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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품글 님의 서재입니다.

만월검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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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해품글
작품등록일 :
2022.07.03 19:15
최근연재일 :
2022.10.09 17:30
연재수 :
95 회
조회수 :
5,675
추천수 :
553
글자수 :
531,864

작성
22.09.15 17:53
조회
43
추천
6
글자
12쪽

전신의 죽

DUMMY

초요의 방으로 들어서자, 지금껏 느껴본 적 없던 서글픔과 아쉬운 감정이라는 것에 제대로 한방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가슴 한켠이 찌릿하게 아파오는것을 느끼는 순간,

초요와 봉순과 자신이 저렇게 함께 어질러 놓던 순간이 벌써 아주 오래전의 기억처럼 그리워지고, 손끝에 느껴지는 그들의 흔적에 대한 감촉에 그저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연수가 초요의 방 앞을 나선 후, 그녀의 기억 속에 심기라도 하려는 듯이 주변을 찬찬히 구석구석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음을 다잡듯이 붉어진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뜬 연수가, 그녀의 단전 앞으로 두 손을 모으며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왕부의 전체가, 보이지 않는 투명한 물살에 밀려나는 듯이 지금의 세상위로 다른 세상이 덮여 씌워지고 있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물을 긷고 바쁘게 걸어가는 하녀도, 같은 걸음으로 같은 양만큼의 물방울을 튀기며 지나가고 있었고,

마당 한쪽에 예쁘게 자라난 화초들 위를 떠다니던 나비도, 같은 날개 짓을 펄럭이며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꽃잎에 사뿐히 내려앉고 있었다.


연수가 선왕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문지기 병사가 말한 것처럼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딸을 기다리며 불안해하고 있을 아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속에서,

그의 처소 앞의 야외 탁자에 앉아 느긋하게 오후다과를 즐기던 선왕이 다가오는 연수를 발견하고 반갑게 맞아주고 있었다.


“그래 연수가 왔구나.”


처음 주선왕을 만났을 때처럼, 또다시 선왕에게 가까이 다가가던 연수가 그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네, 주선왕전하를 뵙습니다.”


“가까이 오너라. 차가 참으로 향기롭구나!"


인자한 표정의 선왕이 연수를 위해 ‘또르르’ 소리가 나도록 찻물을 따라주며, 찻잔으로 떨어지는 찻물의 소리처럼 맑게 웃고 있었다.


“우리 초요가 살아 있었다면, 이렇게 먼 곳에서 온 손님을 외롭게 지내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본 왕이 염려되어, 부친께서 일부러 너를 보내어 이 왕부의 적적함을 달래려 하셨음을 안다.

덕분에 네가 이곳에 함께 있으면서 말동무가 되어 주었으니, 본 왕도 그동안 근심을 조금이라도 덜 수가 있었구나.”


“송구합니다. 선왕전하 ! 초요가 사용하던 방은 전하의 말씀대로 이전의 모습 그대로 남겨두었지만, 전하께서 너무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신다면 초요도 마음 편하게 이곳을 떠나지 못할 것이옵니다."


미소를 그대로 머금은 채로 선왕이 차를 음미하며, 연수를 바라보았다.


“그래 본 왕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 이란것이 그러한 것을 어떻게 하겠느냐...

한번 온 세상을 떠나는 것도 순리이겠지만, 알면서도 보내기 힘든 것이 또한 부모의 마음인 것을 말이다.”


연수도 더 이상 해야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맑은 찻물이 가득 담긴 찻잔 안으로 들어찬 하얀 구름이 예뻐 보여서, 옥빛 찻잔을 두 손으로 오목하게 받쳐 들고 먼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 떠나는 날이라고 하였지? 그동안 고마웠구나. 언제든 아쉬운 일이 있으면 본 왕을 찾아오도록 하여라. 우리 초요를 대신해서, 너 하나는 본 왕이 잘 지켜주고 싶구나!"


주선왕의 아쉬워하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자, 인간들의 감정에 또 한 번 연수의 코끝이 찡하게 울려오고 있었다.


“말씀만이라도 너무 감사합니다. 주선왕 전하! 다음번에 뵐 때까지, 옥체 보존하시고 무탈하게 잘 지내십시오.”


연수가 가만히 일어나자 일어선 그녀의 등 뒤로 하늘빛이 가려지고,

그늘 속에 드러난 주선왕의 얼굴위로 짙게 배인 그리움의 흔적은, 지금 그의 나이보다는 몇 배나 더 많은 세월이 지나간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참, 네가 타고 갈 마차와 함께 부친께 전해드릴 선물을 좀 준비하였으니, 편안하게 돌아가도록 하여라.”


“네, 선왕전하 감사합니다!"


연수가 선왕의 앞에서 돌아 서기전, 짧게 수인을 맺으며 한손을 들어 그를 향해 선기를 날려 보냈다.


‘이제 모든 것이 원래 주어진 운명선 위로 올라왔습니다. 선왕 당신에게 또다시 나는 원래가 없던 사람이구요.’


연수가 그의 앞에서 물러 날 때까지 더 이상의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



넓은 창틀 안으로 거침없이 쏟아지는 밝은 햇살 속에, 갖가지 꽃 향이 섞여진 풋풋하고 달콤한 냄새가 오래간만에 그녀를 편안한 기분으로 감싸주었다.


하지만 초막 한쪽에서 ‘딸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으로 풍겨오는 익숙한 음식 냄새는, 지금 이곳이 더 이상 아늑한 꿈이 아닌 현실 속이라고 그녀를 자극하는 것 같았다.


가볍게 딸그락 거리던 소리가 어느새 제법 묵직하게 바닥을 긁는 소리로 바뀌며, ‘탁탁’ 거리며 타들어가는 나뭇가지 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는 구수한 불 냄새가 ‘폭폭’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르는 음식냄새와 섞여, 초막 안을 거칠게 휘젓고 다녔다.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여전히 누운 채로 자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검고 긴 머리를 대충 묶어 넘기고, 하얀 도포자락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끈으로 형편없이 아무렇게나 묶어 올린 모양새의 남자가 그녀의 눈 속으로 희뿌옇게 들어왔다.


너무 밝은 햇살 탓인지, 모든 사물이 현실 같지 않게 희뿌옇게 보이고 있었지만 부뚜막 앞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과 씨름이라도 하는 듯이 용을 쓰고 있는 남자는, 온몸이 버거울 만큼 어색하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타요...”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음식 앞에서 음식이 타고 있는 것도 모르다니, 한심해 보였다.


“나무를 좀 빼던지, 아니면 물을 좀 뿌리던지..."


침상에서 반쯤 일어나 기대어 앉으며, 자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큰소리로 말해줄 만큼 기운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아 ... 알겠소...! ...? 일, 일어난 것이오?"


놀랄 만큼 반가와 하는 표정이었지만, 지금 그는 제 일하나 책임지기에도 너무 빠듯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잘, 안되오 ... 이런, 이런...!”


한심해 보이는 모습이 참 신기해 보이는 남자를, 초요가 가만히 지켜보았다. 여전히 저만치에서 계속 동동거리고 있었다.


나무를 좀 빼내려던 찰나, 하늘한 도포자락 끝에 닿인 불씨가 순식간에 그의 소맷자락으로 옮겨 붙으며 타고 올라가려 하였다.


놀란 남자가 불씨를 털어내듯이 급하게 운기한 손을 흔들자, 부뚜막에서 발갛게 타오르던 불씨가 순식간에 싸늘한 재로 변해 버렸다.


“신선이군...”


자운이 맥없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넓게 펼쳐진 꽃밭에서 나비와 장난이라도 치는 듯이 허공에 발길질을 쳐대고 있는 하얀 말이 ... 아마 숙이 인것 같았다.


정치마를 발견한 자운의 눈빛에 생기가 돌기가 무섭게, 그들에게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비틀거리며 침상에서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죽 그릇을 들고 다가오던 전신이 놀란 나머지, 죽 그릇은 옆의 탁자위에 던지듯이 놓아두고 자운의 어깨를 가슴으로 받아 안으며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는 그녀의 몸을 두 손으로 굳건하게 잡아 세워주었다.


“자운, 아니, 초요...누구든, 어디를 가겠다고 이렇게 나서는 것이오!”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에 힘이 풀려 침상에 주저앉으며, 그녀를 지켜주는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누구... 신지?”


“내가... 기억나지 않는 거요? 어쨌든 지금 당신은, 인간의 몸으로는 견디기 힘든 길을 정치마와 함께 헤치고 오느라 기력이 많이 상했소.

회복을 할 시간이 필요하니, 갑갑하더라도 가만히 누워 기운부터 좀 차린 후에 다른 일도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그녀의 몸이 주저앉는 이유가, 단지 어지럼증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신뢰감은, 그녀의 무모한 의지를 녹녹하게 해제시키며 그의 손길대로 순순히 따를 준비를 하도록 만들었다.


다시 침상에 올라앉은 자운이 그가 덮어주는 이불에 다리를 묻고, 어느새 죽 그릇을 들고 그녀의 앞에 초췌하게 서 있는 신선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녀에게 숙이를 맡기고 간 사내였다.


‘어쩐지...’


인간이라고 하기엔, 처음 만남부터 너무 현실적이지 않게 잘생겼었던 ... 그날의 기억들을 더듬고 있었다.


‘전신의 정치마... 그래, 연수언니가 그랬었지. 전신...’


“자운 !”


멍하게 앉아있는 그녀를 일깨우기라도 하듯이 전신이 불쑥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


전신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번졌다.


“당신의 이름, 기억이 난 건가 ? 그럼, 우리의 기억도...?”


하지만 아무 대답 없는 자운이, 또다시 그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아, 아니. 그저 난 이게 너무 하고 싶었어.”


“...뭘요?”


자운의 반응에 어색하기 만한 전신이 얼른 안색을 바꾸며 다른 말을 잇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죽 먹이는 거.”


“...?”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망천강의 도하노인을 찾아가서, 그가 경험한 인간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정말 즐거웠는데..."


‘또, 도하노인 인거야?’


얼마 전 마존도 도하노인 이야기를 그녀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던 것 같았다.


“그는 망자들을 건네주고 노잣돈이 생기면, 언제든 자유롭게 인간계에 내려가서 노잣돈을 다 쓸 때까지, 그들과 어울리며 구중천과는 다른 색다른 경험들을 많이 할 수 있었거든.

슬픈 일을 하는 대가인 거지.”


자운 또한 인간계에 있어봐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들의 감정은 신기할 만큼 복잡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바쁘기 때문에 슬픈 감정 따위에 오래 머무를 틈이 없이, 그 다음날을 살아 내야하는, 강하고 부지런한 존재들이었다.


“특히 도하노인은 남녀의 사랑 분야에 관심이 많은 편이지. 그의 이야기를 다 믿을 필요는 없지만, 어떤 이야기는 너무 공감이 가기도 하거든. ”


전신이 자운을 향해 죽 그릇을 살짝 들어 올려 보이면서 쑥스럽게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인간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정성껏 죽을 끓여서 직접 떠먹여 준다고 하더군.

아픈 사람에게는 맛있는 죽이 필요한 게 아니고, 자신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사랑이 담뿍 담긴 음식이라는 것이 중요한 의미인 것이라고...

그래서 본군도 그런 이가 생긴다면, 죽을 끓여서 직접 먹여주는 상상을 했었지...이렇게.”


전신의 말이 점점 작게 들렸다.


“네... 그렇군요.”


그의 말이 끝까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대답에 확신이 없는 자운의 말도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전신이 자운의 침상 앞에 의자를 당겨 앉으며 죽 그릇을 들고 앉아 자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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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24.01.19 22:44
    No. 1

    인간 초요였던 운이와 봉순이, 주선왕과 이별하는 연수의 마음이 조용하면서도 애잔하게 그려지네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인간으로서 인연을 맺고 헤어짐을 겪는 모습에서 여운이 남아 좋아요.

    전신은 오늘도 전신 했군요. ㅋㅋㅋ
    이 멋진 두 남자는 운이 앞에서 너무 귀엽고 어설퍼요^ㅁ^/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4 해품글
    작성일
    24.01.20 02:01
    No. 2

    만월검의 한편 한편을 너무 소중하게 읽어주셔서..
    정말 별님의 한글 한글들이,
    마음속에 콕콕 울림을 주시는것 같아요.
    오늘도 미소가득 지으며 하루를 정리합니다..
    감사해요. 별님~~^^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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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보천귀장 +2 22.10.02 36 4 11쪽
87 아녕의 진실 +3 22.10.01 42 4 11쪽
86 마계로 향하는 청룡 +4 22.09.30 37 4 11쪽
85 천해문을 여는 운우 22.09.29 38 4 12쪽
84 선. 마의 기운 +2 22.09.28 34 4 12쪽
83 격전의 날 22.09.27 38 4 12쪽
82 마존이 선택한 여인 22.09.26 44 4 12쪽
81 보연의 거래 22.09.25 34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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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잃어버린 너 22.09.23 37 4 12쪽
78 슬픈 준비 +2 22.09.22 41 5 13쪽
77 셋이서 함께 +4 22.09.21 63 5 12쪽
76 세오의 계획 22.09.20 31 5 12쪽
75 연적의 사내들 +2 22.09.19 33 4 11쪽
74 운우의 흔적 22.09.18 44 4 12쪽
73 기억 심기 +2 22.09.17 36 4 12쪽
72 현연의 탈출 22.09.16 34 6 12쪽
» 전신의 죽 +2 22.09.15 44 6 12쪽
70 다시 제자리로 +4 22.09.14 47 6 11쪽
69 기억 소환 22.09.13 33 6 12쪽
68 현연의 윤회점 22.09.12 37 6 12쪽
67 네가 꿈꾸는 사이 +2 22.09.11 49 6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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