상히 적혀 있었다.


근래 합비를 어지럽히는 흉수를 더는 좌시할 수 없으니, 연씨세가를 시켜 그 토벌을 맡길 것이라고.


그리고 적사회는, 연씨세가에 전적으로 협조하여 토벌 과정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하라고.


“너희는 그저, 우리가 판을 벌일 수 있도록 좌판이나 깔면 되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존중 따윈 추호도 없는 횡포였다. 이번 사건을 빌어 상하관계를 공고히 할 작정인 거다. 속에서 열불이 끓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을 나서는 연도근을 향해, 신천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도대체 어찌해야 좋단 말이냐.’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암만 물을 들이켜도 도저히 가시질 않았다.


창연은 생각했다. 이리 안절부절못했던 적이 내 생에 또 있었던가.


‘연씨세가가 움직인다’. 그 한마디가 시전에 퍼지자, 합비의 거리가 얼어붙었다.


괜히 휘말렸다가 어떤 화를 당할지 모른다. 그 걱정에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좌판을 치우고 꽁꽁 숨었다.


그 대신 나타난 칼 든 자들은, 골목길을 틀어막고 온 담벼락에 방을 붙였다.


흉수를 향한 경고.


다만 죽을 것이라 적힌 그 방은, 수백 마디 상스러운 모욕보다도 두렵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야 했다. 몸을 숨기고선 때를 기다려야 했다. 그리 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녀가 섬기는 주인은 요지부동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이냐.’


강우는, 놀라울 정도로 태평했다.


청월루를 나선 그는 이곳저곳을 훑으며 먹거리나 맛보았다. 만두, 떡, 경단, 빙당(氷糖), 어린아이가 좋아할 법한 것들을 입에 문 채, 유유자적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이번 아침에도 그랬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창연이 강우를 모시기로 결의한 지 꼬박 사흘 되는 날이었다. 오늘도 한 움큼 주머니를 챙긴 채 대문 밖을 나서려는 그를, 창연은 가로막으며 간언했다.


삿된 일에 재물을 낭비하는 일. 별 뜻 없이 허송세월하는 일. 그리 미련한 짓을 충언으로 끊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 여겼다. 창연은 꿇어앉은 채 탄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두렵다면, 도망쳐라.’


단 두 마디. 그 두 마디만을 남긴 채 강우는 창연을 스쳐 지나갔다.


정신이 멍해졌다. 그가 자리를 뜨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바닥을 걸레질하던 이연석이 뭣 하느냐 묻고서야 겨우 넋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 죽는 게 두려우면, 저자 말대로 당신이나마 몸 좀 숨기시오.’


자기야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 뇌까리는 이연석을 보며, 창연은 생각했다.


아니라고.


나는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고.


이 기회를 잃는다면, 더 이상 기다림을 감수할 자신이 없어서.


그 비참한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게 두려운 거라고.


그렇게, 이제 어찌해야 좋은가 한숨 짓고 있던 그 순간.


- 콰앙!


청월루의 대문이 박살 난다.


폭죽이 터진 듯한 굉음이 일었으나, 창연은 놀라지 않았다. 다만 착잡했다.


이제 올 것이 왔노라고.


“이리 오너라!”


연씨세가의 토벌대.


쳐들어온 그들은 모두 무복 위에 허연 삼베옷을 덧입었다. 명을 달리한 자기네 공자 공녀를 기리는 상복이리라.


그 무리 속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연씨세가의 가주, 연도근.


그리고···.


“어이쿠, 이거 집 나간 탕아 아니신가.”


연호량.


죽은 연정호와 연은청의 사촌. 토벌대의 선두에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가 새로이 대주를 맡은 모양이었다.


창연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남궁 본가와 연씨 방가. 직위에 따른 격의 차이 탓에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으나, 그가 자신에게 품었던 멸시의 마음이 얼마나 짙은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창연이 남궁과 절연한 현재.


“아, 잠깐만.”


호량에게 그 마음을 숨길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 이거 네가 벌인 일이냐?”


그는 건들대는 태도로 창연을 추궁했다.


“하긴, 너 같은 년에게도 구멍이란 게 있긴 하지. 혹시 그 흉수 놈도 그걸로 꾀었냐?”


곧장 튀어나오는 폭언. 암만 그래도 가주 앞인데, 태도를 지적하는 자 하나 없는 것으로 보아···.


‘가주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는 건가.’


아들딸 모두를 잃었다. 마음 같아선 직접 욕설을 박아넣고 싶겠지. 하지만 가주로서의 체면이, 지켜야 할 세가의 위신이 있었다.


그래서 대변인을 세웠다. 대신 욕하고, 대신 손가락질 받을 자를.


- 꼴같잖게도.


이 상황에서도 머리는 차가웠다. 저까짓 모욕은 세가 내에 있을 적 질리게도 들었다.


“또 또 입 꾹 다무는 것 봐라. 늘상 그딴 식이지?”


창연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돌아오질 않자, 호량은 짧은 코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야, 너 더 이상 본가 사람 아냐. 그니까 그 앙다문 입 찢어발기기 전에 알아서 입 열어라. 보다시피 우리 가주님께서 정말, ‘정말’ 크게 노하셨거든.”


어디 있느냐.


“그 새끼, 혹시 튀었냐?”


빌어먹을.


시간을 끌어야겠지. 하지만 얼마나 필요할까.


이런 난관 또한 어찌 타계해야 할지,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런 때와 이런 상황이라니.


하아.


침착하게 숨을 가다듬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나 자신이 평정을 유지해야 남의 평정을 빼앗을 수 있다.


창연은 빠르게 생각을 짜냈다.


“맨입으로-”


“나 찾나?”


그때.


느닷없이 끼어든 목소리에, 기루 내의 모든 시선이 문가로 향한다.


터벅터벅.


신발 밑창을 슬쩍 끌며 내는 나지막한 발소리.


짙푸른 장포.


허리에 찬 검 한 자루와 등에 멘 장대.


바람결에 살랑이는 멱리.


···그리고, 입에 문 채 질겅이는 빙당 하나.


“···뭐 하다 왔냐?”


긴장감이라곤 하나 없는 태평한 모습. 강우의 그 모습에 당황한 모두를 대변하듯, 호량은 황당함을 담아 물었다.


“보면 모르나.”


와작.


강우는 물고 있던 빙당을 씹어 먹었다. 그 순간, 창연은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껏 아무 표정이 없던 연도근의 얼굴이 한차례 꿈틀댔음을.


“무슨 배짱으로 씨부리는 거냐, 이 천하에 찢어 죽일 악적 놈아.”


그의 분노를 대신 토로하려는 양, 호량이 말을 이었다.


“네 죄는 네가 이미 잘 알지? 뭘 해야 할지도 잘 알 거야. 당장 가주께 무릎 꿇지 않고 뭣 하는-”


쐐액.


그의 목소리가 멎었다.


- 끄르륵.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피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혀가 길구나.”


침묵한 호량을 대신해, 강우가 입을 열었다. 그제야 다들 알 수 있었다.


그가 빙당 꼬챙이를 던졌음을.


그 꼬챙이가, 호량의 목을 꿰어버렸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호량은 제자리에 고꾸라졌다.


목을 감싸 쥔 그는, 그렇게 칼 한 번 휘두르지도 못한 채 말없이 경련하다 죽었다.


연도근의 낯빛에 살짝, 놀라움이 번졌다. 챙, 토벌대의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든 것도 그때였다.


순식간에 깔려 든 묵직한 긴장감. 그 속에서···.


“우리가 할 대화는,”


강우는, 곡검의 슴베를 쥐었다.


“칼날로 나눠야 마땅할 진데.”


작가의말

侮: 업신여길 모

추천과 댓글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나는 이렇게 천마가 되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8 귀(鬼) +1 24.05.23 1,131 34 12쪽
17 난(難) +1 24.05.22 1,175 40 11쪽
16 랑(浪) 24.05.21 1,230 34 11쪽
15 기(起) +2 24.05.20 1,302 39 12쪽
14 집(集) +3 24.05.19 1,378 56 11쪽
13 소(甦) +2 24.05.18 1,410 51 10쪽
12 경(憬) 24.05.17 1,473 54 13쪽
11 강(降) 24.05.16 1,522 47 11쪽
» 모(侮) +3 24.05.15 1,629 55 13쪽
9 뢰(蕾) +2 24.05.14 1,762 57 12쪽
8 성(惺) +2 24.05.13 1,895 66 13쪽
7 자(諮) +6 24.05.12 2,145 67 13쪽
6 람(爁) +10 24.05.11 2,808 83 17쪽
5 개벽(開闢) +15 24.05.10 2,928 101 17쪽
4 천붕(天崩), 그리고···. +11 24.05.09 2,835 91 13쪽
3 하루 전. +12 24.05.08 2,832 88 10쪽
2 이틀 전. +7 24.05.08 3,124 96 13쪽
1 칠 년, 그리고 사흘 전. +10 24.05.08 4,666 113 1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