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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화26 님의 서재입니다.

나는 이렇게 천마가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공모전참가작

장연화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5.08 11:58
최근연재일 :
2024.06.27 22:20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58,634
추천수 :
1,979
글자수 :
262,810

작성
24.05.11 21:50
조회
2,807
추천
83
글자
17쪽

람(爁)

DUMMY

합비.


안휘의 심장이자, 남궁의 본진.


그곳은 밤을 밝히는 누각의 숲이자, 부(富)로 일궈낸 향락의 수도였다.


그 누각마다 비단옷을 두른 자들이 있었다. 옥을 깎아 만든 잔으로 술을 따라 즐기니, 향기로운 주향과 기녀들의 웃음이 그 곁에서 도통 멎질 않았다.


이곳에 흐르는 재물의 물결처럼.


그러나 그 아래에는 무엇이 있던가.


- 저 도둑놈! 잡히기만 해봐라!


북적이는 시전에는, 잘린 손 대신 입을 써서라도 주머니를 훔치는 소년들이 있었다.


- 자, 오늘 막 들어온 물건일세. 지금 사면 1할은 깎아주지.


정적 깔린 골목에는, 슬그머니 다가와 미혼산(迷魂散)을 권하는 호객꾼들이 있었다.


- 한 푼만 줍쇼. 제발, 한 푼만 줍쇼···. 대협의 자비에 천지신명이 함께할 겁니다···.


객잔 앞에는, 행색부터 걸인이라 알리는 자들이 한없이 엎드려 있었다.


흉년.


사람이 많으니 입에 풀칠할 거리나마 있겠지.


도시는, 그 자그마한 간절함을 품고 이곳에 온 자들을 게걸스레 집어삼켰다. 쌀알 하나에 피가 흐르고 사람이 죽어도, 아무런 책임 하나 지지 않았다.


그 모든 광경 위에 군림하며, 말없이 내려다보는 자들이 있었다.


남궁세가.


합비를 수도 삼은, 안휘의 왕이었다.


“저곳이요.”


창연은 시전 어느 데서나 보이는 드높은 저택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 커다란 누각이, 남궁세가의 장원이지. 혹여 일자리 알아볼 셈이라면 때려치우고.”


“···일자리라니?”


창연은 표정을 찌푸리며 눈앞의 사내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짙푸른 장포에 푹 눌러 쓴 멱리. 그리고 등짝에 메인 뭣에 쓰는지 모를 장대 하나. 사내는 얼굴을 포함한 온몸을 빠짐없이 가리고 있었다. 목소리를 듣고 겨우 청년임을 짐작할 정도로.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창연의 시선에 밟힌 것은 따로 있었다.


허리춤에 찬 검 하나.


자루도 없이 슴베만 튀어나온, 그 휘어진 검 탓에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사내는 자신이 가장 혐오스럽게 여기는 종자였다.


무림인.


사람 패고, 사람 베는 것을 업으로 삼는 것들.


세상사에 도움 되는 건 무엇 하나 없는 주제에, 빌어먹을 자존심은 하늘 찌를 듯 높다란 것들.


“시치미 떼는 짓거리는 집어치우시오. 이곳 안휘 사는 칼잡이들, 요 몇 년간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우르르 남궁에 몰려드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창연은 대놓고 이죽거렸다.


“하긴, 부질없는 경쟁 따윈 집어치우는 게 낫지. 칼 휘둘러 밥 벌어먹을 생각 말고, 차라리 저어기 객잔 점소이 자리나 알아보든가 하쇼.”


“······.”


답변으로 돌아온 것은 침묵이었다.


한 방 먹었나 싶다가도, 곧 그 침묵 속에 별다른 감흥이 없음을 발견한다. 심성이 초연한 건지, 아니면 말귀를 못 알아먹을 만큼 어리숙한 건지. 괜히 심사가 꼬였다.


“뭐, 그릇이나 깨먹지 않음 다행이겠지만.”


그 말과 함께 자리를 뜬 창연은 후다닥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꼬인 심사는 반드시 화를 부른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비록 이곳이 오대세가 중 으뜸이라 불리는 남궁의 터라고 한들,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겉보기엔 오롯이 남궁의 지배 아래에 있는 합비였으나, 그 속에는 적사회가 도사리고 있었다.


앞과 뒤, 낮과 밤을 나눠 가진 둘이었다. 정파와 사파, 그들은 공존을 이루면서도 결단코 서로를 인정하는 법이 없었다.


그 미묘한 경계 사이에서, 불쑥 칼부림하는 자 한 명쯤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었다. 인파 속에 숨어든 창연은, 슬쩍 자신에게 길을 묻던 사내를 돌아보았다.


“허우대도 멀쩡한 게, 몸 상할 일 없는 일이나 할 것이지. 쯧.”


***


강우는 퍽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방금 만난 자 때문이었다.


어린 도령인가 싶어 말을 물었는데, 나오는 목소리는 여식의 것이었다. 말씨는 또 신랄한 게 무엇 하나 어울리지 않고 튀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기했던 건 배짱이었다. 마치, 무림인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너무 괘념치 마시오.”


멀거니 서 있길 잠시, 근처에서 호객하던 점소이 하나가 슬쩍 다가와 툭 말을 붙였다. 갈빛 두건이 퍽 눈에 띄었다.


“저자는 창연이라고 하오. 이 거리에서 나름 유명한 인간이지. 길바닥에서 구르는 것치곤 그럭저럭 실력 있는 의원인데, 무림인만 보면 무작정 시비부터 건다오.”


“그런 것치곤 어디 칼침 맞은 데 하나 없는 것 같더만.”


강우의 말에 점소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입이야 저리 사나워도, 여기서 사람 안 가리고 환자 봐주는 의원이 저자뿐이거든. 거기다···.”


그는 짐짓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저리 괄괄해 보여도, 사실 본디 남궁 쪽 아가씨였소. 머리 자르고 절연한 지 한참이라곤 해도, 누가 아오? 괜히 건드렸다가 뭔 일이 벌어질지.”


무슨 체질이었던가, 아무튼 내공을 쌓지 못하는 몸이었다고 한다.


“뜻은 큰데 몸은 따라주지 않으니, 결국 세가를 박차고 나와 시전 바닥에 눌러앉았다고 하더군.”


“······.”


뜻은 큰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라.


상반된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먼저 떠오른 것은, ‘역시 고운 물 먹은 인간은 다르다’ 하는 독심.


힘없는 자는 처음부터 뜻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다. 암만 유민 신세를 자청했다고 한들, 그녀가 남궁의 피를 갖지 못했다면 이토록 호의적인 시선을 살 수 있었을까.


동시에, 약간의 공감. 그리고 작은 연민.


어릴 적, 무(武)의 세계를 꿈꿨던 시절이 짧게 떠올랐다. 공헌명을 베어낸 후 괴로움은 가셨으나, 아련한 그 기억에 다만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이런,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혹시 묵을 곳을 찾지 못했다면 저 남문 근처 청월루라는 곳으로 와주시오. 좋게 대접해드리리다.”


그 말을 끝으로 점소이가 사라졌다. 순식간에 인파 속에 섞인 그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강우는 시선을 옮겼다. 노을로 향하는가 싶던 그 시선은, 이내 남궁세가의 장원에 걸렸다.


‘우리는 어둠을 몰아낼 곳에서 다시 만날 걸세.’


그날, 피로 물든 객잔을 나설 적. 노인은 이 말을 남기고선 훌쩍 사라졌다.


아쉬움은 없었다. 분명 다시 만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일견 막연했던 그 믿음은, 이곳에 다다르고서 뚜렷한 확신으로 변했다.


포화된 도시 곳곳에 사람들이 굽이치고 있었다. 제 할 일에 여념 없는 사람들의 물결은, 언뜻 보기엔 특별할 게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시야에서는.


짙게 피어나는 의념을 읽어내는, 감각의 세계에서는···.


이 도시 전체에 불길이 일고 있었다.


일찍이 제 마음속에 지녔던, 검붉게 타오르는 끈적한 원한이··· 이 도시 곳곳에 깃들어 있었다.


그 창연이라는 이름의 의원부터, 방금 말을 나눴던 점소이까지.


한(恨)의 불씨가, 제대로 지피지 못해 매연만을 토해내는 그 불씨가 만연했다.


그렇기에 확신한다.


노인과의 만남으로 사사 받은 힘. 그를 통해 입문한 의념의 세계. 그것은 자신이 마주해야 할 숙명을 깨닫도록 만들었다.


저리도 만연한 원한을, 대신 풀어줘야 한다고.


무(武)를 모르는 자들이 당한 핍박에, 대신 복수해줘야 한다고.


‘일찍이, 노인이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시야 속에 여전히 장원을 담은 채, 강우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화(禍)를 일으킬 거요.”


수많은 불씨가 한탄하듯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원한이 토해내는 그 자욱한 한탄이, 이 도시를 어둠 속에 가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펴내야 한다.


“이 짙은 어둠을 몰아낼, 거센 화(火)를.”


합비의 시간은 분주히 흘러간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이 태반인 이곳에서, 서로에게 관심 둘 여력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강우의 곁을 스쳐 지나가던 수많은 이들 중, 그의 말을 담아 들은 이 또한 아무도 없었다.


그 탓에, 아직 누구도 알지 못했다.


천살성을 짊어지고서, 하룻밤 만에 백무회를 파(破)한 살신(殺神)이 이 도시에 섞여 들어왔음을.


***


나고 보니 남궁이었다. 듣기에는 좋겠지. 하지만 평생토록 이 핏줄만큼 저주스러운 것이 없었다.


폐혈절맥(閉血絶脈), 어릴 적 들은 이 네 글자는 창연의 삶에 찍힌 낙인이었다. 그 낙인은 서자라는 태생 이상으로 진하고, 또 지독했다.


무로서 협을 실천하는 데 앞장 서는 것이 남궁이라며, 점잔 빼는 척 무능하다 조롱받은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꼭 칼을 휘두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었다. 그들이 주워섬기는 무가 아니더라도, 협을 이룰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리라 믿었다.


믿고 싶었다.


처음에는 한낱 반발심에 불과했던 그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굳건한 신념으로 거듭났다. 의롭지 못한 자들을 쓰러뜨리는 대신, 의로운 자를 살림으로서 협을 이루겠노라고.


그때부터 세가 내의 따돌림과 핍박은 되려 양분이 되었다. 제 또래 여식들이 고운 분이나 노리개 장식에 관심 가질 때, 그 대신 책과 글씨를 가까이했다.


가까스로 제갈 쪽에서 운영하는 학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겨우 얻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의복성상(醫卜星相), 공예잡학(工藝雜學). 분야를 가리지 않고 학식을 쌓았다. 최고의 자리를 따내었다.


그 뒤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집안 덕에 설치고 다니는 게 자기 주제도 모른다.’ 세가 바깥에서의 평이었다.


‘삼류만도 못한 년이 입에서 먹물 냄새나 풍기고 다닌다.’ 세가 안에서의 평이었다.


- 집어치우고 말지.


이를 악물고 노력해도 괄시만이 돌아오는 데에 질려버렸다. 무공으로 모든 것이 판가름 나는 세상에 넌더리가 났다.


인정받기 위해서는, 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결국 세가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가문이라는 이름의 족쇄이자 후광을 벗어던져야 나만의 활로가 트일 것이라 믿었다.


믿고 싶었다.


머리칼을 자르며 남궁과의 연도 끊었다. 모아둔 돈을 털어 작게나마 의방을 차렸다.


그렇게 겨우 나온 바깥세상에서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나.


얻어터진 소매치기 소년을 간신히 치료해 보냈더니, 그다음 날 악적을 잡겠다던 무사한테 손목이 잘려 나가는 꼴을 보았다.


아침때 식사한 객잔에서 저녁때 급히 불러 왕진 가니, 문파 간 패싸움으로 초토화된 꼴을 보았다.


무사 한 명을 치료해주면,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그 무사한테 베인 사람이 실려 오는 꼴을 보았다.


아무리 사람을 살리고 고쳐봐야 헛짓거리였다.


무로서 협을 실천하는, 사람을 해하는 데 여념 없는 이들 탓에.


문제를 이해했다. 머리로는 진즉 알고 있었다. 누군가, 이 무림을 부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전부 파괴하고 다시 시작해줄··· 귀인이 되어줄 누군가가.


그런 누군가가 있다면.


있을 거라고 믿으면.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믿음으로, 믿고 싶다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 앞에 깨달은 그 사실이 무엇보다도 비참했다.


남궁세가의 여식 남궁연이 아니라, 한낱 의원 창연으로서는 합비에서 벗어날 수조차 없어서.


간절한 믿음조차 걷어내는 그 지독한 현실에··· 다만 신랄해져만 가는 나날이었다.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았다.


···그 만남이 있기 전까진.


***


“의원님, 조심히 들어가십쇼.”


대문을 나서는 창연의 낯빛은 어두웠다.


최근, 자상(刺傷)에 불려 가는 일이 잦았다. 일거리가 불어난 만큼 벌이도 좋았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가 생각하면 썩 유쾌하지 못한 일이었다.


적사회의 약쟁이들이 칼부림을 벌인단 소문. 창연은 그 소문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혀를 차고 걸음을 재촉한다. 벌써 해가 졌다. 한기 어린 바람에 차림을 여미고, 골목 사이를 누비며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자칫하단 방금 살핀 환자처럼 또 다른 희생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일각 남짓 지났을까.


문득 불어온 바람에, 창연은 걸음을 멈추었다. 공기 중에 피 냄새가 옅게 섞여 있음을 포착한다.


겨울에는 냄새가 멀리 퍼지지 않는다. 멀지 않은 곳에 분명 사달이 났음이라. 그녀는 서둘러 근처 담벼락에 몸을 숨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포에 떠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 살려주시오. 나는 단지 오늘 처음―아악!”


뚝, 단말마와 함께 말이 멎는다.


합비의 밤거리는 위험하다. 이런 비명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짙은 낭패감이 느껴졌다. 창연은 숨소리를 확 죽였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되려 들킬지도 모른다. 그녀는 눈만 살짝 내밀어, 골목 모퉁이를 확인한다.


일렁이는 불빛이 흔들리는 그림자를 그리고 있었다. 단지 바람 때문에 흔들리는 게 아닌 것 같았다. 헉헉대는 숨소리, 불규칙한 발소리가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왜, 왜 이러는 거요! 도대체 뭣 때문에!”


이윽고, 뒷걸음질 치는 누군가가 나타난다.


두 손을 덜덜 떨면서, 제 앞쪽을 향해 횃불을 겨눈 남자. 뚜렷하게 붉은 차림과 멀리서도 두드러지는 풍채. 창연은 그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금와(金蛙) 양비혁.


‘저 인간이 왜 여기에?’


그는 청월루의 주인이자, 적사회의 주요 자금줄 중 하나였다. 그 사실만으로 합비 내에서 이름을 떨치기엔 충분했으나, 그의 유명세는 다름 아닌 고리대금업에서 비롯되었다.


저자에게 손을 빌렸다가 패가망신한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시전 바닥에서 그만큼 악명 높은 자는 드물었다. 그만한 원한을 사고도 루주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는, 전적으로 그가 유능한 덕이었다.


그럴싸한 별호가 있어야 몸을 지킬 수 있다. 출중한 처세술이 받쳐줘야 남궁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적사회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다. 양비혁은 그 둘 모두를 할 줄 아는 자였다.


그래서, 되려 의문이 들었다.


항상 주위를 경계하는 탓에 섣불리 누각 밖으로 나서지 않던 자가, 제대로 된 호위도 없이 어째서 이 밤거리에 나선 걸까.


어째서 저리도 겁에 질려 있는 걸까.


“남궁에서 보냈소? 호, 혹 회주께서 알아차린 거요? 누구의 명을 받은 건지 몰라도, 약속한 보수 그 이상을 주겠소!”


양비혁은 넋 나간 듯 횡설수설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허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윽고, 그가 두려워하던 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얼굴을 가린 멱리에, 짙푸른 장포. 그리고 땅을 긁는 낫까지.


익숙했다.


“이야아―끄악!”


순간, 사마귀처럼 튀어 나가는 칼날에 기합성이 확 비명으로 뒤바뀐다.


숨겨둔 비도(飛刀)를 꺼내 들려던 양비혁은 얼굴이 세로로 베이고 만다.


횃불이 땅을 구르고, 그는 상처를 감싸 쥔 채 울부짖었다. 그 비명조차 뒤이은 올려 베기에 그치고 만다.


그제야 생각났다.


저잣거리를 떠돌던 소문. 하성에서 열린 백무회에서, 하룻밤 만에 수십의 시체를 쌓은 흉수.


연씨세가가 사람을 풀어 쫓고 있다는 말이 있었다. 공식적인 포고는 없었으나, 현장에 있던 둘째 공녀가 비명횡사했다고 한다. 그러한 풍문이··· 지금, 창연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발소리가 들린다.


가까워진다. 얼어붙은 흙이 바스러지는 것이 느껴진다. 창연은 입을 틀어막고서 슬며시 뒷걸음질 친다.


제발 지나가라.


이쪽으로 오지 마라.


그러나 그 간절한 바람이 무색하게, 강우는 모퉁이를 돌아 창연 앞에 나타났다.


두 명의 눈이 마주친다.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이 창연을 스쳐 지나갔다.


죽을 만큼 무서웠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눈을 감지도, 몸을 떨지도 않았다. 몰래 이를 악물고 몸을 바짝 굳힌 채, 강우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이내 강우의 겸이 올라가는가 싶더니.


···등에 걸쳐진다. 그리고 저벅,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창연을 지나쳐갔다.


당황스러웠다. 분명, 저 낫을 든 흉수는 오늘 낮 시전에서 마주한 자였다. 그녀는 가볍게나마 그를 모욕했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방금, 사람을 베어 죽인 살인귀가.


“왜···.”


창연은 저도 모르게 입을 움직였다. 얼떨떨한 정신이 목소리를 빚었다.


“왜, 날 죽이지 않는 거요?”


그 물음에 잠시, 지나가던 걸음이 멎는다.


발소리가 그치고도 무어라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 창연은 긴장으로 뻣뻣해진 목을 돌려, 슬쩍 등 뒤를 곁눈질한다.


그 순간, 절묘하게 불어든 바람이 잠시 멱리를 걷어내었고.


“그대는 무(武)를 모르니까.”


더없이 나른한 목소리로, 강우는 일찍이 들은 답을 전해주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표백된 듯 창백한 낯빛에··· 지독한 웃음을 담고 있었다.


이해 못할 대답과 그 찰나 간의 포착. 그 둘은 창연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녀는 빠르게 소문을 되새겼다. 하성, 애월객잔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 무사들을 썰어 죽이고, 남궁세가의 다섯 방가 쪽 자식까지 건드린 악적이, 정작 현장의 인부들은 도망치게 놔뒀다고 했지.


무를 모른다고?


그것만으로··· 생사를 가른다고?


“당신은, 누구요?”


창연은 질문했다. 묻지 않고선 배길 수가 없었다. 설령 여기서 죽는다고 한들 그 답을 듣고 싶었다.


허나 화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가까스로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장포 자락은커녕 발자국조차 찾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직 시체에서 피어나는 혈향만이, 작금의 순간이 현실임을 을러주고 있었다.


작가의말

爁: 불 번질 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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