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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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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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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7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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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15)

DUMMY

『···전쟁에 관한 여러 문헌을 들춰 볼 때면 나는 때때로 황당한 기분을 느끼곤 한다.

대부분의 문헌에서, 당시 열병처럼 남부에 번졌던 제후들의 영역다툼을 상당히 참혹한 것으로, 또 대단히 장대한 서사를 내포한 것처럼 표현해 놓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연하게도 그 기록들은 다분히 거짓에 가깝다.

굳이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문헌의 고증을 일일이 따질 필요도 없다.

종교전쟁 이전 남부에서 행해지던 전쟁이란 분명 누가 보더라도 소꿉놀이나 연례행사에 가까운 것이었다.


예컨대 현대에 '전쟁'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시무시한 인상과 당시 전쟁이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은 차원이 달랐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당시의 전쟁이란, 우선 싸울 명분을 서로가 공고히 한 뒤, 전쟁 시기와 전쟁 장소를 몇 달 간 면밀히 조사하고, 전쟁을 치를 인물을 서로 꼼꼼히 선별하고, 또 그 모든 것들이 합의된 후에나 이루어졌다.

심지어 누가 먼저 칼을 휘두르고, 어느 쪽 군대가 먼저 전진하고, 어느 쪽 군대가 후퇴할지 모두 정해 놓은 사례도 있으며,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한 모든 사항은 당일 날씨가 좋지 않으면 자연스레 다음으로 미루어지는 것이 소위 그 시대에서 말하는 전쟁이었다.


전쟁과 관련된 이런 식의 다양한 합의의 주된 목적은 어이없게도 농사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선 파종 시기에는 어느 쪽이건 전쟁을 하려 들지 않는다.

소맥과 대맥은 보통 가을에 파종하며, 그 시기를 놓친 경우에는 이듬해 봄에 파종하게 된다.

이 말은 즉, 늦가을과 늦봄이 가까운 시기에는 결코 전쟁을 치를 수 없다는 말과 같다. 한 해의 파종 시기를 죄 놓쳐버리면 전쟁의 승패 여부와 무관하게 시민들은 모두 굶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완전히 같은 이유로 소맥과 대맥의 수확 시기에도 전쟁은 발발하지 않는다.

특히 대맥은 이삭이 패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굉장히 품이 많이 드는 작물이다. 또 대맥은 적어도 두 번째 만이 완전히 지기 전까지는 반드시 수확해야 하고, 그 후에도 탈곡과 정선 그리고 건조나 저장 작업이 까다롭기에 여기에도 상당한 품과 시간이 소모된다.


제후들 간의 전쟁에서 사상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이유도 근간은 비슷하다.

전쟁에서 너무 많은 청년들이 죽게 되면, 이긴 쪽이나 진 쪽이나 심각한 인력난에 시달리게 된다.

이와 같은 것들은 일종의 절대적인 불문율이다. 즉 서로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이 전쟁이라는 소꿉놀이는, 서로의 명예는 지키되 서로를 완전히 멸절시킬 셈은 아니라는 강고한 의사표현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영지전에서 간간이 목숨을 잃는 자가 나오기는 한다. 다만 그 경우 사상자의 대부분은 생산활동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 기사나 혹은 기사 지망생인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라도 전쟁에서 소작농을 잃는 경우는 없다.


종합하자면 결국 남부에서 치러지던 전쟁은 번농기(繁農期)가 아닌 시기에, 그리고 번농기와 겹치지 않을 시기에 아주 잠시 동안만 짧고 간결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청년들은 농사가 한가한 시기에, 더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후한 보수를 받고 전쟁에 참여했고, 남부와 타영지를 며칠 혹은 몇 달 정도 관광하고 나서는 다시 즐거운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 후반에 벌어진 나데자 공습은 평화로운 전쟁에 익숙해져 있던 남부군의 머리를 세차게 내려치는 철퇴였다.


많은 보수에 혹해 종군한 청년들은, 처음에 그 전쟁이 다른 모든 전쟁처럼 겨울 전에는 끝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시 북부는 미개척지였고, 미개척지에 사는 것은 당연히 미개인들이다. 남부군에 속한 청년들에게는 그것이 뒤집을 수 없는 전력차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북진하는 길은 내내 유쾌함이 넘쳐 흘렀다.

청년들은 낯선 경치를 즐기며 하루종일 참새처럼 저들끼리 떠들어 댔고, 무벤 근처에 다다라서는 생전 처음으로 눈을 본 많은 청년들이 환호하며 눈 위를 뒹굴기도 했다.

물론 청년들 뿐만 아니라 종군했던 귀족과 성직자들도 그런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요컨대 그때 남부군은 그 북진을 어떤 소란스럽고 비밀스러운 시위나, 흥분과 유쾌함이 가득한 축제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유쾌함은 나데자에서 악몽 같은 하룻밤을 겪은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과장이 좀 심한 소설에서 이 야습으로 남부군이 전멸했다는 표현을 본 적이 있다.

전쟁을 소설로 접한 젊은 세대들은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것은 터무니 없는 소리다. 한 군대에서 2할이나 3할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하면 전멸이라고 일컫는 것을 감안해 봐도 터무니 없다.


사실 단순한 통계적 수치로 보자면 그날 있었던 야습에서 남부군이 입은 피해는 미미했다.

미미할 수 밖에 없다.

그야 작정하고 야습을 감행한 북부인들은 무방비로 잠들어 있던 남부군보다야 어둠에 익숙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쳐도 그들은 숲무스가 아니라 엄연한 인간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 실제로 행해본 사람이야 없겠지만, 깜깜한 어둠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타인을 확실히 죽이기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그날 화려한 막사에서 쉬고 있던 귀족들이 대거 사망한 것은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름이 귀한 탓에 일반 병영에는 불을 밝혀 놓지 않았지만, 귀족들의 막사에는 시종들이 언제나 초를 밝혀 놓았고, 그 탓에 목표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야습에서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귀족들이 꽤 사망하긴 했지만, 그 역시 그리 중요한 사건은 아니었다.

당시 남부군의 편제 특성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남부군의 지휘관은 귀족이며 그 전쟁에 참여한 귀족의 수는 대략적으로 추산해도 삼백여 명이 훌쩍 넘는다. 지휘관이 죽었다면 그 자리에 다른 귀족이 앉으면 그 뿐인 일이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그 야습은 통계적인 수치상으로는 그리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하지만 나데자 공습은 남부군의 정신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지옥에 온 것이 아닌가 싶은 무시무시한 밤도, 결국 태초 이래 단 한번도 결근하지 않았던 성실한 공무원에 의해 물러났다.

그날 따라 태양은 이상할 정도로 시리게 하얀 빛을 내뿜었고, 남부군은 그 덕에 빛 아래 드러난 참상을 온전히 목격할 수 있었다.

참상을 목격하자마자 몇 백 명의 청년들이 그 자리에서 졸도했다. 그 청년들은 그때까지 농기구에 손을 베이는 일을 제외하면 평생 피를 본 일이 없던 자들이었다.

당장 졸도하지 않은 자들도 정신적으로는 이미 졸도한 것 같아 보였다.

남부군의 대부분은 그날 아침 각자 기묘한 행동에 착수했다.

예컨대 의미 없이 주변의 눈을 파 먹거나, 눈 위에 하염없이 원을 그린다거나, 침을 질질 흘리는 자들이 대거 발생했다.

정신착란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여기서 그들의 심성이 나약했기에 정신이 망가졌다는 비난은 지나치게 이기적일 것이다. -그런 비난을 일삼는 부류는 지극히 평화로운 대륙에 살며, 한평생 날붙이로 위협 받아 본 적도 없는 주제에 타인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높이려는 부류일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당시 남부군의 시체는 일반적인 죽음을 맞이한 여느 시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곳에는 이마부터 턱까지 지그재그로 길게 찢어진 시체.

눈알이 찢겨 그 사이로 알 수 없는 액체가 질질 흘러나오는 시체.

얼마나 난도질을 당했는지 흉측하게 갈라진 배에서 조각난 내장을 쏟아내는 시체.

끊어질 듯 위태롭게, 그러나 절대 끊어지지는 않은 채 계속해서 덜렁거리는 다리나 팔을 가진 시체.

그리고 턱없이 불행하게도 그 모든 상황을 겪고서도 아직 시체가 되지 못하고 뜻 모를 신음을 뱉는 부상자들이 있었다.

지금 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역시 어둠 속에서 정확한 급소를 노리기 힘들었다는 것이 그 흉측한 시체와 부상자를 만든 원인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 후의 상황은 말할 것도 없다.

당장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북부 관광 사업에 관한 낙관적인 전망을 나누고 있던 청년들은, 하루 아침에 지독하고, 또 종잡을 수도 없는 심각한 향수병에 시달리게 됐다.

야만을 비웃던 남부인들은 그 야만을 직접 맞닥뜨리고선 완전히 넋을 잃고 굴복해버렸다.

장담컨대 그 시기, 그 장소, 그 사람들 중에서 아돌프를 제외하고선 동료나 친구의 죽음에 대해 분노하거나 혹은 북부의 비겁함에 대해 규탄하려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말단 병사부터 단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의 소망은 한결 같았다.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따뜻한 남쪽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한 청년이 나타난 것은 바로 그런 향수의 분위기가 가장 팽배했을 시점이었다.

그 무뚝뚝한 청년은 작위는 있지만 영지는 없는, 그러니까 허울 뿐인 영세한 귀족 중 하나였다.

여기서 고백하건대, 사실 그 청년이 등장한 이후 벌어진 일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는 전쟁이 완전히 종식된 후에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지만, 사람들은 마치 요사스러운 메구에게 홀린 것처럼 누구도 그 당시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은 그 청년이 모두를 한데 모아 놓고 연설 비슷한 것을 했다는 것과, 밤에 사로잡힌 북부군 포로 몇 명을 상대로 어떤 잔인한 짓을 벌였다는 것 정도이다.

그 청년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뒤의 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각자 바닥의 눈을 파 먹거나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남부군들은 어느 시점부터 분노에 완전히 몸을 맡겼다.

그때까지 병영에 맴돌던 끔찍한 두려움과 공포 섞인 공기가 한 순간에 분노 어린 공기로 완전히 치환됐다.

바로 그때부터 남부군은 갑자기 스스로 야만인이 되길 자처하고 나섰다.


·

·


···역사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술되는 것이 원칙이고 또 마땅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종교전쟁은 그렇지 않다.

나는 종교전쟁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항상 그 청년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나데자 공습이 끝난 시점에 불쑥 등장했고, 이후로 남부군의 중심에 서서 단 한번도 패퇴를 기록하지 않은 청년.

종합하자면, 우리는 종교전쟁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당시 듀라트 백작의 기묘한 행적에 대해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 수잠의 종교전쟁 회고록 중 -


*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앞에서 듀라트 백작은 말없이 북부의 대주교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과 턱에서부터 구레나룻까지 이어진 투박한 하얀 수염.

치장이 거의 되지 않은 헐렁한 블리오((Bliaud) 위로 드러난 탄탄한 몸.

그것과 더불어 근엄한 표정과 흐트러짐 없는 곧은 자세와 눈빛 탓에 백작은 마치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추궁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한참 동안이나 대주교를 응시하던 백작의 입이 어느 순간 열렸다.


"난 백작이 아니오. 내겐 더 이상 작위가 없소."


백작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내심 고대하던 파스토르는 그 대답에 약간의 황당함을 느꼈다. 파스토르는 얼떨떨한 느낌을 받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내가 헛갈렸구먼. 자네는 이제 백작이 아니었지."


파스토르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냐는 태도로 슬쩍 백작의 눈을 쳐다보았다. 대주교의 의도는 명백해 보였지만 백작은 그저 무덤덤한 시선으로 대주교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 소득 없는 눈씨름 후에야 파스토르는 결국 본론을 바로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듀라트 경, 나를 따라오게. 출정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네."


파스토르는 이번에는 백작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파스토르는 백작을 지나쳐 그가 서 있던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의 뒤 편으로 걸었다. 백작은 썩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신을 지나쳐가는 대주교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백작이 움직였다. 대주교는 큰 오르간 뒤에 가려진 작고 낡은 나무 문 앞에 서 있었다. 대주교는 나무로 된 낡은 문의 빗장을 걷어냈다. 낡았지만 자주 사용한 덕에 먼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빗장을 연 파스토르는 뒤를 돌아보았다.


"들어가지."


대주교와 백작은 문 뒤편에 있는 넓은 지하를 함께 걸었다. 백작이 지상과 전혀 다른 낡고 습한 먼지 냄새에 슬슬 익숙해질 무렵, 불쑥 대주교가 혼잣말 하듯 말을 꺼냈다.


"남부와 달리 이곳은 지하가 그리 깊지 않아 천만다행이로군. 만약 콜텐이나 무벤의 유적처럼 깊었다면 곤란했을 거야. 요즘 들어 관절이 영 말을 듣지 않거든. 어떤가? 자네도 슬슬 그럴 나이가 되었을 텐데."


"가끔 삐걱거릴 때가 있지만 아직 젊은이들에게 지지 않을 자신은 있소."


"부러운 일이구먼. 육신이 썩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서러운 일이지. 나이를 먹으면 정신은 완고(完固)해지지만 그것을 실천할 수단이 없어지거든."


"내 생각에 그것은 서러워할 이유가 되질 않소. 젊은 놈들은 억센 육신을 가지고 있지만 그 육신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오. 정제되지 않은 힘은 정제된 악과 그리 다르지도 않으니, 차라리 반대의 경우가 훨씬 낫소."


"그렇게 위로해주니 고맙구먼. 그보다 자네와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것은 처음이군. 참, 그러고 보면 예전에 수잠이 자네에 대해 재밌는 말을 남겼었지. 그 여자는 자네의 실종을 그 목적에 따라 배반, 도망, 망명, 도주, 사망, 이탈, 도피로 분류했더군. 마침 자네가 내 옆에 있으니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내가 독차지 할 수 있겠구먼. 그래 듀라트 경, 자네가 생각하기에 자네의 실종에는 어떤 단어를 붙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나?"


백작은 생각에 잠긴 듯 얼마간 말없이 지하를 걸었다. 그리고 파스토르가 혹시 백작이 질문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을 때에야 입을 열었다. 백작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 중에는 없소."


"그것은 이상한 말이구만. 자네에겐 분명 남부를 떠나 여기까지 온 목적이 있잖나."


"목적은 있지만 목적에 따라 내 실종을 분류할 수는 없을 거요. 당신은 성직자니 나보다 훨씬 잘 알지 않소? 신은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소. 그러니 내 목적도 분류할 수 없소.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내 실종에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바람직할 거요."


"호오. 그것 참 멋진 말이로군. 운명, 운명이라."


대주교는 술에 취해 멋대로 아무 말이나 주절거리는 사람처럼 운명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흥얼거렸다. 백작이 내내 무뚝뚝한 태도인 것과 반대로 대주교는 그렇게 연신 서글서글하게 굴고 있었다.

두 사람 앞에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파스토르는 망설임 없이 계단을 내려갔고 백작도 뒤를 따라 움직였다. 내려갈수록 지하 내부의 온도는 점점 올라가는 듯했다. 착- 착- 하는 계단 밟는 소리만 울려퍼지는 가운데 대주교가 불쑥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런데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구먼. 만일 자네의 그 놀라운 무위(武威)처럼 예술적 재능 쪽도 조금 더 풍부했더라면 성물의 흡수 시기가 훨씬 앞당겨졌을 텐데 말일세. 그야 그 오르간은 다루기 여간 까다로운 악기이니 한 곡을 완주하는 데 오래 걸릴 것이야 예상했지만, 그렇다고 이십 년이 넘게 걸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네."


대주교는 계단 밑으로 시선을 향한 채 뒤에 있는 백작에게 그렇게 말했다. 대주교는 무심한 투였지만 백작은 인상을 조금 찡그렸다.


"...어차피 시기는 지금이 가장 적절하오. 북부는 이제서야 겨우 남부와 견주어 볼 만큼 적당히 단합됐소. 만일 내가 이십 년 전에 성물을 흡수했다면, 그때 내가 거느려야 했을 병사들은 아마 코흘리개 꼬마들이었을 거요. 아마 그 시기 북부의 장정들은 징집관들의 말에 코웃음을 쳤을 테니까."


파스토르는 빙긋 웃었다. 파스토르는 백작이 아이들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전쟁을 수행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썩 유쾌한 상상이었다. 파스토르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나저나 생각할수록 자네는 참으로 어이없는 경우구만. 그야 성물을 흡수하는 방법들은 온갖 해괴한 것들이 다 있기야 하네. 가장 흔하고 단순한 경우는 만지는 것이지. 혹은 빛이 뿜어져 나온다거나 물이 샘솟는 경우도 있고, 특정한 형태로 가공해야만 힘이 드러나는 것들도 있었지. 아마 자네는 믿지 못하겠지만 개중엔 성물이 깃든 것을 먹고 소화시켜야만 힘이 전이되는 경우도 있었다네.

그래도 역시 자네의 경우가 가장 특이하구먼. 하고 많은 방법 중 하필 연주라니. 그것도 가장 배우기 어려운 악기인 파이프 오르간으로, 가장 치기 어려운 찬송가를 말일세. 만약 스라바가 정확한 전이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거나, 자네의 예술적 재능이 턱없이 모자랐다면 아마 우리 계획은 영영 실행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네."


백작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후에도 대주교는 지하를 걸어가며 한참이나 이것저것 떠들어 댔다.

처음에 무성의한 답변이나마 꺼내 놓던 백작은 그러나 나중에는 이내 그것마저 않게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대주교는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마침내 백작이 침묵의 미덕에 대해 설파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불쑥 대주교가 자리에 멈춰 섰다.

어느새 두 사람은 지하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와 있었다. 대주교는 다섯 개의 문 앞에 서서 백작을 돌아보았다.


"다 왔구먼. 응? 왜 그리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나. 이리 오게."


대주교는 다섯 개의 문 중 세 번째 문 앞으로 백작을 이끌었다. 백작은 높이가 거의 10큐빗쯤 되는 장엄한 돌문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주교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기엔 왜 데려 온 거요? 이 문은 열리지 않잖소."


백작의 질문에 대주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네. 예전엔 열리지 않았지."


"그 말은 지금은 열린다는 말이오?"


돌 문을 향해 있던 대주교가 몸을 완전히 백작 쪽으로 돌렸다. 어느새 대주교의 눈빛에선 이전까지 보이던 장난스러움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대주교는 진중하게 말했다.


"나흘 전, 남부에서 두 번째 문을 열었네. 이제 자네 차례일세 듀라트 경. 자네가 이 세 번째 문의 주인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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