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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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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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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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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기 (13)

DUMMY

말콤은 정보길드에 처음 들어갔던 당시를 떠올렸다.

사실 초창기에 그곳은 길드라기보다는 조금 외진 곳에 있는 비밀스러운 술집에 가까웠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 선대 길드장은 누구나 인정하는 호방한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을 좋아하는 인물이었고, 무엇보다 자연스레 주변에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유별난 매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뿐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기 좋아했지만 그 정보에 값어치를 매길 생각은 하지 못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대 실드장은 술집에서 오가는 무수한 얘기들이 정보라는 점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정보길드의 시발점이 된 술집을 차린 인물이며, 그런 이유로 나중에 가서는 길드장이라고 불렸다.


사람을 좋아하는 길드장 덕에 술집은 언제나 문전성시였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자연스레 정보가 발생하기 마련이며, 길드장의 술집 역시 수 많은 정보가 오고 갔다.

콜텐의 시민들은 유독 그곳에서 중요한 얘기를 더 많이 떠들어 댔다.

가게에 독하지만 향이 그윽한 술이 가득했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역시 분위기 덕일 공산이 컸다. 길드장의 가게에는 무엇을 말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은 묘한 분위기 같은 것이 맴돌고 있었다.


술집 안에서 중구난방으로 떠돌던 이야기에 처음 값을 매긴 것은 말콤이다.

말콤이 처음 팔았던 정보는 어느 여인의 불륜이었다.

남자들이란, 가끔 자신이 몸을 섞은 여인과의 관계를 자랑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기지 못할 때가 있다. 그리고 보통 한 사람이 그런 주제의 이야기를 꺼내면 대화는 어느새 그 방향으로 쭉 이어지곤 한다.

그날이 그랬다. 그 날 길드장의 술집에서는 유독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말콤은 여느 때처럼 그저 손님들의 푸념과 투정을 가만히 들어주고 있었다. 다만 길드장만큼 인류애가 넘치지 않았던 말콤은 거의 타성적으로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약간 지쳐있던 말콤은 배경처럼 흘러가는 소음 속에서 불현듯 어떤 놀라운 정보를 포착해냈다.

말콤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바로 앞에 있던 테이블에서 이미 만취한 남자가 어느 여인의 외모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하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서는 어느 여인의 성격과, 그 여인의 남자를 내조하는 기막힌 처세에 관해 칭찬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뒷테이블에선 어느 여인의 가슴과 엉덩이가 얼마나 훌륭한지 설파하고 있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말콤은 그 이름 모를 가상의 여인의 외모와, 성격과, 가슴과, 엉덩이를 머릿속에서 조합했다.

놀랍게도, 남자들이 말하는 모든 특징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한 여인이 곧바로 떠올랐다. 시장 건너편에 위치한 양조장의 부인이었다.

말콤은 그 정보를 양조장 주인에게 팔았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양조장 부인은 시장가와 술집 근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말콤은 정의감이나 재미를 위해 정보를 팔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말콤은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도무지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 당시 말콤은 지긋지긋한 길드장의 가게를 떠나 번듯한 자신의 가게를 가지고 싶었다. 한 마디로 돈이 궁했다.


처음 정보를 팔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았을 때, 말콤은 일말의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기는 했다.

그 죄책감이란, 예컨대 집을 중개하는 사람이 하자가 있는 집을 중개할 때 느끼는 것과 비슷했고.

또 뚜쟁이들이 영 부족한 사람을 상대방에게 알선해 줄 때 느끼는 것과도 비슷했다.

게다가 말콤은 돈을 벌어 만족했고, 양조장 주인은 불륜 사실을 알게 되어 만족했겠지만, 그 부인에게 있어서 그 사건은 불행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죄책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후로 몇 번인가 정보를 더 팔고 나서는 완전히 사라졌다.

정보라는 것은 애초에 하자가 있을 수 없으며, 말콤은 스스로를 그저 중간 전달자 정도로 여겼기 때문이다.


수백 가지의 정보를 모으고, 살짝 가공하고, 그것들을 판 후에 마침내 말콤은 자신의 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

선대 길드장의 가게와 똑같이 가게의 겉모습은 술집이었다. 실제로 말콤은 그곳에서 술과, 안주와, 또 가끔 여자를 팔았다. 그래서 몇몇 시민들은 그곳을 술집처럼 이용하곤 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고 나서는 콜텐의 시민들 중 말콤의 가게를 술집이라 생각하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초창기 말콤의 가게를 찾았던 것은 대부분 상인들이었다.

물론 그들을 위한 상인 조합이 있기는 했다. 조합에서는 시장 가격의 안정화나, 분쟁 상황 시 조합원들의 권리 대변, 그리고 상인들에게 각종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조합에서 제공하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조합원 모두의 권익을 위한 것에 불과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두가 아는 정보란 가치가 없는 법이며, 행상인들이 진정 원하는 정보는 오직 그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정보였다.

말콤은 바로 그 부분을 파고 들었다.

말콤은 주요 도시에 사람을 배치한 후 마탑을 이용해 각 도시의 정보를 끌어모았다.

놀라운 일이지만 그 모든 정보는 거의 헐값에 말콤의 수중으로 흘러 들어갔다.

말콤이 제공 받은 정보란 부인들의 잡담이나, 지역 상인 모임(이라 명명하고 실제로는 술자리라 부르는)에서 아무렇게나 떠들어 제낄 정도의 하찮은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쯤 말콤은 이미 정보의 본질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말콤은 일견 무가치한 그 정보들이 필요한 사람에겐 굉장한 값에 팔릴 것임을 알았다.


말콤의 사업은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크기로 부풀었다. 콜텐에 세 곳, 남부의 큰 도시에 각각 한 곳씩 말콤의 가게가 들어섰다.

일이 그렇게 커지자 말콤은 자신의 열 손가락과 두 눈으로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때마침 방문한 도시에서 전쟁고아들을 만난 말콤은 기꺼이 그들을 가게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고, 가게에서 일할 수 있도록 부단히 교육했다.

말콤의 가게가 시민들에게 정보길드(혹은 도둑놈들의 소굴)로 불리게 되고, 또 데려온 아이들이 각자 길드의 익스퍼트가 되었을 무렵, 말콤은 비로소 한가해졌다.


한창 책과 정보에 파묻혀 살던 어느 날 말콤은 문득 특이한 착상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처음에 말도 안되는 상상으로 치부해버린 뒤 머리 한 구석으로 치워 놓았던 그 착상은, 그러나 날이 갈수록 말콤의 안에서 점점 커져만 갔다.

말콤의 착상은 이를 테면 환원주의자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었다.

가령 지질학자들은 세상이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세상의 여러 구성요소들 중 주로 바위나 암석, 혹은 땅이나 산 같은 것에만 관심을 할애한다. 그들은 흙이나 땅이야말로 만물의 근원이라고 여긴다.

수생학자들의 경우엔 세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거대한 대양, 숲의 냇물, 혹은 도심 속 작은 웅덩이를 통해 세상을 관조한다. 그들은 물이야말로 세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구성요소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천체학자들은 세상이 공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통 관심이 없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떠다니는 구름이나 밤하늘의 달, 별, 혹은 하늘 자체다. 그들은 그런 것들이 세상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라 생각한다.


특별한 발상은 아니었다. 아마 그 비슷한 착상을 떠올린 사람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도 모르는 새에 세상을 편의적으로 해석하려 안달이 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말콤은 (물론 그들도 그렇게 여기겠지만) 그 많은 이론들 중 자신의 생각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말콤은 세상이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고 확신했다.

말콤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땅이건, 물이건, 별이건, 사람이건, 어쨌든 관측한 사람이 해석하고 명명한 뒤에나 실질적인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의미라는 것은 반드시 해석과 그에 따른 명명 이후에 생긴다. 결코 어떤 것도 의미를 존재보다 먼저 가질 수는 없다.

이 경우 그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들을 단순히 움직이는 것, 고정된 것, 떠다니는 것이라고 지칭할 수도 없다.

그 말 속에는 각각 움직이고 있고, 고정되어 있고, 떠다니고 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미란 곧 정보다. 의미가 없다면 어떤 것도 의미가 없으며, 그 말은 정보가 없다면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는 말이 된다.

말콤은 자신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후 주위 사람들에게 은밀히 공표했다. 그리고 선대 길드장과, 말콤이 가장 신뢰하는 부하들 -각각 돼지와, 지렁이와, 요리 실력이 형편없는 부관-에게 비웃음을 산 뒤에는 완전히 사장시켜버렸다.


당시의 치욕을 회상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말콤은 현실로 돌아왔다.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말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말없이 주위 풍경을 감상하던 말콤은 그제서야 예전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착상에 빠져 있었는지 절절히 체감했다.

세계가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니, 그야 말도 안되는 헛소리다.

대관절. 세계는 베르미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확실했다.


"마스터!"


마르코의 외침에 말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꽤 오래 과거에 천착하고 있던 탓에 말콤의 정신은 시제를 파악하는 일에 다소 허둥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은 완전히 현재에 정착했다.

현재로 돌아온 말콤은 어째서 자신이 현실 도피적 회상에 빠져 있었는지 기억해 냈다.

주위 풍경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을 만큼 절망적이었다.

물론 세계는 여전히 그 자체로 아름답고 매혹적인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세계의 구성요소들 중 하나일 베르미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런 젠장. 꿈이 아니었군."


땅에서 막 올라온 베르미들은 기지개를 켜듯 날개를 펴고서 앞발을 하늘로 쭉 뻗고 있었다. 마치 태양을 숭배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놈들이 적어도 수십 만 마리는 돼 보였다.

순간 말콤은 한밤의 해변가를 거닐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바닥을 덮은 그 까만 것들이 꿀렁거리는 모습은 꼭 밤에 보는 파도와 흡사했다.

아득한 느낌을 받으며 말콤은 시야를 저 먼 곳으로 돌렸다. 하지만 아무리 시야를 멀리 내던져도 그 까만 바다는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말콤이 공포에 잡아먹히기 바로 직전에 옆에서 마르코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이 상황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건 다 집어 치우십쇼. 그렇게 멍청하게 있지 말고 전방이나 제대로 주시하란 말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몽상주의자보다는 현실주의자에 가까웠던 말콤은 그래서 일단 겸허히 부관의 충언을 수용하기로 했다.

말콤은 가슴이 거의 안장에 닿을 정도로 몸을 낮춘 뒤 고삐를 잡았다.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무게 중심을 낮추는 안정적인 자세였다.

자세는 훌륭했지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말콤은 곤경에 빠졌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두 가지를 동시에 완벽하게 해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말콤은 현재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벌이고 있었다.

말콤은 슬쩍 안장 밑을 내려다 보았다. 안장 모서리의 작은 구멍에 긴 줄이 매어져 있었다. 말콤은 그 줄을 따라 시선을 뒤 쪽으로 옮겼다. 줄 끝에 썰매가 있었고, 다시 썰매 위에는 사제복을 입은 세 사람이 있었다. 스칼과 스니블 그리고 더글라스였다. 말콤이 멍하니 뒤돌아보고 있자 갑자기 더글라스가 마침 잘 걸렸다는 투로 소리쳤다.


"그렇게 급하게 방향을 틀면 안됩니다! 속도를 너무 늦추지도 급하게 올리지도 마십쇼! 말에 매달린 썰매를 생각해야 합니다! 방금 그런 식으로 방향을 틀다가는 뒤늦게 움직이는 썰매에 말들이 넘어질지도 모릅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실제로 말이 조금 휘청거렸다. 말콤은 기겁하며 고삐를 잡고서 말머리를 조정했다.

그 뒤 한동안 말콤은 온전히 승마에 집중했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썰매 쪽에서는 끊임없이 잔소리 비슷한 외침이 들려왔다.

더글라스가 대략 열 번째 조언을 건넸을 때, 결국 말콤은 더 참지 못했다. 말콤은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이보쇼! 더글라스라고 했소? 이런 상황에 어떻게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란 말이오? 당신 말을 몰 줄이나 아는 거요?"


"모릅니다!"


말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더글라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더글라스는 여전히 당당했다. 더글라스는 외쳤다.


"그야 북부에는 말이 없잖습니까! 하지만 당신들은 지금 썰매를 끌고 있습니다! 승마술이야 어떻든 저는 썰매를 끄는 짐승과, 썰매 사이의 역학 관계에 대해서는 당신들보다 훨씬 잘 압니다! 그러니 낙마하고 싶지 않다면 제 말에 따르십쇼!"


반박하려던 말콤은 그러나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말콤은 얌전히 전방을 주시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더글라스의 지시는 계속 이어졌다. 어느 시점에 말콤은 자신의 허벅지에 있는 단검을 포착했다. 말콤은 안장에 매인 줄과 단검을 물끄러미 번갈아 보았다. 말콤이 딱 한번만 단검과 줄 사이의 중매를 서는 것은 어떨까하는 유혹을 느꼈을 때, 마르코가 타이르듯 말했다.


"이상한 상상은 그만두십쇼. 지금 줄을 끊으면 그 반동 때문에 말이 쓰러질지도 모릅니다."


"...외모랑 달리 생각보다 훨씬 말이 많은 친구였군. 그냥 우리 둘이서 도망칠 걸 그랬다."


"저들을 구하자고 한 것은 마스터입니다. 선택을 했다면 책임을 지십쇼. 게다가 저 놈 말에 딱히 틀린 구석도 없잖습니까. 그냥 시키는대로 하십쇼."


말콤은 소외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아무래도 네 사람 중 자신의 편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말콤은 잠깐 '어떻게 너마저 그럴 수 있냐'는 얼굴로 마르코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르코는 '잔말 말고 승마에 집중하라'는 눈빛으로 응수했다. 시무룩해진 말콤은 다시 승마에 집중했다.

긴장을 풀기 위해 부관과 농담을 주고 받았지만, 그럼에도 말콤의 손에서는 식은땀이 삐질삐질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탓에 고삐가 자꾸 미끄러졌고, 그렇게 고삐가 미끄러질 때마다 말콤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무튼 두 사람에게 그 상황은 너무 버거웠다. 도망치는 동안 두 사람은 고작해야 평보 정도의 속도로 말을 몰아본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지금도 뒤에서 떠들고 있는 더글라스의 말처럼, 확실히 말은 썰매를 몰기에 적합한 짐승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곳은 말이 마음껏 달리기에도 적절하지 않았다.

최초에는 낙엽 탓에 제대로 속도를 내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낙엽이 쌓인 지대를 벗어난 지금은 곳곳에 핀 이끼와, 지천에 깔린 베르미 탓에 속력을 낼 수 없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말 편자 밑에서는 쉴 새 없이 콰직- 콰직- 하는 얇은 외골격이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대체 왜 동면에 들어갔어야 할 저것들이.. 우웁."


잠시 후 다시 마르코에게 투정하려던 말콤은 그러나 다음 순간 입을 다물어야 했다.

미적지근한 액체가 말콤의 얼굴을 덮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흐려졌다. 당황한 말콤은 얼른 팔을 들어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죽 비볐다.

시야를 회복한 말콤은 이내 그 액체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아챘다. 더러운 소매에 눅진한 초록색 피가 가득 묻어 있었다. 그 냄새나는 액체는 베르미의 외골격 안에 있던 것이 분명했다.

말콤은 무의식적으로 입맛을 한번 다셨다. 그리고 자신의 입 안에 소매에 묻은 것과 완전히 동일한 액체가 들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콤은 구토했다.


"우웨엑..!"


옆에서 한참 동안 말콤의 구토를 지켜보고 있던 마르코가 적잖이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그것 참 흥미로운 마상재(馬上才)군요. 그런 놀라운 기예는 또 언제 익히셨습니까?"


대꾸할 기운도 없었던 말콤은 말 등에 거의 엎어진 자세로 침묵했다. 그러나 뒤쪽 썰매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와서 말콤은 다시 몸을 일으켜야 했다.

말콤은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썰매 탑승자들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유심히 그들을 관찰하던 말콤은 이내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말 등의 높이가 썰매보다 높았던 탓에 방금 전 게워낸 것들이 그대로 썰매를 덮친 것 같았다.

부지불식간에 봉변을 당한 세 탑승자가 말콤을 향해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리고 말콤은 그 항의를 죄다 무시했다. 아무튼 말콤은 베르미에게 파먹혀 죽는 것보다야 낯선 사람의 토사물을 뒤집어 쓰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말콤은 마르코를 바라보았다. 말콤은 처음에 하려던 질문을 마저 이었다.


"이봐 마르코. 이맘때쯤이면 동면에 들어가 있어야 할 저것들이 왜 갑자기 단체로 뛰쳐나온 걸까?"


"젠장할. 전들 알겠습니까? 저는 요괴도 아니고 요괴학자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보다 멍청한 질문은 그만하고, 제발 말을 모는 일에만 집중하십쇼. 뒤에 저 잡종 친구가 했던 말처럼 여기서 낙마하면 우린 전부 끝입니다. 마스터가 저 놈들을 살리겠답시고 썰매와 말을 묶어 놓아서, 이젠 저 혼자 도망칠 수도 없단 말입니다 제기랄!"


이번에도 말콤은 부관의 충언을 겸허히 수용했다. 물론 말콤은 충고 도중에 등장한 각종 비속어와, 멍청하다는 발언까지 수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말콤은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무벤의 성벽이 흐릿하게 보였다. 어림잡아 이천 큐빗 정도 남은 것 같았다. 성벽 안으로 진입하기만 하면 반드시 하극상에 대한 대가를 치러주겠다고 다짐하며 말콤은 고삐를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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