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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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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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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0 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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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9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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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속기(速碁)

DUMMY

『"선생님. 바둑이라는 것은 참으로 오묘한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애기가들로부터 바둑에는 우주가 담겨 있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그 말을 듣고선 다소 문학적 감수성이 지나친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군요. 나이를 먹은 지금 생각하자면 그 표현은 과장은 커녕 담백한 진실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뭐 그럴지도 모르지."


베테거는 심심한 얼굴로 대답했지만 문하생은 기죽는 일 없이 열정적으로 질문했다.


"저야 워낙 일천한 기력이니 아직 바둑의 깊고 심오한 면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다르시겠지요. 선생님께선 평생 동안 바둑을 둬 오셨잖습니까. 저는 선생님께서도 매 대국마다 저와 같은 경이로운 기분을 받으시는지 궁금합니다. 모든 문하생을 대표해 묻건대, 선생님께 바둑이란 무엇입니까?"


말하던 도중 점점 격앙되던 문하생의 말투는 마지막에 가서는 마치 감정이 벅차오른 사람처럼 변해있었다. 베테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자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야 나무판 위에 차례대로 돌을 늘어 놓는 것이지."』


-베테거와 문하생의 대화 중-



*



길버트가 다시 돌아왔을 때 코이마 여관의 분위기는 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가 떠나기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곳은 여전히 너저분한 분위기였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 역시 품위와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각자 떠들고 있었다.

다만 떠나기 전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떠들썩했다면 현재 코이마 여관은 그럭저럭 차분한 편이었다.

홀을 둘러본 길버트는 그 묘한 분위기의 원인을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홀에 앉아 있거나 혹은 서 있는 사람들은 저들끼리 떠들고는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흘끔대며 한 탁자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버트는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어떤 특정한 탁자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곧바로 시선의 구심점에 있는 루나를 발견했다.


루나는 여태 그랬던 것처럼 외양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물론 루나는 여행 내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부에서의 얘기다.

남부에서는 그녀와 같은 창백한 피부가 흔치 않으며 그녀의 옷차림 역시 남부에서는 지나치게 파격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무벤은 북부다. 북부에서 하얀 피부를 가진 여성은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하며, 종족이 섞인 탓에 의복의 양식 또한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따라서 루나의 외양은 북부에서 이목을 끌 만한 요소가 되질 않는다.

겉모습이 아니라면 행동이겠지만, 사실 그녀의 행동거지 또한 그리 관심 받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단순하게 보자면 루나는 그저 테이블에 앉아 있을 뿐이었고, 또 차분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이름 모를 생선의 가시를 요령 좋게 발라내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식당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모습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람들은 루나의 외양이나 행동이 아닌 그녀에게 일어난 상황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느릿하게 포크를 놀리고 있는 루나 주변에 세 남자가 있었다.

그 세 남자는 각각 너무 마르고, 평범하고, 또 지나치게 뚱뚱했다.

겉모습으로 유추했을 때 도대체 어떻게 서로 친구가 되었는지 쉽사리 짐작되지 않는 세 남자는 그러나 한 가지 뚜렷한 공통점이 있기는 했다.

세 남자는 체격과 별개로 하나같이 험상궂은 얼굴과 껄렁한 태도를 함양하고 있었다.


세 사내 중 가장 뚱뚱한 사내가 루나의 맞은 편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러고선 탁자 위에 상체를 거의 붙이다시피 깔았다. 사내는 그 자세로 루나를 올려다 보았다.

한 사내가 그렇게 행동하자마자 다른 사내들이 움직였다. 평범한 체격의 사내는 루나의 바로 지근거리에서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루나를 관찰했고, 가장 뚱뚱한 체격의 사내는 선 채로 루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사내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낄낄대며 웃고 있었고, 루나에게 계속해서 뭐라 말을 건네는 듯했다. 그리고 홀 내부의 사람들은 꽤나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루나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홀을 슬쩍 둘러본 것으로 길버트는 즉시 완벽하게 상황을 이해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길버트는 상황을 종식 시키기 위해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었다.

그때 길버트의 어깨에 커다란 손이 덥석 올라왔다. 길버트는 한번 소스라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여관의 입구 앞에서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토비와 리버를 발견했다. 길버트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말했다.


"두 분이었군요. 어딘가 외출하고 오는 길입니까?"


"시장에 좀 들렀다. 이 녀석이 향신료가 떨어졌다고 난리를 피워 대서 말이지. 시장에 들른 김에 무장을 손 보기도 했다. 아무튼 이 녀석의 무장은 영 변변찮았잖냐. 그런데 길버트 너야말로 대체 이 시간까지 어디에 있었던 거냐?"


길버트는 대답할 말이 궁해졌다. 길버트는 방금 전까지 어느 으슥한 골목에서 대머리 남자와 대륙의 차기 황제가 되기 위한 열띤 논의를 벌이고 왔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할 수는 없었다.

질문을 한 것이 토비가 아니었다면 길버트는 대강 얼버무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질문의 발화자는 토비였고, 토비는 아돌프였다. 아마 거짓말을 한다면 토비는 곧장 알아챌 것이 분명했다.

길버트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자 불현듯 토비가 인상을 찡그리며 길버트의 목 근처로 코를 가져다 댔다. 토비는 몇 번이나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은 뒤에 물었다.


"이것 참 코가 삐뚤어질 것 같은 술 냄새로군. 그렇지. 길버트 너는 분명 개인적인 볼 일이 있다고 말했었지. 설마 그게 술집을 말한 거였냐?"


"아, 예... 뭐. 그렇지요. 당신의 추측이 맞습니다 토비군."


토비의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는 화법에 길버트는 안도했다. 다행히 단답이 가능한 질문들이었다. 다시 토비가 혼잣말하듯 얘기를 꺼냈다.


"술 냄새에 향수 냄새도 섞여 있군. 보아하니 혼자 마신 게 아닌 모양인데."


재차 코를 씰룩이던 토비가 이번에는 살짝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길버트를 쳐다보았다. 길버트는 토비가 어떤 오해를 하는지 금방 알아챘다. 하지만 굳이 그 오해를 정정하지는 않았다. 길버트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조금은 뻔뻔한 투로 대답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중년에 접어든 인간 남성은 아주 가끔 참을 수 없을 만큼 외로워 질 때가 있습니다. 당장 달래주지 않으면 어딘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지는 그런 순간들이지요."


"뭐 모르지는 않아. 우리도 가끔 그런 기분에 빠지기도 하지. 하지만 너무 불건전하게 놀지는 말라고. 술과 여자 그리고 섣부른 모험심은 종족을 막론하고 모든 남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법 아니겠냐."


"...숙고하겠습니다."


길버트의 정중한 대답에 토비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리버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리버는 홀 중앙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여전히 식사에 집중하고 있는 루나와 그 곁에서 여전히 치근덕대고 있는 세 사내가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저 상황부터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보기엔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데요."


"음. 그러고 보니 저 녀석들은 누구냐? 얼핏 봐서는 루나와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아니오 그렇진 않을 겁니다. 아마 저 사내들은 오늘 루나양을 처음 봤을 겁니다."


"그래? 하지만 처음 본 사이인 것 치고는 아주 다정하고 친근해 보이는군."


이번에도 길버트는 토비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금세 알아챘다.


"당신에겐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군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저것은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구애 활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들도 마음에 드는 이성을 발견하면 처음 본 사이더라도 허물없이 다가가지 않습니까."


"과연 그런 것이었군. 하긴 우리들도 그렇지. 같이 집을 지을 여자에게는 말이야."


"집을 지을 여자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군요. 아돌프들의 은유입니까?"


"전혀 아니야. 말 그대로 함께 집을 짓자는 의미다. 우리에겐 이런 속담이 있다.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롭다는 오래된 속담이지. 뭐, 보통 아무리 막역한 사이라고 해도 매일 붙어 다니다 보면 정이 떨어지기 마련이잖냐. 그런데 같은 공간에 살면 오죽하겠냐. 그러니 함께 집을 짓고 살자는 말은 우리 사이에서는 확실한 호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지. 너와는 같은 공간에서 평생 같이 있어도 괜찮다는 말이니까."


리버가 입을 헤 벌리며 토비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낭만적인 문화네요. 그런데 당신들은 어차피 숲이 곧 집이잖아요? 굳이 따로 집을 지을 필요가 있어요?"


"너는 한번씩 나를 무슨 야만인처럼 취급하는군. 욘석아 우리도 엄연히 사람이다. 집이 없을 리가 있겠냐. 그야 너희들처럼 크고 웅장한 집을 짓지는 않지. 그럴 필요도 없고 또 귀찮기도 하니까. 그래도 집은 반드시 필요해. 집이 없으면 우리는 방랑을 떠날 수가 없으니까. 우리들의 방랑은 반드시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하거든."


"잠깐, 그럼 혹시 토비 당신도 고향에 집이 있어요?"


"그런 은근한 눈빛으로 묻지 마라 욘석아. 집은 있지만 나 혼자 지은 소박한 집이다. 이 방랑이 끝나면 그곳으로 돌아가야겠지."


이후에 리버의 질문 공세가 이어졌지만 토비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어느 시점에 길버트가 두 사람을 제지하고 나섰다.


"흥미로운 주제지만 대화는 이쯤 해두는 게 좋겠습니다. 리버군의 말처럼 슬슬 말리지 않으면 위험할지도 모르겠군요."


"응?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방금 저 놈들이 루나에게 구애 활동을 하고 있는 거라고 했잖냐. 어떤 사내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하면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법이지. 괜히 나서서 남의 구애를 방해하는 것은 사내답지 못한 짓이야."


토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그렇게 말했다. 루나에게 걸어가던 길버트는 걸음을 멈추고 잠깐 뒤돌아 보았다.


"저 사내들을 말리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당연히 루나양 쪽을 말리겠다는 말이지요. 제가 보기엔 그녀의 인내심이 슬슬 한계에 다다른 것 같군요."


길버트의 말에 토비는 루나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비는 완전히 납득했다.


"그렇군. 저 세 놈이 사달나기 전에 말려야겠군."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세 사람은 루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리버 일행과 세 남자들 사이에서 묘한 기싸움이나 살벌한 눈빛, 혹은 폭력적인 분위기 비슷한 것은 형성될 기미조차 없었다.

사내들은 루나와 토비가 일행이라는 점을 파악한 순간 껄렁한 놈팡이에서 순식간에 지극히 예의 바르고 건실한 청년으로 바뀌어버렸다. 사내들은 곧바로 퇴장했고, 리버와 길버트 그리고 토비는 그 사실에 큰 감흥을 느끼는 일 없이 자리에 착석했다.


탁자 위엔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세 남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루나가 세 남자의 몫까지 전부 주문해 둔 것 같았다.

겉에서 느껴지는 여관의 너절한 분위기와 달리 의외로 요리는 제대로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메인 요리는 닭을 이용한 미트파이였고 그 외에도 도미나 대구로 보이는 생선 요리, 감자를 짓뭉개 놓은 이름 모를 요리, 흰 빵, 완두콩과 야채가 가득한 수프, 쿠민(Cumin)이 너무 많이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계란 요리 같은 것들이 있었다.


물론 술도 있었다. 루나와 길버트 앞에는 각각 투명한 호르체가 담긴, 손바닥의 절반쯤 되는 크기의 잔이 있었고, 리버와 토비 앞에는 높이가 1큐빗이 넘는 커다란 맥주잔이 있었다.

그중 토비의 맥주잔은 남부에서와 달리 주둥이의 한 부분이 오리의 부리처럼 세모꼴로 삐죽 나와 있었다.

사용법을 몰랐던 토비는 처음에 그 부분을 이용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가서는 그 특이한 모양의 잔의 편의성을 깨달았다.

아돌프들은 입이 긴 탓에 인간들처럼 액체를 마실 경우 액체를 바닥에 흘리기 일쑤다. 하지만 그 맥주잔의 주둥이는 주전자처럼 한 방향으로 쪼르륵 흐르게 되어 있어 그럴 염려가 없었다. 다양한 종족이 머무는 대도시에는 그런 식으로 타종족을 배려한 것들이 많은 듯했다.


토비가 송어 한 마리를 쥐고 그 머리 부분을 통째로 씹는 것으로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됐다.

토비는 거의 모든 음식을 화끈하게 한 입에 처리했다. 그리고 포크와 나이프질이 익숙치 않았던 리버는 숟가락을 이용해 거의 긁다시피 요리를 처리해 나갔다. 루나는 세 남자가 오기 전에 이미 배를 채웠는지 간간이 술만 비웠다.

한창 포식하던 도중 리버는 길버트가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는 점을 알아챘다. 길버트는 좋게 표현하면 신중한 태도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보자면 깨작거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모습으로 식사에 임하고 있었다. 리버는 멍하니 생선을 분해하고 있는 길버트에게 물었다.


"혹시 음식이 입에 맞질 않나요? 음, 전 맛있는데요."


곧 세 사람의 이목이 길버트에게 쏠렸다. 식사가 중단되자 길버트는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길버트는 왠지 모를 창백하고 우울한 안색으로 말했다.


"이런, 모처럼 제대로 된 식사 자리인데 제가 분위기를 망쳐버렸군요."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거냐? 그야 오늘 겪은 일들은 심란한 것들이기는 했지. 그래도 배는 채워둬라. 현명한 사고와 판단은 언제나 두둑한 배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길버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거리가 있기는 합니다만... 유적에서 경험한 것들에 대한 걱정거리는 아닙니다."


거기까지 말하고서 길버트는 홀 내부를 한번 두리번거렸다. 여관의 손님들은 얼핏 보기에 식사와 잡담에 열중하고 있는 듯했지만, 개중 몇몇은 흘긋대는 눈길로 명백하게 리버 일행에게 관심을 보내고 있었다. 주변을 확인한 길버트는 조금 전보다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께 드릴 얘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기는 곤란하겠군요. 방으로 올라간 후에 말하겠습니다."


즐거웠던 식사는 길버트의 발언 이후로 적잖이 지지부진하고 시들해졌다. 토비와 리버는 적당히 배를 채우고, 또 적당히 취한 상태가 되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행이 그대로 이층으로 올라가려 움직였을 때 불쑥 토비가 멈춰 섰다. 토비는 진득한 아쉬움이 묻어나는 눈길로 탁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카운터 쪽으로 이동했다.

카운터에서 큰 접시 하나를 받아 온 토비는 그곳에 몇몇 음식을 쓸어 담았다. 토비의 의도를 알아챈 리버 역시 카운터에서 호르체 한 병을 가져왔고, 루나는 후식으로 보이는 꿀에 절인 라즈베리 같은 것을 한 접시에 담아 들었다.


간단히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챙긴 일행은 여관의 3층으로 향했다. 루나는 3층의 어느 방 앞에 멈춰 섰고 그대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세 남자 역시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길버트의 예상과 다르게 일행은 방을 하나 밖에 잡아 놓지 않은 듯했다. 길버트가 리버에게 의심의 시선을 보내자 리버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리버는 금액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남아 있는 방이 그곳 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홀은 지저분했지만 방은 의외로 넓고 쾌적했다.

이층 침대 하나와 일반적인 낮은 침대 하나. 벽면에는 큰 벽난로가 있었다. 사람 수보다 침대 수가 하나 모자랐지만 일행은 그 사실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예상대로 토비가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자길 자청하고 나섰다.

각자 여장을 풀어 놓은 후 그들은 방바닥에 마름모를 그리고 앉았다. 마름모의 중앙에는 토비가 가져온 큰 접시를 놓았다. 리버는 각자의 앞에 술잔을 놓은 뒤 호르체를 따랐다.

가장 먼저 토비가 호르체를 한잔 들이켰다. 토비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거의 부어 넣듯이 한잔을 비운 다음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그래, 우리에게 할 얘기라는 게 대체 뭐냐? 그렇게 잔뜩 무게를 잡는 걸 보아하니 썩 중요한 얘기일 테지."


길버트는 우울한 얼굴로 잔에 든 것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선 좌중을 한번 둘러보았고, 이글대는 벽난로와, 불규칙한 패턴의 벽지를 차례대로 훑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 길버트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저희들의 여정을 이쯤에서 끝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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