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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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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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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0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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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기 (2)

DUMMY

"여정을 끝내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뭔가 말하려던 길버트는 그 전에 잠깐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고선 바닥에 있던 반쯤 남은 술잔을 들었다. 길버트는 술잔을 단숨에 비운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이제 곧 무벤은 턱없이 위험해질 겁니다. 그러니 이곳에 계속 머무르면 험한 꼴을 당하게 되겠지요."


"...수도원에서 들었던 전쟁을 말하는 것이로군. 이것 참 갈수록 태산이군. 그럼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지? 다시 롭스 산맥에 쳐박혀야 하는 거냐?"


길버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버군과 토비군은 그러는 편이 좋을 겁니다. 다만 저는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길버트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토비는 의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는 함께 갈 수 없다고? 왜 그렇지?"


"반드시 이곳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습니다."


토비는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지그시 길버트를 쳐다보았다. 토비의 눈빛은 자신이 납득 할 수 있을 만한 이유를 대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길버트는 한숨을 내쉬고서 설명했다.


"여러분께 이 얘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수차례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사안에 직접 몸을 담그고 있는 만큼 알아둬야 할 권리가 있겠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저는 여관에 돌아오기 전까지 한 남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남자입니다. 여러분은 성문에서 보았던 그 대머리 남자를 기억하십니까?"


토비는 성문에서 실랑이를 벌인 일은 떠올렸지만 남자의 이름까지 떠올리지는 못했다. 그때 바로 옆에서 기억을 더듬던 리버가 확신에 찬 투로 끼어들었다.


"지롱드라는 남자였죠?"


"맞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롱드는 정보길드의 익스퍼트였습니다. 수도원으로 치자면 추기경쯤 되는 직급입니다. 그때 성벽에서 그는 거래할 것이 있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찾아갔습니다."


"정보길드로 말인가요?"


"예. 정보길드로 찾아갔습니다. 사실, 본래의 목적은 단순한 정보 수집이었습니다. 정확하게는 전쟁의 조짐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북부는 종교전쟁으로 일약 성장했습니다. 웅크린 페루스가 언제 뛰어 올라도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저는 북부에서 언젠가 일을 벌일 거라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길버트가 말하던 도중 리버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음, 길버트씨. 말하는 도중에 죄송하지만, 제 머리론 이해가 되질 않는데요. 혹시 정보길드에선 어느 시점에 누가 전쟁을 일으킬지에 관한 정보도 다루나요?"


길버트는 빙긋 웃으며 설명했다.


"리버군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알겠습니다. 물론 정확하게 어느 시기에 누가 전쟁을 벌일 것인지에 관한 정보는 없습니다. 그것은 정보가 아니라 예언에 가깝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구체적이지는 않아도 전쟁이 의심되는 징후들은 몇몇 있습니다.

예컨대 경제적으로 보자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식자재나 원자재, 혹은 공산품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또 그 반대로 예술품이나 사치품의 가격이 수요와 전혀 무관하게 폭락하는 현상도 의심해 봐야겠지요. 찾으려 노력하면 이런 식의 전조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원한 것도 그런 정보들이었지만 결과만 놓고 보자면 이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정보를 구매하기도 전에 그들은 제게 어떤 제의를 건넸고, 그 제의가 너무나도 중대했던 탓입니다."


"제의? 정보길드에서 네게 말이냐?"


"예. 세 사람도 수도원에서 들어서 알겠지만 현재 정보길드는 남부의 역적으로 몰려 있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낭떠러지 바로 앞에 서 있는 상황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런 상황에서 힘껏 발버둥치기 마련이고, 그들 역시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길버트는 거기까지 말한 뒤 술잔을 들어 올렸다. 리버가 얼른 길버트의 술잔을 채웠다. 잠시 못다 한 식사가 이어졌다.

토비가 접시 위에 있던 정어리 몇 마리를 해치웠을 시점에, 문득 찬바람 한줄기가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창가에서 가장 가까운 쪽에 앉아있던 리버는 어이없을 정도로 차가운 바람에 몸을 한번 부르르 떨었다.

창문의 이음새가 느슨한 것인지 바람은 그 후에도 계속 새어 들어왔다.

창문을 바라보던 길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버트는 벽난로 앞으로 이동했다. 벽난로의 불은 꺼질 듯 낮게 타오르고 있었다. 다행히 난로 옆에는 리버가 미리 구매해둔 장작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길버트는 장작들 중 적당한 두께를 골라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길이 다시 살아났다. 불길은 살아났지만 밖이 어두컴컴한 탓에 방의 조도는 낮았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방 안에서 불규칙적으로 번지는 불빛이 네 사람의 등 뒤로 기묘한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길버트는 잠시 동안 말없이 그림자들의 춤을 감상하다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은 북부와 손을 잡고서 저를 차기 황제로 추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더군요."


이후에 길버트는 정보길드에서 나눴던 얘기를 천천히 전부 풀어 놓았다.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리버는 얘기를 듣는 내내 놀라워했고 루나는 얘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저 잠자코 듣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토비는 그것이 중요한 얘기인 것은 알겠지만 그렇게까지 심각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경청했다.

조금 전 던져 넣었던 장작 몇 개가 까맣게 변한 시점에서 길버트의 설명이 끝났다. 팔짱을 낀 채 신음하던 토비는 가만히 길버트의 눈을 응시하며 길버트가 늘어놓은 얘기를 총평했다.


"터무니없는 계획이로군. 애초에 말이다, 네가 황제가 된다고 해서 그 도둑놈들이 다시 영광을 되찾을 거라는 보장이 없잖냐. 네가 황제가 되면 갑자기 세상 모든 사람의 인식이 순식간에 바뀌기라도 한단 말이냐?"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오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대중이란 대체로 카니쿨라에 가까운 존재들입니다. 집단을 이룰수록 개개인은 멍청해지고, 멍청해진 사람은 권력에 굴종하기를 스스로 원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렇게 이미 굴종해버린 후에는 더 이상 진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따르기로 결정한 위정자가 말하는 것이 곧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 그 말은 그러니까, 길버트씨가 황제가 된 후에 공식 석상에서 '사실 정보길드는 남부의 역적이 아니었다!'는 식으로 한 마디만 하면 금세 상황이 역전될 거라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 방법론에 관해서도 저는 지롱드와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길버트는 시종일관 담담한 태도로 모든 질문에 대답했다. 이번에는 토비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물었다.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되질 않는군. 솔직한 심경을 말하자면 그 계획은 어느 망상증 환자의 일기처럼 보이는군. 물론 나는 정치에 관해서도, 또 전쟁에 관해서도 너보다 무식하겠지. 그렇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그것이 터무니없는 계획인 건 알겠다."


"어떤 부분이 그렇습니까?"


"지금 자드 그 녀석이 황제가 되기 위해 남부의 모든 인간을 이끌고 여기로 오고 있잖냐. 그 지롱드라는 놈이 네게 협력한다고 쳐도, 군대와 일개 개인이 맞선다는 것은 말이 안되지. 아니면 너는 자드에게 네가 황제가 되는 편이 더 낫겠다고 조곤조곤 설득이라도 할 셈이냐?"


"당연히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토비군. 저는 승산도 없는 일에 목숨을 걸 만큼 멍청하지 않습니다."


길버트가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자 토비가 민망한듯 콧등을 긁적였다. 토비가 그대로 입을 다물자 다시 리버가 질문을 던졌다.


"어, 그런데 잠시만요. 지금 제가 대화의 흐름을 똑바로 파악하고 있는 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결국 길버트씨는 그들의 제의를 승낙했다는 말인가요?"


"승낙했습니다."


"네?" "뭐야?"


리버와 토비에게서 동시에 의문성이 터져 나왔다. 곧 리버가 당황한 기색으로 물었다.


"아니... 아니, 잠깐만요. 길버트씨는 혹시 아주 예전부터 황제가 되고 싶었다거나..."


"그렇게 보였습니까?"


길버트가 빙긋 웃으며 리버를 바라보자 리버가 고개를 저었다. 리버와 토비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길버트는 설명했다.


"맹세컨대 대륙을 멋대로 주무르고 싶은 욕망 같은 것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얘기는 중요한 내용이 아니니 접어둡시다.

다시 처음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저희들의 여정은 이쯤에서 끝나야 합니다. 여기에 계속 머물다간 분명 화를 입게 될 겁니다.

현 시점까지 대륙에서 발발한 모든 전쟁에서 무벤은 쭉 중립을 유지해 왔습니다만, 이번에는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자드는 더 이상 이곳을 독립적인 도시로 놔두지 않을 겁니다.

저는 그 남자를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궁극적으로 좇는 것은 다름 아닌 효율성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대륙에서 행정과 종교와 문화가 분리되어 있는 것은 지독하게 비효율적입니다.

자드는 이번 기회에 대륙의 모든 것을 통일할 겁니다. 그럴 생각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남부 전역에서 모병할 이유가 없습니다. 병사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입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많은 입은 필연적으로 군비의 과도한 증강을 초래합니다. 그것 역시 너무 비효율적이지요."


그쯤에서 길버트는 리버에게 팔을 뻗어 손을 내밀었다. 의도를 오해한 리버는 길버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길버트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길버트는 리버의 옆에 놓여 있던 술병을 가리켰다. 술병을 건네받은 길버트는 잔을 채웠다. 길버트는 바닥에 놓인 잔을 멀뚱히 바라보면서 혼잣말하듯 말했다.


"더불어 그는 성물을 탐내고 있습니다. 추기경들과 나눈 얘기를 떠올려 보면 아마 확실하겠지요. 이미 저희에게 흡수된 것을 어떤 식으로 사용할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어쨌든 그의 목표는 명확해 보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연유로 여러분은 도망쳐야 합니다. 물론 두 추기경은 저희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추기경의 뜻이지 수도원 전체의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수도원에는 두 추기경과 반목하는 자들도 꽤 있었습니다.

공작이 무벤에 도착한 후에는 늦습니다. 리버군에겐 가혹한 얘기지만 북부의 끝자락쯤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자드는 대륙을 통일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부의 아주 윗지방까지 손에 넣고 싶어하지는 않을 겁니다. 예, 직접 통치할 수 없는 지역에 과도한 투자를 하는 것 또한 비효율적이니까요."


길버트의 말이 끝나자 다시 토비에게서 깊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이리저리 까닥이며 한참을 끙끙 앓던 토비는 어느 순간 눈썹을 크게 꿈틀거렸다. 토비는 콧잔등을 있는 힘껏 구겼고, 그렇게 코를 당기는 바람에 위협적인 두 송곳니가 드러났다. 토비는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이런 젠장맞을 일이 있나! 이봐, 나는 너희를 만난 이후로 영 성미에 맞지 않는 일만 해 왔다. 나는 도망치고, 산에서 밥을 짓고, 도망치고, 설거지를 하고, 또 도망치고, 초막을 짓고, 도망치고, 불침번을 서고, 다시 도망쳐서 방금 전에는 기어코 시장에서 흥정까지 하고 왔다는 말이다!"


토비는 주먹으로 바닥을 툭 내리쳤다. 그 바람에 바닥에 놓여 있던 접시가 크게 덜그럭거렸다. 음식이 쏟아질 뻔했지만 토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매서운 눈으로 길버트를 쏘아보았다.


"이제 상황에 맞춰 적당히 굴러가는 일은 염증이 난다. 그러니 나는 내 마음대로 해야겠다! 길버트 너는 그 도둑놈들의 제안을 수락했고, 아까 분명히 그 일에 승산도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렇지?"


"승산이 있다고 했지만 그것이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승산이 있다는 것은 전부 제 추측일 뿐이고, 무릇 세상 일이란 어떤 식으로도 결과를 미리 알 수 없는..."


"됐다. 거기까지만 들어도 충분해."


토비는 마치 파리를 쫓아내는 것처럼 길버트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토비는 말했다.


"듀라트 영지에 머물렀을 때 그 밀러라는 영감이 그러더군. 네 추측은 틀린 적이 없다고 말이야. 그렇다면 나는 네 편에 붙겠어. 네 말대로라면, 너를 추앙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냐."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토비군."


"이미 결정한 일이야. 번복은 없다. 게다가 순전히 너를 위해 남겠다는 말은 아니야. 나는 그 자드라는 녀석이 하는 짓이 영 마음에 들질 않거든. 내가 느끼기에 그 놈은 타고난 불행 전도사야. 세상을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겠다고? 그런 카니쿨라 같은 짓거리로 누가 행복해진단 말이냐. 그 놈은 대륙의 모든 사람을 한 명 한 명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있잖냐.

당장 우리들만 봐도 그렇지. 그 카니쿨라 같은 자식은 약간 모자라지만 성실한 상인과 잘생긴 아돌프 한 명을 대륙 끝에서 끝까지 도망치게 만들었다. 그 외에도 현명한 황태자를 폐위시켰고, 또 무녀 일족을 모두 죽였다. 내가 유달리 정의감이 가득한 아돌프가 아니더라도 그것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지. 차라리 이 참에 네가 황제가 돼라 길버트. 아무래도 그 편이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더 행복해 질 것 같으니까."


"어. 잠시만요 토비."


기세등등하게 더 말할 것 같던 토비를 리버가 말리고 나섰다. 이어서 리버는 아주 난해한 퍼즐을 마주한 사람처럼 복잡한 표정으로, 그리고 동시에 불안과 혼란 사이의 어떤 감정이 깃든 눈빛으로 토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뭐라고 했죠?"


"길버트의 편에 서겠다고 말했다."


"그것 말구요. 마지막쯤에 했던 말이요."


토비는 잠깐 자신의 발언을 되짚었다. 잠시 후 토비가 그리 상심할 것 없다는 얼굴로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모자라다고 한 것 때문에 그러냐? 하지만 성실하다는 수식도 붙여줬잖냐. 그만하면 네 평가로는 아주 적절한..."


"아뇨! 무녀 일족이 모두 죽었다는 대목이요!"


리버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토비는 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몇 번 갸웃거렸다. 이윽고 토비의 입이 다시 열리려던 순간 그보다 한발 앞서 길버트가 황급히 토비를 제지했다. 길버트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토비군, 굳이 지금 꺼낼 필요가 없는 얘기입니다."


길버트는 근엄한 얼굴로, 동시에 나무라는 눈빛으로 토비를 바라보았다. 도무지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던 토비는 일행을 한번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대로 억울함을 호소하려던 토비는 그러나 리버의 심각한 얼굴을 발견하곤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토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리버 너 이 자식, 설마 여태 모르고 있었던 거냐?"


"제가 뭘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에요? 얼버무릴 생각 말고 제대로 설명해요. 무녀 일족이 어떻게 됐다는 거예요?"


"어, 음, 그러니까..."


입을 반쯤 벌린 토비는 길버트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길버트는 토비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곧 토비는 벽난로와 사랑에 빠졌다. 어느 순간부터 토비는 하염없이 벽난로를 바라보며 갈기털을 매만지는 일에 열중했다.

토비가 끝내 대답해주지 않을 작정임을 깨달은 리버는 곧장 길버트에게 시선을 보냈다.

길버트의 경우엔 술잔과 사랑에 빠진 것 같았다. 원래 그것이 취미였던 사람처럼, 길버트는 애꿎은 술잔을 끊임없이 매만지면서 그 안에서 빙글빙글 도는 호르체를 감상하고 있었다.

두 남자의 외면에 리버는 반쯤 울상을 지으며 결국 마지막으로 루나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루나는 불특정한 무정물과 사랑에 빠지지도 않았고, 리버를 외면하지도 않았다. 루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토비는 있는 그대로 말했어."


루나는 그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루나는 작은 통에 담긴, 꿀에 절인 라즈베리 하나를 꺼내 먹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루나는 타오르는 눈빛으로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리버를 발견했다. 루나는 명백히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태도로 말했다.


"달리 무슨 말을 더 듣고 싶은지 모르겠군. 지금 네가 하고 있을 예상이 맞아. 그 녀석은 내 부족을 멸절시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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