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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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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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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4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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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17)

DUMMY

남부의 수도원은 성직자의 직위에 따라 구역이 치밀하게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반대로 북부의 머리에는, 즉 디스토니아 중앙 수도원에는 공식적인 불가침 구역이 없다.

이 사실에 대해 (세상 모든 일에 신성한 이유를 갖다 붙이기 좋아하는) 몇몇 호사가들은 교단의 교리를 그 이유로 들곤 한다.

먼저 대륙을 이분화하고 있는 두 종교의 교리는 어지간히도 상반되어 있다. 깊이 파고들자면 끝이 없지만 가장 단순하고 넓게 보자면 피오 교단의 교리는 생성이며, 디스토니아 교단의 교리는 파괴다.

호사가들은 바로 그 부분에 주목한다. 생성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은 지극히 제한적이지만 반대로 파괴는 어디서나 자행될 수 있다. 따라서 북부의 머리에 불가침 구역이 없는 것은 디스토니아의 교리와 일맥상통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호사가들은 그런 식으로 주장한다고 쳐도 당연히 모두가 그 주장에 납득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냉철하게 세상을 직시하는 현실주의자들은 (혹은 그렇게 보이고 싶어 안달 난 부류들은) 전혀 다른 주장을 펼친다.

그들은 남부와 북부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대부분의 요인이 그렇듯, 그 사안에 대해서도 기후를 요인으로 꼽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북부의 머리는 언제나 겨울이며 연중 눈이 내리는 지역이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요인은 필연적으로 수도원에 거주하는 신도들의 주된 업무를 장작 생산과 제설작업으로 만들었다.

요약하자면 현실주의자들은 주장은 이렇다. 그들은 수도원에 불가침 구역이 있다면, 며칠 내로 그 구역이 눈으로 완전히 뒤덮여버릴 것이고, 따라서 수도원 측에선 불가침 구역을 제정할 수 없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부류의 주장은 모두 사실과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북부의 머리에는 이미 전통적이고 암묵적인 불가침 구역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원 가장 서쪽에 있는 변두리 지역이 바로 그 구역이다.

사실 어느 누구도 그곳을 공식적으로 불가침 구역으로 지정한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어느 순간부터 신도들은 모종의 이유로 그 근처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신도들이 서쪽 변두리에 발길을 끊은 시기는 정확하게 이십 여 년 전쯤이다.

당시 서쪽에서 눈을 치우던 어린 신도 하나가 그곳에 기거하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남부인이 분명한 그 남자는 눈 위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봐도 무도를 단련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처음 남자를 발견한 신도는 그 장면에 의아함을 느꼈다. 수도원 내부에서 세차게 검을 휘두르는 행동은, 그야 수도원 강령에 따로 쓰여 있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해괴한 행동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이질감이 드는 행동이었다. 가령 결혼한 여성이 다른 남자와 동침하는 것을 제지하는 법은 없다. 하지만 그런 여성이 직장 동료이며 또 매일 마주쳐야 한다면 께름칙한 기분이 드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멍하니 남자를 훔쳐보던 어린 신도는 어느 순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신도는 허겁지겁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돌아가 자신이 본 것을 전달했다.

눈을 치우는 일과 기도와 교리 해석에 신물이 나 있던 신도들은 그 소식에 기뻐했다.

아무튼 눈이 나리고 서릿발이 솟아 오른 한겨울에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남자가 있다면 누구나 호기심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신도들 중 유달리 서글서글하고 또 그 덕에 인맥이 남달랐던 신도들은, 상황을 알고 있을 법한 주교나 추기경들에게 남자에 대해 물었다.

결론적으로 주교와 추기경들의 답변은 신도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주교와 추기경들은 그 남자가 경비병이나 수위 같은 역할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신도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수위라는 직업은 어쨌든 외부의 적으로부터 내부를 보호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도 북부의 머리에 쳐들어올 만한 외부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남자에 대한 무성한 소문과 또 수도원 자체에 대한 비밀스러운 음모론 같은 것이 신도들 사이에서 오갔다.


신도들의 호기심이 자제력을 넘어서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몇몇 혈기왕성한 신도들은 저녁 미사가 없는 날, 스콜라리움의 교육을 마친 뒤 우르르 수도원의 서쪽으로 몰려갔다.

기세등등한 신도 무리와 조우할 당시 남자는 단련을 막 끝낸 참으로 보였다.

웃통을 벗고 있던 남자의 상체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있었다.

남자의 신체는 벌목으로 다져진 신도들의 몸처럼 우락부락한 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나이대의 중년들처럼 허약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꼭 필요한 곳에 꼭 필요한 근육만 자리 잡은 남자의 몸은 마치 몇 십 차례나 담금질 한 쇳덩어리 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고, 온 몸에 가득한 깊거나 혹은 자잘한 상처와 생채기들이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내뿜고 있었다.


신도 무리와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평소 가장 호승심 넘치던 신도 한 명이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무리의 앞으로 나섰다. 이어서 신도는 남자에게 '당신이 누군지 알고 싶다'에 해당하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호의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남자는 말없이 신도들에게 검 끝을 겨누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수도원의 신도들은 기본적으로 호기 넘치는 사내들이며, 심지어 남자는 동료들에게 칼을 겨누는 적대적인 행동을 취했다.

누가 보더라도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결코 눈 위에 피가 흩뿌려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신도들은 얌전히 후퇴했다.

수십 명이 한 남자에게 패퇴한 그 일화는 적막한 북부의 머리에서 화젯거리가 될 법도 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일이 회자되는 일은 없었다.

그날부터 수도원의 서쪽은 암묵적인 불가침 구역이 되었다.

주교들과 추기경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 구역에 대해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남자를 마주한 신도들은 서쪽 구역으로 어린 신도들이 다가가지 못하게 철저히 단속했다.


그렇게 남자가 눌러 앉은 지 십 년쯤 지난 후에는 누구도 수도원 서쪽 구역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코이마 나무 군락은 북쪽과 동쪽에 밀집해 있었으므로 눈이 쌓이지 않는 이상 별 볼일 없는 구역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남자와 대치했던 신도들은 어째서인지 그 날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린 듯 행동했다.

신을 믿는 자들의 입소문치고는 다분히 미신적이지만, 어느샌가 수도원 서쪽에느 페루스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거의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북부의 머리에서 그 사실은 정설이었으며 당연한 상식쯤으로 받아들여졌다.


*


지나치게 성실한 신도들을 제외하면 모두 침대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고요한 새벽 나절에, 세 남자와 열 두마리의 카니쿨라가 디스토니아 중앙 수도원의 서쪽 외곽 지역에 있었다.

세 남자 중 한 남자는 카니쿨라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는 썰매꾼이었다. 썰매꾼은 손을 핥고 엉겨붙는 카니쿨라와 잠시 놀아주고 나서 썰매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선 카니쿨라들이 끌게 될 썰매를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한편 백작은 가만히 서 있었다. 썰매꾼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야 있었지만 백작은 전문가가 아니었다. 백작은 북부를 종단할 때 어떤 것이 필요한지 알지 못했다.

썰매꾼의 행동을 지켜보던 백작이 무심코 수도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작은 따분함에 시선을 돌렸지만 그 행동은 마치 주위에 자신을 지켜보는 이가 없는지 확인하려는 동작처럼 보였다. 맞은 편에 있던 대주교는 백작의 모습에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뭘 그리 두리번대나. 이 근처에는 아무도 오지 않네. 이곳은 페루스가 사는 곳이잖나."


"그렇소? 이상하군. 나는 이곳에만 이십 년 가까이 머물렀지만 페루스를 본 일은 없소."


퉁명하고 진지한 대답에 대주교는 잠시 얼빠진 얼굴로 백작을 관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주교는 백작이 마주 농담을 해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대주교는 기가 찬 심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는 정말이지 세상 일에 한결같이 무심하군. 아니, 됐네. 묻지 말게. 더 말하면 내 쪽이 바보가 되는 기분이 들 것 같으니."


대주교는 백작과의 대화를 포기했다. 대신 대주교는 썰매꾼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썰매꾼은 점검을 완전히 끝낸 듯 보였다. 썰매꾼이 대주교를 향해 고개를 끄뎍였다. 대주교는 믿음직스럽다는 눈빛으로 썰매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점검이 끝난 모양이군. 아무튼 잘 부탁하네. 자네가 맡은 임무는 현 시점에서 보자면 대륙에서 가장 중한 일일세. 그래, 나데자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 같나?"


"보름 정도는 걸릴 것 같습니다."


"그렇군. 보름이라... 아니, 잠깐만 자네 지금 보름이라고 했나?"


대주교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확인하듯 되물었다.

물론 대주교는 눈 앞의 남자가 몇 번이나 북부의 머리와 무벤을 종단한 전설의 썰매꾼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보름은 너무 빨랐다. 북부의 머리에서 나데자까지의 거리를 보름으로 나누면 하루에 이동해야 할 거리는 경악할 정도로 길다.

대주교가 계속해서 의심 섞인 눈빛을 보내자 썰매꾼의 눈썹이 약간 꿈틀거렸다. 썰매꾼은 자부심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상에 따라 하루 정도의 오차는 있겠지만 보름이면 충분합니다."


썰매꾼의 못마땅한 표정을 본 대주교는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대주교는 백작에게 마지막 안부를 전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다음 순간 백작에게서 불쑥 질문이 튀어나왔다.


"떠나기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소."


"그렇군. 뭐든 물어보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사안이라면 흔쾌히 대답해주겠네. 이제 오랫동안 못 보게 될 테니 그래야 하겠지."


"그럼 묻겠소. 혹시 현재 무벤에는 나를 제외한 대륙의 전이자들이 전부 모여 있는 거요?"


"그렇지는 않네. 무벤에 전이자는 두 사람 뿐이라고 하더군. 하지만 곧 그곳에 전부 모이게 될 걸세. 스라바의 보고에 따르자면 현재 무벤에는 두 전이자와 한 성물이 있네. 아쉽게도 전이자들이 어떤 성물을 흡수했는지, 남은 하나의 성물이 어떤 종류인지 알 수는 없네. 그 일은 오직 무녀들과 스라바 만이 가능하고, 그들 역시 눈 앞에서 보아야 제대로 가려낼 수 있는 모양이더군. 뭐, 하지만 내 나름대로 추측하고 있는 구석은 있네. 그것도 신빙성이 꽤나 높은 추측이지."


"어떤 추측이오?"


"으음, 자네도 알겠지만 성물에는 특별한 힘이 있네. 성물에 깃든 관념을 가장 강하게 갈구하는 자를 인도하는, 그런 유별난 힘이지. 듀라트 경 자네가 이 수도원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도 거기 있네. 자네가 오르간을 연주하고 손에 넣은 성물은 손에 해당하는 성물이네. 여기서 손은 힘을 상징하지. 바로 자네가 대륙의 누구보다 강하게 갈구하는 힘 말일세."


거기까지 말한 뒤 파스토르는 백작의 반응을 살폈다. 백작은 지하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래서 그게 어떻단 말이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파스토르는 백작의 눈을 직시하며 설명했다.


"얼마 전 스니블이 갑작스레 무벤으로 떠났네. 그야 컨트 시장이 오피디아 잎에 장난질을 치고 있다는 이유가 있기야 하지만 이 경우 그런 것은 전혀 중요치 않네. 자네가 북부로 온 것을 스스로 운명이라고 칭한 것처럼 스니블이 무벤으로 향한 것 또한 운명이라고 봐야 하네.

자, 잘 들어 보게나 이건 아주 중요한 시사점이 있는 사건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스니블은 그야말로 천재의 전형이네. 인정하긴 싫지만 대륙에 그보다 똑똑한 인간은 없네. 도대체 어느 인간이 그 어린 나이에 악시오마를 해석하겠나?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네. 처음에 나는 무벤에는 흡수되지 않은 성물이 하나 있다고 했지. 아마 그것은 지성을 대표하는 성물일 가능성이 높네. 앞서 말했듯이 성물은 대륙에서 그 힘을 가장 갈망하는 자에게 깃들기 때문이네. 그렇다면 스니블이 흡수하게 될 테지. 누가 뭐래도 그의 지식욕은 남다르니까. 그리고 만약 스니블이 지식의 성물을 흡수하게 되면 상황은 우리에게 훨씬 유리해질 걸세. 자네와 스라바 역시 무벤으로 향하고 있으니 말일세."


대주교의 설명이 끝난 후 백작은 얼마간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멀거니 서 있었다.

파스토르는 백작이 머릿속으로 복잡한 상황을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사실 백작은 파스토르의 복잡한 설명을 거의 귀담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보다 백작은 대주교가 천재 어쩌고 하는 소릴 내뱉은 순간부터, 그저 한 명의 인물을 곰곰히 떠올리고 있었다. 침묵하던 백작이 입을 열었다.


"스니블이 불세출의 천재라는 것은 인정하겠소. 하지만 그는 대륙에서 가장 현명한 인간은 아닐 거요."


"응? 그럴 리가 없네. 자네의 식견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네만, 여기서 내가 말하는 천재라는 것은 단순히 계산이 빠르다거나 암기를 잘하는, 혹은 그저 지식이 많은 인간을 뜻하는 게 아닐세. 그래, 통찰력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겠구만.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통찰력이 가장 비상한 인물이 바로 으뜸가는 천재일세."


백작은 고개를 가로저은 뒤 나지막이 부연했다.


"천재의 정의에 대해선 동의하오. 그러나 나는 남부에 있을 당시 통찰력이 지독하리 만치 비상한 인물을 한 명 만난 적이 있소. 여지껏 살아 있다면 아마 지금쯤 중년이 되었겠군."


파스토르는 순수한 호기심에 그 남자가 누군지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백작이 다른 것을 질문해왔다.


"그 설명은 거기까지면 됐소. 무벤에 두 전이자와 주인 없는 성물 하나가 있다는 것은 이제 알겠소. 궁금한 점이 한 가지 더 있소. 어제 당신이 도망가버려서 제대로 듣지 못한 것 말이오.

요컨대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은 가장 좋게 말해도 배신이나 살육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한 것들이오. 그러니 적어도 나는 당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알아야겠소. 어제 당신은 스스로 새로운 황제가 되겠다고 말했고, 그것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말했소. 명확하게 설명해줬으면 좋겠군. 당신은 황제가 되어서 대체 무얼 할 셈이오?"


"...듀라트 경 자네에겐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구만. 보게, 지금 우리는 멋진 쌍무적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네. 자네가 자드를 끝장내주지 않으면 나로서는 곤란하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네는 자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네. 그것 외에 중요한 것이 있나? 우리들의 진정한 목적을 자네가 알게 된다고 해서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네. 아니, 어쩌면 방해가 될지도 모를 일이네. 따라서 나는 말하지 않겠네. 그러나 잘 듣게 백작. 나는 한번도 자네를 강제하지 않았네. 바로 이 순간조차 말일세. 만일 그만두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그만두어도 상관없네. 그래서 묻겠네 백작. 혹시 마음이 바뀐겐가?"


"마음은 그대로요. 약속은 이행하겠소. 하지만 왠지 내 손으로 제 2의 자드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군."


"재밌는 얘기를 하는구만. 이보게 백작. 그것은 세상 모든 치들이 흔히 저지르곤 하는 실수일세.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결과밖에 없기에 그 결과 만을 놓고 비교질하는 인간들의 못된 버릇이지.

많은 이들이 착각하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 결과는 전혀 중요하지 않네. 그래, 가령 접시를 깨뜨린 두 아이가 있다고 쳐 봄세. 다만 한 아이는 단지 화를 주체하지 못해 접시를 바닥에 던져버렸네. 반면에 한 아이는 저녁 준비를 돕기 위해 접시를 나르다 우연찮게 떨어뜨렸네. 결과는 아주 똑같네. 두 아이가 접시를 깨뜨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 하지만 두 아이의 의도가 다르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의도일세."


"내가 묻고 있는 것이 그거요. 당신의 진정한 의도 말이오."


파스토르는 대답하기 전에 잠시 썰매꾼을 바라보았다.

한참 전부터 이미 떠날 채비를 끝낸 썰매꾼은 두 사람의 대화에 어떤 관심도 없는 듯했다.

어느 쪽이냐 하면 오히려 썰매꾼은 어서 출발하지 않고 밍기적대는 두 사람에게 짜증이 난 것처럼 보였다.

종교전쟁이 끝날 때쯤 세 사람을 북부의 머리로 이끌었던 그 전설적인 썰매꾼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인내심 많고 과묵했다. 그리고 파스토르는 그 점이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썰매꾼이 더 이상 기다리지 않도록 파스토르는 그쯤에서 대화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듀라트 경. 시간이 촉박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성물은 결코 한 자리에 모여선 안되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성물을 흡수한 방랑자들은 한 곳에 모여선 안되네. 왜냐하면 인간은 세계의 일부이지 세계 자체가 되려 해선 안되기 때문일세. 나는 전부 말했네.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네. 내가 해줄 설명은 그것 뿐이네. 자, 설명은 이쯤이면 충분하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이 썰매를 타고 어서 나데자로 가게.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전부 나데자에 준비해 놓았네."


대주교는 사람 좋은 미소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은 뭔가 질문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잠시 후 백작은 마침내 질문을 단념한 듯했다. 백작은 썰매에 올라탔다. 그간 묵묵히 기다리고 있던 썰매꾼은 그제서야 생기 도는 얼굴로 카니쿨라들을 불러 모았다.


"이르-히!"


썰매꾼의 뜻 모를 고함에 열 두 마리의 카니쿨라 중 절반이 두 줄로 나란히 섰다. 흔히 말에 씌우곤 하는 섬세한 마구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카니쿨라의 가슴통과 썰매에 연결된 줄이 전부였다. 금방이라도 썰매꾼이 다음 명령을 내지를 것 같았을 때 대주교가 불쑥 백작에게 말을 건넸다.


"북부에선 말이 필요 없지만, 그럼에도 떠나기 전 한 마디만 더 해두겠네. 일이 심각하게 틀어지는 그런 끔찍한 상상은 하기 싫네만 그럼에도 노파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구만. 듣게 듀라트 경. 만일 자네에게 선택의 시간이 오게 되면 자네는 무엇도 망설일 것 없이 자네의 욕망을 따르면 되네. 명심하게 자네의 욕망이 최우선일세, 그 외의 것은 무엇도 신경 쓸 필요가 없어. 그렇게 욕망을 따르기만 하면, 어느 순간 자네는 영웅이 되어 있을 걸세."


"...영웅이 되는 일에는 관심 없소."


파스토르는 그 대답에 적잖은 답답함을 느꼈다. 그래서 파스토르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이려 했다. 하지만 그때 쯤에는 이미 썰매꾼이 두 사람에게 명백히 화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대주교는 썰매꾼에게 눈으로 사과한 뒤 입을 다물었다.

백작도 대주교와 비슷한 심정인 듯했다. 백작은 보름 동안 자신의 목숨을 내맡기게 될 사내를 괜히 화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썰매에 착석한 백작은 대주교를 바라보았다.


"날이 춥군. 이만 들어가시오."


대주교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썰매꾼에게 눈짓을 보냈다. 썰매꾼은 크게 소리 질렀다.


"야-히! 투!"


선두에 있던 카니쿨라 두 마리의 귀가 동시에 쫑긋거렸다. 선두의 두 마리가 천천히 앞발을 뗐고 이윽고 한 발자국씩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묶어 놓은 줄이 팽팽해지는가 싶더니 곧 썰매가 앞으로 나아갔다. 시작은 느릿했지만 곧 썰매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미끄러졌다.

파스토르는 미끄러지는 썰매를 바라보았다. 혹시 백작이 뒤돌아볼까 싶었지만 백작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문득 제법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 파스토르의 이마에 내려 앉았다. 체온에 곧바로 녹아버린 눈은 파스토르의 이마를 타고 아래로 미끄러져 눈으로 파고 들었다. 파스토르는 눈을 질끈 감으며 얼른 옷깃을 들어 눈 주변을 닦았다.

잠시 후 파스토르가 팔을 내렸을 때 두 사람은 이미 시야에서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파스토르는 하늘을 한번 쳐다본 후 수도원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주 느릿한 발걸음으로 파스토르는 터벅터벅 수도원 내부를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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