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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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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6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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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성문 앞에서 바르톨은 극심한 무료함을 느끼고 있었다.

날씨는 싸늘하다기보다는 선선한 것에 가까웠고 근무 시간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바르톨은 크게 한번 하품했다. 이어서 별 이유도 없이 팔과 손을 주무른 다음, 마찬가지로 이유 없이 온 몸 구석구석을 긁었다. 그리고 주변의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를 찾아 저 멀리 휙 차버렸다.

마치 진자 운동처럼 일련의 행동을 몇 번 반복한 다음 바르톨은 기대감을 품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태양은 바르톨이 마지막으로 확인한 위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시간이라는 놈은 아마 세상 무엇보다 악독하고 교활한 놈이 분명했다. 시간은 꼭 바르톨의 교대 시간이 찾아올 때마다 일부러 늦장을 부려 대는 것 같았다.


바르톨은 창을 바닥에 꽂았다. 그리고 점점 늘어지는 몸을 창에 기댔다.

다소 위태로운 자세로 바르톨은 그날 하루에 대해 생각했다.

아침부터 시작해서 근무가 끝나는 지금까지, 딱히 인상에 남을 만한 일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바르톨에게 그날 하루는 여느 날처럼 지극히 무난한 하루였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바르톨에게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가장 무난한 하루야말로 가장 만족스러운 하루라는 것이 바르톨의 신념이었다.

요컨대 특별함이라는 말은 평범하지 않다는 말과 동의어다. 그리고 평범하지 않다는 말이 성립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평범함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특별함의 근원은 무난함이며, 모든 비범함의 근원은 수수함이다.

그래서 바르톨은 언제나 무난한 하루를 소망했다. 가끔 찾아오는 특별한 날을 더 민감하고 행복하게 느끼기 위해선 반드시 그 전까지의 일상이 무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바르톨은 특별함을 사랑했고, 그래서 평범함을 더욱 사랑했다.


생각의 그 지점에서 바르톨은 자연스레 얼마 전 일을 떠올렸다.

그 날은 바르톨에게 있어서 특별한 날이었다.

그날 바르톨은 무벤의 누구나 아는 저명한 추기경과, 정보길드의 익스퍼트와, 이상하리만치 위엄 있는 이름 모를 중년 남자와, 마지막으로 화가 머리 끝까지 차 있는 아돌프를 상대해야 했다.

그 일을 겪은 다음 날까지 격렬한 직업적 회의감에 시달린 바르톨은 그러나 며칠 만에 완벽히 자신을 추슬렀다.

바르톨은 고작해야 일 년에 몇 번 벌어지지 않는 그런 괴상하고 불미스러운 사건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느 직업에 종사하더라도 고충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렇게 고충을 느낄 때면 아무래도 직업의 단점을 의식적으로 외면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바르톨은 객관적인 사내였고, 자신의 직업에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어이 바르톨! 그만 졸고 일어나게. 교대 시간일세."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바르톨은 눈을 떴다. 교대할 동료가 성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바르톨은 퍼뜩 허리를 폈다. 그리고 서둘러 태양을 확인했다. 그 전까지 무슨 짓을 해도 움직이지 않던 태양은 어이없게도 잠깐 눈을 감은 사이 꽤 기울어 있었다.

시간이 부린 마법에 바르톨은 잠시 얼떨떨하게 서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올랐다. 바르톨은 일단 답답한 투구부터 벗어버렸다. 바르톨의 동료는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동료는 짐짓 한심한 눈길로 바르톨을 바라보며 말했다.


"졸고 있었던 걸 보니 별일 없었던 모양이군."


"별일은 무슨..."


바르톨은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나서 투구와 창을 넘겨주었다. 동료와 농담을 몇 마디 주고받은 바르톨은 성문으로 이동했다. 바르톨이 무벤의 시가지와 성벽의 경계에 발을 걸쳤을 때, 갑자기 동료가 그를 불러 세웠다. 바르톨의 동료는 별 신기한 것 다 보겠다는 투로 말했다.


"어어- 잠깐 기다려 보게 바르톨. 저기 웬 이상한 놈들이 오고 있는데?"


바르톨은 동료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장 이상한 놈들을 발견했다. 말을 탄 두 사람이 성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던 바르톨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이상한 놈들이군."


바르톨은 두 승마자들이 이상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물론 두 승마자들은 웬만한 거지들도 비위가 상할 만큼 남루하고 더러운 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유 도시 무벤에는 언제나 별의 별 놈들이 다 찾아오곤 했고, 그중에는 더한 꼴을 한 녀석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무엇이 이상한지는 명백했다. 앞서 달리는 두 마리의 말은 카니쿨라용이 분명할 썰매를 끌고 있었다. 동료가 중얼거렸다.


"이거야 원... 남부 놈들은 말과 카니쿨라도 구분 못하나?"


바르톨은 그 말에 동의했다. 곧 심도 깊은 토론이 벌어졌다. 바르톨과 그의 동료는 말이 카니쿨라 썰매를 끌 경우 얻을 수 있는 이점에 대해 얘기했다.

서로 시시덕거리던 두 사람의 표정이 바뀐 것은 그 말썰매와 성벽의 거리가 300큐빗쯤 남았을 시점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일관하던 동료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런데 바르톨, 저 놈들 슬슬 속도를 줄여야 하는 게 아닌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바르톨의 무신경함과 동료의 걱정 속에서도 말썰매는 계속 가까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멈추기는 커녕 점점 더 빨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들이 100큐빗쯤 더 전진했을 때 비로소 두 사람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바르톨의 동료가 인상을 구기며 험한 말을 내뱉었다.


"저... 저 미친놈들이..!"


이전의 이상하다는 수식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바르톨은 동료의 표현에 완전히 동의했다.

동료의 말처럼 지금 성벽을 향해 달려오는 놈들은 미친 것이 분명했다.

물론 말에 카니쿨라용 썰매를 매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은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말이 꼭 마차만 끌라는 법은 없으며, 반대로 카니쿨라가 꼭 썰매만 끌라는 법도 없다. 실제로 눈 앞의 두 말은 제법 썰매를 잘 끌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썰매를 맨 채로 속도를 줄이지 않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현재 성벽을 향해 달려오는 두 말은 구보(驅步)와 습보의 중간쯤 되는 속도였다. 그 정도 속도라면 승마자의 안전을 위해서 적어도 60큐빗쯤에서는 제동을 시작해야 한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들과 성벽의 거리는 아직 300큐빗이나 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르톨과 그의 동료는 이미 그 지점에서 제동 시기를 놓쳐버렸다고 판단했다.

단지 두 마리의 말 뿐이었다면 바르톨은 어떤 걱정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두 말은 카니쿨라용 썰매를 끌고 있었다.

사람들이 말에 카니쿨라용 썰매를 매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카니쿨라 썰매에는 마땅한 제동 장치가 없다.



*



마상에서 말콤은 말에게 진지한 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제발 좀 멈춰라 이놈아! 대체 뭣 때문에 이러는지 이유라도 말해 봐라!"


당연히 말이 말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결국 말콤은 혼자 묻고 혼자 추론했다. 말콤은 어째서 말이 말을 듣지 않는지 고민했다.

놀랍게도 짚이는 점은 꽤 많았다. 아무튼 자신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네 발 달린 두 동반자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언제나 두 사람은 더러운 물과, 더러운 풀과, 더러운 건초와, 더러운 잠자리를 제공했다. 사실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대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말콤은 섭섭하다는 식으로 소리쳤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앙갚음을 하는 거냐 이 망할 자식아!"


이후에 말콤은 말에게 묻고, 부탁하고, 화내고, 소리치고, 사정하고, 굽신거렸다. 한창 말과의 의사소통 개진에 노력하던 때 뒤에서 더글라스의 외침이 들려왔다.


"뭐 하고 있습니까! 성벽이 가까워지니 속도를 늦추십쇼!"


말콤은 뒤를 돌아보며 노호했다.


"이런 빌어먹을! 한창 노력중이니 제발 좀 닥치고 있으쇼!"


사제에 대한 예의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과격한 발언에 더글라스가 벙찐 얼굴로 변했다. 그러나 아주 잠시 뿐이었다. 더글라스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을 멈추는 방법에 관한 수십 가지 조언을 외치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더글라스의 조언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하지만 그 조언들은 말콤 역시 알고 있는 것들이었고, 심지어 그중 가능한 것들은 이미 전부 시도한 상황이었다. 승마술이야 일천해도 어쨌든 말콤은 말을 멈추는 기본 상식조차 모를 만큼 무식하지는 않았다. 더글라스는 계속 외쳤다.


"몸의 중심을 뒤로 이동시키고 다리에 힘을 푸십쇼!"


말콤은 이제 대꾸할 기력도 없었다. 지긋지긋한 느낌을 받으며 말콤은 상체를 정면으로 돌렸다. 그리고 다시 협상을 시도했다. 상체를 숙인 말콤은 말의 귀 부분에 최대한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 상태로 말콤은 말을 어르고, 달래고, 뒷굽으로 걷어차고, 최후에는 그 모든 것과 동시에 채찍질했다. 하지만 여전히 말은 요지부동이었다. 말콤은 시무룩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다음으로 말콤은 더글라스의 조언에 따르는 것을 고민했다.

고삐를 세게 잡아당기면 말은 멈출지도 모른다. 사실 그것이 말을 멈추는 가장 원론적인 방법이며 고삐의 존재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말콤은 말이 어떤 방식으로 멈출지 예상할 수 없었다.

이끼 핀 지역을 벗어난 순간부터 말콤과 마르코의 말은 내내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쉭쉭 헐떡이고 있었다. 흥분한 상태가 분명했고 어쩌면 미쳐있을지도 몰랐다. 보통 승마자들이 중상을 입는 경우는 흥분한 말을 갑자기 멈춰 세웠을 때다. 말이 앞발을 들어 올려버리면 낙마를 피할 수 없다.

물론 평탄하고 바닥이 푹신한 지역이었다면 그럼에도 말콤은 그 방법을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낙마하면 죽을 만큼 아프기야 하겠지만 죽지 않을 공산도 있다. 하지만 현재 속도로 성벽에 들이박으면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고민하던 말콤은 그러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콤은 말과 완전히 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는 묵직한 썰매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저찌 말을 멈춘다고 해도 썰매를 멈출 방법은 없다. 낙마와 동시에 썰매에 부딪혀 죽을 것이 뻔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말콤은 고개를 들었다. 성벽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 마르코가 뭔가 알아냈다는 투로 소리쳤다.


"마스터! 혹시 이 녀석들 피에 흥분한 것 아닙니까!"


말콤은 그럴듯한 이론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말은 베르미 밭을 지나오며 그것들의 피를 흠뻑 뒤집어 쓰고 있었다. 너무 흔한 탓에 가끔 잊어버리곤 하지만 베르미는 엄연히 요괴다. 그렇다면 그 피에는 뭔가 요사스러운 효과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말콤이 상념에 빠져있자 다시 뒤에서 더글라스의 외침이 들려왔다.


"당신들 정말 미쳤습니까! 이 속도로 조금만 더 가면, 그때는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단 말입니다!"


바로 그 멈출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말콤은 일단 참기로 했다. 말콤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타개책을 모색했다. 문득 말콤의 시야에 단검이 들어왔다. 말콤은 지그시 단검과 안장을 번갈아보았다.

마침내 성벽과 200큐빗이 남은 지점에서 말콤은 결심했다. 말콤은 비장한 얼굴로 단검을 빼들고서 마르코를 바라보았다.


"마르코! 줄을 자를 테니 옆으로 붙어!"


"줄이라니요! 무슨 줄 말입니까?"


되묻는 와중에도 마르코는 본능에 따라 상관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내 마르코의 말과 말콤의 말이 주먹 하나쯤 들어갈 공간을 두고 나란히 달리게 됐다. 성벽은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르코는 설명을 요구했지만 말콤은 설명하지 않았다. 말콤은 썰매와 연결된 줄을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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