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28 덫(1)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그 날 밤 바로, 사방이 컴컴한 어둠을 뚫고 세 필의 말이 아스드의 성을 빠져 나왔다. 조용한 밤길을 말들이 속력을 올려 달려갔다.
“말을 갈아 탈 데가 있을까?”
귀가 베일 것 같은 찬바람을 양 쪽으로 가르고 나가며 시라는 레이를 향해 물었다.
“중간에.”
쉼머까지 배를 탈 일이 없는 건 다행이었지만 말을 교체해 주어야 했다.
“가는 길에 이므즈라는 마을이 있는데..”
옆에서 말을 달리던 레이가 대답했다.
“잘 아는 곳이니 거기면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말을 바꿀 수 있을 거에요.”
그런 것은 시라 보다야 여기 출신인 레이가 더 능통하게 잘 알았다.
“근데 우린 왜 같이 가요?”
같이 말을 달리며 시즈가 말했다.
“베이그릴스로 가는 것도 아닌데.”
지난 번 베이그릴스에 갔던 때처럼 시라에게는 지금 그와 레이가 동행하고 있다.
“진짜 난 그렇다쳐도 이 녀석은 뭐하러 데려가요.”
동감이라는 듯 레이도 말했다.
네이엔느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가슈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도 들었다. 레이가 따라 나선건 엘리어트에게 신속하게 연락을 해주기 위해서였고, 혹시 모르니 한 명 더 같이 가는 게 좋겠단 가슈의 말에 어쩌다보니 시즈가 따라 나서게 되었다.
“왜? 나도 할 일은 해.”
먼저 말을 꺼내 놓고 레이가 그렇게 말하자 시즈가 입을 삐죽거렸다.
“너야말로 가지고 있는 매가 아니면 별로 도움도 안 될 걸. 싸우는 것도 싫어하면서.”
“그래서 난 억지로 가고 있는 거야.”
평소의 냉소적인 어투로 대꾸하고는 레이는 다시 시라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근데 정말 오니트 아가씨한테 무슨 일 생긴 거에요?”
그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 아니라고 일단 생각하지만..”
시라는 대꾸했다.
“확실히는 가봐야 알지.”
이제 출발해 거기 도착할 때까지 아직 이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 셰릴을 비롯한 그쪽 일행에게 염려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 무슨 일이라도 벌어져 그걸 엘리어트가 알게 된다면 그 다음 상황도 문제가 될 것이다.
“서두르자.”
그런 생각을 하며 시라가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가 먼저 앞으로 치고 나가자 레이와 시즈도 말에 속력을 올리기 시작했다.
시라들이 쉼머로 가고 있을 즘, 페이테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숲 한 가운데에서는 작은 불꽃과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숲 가운데를 뚫고 가느다란 연기가 조용히 하늘로 이어졌다.
“으....”
근처에 땔감이 별로 없어 불길이 그리 크지 않은 모닥불 앞에 쭈그려 앉아 우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춥네.”
페이테드에서 나와 그들은 지금 숲 한 가운데 있다. 두꺼운 옷을 챙겨 입고 있긴 했지만 지금 있는 숲은 무지막지 하게 추웠다.
“누가 가서 땔감 좀 더 만들어 오지 그래?”
모닥불 근처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두 사람을 향해 그가 말을 던졌으나 아무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직접 하지 그래요?”
불 근처에 있는 건 우트 혼자 인 걸 보며 몇 발 떨어진 곳에서 나무에 기대 서 있던 러셀이 말했다.
“지금 같은 때엔 막내인 네가 움직여 주면 좋지 않겠어?”
“지금까지 막내 취급 받은 적 없는 것 같은데요.”
땔감을 만드는 거야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을 텐데 자리에서 꿈쩍 안 하려는 게 보기보다 게으르다고 생각하며 러셀이 대꾸했다.
“어이. 반델포드.”
그 정도 말로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자 러셀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보다 더 떨어진 수풀 한 쪽을 향해 우트가 고개를 돌렸다.
“안 춥나?”
“... 시끄러. 말 걸지 마.”
어둠 속에서 목소리만 날아왔다. 같이 있으면서도 우트나 러셀에게는 관심도 흥미도 없었는지, 혼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반델포드는 우트와 러셀이 서 있는 쪽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다.
“회의가 끝났으면 빨리 쉐네드로 돌아가지, 또 어딜 간 거야?”
둘 다 설득에 실패하자 아껴서 불 조절을 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우트는 타오르고 있던 나뭇가지 하나를 옆으로 살짝 빼냈다. 그러면서 그가 모닥불 가까이 더 바짝 다가갔다.
칼릭스와 이벨은 지금 여기 없다. 두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셋은 하루도 넘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
“카비안 공자는 아드리엥으로 돌아 갔겠지?”
그렇다고 칼릭스가 하는 일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건 아니었는지 우트는 그대로 화제를 돌렸다.
“그랬겠죠.”
무심히 러셀이 대꾸했다.
“어떤 자인지 좀 자세히 봐둘 걸 그랬어.”
쪼그려 앉은 다리가 저려왔는지 앞뒤로 몇 번 뒤뚱거리듯 움직이며 우트는 중얼거렸다.
“앞으로 우리한테 더 중요해질 자일텐데.”
“그렇게 따지면 아드리엥보다 아스드가 더 그렇죠.”
러셀은 말했다.
“제이더 님도 그쪽을 더 신경쓰는 것 같고.”
“아스드야 아직 우리가 나서고 있는 걸 모를텐데 뭐.”
“아뇨. 그 쪽도 이미 우리를 경계하고 있어요.”
피아 렐츠린이란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 정도라는 건, 그건 이쪽에 대한 신상을 아스드 쪽에서도 다 꿰고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들에 대해 안다는 건 역시 그날의 일 때문일 것이고 그럼 충분히 경계심을 갖고 있다고 봐야 했다.
“만약 아스드가 그렇게 나온다면 그건 네 덕이겠군.”
반델포드의 묵직한 음성에 잠깐 피아를 떠올리다가 러셀은 힐끔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내 덕이에요? 그 날 부주의해서 내 이름을 부른 건 반델포드 씨인데.”
다른 흔적은 남긴 게 없으니 그것은 역시 그날 피아를 살려줄 때 반델포드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네가 괜한 짓을 하지 않았으면 그럴 일도 없었어.”
맹수처럼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날아왔다.
“글쎄요. 아무리 그래도 조심성이 없던 건 반델포드 씨죠.”
지지 않고 대꾸하는 소리에 반델포드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뭐라고..?”
살짝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같이 있으면서도 거기에는 관심도 없는 얼굴로 우트는 사그러드는 불쪽으로 바짝 다가앉을 뿐이었다.
“그 정도로 해둬.”
수풀 사이에서 목소리가 날아왔다. 러셀과 반델포드의 시선이 그쪽으로 갔다. 이제 돌아왔는지 칼릭스가 수풀을 헤치고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 같이 갔던 이벨도 앞으로 나왔다.
“의구심을 갖는다 해도 그것만으로 우릴 보쇼의 성과 연관시킬 증거가 되지는 않아.”
두 사람이 하던 대화가 멀리까지 들렸는지 반델포드와 러셀을 향해 칼릭스가 가볍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 얘긴 더 꺼낼 필요 없어. 이미 지나간 일이고.”
“왜 우리 계속 여기 있습니까?”
칼릭스의 말 때문인지 아니면 러셀과 굳이 싸움으로 이어질 생각이 있던 건 아니었는지, 바로 말을 끊고는 반델포드가 그에게 물었다.
“이제 쉐네드로 돌아가 싸울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랭더발이 어떻게 나올지 미리 알아야 준비를 하지.”
“아드리엥이 첫번째일 거라면서요?”
영주들에게 그렇게 말을 전했던 걸 떠올리며 우트는 칼릭스의 말이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랭더발이 설마 다짜고짜 거기로 쳐들어가겠어? 아드리엥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만한 대비는 할 거라는 걸 알텐데.”
반델포드가 어둠 속에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럼 그 놈들이 가만 있을 거란 겁니까?”
이제 와서 또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인상을 구긴 채 그가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영주들한테는 왜 그렇게 말했습니까?”
“결국엔 아드리엥을 넘어서려 하기는 하겠지. 단지 그게 첫발은 아니라는 것 뿐이야.”
어딜 돌아다니다 왔는지 세 사람보다 훨씬 몸에서 냉기를 풍기며 칼릭스는 우트 옆으로 다가갔다.
불을 쬐려는 듯 모닥불 위로 한 손을 뻗으면서 그가 제일 길다란 장작 하나를 불쪽으로 집어넣자 우트가 움찔했다. 이제 남은 땔감이 몇 개 없다.
“나라고 카뷔에 에르디스가 어떻게 나올지 다 알 순 없어. 하지만 아드리엥이든 어디든 이제 손을 잡은 영주국들과 같이 움직이려면 그 전에 거점지가 먼저 필요할 거야.”
유효한 동선을 만들어줄 거점지를 역시 먼저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게 어딘데요?”
반델포드가 다시 물었다.
“모르겠어.”
예상치 못한 대답에 반델포드가 멈칫했다. 진심이었는지 더 말을 안하는 칼릭스를 향해 그가 다시 인상을 썼다.
“지난 하루 동안 그거 알아보러 돌아다닌 거 아닙니까?”
“여기저기 쑤셔 보긴 했는데 딱 감이 오는 데가 없더라고.”
“그래서 뭐요. 감이 올 때까지 설마 기다리겠단 겁니까?”
“그럴 리가.”
자신들도 길에서 허비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쉐네드에게는 이미 연락을 해 국경 경비를 강화해 두라고 하긴 했지만 칼릭스 역시 늦지 않게 돌아가야 했다.
“의심스러운 데는 있으니까 일단 그 중에 한 곳에 가보게.”
“어딘데요?”
“젤른.”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우트가 옆에서 혼자말로 되물었다.
“그런 곳도 있어요?”
“눈에도 안 띄는 소영주국이야.”
크기로 따지자면 아마 소영주국 중에서도 작은 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랭더발과 손을 잡겠다고 한 영주국들이 위치한 곳을 봐서는 이제부터 중요해질 가능성이 큰 곳이지.”
“얼마나 큰데요?”
그가 나타나고 잠자코 있다가 처음으로 러셀이 말했다.
“대충 여기저기 다 들쑤실 시간 없어요 지금.”
“알아.”
칼릭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말했잖아. 나라고 다 아는 건 아니니고.”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모닥불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 운에 맡기고 한 번 가보자고.”
칼릭스가 일어서자 이제 출발할 때라고 생각했는지 러셀 역시 자리에서 앞으로 나왔다. 반델포드와 이벨도 말이 묶여 있는 데로 몸을 틀었다. 셋이 그러자 아쉬운 듯 불꽃에 손을 가까이 댔다가 마지막으로 우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레이의 매가 아스드로 날아든 것은 시라가 떠나고 이틀 째 되던 날 밤이었다. 별이 빼곡히 보일 정도로 구름 하나 없는 밤 하늘을 가로 질러 성 위로 날아온 매가 성벽 가장자리에 서 있던 엘리어트의 팔로 날아가 앉았다.
엘리어트는 매의 다리에 묶여 있던 서신을 풀러 냈다. 거기 적혀 있는 내용을 읽어 내려 간 뒤 곧 그가 손을 내렸다.
갑자기 움직임이 없는 그가 이상하다는 듯 매가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다가 길게 울음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고개를 들고 손을 뻗어 엘리어트가 매를 몇 번 쓰다듬었다.
“엘리어트.”
그런 그에게 가슈가 가까이 다가왔다.
엘리어트의 손길에 작게 끼룩거리다가 가슈가 다가오자 느리게 날개를 펄럭이며 매가 성곽 저쪽으로 날아갔다.
“헨터만 님께 연락왔어요.”
가슈가 말했다. 그들과 같이 있지 않은 헨터만으로부터의 연락이 조금 전 날아들었다. 그가 내민 또 다른 서신을 엘리어트가 읽어 내려갔다.
“뭐래요?”
가슈가 물었다.
페이테드에서 아스드로 올 때 헨터만과는 중간에서 헤어졌다. 아스드로 돌아오지 않고 그는 지금 엘리어트가 부탁한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예상대로.”
헨터만이 보낸 서신을 읽고 난 뒤 엘리어트가 말했다.
“그럼 병사들을 움직일 거에요?”
가슈나 아비크들은 이미 엘리어트에게 들은 얘기였기에 별로 의아해하지도 않고 그가 물었다.
“그래.”
대답에 가슈가 끄덕였다.
“가서 준비하라고 할께요.”
그렇게 말하고 그가 몸을 돌렸다.
성벽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가슈를 보다가 엘리어트는 다시 성벽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대지를 응시했다.
찾아온 영주국들에게는 일단 경비를 강화하고 기다리라고 했지만 아스드까지 그렇게 가만 있을 건 아니다.
페이테드에서 나왔을 때 헨터만과는 중간에서 헤어졌다. 랭더발과 손을 잡은 영주국들의 행보를 가장 폭넓게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건 헨터만이었고 이미 그에게 당분간 몇 곳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펴 달라고 부탁을 해놓았다.
그 중 한 곳에 관한 얘기가 헨터만의 서신에 적혀 있었고 이제부터 거기에 대한 행동을 취해야 했다.
엘리어트는 목덜미 안쪽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걸고 있던 목걸이를 밖으로 꺼내 그는 그 끝에서 반짝이는 은열쇠를 잠시 바라 보았다. 은열쇠를 손에 움켜 잡으며 그가 다시 성벽 아래 넓은 대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Commen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