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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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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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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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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9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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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기 (8)

DUMMY

썰매 위에서 더글라스는 다소 위태롭게 행동하고 있었다. 정신이 똑바로 박힌 썰매꾼이라면, 카니쿨라 썰매를 모는 도중에는 결코 정면이 아닌 다른 곳을 응시하지 않는다. 카니쿨라들은 대체로 영리하게 썰매를 모는 편이지만, 가끔 전혀 엉뚱한 곳으로 향하거나 혹은 갑자기 방향을 홱 전환해버리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더글라스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지 않았다. 더글라스는 다섯 번째로 뒤돌아 보았다. 더글라스는 한참 전부터 카니쿨라들의 뒤꽁무니와, 또 그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무벤의 성벽을 끊임없이 번갈아 보고 있었다.

더글라스가 여섯 번째로 무벤을 향해 상체를 틀었을 때 돌연 썰매가 휘청거렸다. 조막만한 돌부리에 걸린 썰매는 중심을 잃은 채 좌우로 흔들리다가 종내에는 거의 엎어질 뻔했다.

다행히 썰매는 용케 넘어지지 않고 중심을 잡았다. 물론 더글라스의 썰매 모는 솜씨가 탁월했기 때문은 아니다.

그 썰매를 모는 카니쿨라들은 거의 한평생을 그 직업에 종사한 일종의 베테랑들이었다. 카니쿨라들은 썰매에 이상이 생긴 것을 감지한 카니쿨라들은 짧은 순간 급격하게 속도를 높였다. 일정한 속도였다면 넘어졌을 썰매는 앞으로 세게 당기는 힘에 의해 간신히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썰매는 제자리를 찾았지만 바닥에 엎어질 뻔한 동승자들은 더글라스를 향해 비난의 눈초리를 보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더글라스는 동승자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집중하겠습니다."


이후로 한동안 더글라스는 얌전히 정면을 주시했다. 썰매는 아무 탈 없이 고요히 앞으로 전진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더글라스는 다시 썰매의 편을 흘깃거리기 시작했다. 썰매의 뒤 편에는 무벤의 성벽이 있었고, 그 성벽은 시시각각 썰매와 멀어지고 있었다. 더글라스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마침내 성벽과 거의 이천 큐빗정도 멀어졌을 때에 더글라스는 더 참지 못했다. 더글라스는 그의 겉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스니블님. 저희들은 무벤에 볼 일이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까? 저는 이 여정의 목적이 오피디아 잎을 빼돌린 컨트 시장을 엄벌하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스니블은 썰매의 옆 부분에 턱을 괸 채 나른한 표정으로 썰매 밖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스니블이 더글라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불쑥 스칼이 먼저 말을 꺼냈다.


"수심 가득한 얼굴이군. 하으음- 너무 걱정하지마 더글라스. 우리는 무벤에 갈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일에는 언제나 우선순위라는 것이 있는 법이지. 대개는 큰 일을 먼저 처리하는 쪽이 편해. 큰 일을 처리하고 있다 보면, 어느샌가 작은 쪽이 짠하고 해결되어 있는 경우가 있거든."


"그 말씀은... 지금 저희들이 무벤에서의 일보다 더 큰 용무를 처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입니까?"


"으음- 그래. 아주 크고 중요한 일이지. 지금 우리들은 세상의 모든 일을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러 가는 길이야. 그보다 더글라스 조금 더 왼쪽으로 방향을 트는 게 좋겠다."


목적지를 몰랐기에 더글라스는 일단 순순히 스칼의 명령에 따랐다. 하지만 카니쿨라들이 몇 걸음도 채 앞으로 뛰지 않은 시점에서 더글라스는 방금 전보다 더 큰 의문에 휩싸였다.


"확실히 이 방향이 맞습니까 스칼님?"


"이 방향이 맞아. 아주 잘 하고 있어 더글라스. 이제 방향을 틀 필요는 없어. 우리가 멈추라고 할 때까지 쭉 직진하면 돼."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스칼은 썰매 위에 누워 퍼질러져버렸다. 더글라스는 썰매 정면의 아득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대륙 지도를 끔찍하게 잘못 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썰매는 딜로 숲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더글라스는 옆에 드러누운 스칼을 바라보았다. 스칼은 눈을 반쯤 감은 채 늘어지게 하품하고 있었다. 그에게 재차 질문하려던 더글라스는 문득 북부의 오래된 격언 하나를 떠올리고선 입을 다물었다.

요컨대 훌륭한 썰매꾼이란 결코 탑승자의 목적을 묻지 않는 법이다.

더글라스는 자신을 훌륭한 썰매꾼으로 여기고 있었고, 그래서 두 사람의 목적에 대해 묻는 것이 정말로 옳은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더글라스는 스스로의 양심을 저해하지 않는 적절한 중재안을 찾아낼 수 있었다.

더글라스는 그 격언에서 자신은 예외로 치기로 했다. 그야 썰매꾼이 탑승자의 목적을 묻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썰매꾼인 동시에 사제였다. 사제가 주교에게 조언을 구하는 데에는 어떤 문제도 없을 것이다. 더글라스는 질문했다.


"스니블님. 이 방향으로 가면 딜로 숲이 나옵니다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스칼과 마찬가지로 정오의 나른함에 중독되어 있던 스니블은 늘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음? 아- 꼭 그렇지는 않아 더글라스.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곳은 없거든."


스니블은 잠깐 고개만 들어서 대답한 뒤에 다시 썰매 옆면에 고개를 기댔다. 그리고 여태 그랬던 것처럼 왠지 모를 아련한 표정으로 휙휙 지나쳐가는 풍경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더글라스는 스니블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다음 순간, 더글라스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다. 더글라스는 감탄과 존경이 섞인 눈으로 스니블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렇습니다. 역시 놀라운 통찰이십니다.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없는 곳은 없습니다. 세상 만물은 신의 피조물입니다. 당연히 신이 만드셨기에 그중 의미가 없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 모든 장소와 사물을 신이 빚어내셨으므로, 그 어떤 것에도 신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군요. 저희들이 그 의미를 알건 모르건 관계없이 말입니다."


열정적인 독백이 끝나자 스니블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야."


"예? 그럼 방금 전 말씀은..."


"없다는 것은 사실 없기 때문에, 정말로 없는 것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지."


더글라스는 이전보다 한층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스니블이 기어코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야 더글라스. 이건 관념적인 얘기니까 그렇게 해석하려 애쓸 필요 없어. 게다가 네가 고민하는 표정은 너무 무섭다고."


그쯤에서 스니블이 처음으로 상체를 똑바로 세웠다. 스니블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으으음- 썰매 위에서만 지내니 몸이 점점 굳는 것 같군. 좋아 더글라스. 얼마전부터 네가 꼭 꼬리에 불 붙은 카니쿨라마냥 조급하게 굴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우리의 목적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것이 좋겠지. 혹시 네가 반항심에 썰매를 확 뒤집어 엎어버릴지도 모를 일이고 말야."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반박하려던 더글라스는 그러나 이내 할 말이 궁해졌다. 더글라스는 바로 조금 전에 썰매를 엎어버릴 뻔한 일을 떠올렸다. 스니블은 자책하는 더글라스를 보며 빙긋 웃었다.


"농담이었어. 그래 이 참에 말해보자구. 너는 지금 왜 우리들이 곧장 무벤으로 가지 않고 저 볼품없고 황량한 숲을 향해 가고 있는지 궁금한 거겠지?"


"그렇습니다."


"우리 여정의 모든 움직임은 전부 계획을 위해서야 더글라스. 우린 딜로 숲에서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거든. 우리들은 앞으로도 쭉 함께 움직여야 할 것 같으니까 역시 네게 말해두는 편이 좋겠지만... 그 전에 우선 네 신변에 대해 한번 짚고 넘어가야겠다."


"제 신변이라면..."


스니블은 책의 어떤 특정한 구절을 찾는 사람처럼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더글라스 핀 멜비오른. 나데자의 귀족 출신. 스물 다섯에 스스로 수도원에 입회. 상당히 늦은 나이에 들어왔군. 어디... 바로 얼마 전 사제가 됐고, 주변 사제들과 추기경들로부터 매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지. 음, 네가 성실하다는 것도 이유겠지만 그것보다는 역시 네 가문에서 매달 수도원에 보내오고 있는 기부금 때문일까."


더글라스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스니블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행동은 역시 썰매 위에서 취하기엔 적절하지 않았다. 썰매가 다시 한번 크게 휘청였다. 더글라스는 당황하며 소리 질렀다.


"라히야-!"


카니쿨라들은 아까와 비슷한 재주를 선보였고 썰매는 금방 안정을 찾았다. 더글라스는 몇 번 더 소리를 질러 썰매의 속도를 낮췄다. 더글라스는 차라리 걷는 것이 더 빠를 정도로 속도를 조정한 다음 어두운 낯빛으로 스니블을 바라보았다.


"뒷조사를 하셨습니까."


"설마 그럴 리가. 그런 짓을 하고 다닐 정도로 내 수도원 생활은 한가하지 않았어.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주교가 되면 이 정도 정보는 그냥 귀에 들어오는 거야. 사제들이 신도들을 보살펴야 하는 것처럼, 주교는 사제를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비단 네 신상에 관해서만 알고 있는 것은 아냐. 수도원에서 눈에 띄는 녀석들의 정보는 대부분 알고 있지."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더글라스는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스니블이 이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네가 정확히 어느 쪽인지 알아야겠어. 무벤에서 누군가 오피디아를 빼돌리고 있다는 정보를 준 것은 대주교야. 그리고 스칼과 나의 여정에 더글라스 너를 동행시킨 것도 대주교지. 충분히 의심할만한 상황 아니겠어?"


"두 분께서는 제가 대주교의 세작이 아닌지 의심하고 계시는군요. 제가 파스토르님의 지령을 받고서 두 분의 행동을 낱낱이 보고하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래서 대답은?"


"당연히 아닙니다. 저와 파스토르 대주교님은 관계가 없습니다. 그 분께서 저를 두 분의 동행자로 지목하신 것은 단순히 제게 썰매 대회의 입상 경력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반쯤 누워 있던 스칼이 갑자기 상체를 앞으로 일으켜 세웠다. 스칼은 더글라스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선 당황한 빛이 역력한 더글라스의 눈을 들여다 보며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피오 신께 맹세코?"


더글라스는 가슴에 얹힌 스칼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스칼은 오른손을 쫙 편 채 지그시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불현듯 더글라스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스칼이 짚고 있는 손은, 일전에 놀라운 권능을 보여주었던 손과 완전히 같은 손이었다.

불길한 상상과 동시에 무궁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더글라스는 만약 그 상태에서 거짓말을 하게 되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물론 더글라스는 실제로 확인하지는 않았다.


"맹세합니다. 대주교님과 제 사이엔 어떤 유착도 없습니다. 두 분과 제 사이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스칼이 슬며시 가슴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 더글라스는 질문했다.


"그러니 알려주십쇼. 두 분께서 말하시는 그 계획이란 건 대체 어떤 내용입니까?"


"우리의 계획은 간단해. 모든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말하자면, 스칼과 나는 이 세상을 좀 더 공정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 생각이야."


그때까지 흐릿한 눈으로 주변 풍경을 감상하던 스니블이 돌연 더글라스의 눈을 직시했다. 눈을 마주한 더글라스는 스니블의 하얀 눈동자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더글라스가 느끼기에 스니블은 더없이 현명하긴 해도 확실히 아직 어렸다. 심지어 함께 남진하던 도중 더글라스는 종종 스니블이 그 또래의 청년들보다 더 어리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 스니블의 눈빛은 청년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 눈은 세상의 풍파를 겪을 만큼 겪어 더 이상 무뎌질 곳도 없는 노인들의 눈과 비슷했다. 한 순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린 스니블의 모습에 더글라스가 의아함을 느낄 무렵, 스니블이 천천히 입을 뗐다.


"더글라스, 너는 이 세계가 더없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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