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굴(4)
거짓말이야. 아닐 수도 있고.
“야아, 바렌틴 가문의 여자가 남편보다 갑옷과 자는 날이 더 많다는 말은 역시 헛소문? 그렇게 화끈한 줄 알았으면 나도 꼬셔보는 건데.”
페리가 낄낄거리다 산디아가 못마땅한 얼굴로 쏘아보자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상대가 아르반의 포고스 백작인데 용케 알려지지 않았군요. 음유시인인 제가 그런 사랑 이야기를 모르다니요.”
마엘이 웃으며 말했다. 산디아는 불쾌한 얼굴인 채로 대꾸했다.
“대부분 모른다. 외국의 귀족이라고 해도 정식으로 혼인한 것이 아니고, 아무래도 상대가 아르반의 백작이니 남자 쪽 가문에서도 쉽게 허락할 리 없다고 생각해서 애초에 반대했으니까. 하지만 다행히 이곳에 잘 정착하신 것 같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서 분명 버림받거나 기껏해야 정부 노릇이나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에 비해 산디아의 어투는 신랄했다. 메칼로가 한숨짓듯 웃었다.
“너무하네. 하코브 네르세스를 그 정도 남자로밖에 안 봐줬다니. 그는 헬리온 클라우스의 식탁에 앉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야. 다 죽어가며 달랑 두 마디 한 걸로 우리를 대륙 북쪽 끝에서 남쪽 끝으로 오게 만든 사람이기도 하고.”
메칼로의 말에 대륙 북쪽 끝에서 온 사람들 사이로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게. 기껏해야 클레타 북쪽 지방이나 좀 돌아다니던 우리가 겨울에 눈 내리는 나라까지 올 줄이야. 그것도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을 맡아서 말이지. 생각하니까 우울해지네.”
페리가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너무 실망하지 마. 기분전환 할 일이 생겼다.”
어쩐지 즐거운 목소리로 메칼로가 대꾸했다. 그는 고개를 꺾어 조금 열린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발소리가 부산하군.”
에밀리오가 입술을 당기며 중얼거리고, 산디아는 말없이 무기를 점검했다. 스텔리안이 어리둥절해서 좌우를 돌아보다가 산디아를 보고서야 재빨리 활과 화살을 챙겼다. 페리가 메칼로의 옆으로 가서 창밖을 보고 혀를 찼다.
“보통 은혜를 베풀면 무기를 들고 떼로 몰려오는 게 아르반의 풍습?”
“짧은 시간에 저렇게나 사람을 모은 걸 보니 바실의 아들들 명성이 거짓은 아닌 것 같네요. 바실의 열두 아들과 메칼로 용병단이라. 오늘 새로운 노래가 만들어질까요?”
자칭 음유시인인 마엘이 짐을 뒤져 낡은 리라를 꺼냈다. 그가 길고 가는 손끝으로 현을 타자 볼품없는 악기에서 높고 투명한 음이 구르듯 퍼졌다.
“첫날부터 열 내지 말고, 적당히 해치우고 그대로 나가서 시킨 일이나 잘 해와. 다들 밤에 다시 보자. 에밀리오. 죽이지 마. 남의 집 마당에서 놀 때는 예의를 지켜야지.”
어느새 발코니에 나가 있는 소년에게 메칼로가 말했다. 그 말에 에밀리오가 발코니에 기어 올라온 남자의 목을 조이고 있다가 짜증내는 얼굴로 팔을 풀었다. 남자는 발코니와 이어진 지붕에서 기와조각과 함께 미끄러져 떨어졌다.
“이런 곳 괜히 왔어.”
불평하며 소년이 발코니 아래로 훌쩍 몸을 날렸다.
“저희도 가겠습니다.”
산디아가 스텔리안과 함께 복도 맞은편 방문을 열며 말했다. 이미 창문을 통해 들어와 있던 두 남자가 그녀에게 달려들었으나 가까이 오기도 전에 얻어맞은 것처럼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산디아는 걸음도 늦추지 않은 채 그들을 지나쳤고 스텔리안은 쓰러진 남자들의 몸에서 재빨리 화살을 뽑아낸 다음 뒤를 따랐다. 화살을 뽑힌 남자들이 딱한 소리를 내며 꿈틀거렸다.
“음유시인, 빨리 안 오면 두고 간다.”
페리가 큰 소리로 말한 다음 좁은 복도를 기세 좋게 내달리자 마엘도 우아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계단 옆방에서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와 누군가의 비명이 연달아 울렸다.
“다치기 싫으면 바짝 붙어!”
“그럼 피가 튀잖아요.”
페리의 커다란 목소리와 마엘의 조신한 대꾸가 들려오고 창밖으로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와 비명이 한 번 더 들린 다음 여관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누군가 달리는 소리, 부딪치는 소리, 숨을 들이켜 신음하는 소리가 바깥의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왔지만 메칼로의 주변은 고요했다.
잠시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메칼로는 침대 머리맡의 작은 탁자를 집어 들었다.
“나갈 구멍이 많은 건 좋은데,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놈들한테는 별로 쓸모가 없잖아.”
한숨을 쉬며 그가 방을 나섰다. 나서는 것과 동시에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날카로운 바람이 일었다. 이어서 북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그것이 화살촉이 나무에 박히는 소리였다고 깨닫기도 전, 활을 쏜 사람들에게 탁자가 날아들었다.
가장 앞에 있던 사람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며 뒷사람을 덮쳤다. 뒷사람들은 활을 집어던지고 칼을 빼들었으나 제대로 일어나기 전에 어깨나 머리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기절했다.
메칼로는 단숨에 세 명을 쓰러뜨린 다음 계단 아래로 쓰러진 한 명을 집어던졌다. 욕설과 비명이 한차례 울리고 계단 쪽으로 발소리가 우르르 몰려왔다. 그러나 쉽게 올라오지는 못한다. 한사람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계단과 복도에서 여러 명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이 의미 없다는 정도는 그들도 알았다.
그 사이 메칼로는 계단 옆의 작은 창을 타고 나가 벽에 붙었다. 여관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밖에서 대기하던 자들은 세 방향으로 흩어진 일행을 쫓아서 멀어졌고, 얼마간 입구 근처에 있던 자들도 조금 전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안으로 뛰어 들어간 것이다.
창틀에 가볍게 매달렸던 메칼로가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아래층 발코니로 뛰어내렸다. 거기에서 다시 땅으로 내려간 다음 망설이지 않고 여관 입구로 뛰어들었다.
그의 목표물은 입구에서 조금 오른쪽 벽 가까이에 서 있었다. 출입문을 열고 당당히 뛰어든 사람이 설마 적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계단 쪽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누군가 달려들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한쪽 팔이 꺾이고 목을 잡힌 후였다.
“팔리!”
계단과 소년의 중간께 서 있던 젊은이가 외쳤다. 메칼로와 남자의 시선이 팔리의 정수리 너머로 맞부딪쳤다. 어두컴컴한 식당 안에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메칼로의 칼이 소년의 가슴팍 옷자락을 뚫고 나왔다.
젊은이가 찢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얼굴로 얼어붙어 있었다.
“이봐, 셈레의 꼬맹이.”
머리카락을 당겨 팔리의 고개를 뒤로 젖히며 메칼로가 속삭였다.
“이걸로 두 번째 빚진 거다.”
말하고 나서 밀어젖히자 소년의 몸이 바닥에 뒹굴며 형 쪽으로 나가떨어졌다. 허겁지겁 동생을 끌어당긴 베할은 그제야 메칼로의 칼이 교묘하게 옆구리의 옷자락을 뚫고 들어와 가슴팍으로 비스듬히 튀어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 개새끼가!”
동생이 죽는 줄 알았던 충격에 놀림 당했다는 분노까지 겹쳐서 베할이 악을 쓰며 벌떡 일어났다. 일어났으나, 거기서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야 했다. 분명 다섯 걸음은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메칼로가 어느새 코앞이었다. 뿐만 아니라 거꾸로 잡은 칼자루 끝이 베할의 턱 아래에 있었다.
폼멜의 차가운 감촉이 목울대를 꾹 눌렀다가 떨어졌다. 장난 같은 동작이었으나 베할의 등에 더운 기운이 훅 끼쳤다.
누구보다 눈과 손만은 빠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머니 끈 베할이라는 악명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화가 나서 잠시 눈이 뒤집혔다고 해도 상대방이 목을 움켜쥘 수 있을 정도까지 다가오도록 모를 수는 없다. 모를 수가 없는데······.
‘위험해. 이놈은 위험해.’
소매치기의 본능이 몸을 차갑게 식혔다. 동생을 꽉 잡은 채로 그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그 사이 계단 쪽에 몰려있던 사람들이 메칼로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만두라고 하고 싶었지만 대부분 셋째 형과 열째 형에게 빌려온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명령은 듣지도 않겠고, 열두 형제 중 가장 독한 두 명 밑에서 일하는 자들이니 실력을 보고 긴장할지언정 겁을 먹지는 않는다. 연락에 응해 가장 먼저 달려온 만큼 충성심도 행동력도 남들과 달랐다.
게다가 상대는 하나. 이쪽은 베할 형제를 빼도 여섯 명이었다. 머릿수를 따지자 베할도 조금씩 기대가 고였다. 위험한 놈이라지만 우리는 여섯. 기회를 봐서 기습하면 제아무리 잘 나가는 용병이라도······.
그러나 희망은 고이는 속도보다 빨리 새어나갔다.
가장 먼저 다가간 남자가 억 소리를 내며 허리를 꺾는 순간 메칼로의 칼은 그의 배에서 빠져나와 왼쪽 남자를 후려치고 있었다. 왼쪽 남자가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휘두른 철퇴는 허무하게 빗나갔다. 뒤와 오른쪽에서 단검을 든 남자들이 함께 달려들었지만 낮은 발차기로 한 명, 다른 한 명은 베기로 거의 동시에 당했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고 생각하는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른 두 명은 미처 가세할 생각조차 못하고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메칼로는 처음처럼 똑바로 서서 칼을 늘어뜨리고는 아직 움직이지 않은 두 명을 힐끗 쳐다보았다. 무심한 녹색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모욕당했다는 것도 모르는 채로 두 사람이 움찔 떨었다.
“세, 세라의 신자냐?”
발차기에 쓰러졌던 남자가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어 뒷걸음치며 물었다.
“대답해 줘야 하나?”
메칼로가 태연히 되물었다. 아직 멀쩡한 두 명이 동료들과 메칼로를 번갈아보며 망설였다. 상대가 전사의 수호신인 세라의 신자라면, 그의 신체적 능력은 어느 면에서든 평범한 인간을 상회한다.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세라의 신자라면 그것을 밝히는 호부를 착용해야 하는 거잖아. 세라의 가호를 받으면서 감추는 것은 신전에서 금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체 할 거냐!”
“아아.”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이 메칼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타와 아르반 포함해서 대륙을 사이좋게 나눠먹고 있는 나라들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말은 들었다. 신들이 주신 힘은 신들의 정의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나 어쩐다나. 그래서 뭐? 이 범죄자의 여관에서 신들의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불만이냐?”
빙글거리며 묻는 메칼로에게 더 이상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들의 정의가 이루어진다면 가장 먼저 천벌을 받을 것 같은 남자들이 우물거리며 베할을 쳐다보았다.
‘조금만 더 버텨볼까?’
베할은 아주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 좀 있으면 다른 자를 쫓아갔던 사람들이 여관으로 돌아올 것이다. 다 모이면 열다섯······.
하지만 그들이 한꺼번에 올 리도 없고, 온다고 해도 저 남자는 여관 문이 열리기도 전에 아직 무사한 네 명을 모두 해치울 수 있었다. 베할은 확신했다.
“나, 나는 바실의 아들 베할이다. 우리 이름 정도는 들어봤겠지?”
“아까 그 자리에서 네 동생이 들려줬지. 다들 인사성이 밝은걸. 소문과 달리 예의바른 집안인가 봐.”
메칼로가 대꾸했다.
“예의바르기만 할까. 댁은 용병 같은데, 그렇다면 바실의 열두 아들 가운데 셋째도 잘 알 거야.”
과거에 제법 이름이 난 용병이었던 셋째 형을 들먹인 베할이 메칼로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도 셋째인 아람은 무기상으로 제법 유명했다. 클레타까지 판로를 가지고 있는데다 용병 시절부터 알음으로 생긴 고객층도 두꺼웠다. 현역 용병이라면 무시하지 못할 이름이다.
그러나 메칼로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셋째는 모르겠고, 범죄자 형제가 열둘이라니 궁금한 건 하나 있다만.”
“뭐······?”
메칼로는 칼을 집어넣고 저벅저벅 베할에게 다가갔다. 상대는 무기도 들지 않았지만 베할은 달아나고 싶은 것처럼 다리를 움찔거렸다. 메칼로는 베할의 바로 앞까지 가서 저보다 한 뼘쯤 작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베할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마주보았다. 조금 전까지 형의 부하들을 귀신같이 쓰러뜨리던 남자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상쾌한 얼굴로 말했다.
“너희 형제들은 소매치기에 용병출신 무기상, 지금 데려온 녀석들을 보니 그밖에도 꽤 재미있고 지저분한 일들을 하는 모양인데, 그 가운데 쓸 만한 도둑도 있나?”
- 작가의말
1. 본문에 등장하는 팔리는.....이 이름은 우연입니다. 절대로 우연이에요. 팔리님, 믿어주실 거죠?
2. 그렇지만 음...내 별명을 등장인물 이름으로 써도 좋아요. 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댓글 달아주시면 마음 편하게 사용하겠습니다.
지나가던 여인1이나 불량배2 같은 단역도 괜찮은가요? 혹은 상표나 상점명이라든가 아니면 뭔가 미움받을 것 같은 악역으로 쓰일지도 몰라요.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지원해 주세욬ㅋㅋㅋ
사람이 엄청나게 많이 나올 예정인데 이름 짓기 힘들어요.
3. 프롤로그 빼고 고작 네 편일 뿐인데 주연급 인물이 일곱 명이나 나왔어요. 저 사실 굉장히 걱정스러워요. 이 사람들 기억은 할 수 있는 건가요. 헷갈리시는 거 아닌가. 그냥 뭐가 뭔지 정신없는 상태인가....
게다가 주연급 인물들은 아직도 많이, 마않이 남아있다는 무서운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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