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21 필센(7)
필센의 영주가 결정을 할 때까지 어제 밤까지는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주의 허락이 떨어지고 엘리어트가 성을 나올 때 그 뒤에는 수천 명의 병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필센은 기사가 백여 명. 일반 병사가 사천 오백. 그 중 영주와 성을 지켜야 하는 기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와 병사들이 토렌 병사들과 합류했다.
길더의 말대로 전투 경험이 별로 없었기에 토렌이나 필센 병사들에게서 뛰어난 병력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싸워본 아스드 병사들이 실력 면에서는 우위에 있었으니 그들을 선봉으로 내세울 수 밖에 없었다.
다행인 것은 근접 싸움에서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필센은 원거리에서 쓸 수 있는 무기들을 제법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투석기와 노포 뿐 아니라 활과 화살 역시 수천여 병사들이 쓸 수 있을 만큼 많았다.
서쪽 국경에서 마을까지는 반나절 거리. 거기서부터 이어지는 필센의 지형은 평이하다. 바다와 가까이 위치한 두올린과 군도 사이에 있으면서 바다와는 접하지 않았고 바다를 이용할 수 없어서 인지 밭농사를 주로 짓는다.
그 점을 보고 확인해 본 결과 서쪽 국경선부터 마을이 있는 곳은 지대가 조금씩 높아졌으며 땅은 배수가 잘되는 엉성하게 큰 토양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슈와 레이 덕에 군도에서 여기 도착하기 까지 하루의 시간이 남았다는 걸 알고 있다. 적을 기다리는 입장에서 하루는 촉박하게 느껴졌지만 8천 가까운 병사들이 무엇을 하기에는 짧지 않은 시간이기도 했다.
필센 영주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엘리어트의 지시로 병사들은 국경에서부터 시작되는 길을 갈아 엎기 시작했다. 엉성한 토양을 파내고 파낸 흙을 옆으로 쌓으며 그들은 길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었다.
밤새 길을 갈아 엎고 엉성하지만 새 길을 낸 덕에 토렌으로 향하는 방향을 크게 바꾸지 않고 마을에서 조금씩 우회하는 길을 만들어 낼 수가 있었다. 횃불로 길을 밝힌다고 해도 진격하는 방향이 바뀌지 않는다면 금방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마을이 조금이라도 지대가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은 나머지 비어있는 땅은 지대가 낮은 쪽에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새로 난 길이 조금씩 낮은 곳으로 이어지게 하면서 원래 있던 길에는 병사들이 부지런히 나른 짚과 나뭇가지, 준비해 놓은 수풀 덩이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런 것들은 눈속임에 이용되면서 동시에 수풀 너머 어둠을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 무의식적으로 시각을 조금 더 단절시킨다. 새로 만들어진 길이 마을에서 엄청나게 멀어지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해서 주의를 돌릴 심산이었다.
지금 마을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둠의 일부가 된 것처럼 조용하다. 마을 사람들은 낮에 이미 영주의 성으로 피신해 들어갔다. 사람들이 성 안에 숨어 있는 동안 빈 마을만이 이대로 군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어둠에 잠겨 있다.
그렇게 준비가 거의 끝날 때 쯤이 되어 정확히 자정이 막 지날 무렵 저기 멀리에서부터 하나 둘 씩 횃불들이 나타났고 불빛은 끝도 없이 이어져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군도인은 야만스럽고 거칠다고 했지만 의외로 그들은 조용히 진격해 오고 있었다. 국경을 넘었을 때 비어 있는 초소를 보았지만 크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별다른 경계심 없이 그들은 길을 따라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각자 위치에 몸을 숨긴 채 그들을 주시하며 이쪽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지금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다.
“병력이 일만 정도라고 하지 않았소?”
끝이 보이지 않는 군도인들의 이동을 보고 엘리어트의 옆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필센 기사 대장이 소리 낮춰 물었다. 그는 서쪽으로 보낸 전령에게 병력의 규모에 대해서까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거짓말입니다.”
조용히 대꾸하는 소리에 기가 차서 기사가 그를 보는 동안 엘리어트는 느리게 움직이는 군도의 움직임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두꺼운 검을 등에 차고 있는 눈빛이 사나운 자들이 선두에서 말을 탄 채 병사들을 이끌고 있다. 선봉 부대인 그들 중 무리의 수장은 없었다.
마을에서 멀어지며 그들은 지금 지대가 조금씩 낮은 곳으로 향하고 있다. 큰 차이는 아니지만 허리 높이 정도 차이만 있어도 한 걸음 늦추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검이 공중을 한 번 가로지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다행히 크게 의심하지 않는 것 같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사방이 야트막한 언덕으로 둘러싸인 낮은 평지가 나온다. 그 위에서 필센의 병사들이 노포와 투석기를 준비한 채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패배한다고 해도 군도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이제 싸움이 시작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찰나 엘리어트가 말했다.
팔 다리가 잘려 나간다고 해도 받은 대로 돌려주기 위해 숨이 붙어 있는 이상 마지막 한 명까지 진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군도인이었다. 3만이 실패한다면 그 다음에는 6만, 아니면 그 이상 모든 군도의 전사들이 라곤을 향해 달려드는 것도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군도에 패할 라곤은 아니지만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불필요한 피를 흘려야 할 것이며 동시에 그로 인한 피해가 가장 먼저 누구에게 돌아갈 지도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서?”
무슨 뜻인지 기사가 되묻는 동안 엘리어트는 검을 빼들었다.
“끝이 나려면 스스로 후퇴하게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천개의 횃불이 열을 지어 사방을 밝히고 있지만 어둠 전부를 몰아낼 수는 없다. 보이지 않는 어둠이 횃불 바로 옆에서부터 함께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곳은 지금 토렌으로 가는 길에 걸쳐 있는 이름도 모르는 조그만 영주국이다.
초소까지 비어 있는 걸 보니 경비도 허술하기 그지 없다. 그러니 가는 길에 눈에 띄는 마을 몇 개만 쓸어 버리고 이대로 토렌으로 진격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제대로 정비가 안 됐는지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가다가 선두에서 말을 타고 가던 군도인들이 멈춰섰다. 사방에 얕은 언덕이 한 두 개씩 보이는 곳에서 토렌으로 이어진 방향을 잠시 확인하기 위해 그들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데, 하늘 저쪽에서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게 보였다.
전혀 예상을 못했기에 눈앞에 보이는 게 생각하는 게 맞는지 잠깐 넋놓고 보다 아차 하고 정신을 차리는 순간 머리 위로 화살이 떨어졌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선두에 있던 자들이 쓰러지고 그것을 시작으로 수천 개의 화살이 궤적을 그리며 군도인의 한 가운데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기습을 알아채고 검을 빼들었지만 그러나 머리 위로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화살에 칼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꼬꾸라지는 자들이 속출했다.
비명소리와 함께 쏟아져 내리는 화살을 막기 위해 군도인들도 방패로 머리 위를 가리는 동안 전체 병력의 허리쯤 위치해 있던 언덕에서 투석기와 노포가 가세해 아래로 발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횃불 바로 가장자리 어둠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병사들이 횃불을 손에 든 채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바로 뒤에서 나타나 그들은 앞에 놓인 짚이나 수풀더미에 불을 붙였다. 불길이 길을 따라 이어지며 순식간에 거대한 원형의 불덩이가 군도 병사 앞쪽 절반을 둘러쌌다. 그러는 동시에 다른 수백의 병사들이 땅에 묻어두었던 밧줄을 양 옆에서 동시에 잡아 당기기 시작했다.
굵고 긴 밧줄 여러 개가 군도인의 중간에 걸친 곳에서 동시에 위로 들려졌다. 바닥에 얕게 묻어놓은 성문과도 같은 판 수십 개가 위로 솟아올랐다. 그 위에 있던 군도인들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중간을 끊어 앞쪽을 포위하자마자 기사들을 선두로 필센과 토렌 그리고 아스드의 병사들이 함성과 함께 그들에게 달려 들었다.
계속 앞으로 나가는 군도인의 병대 수장을 찾기 위해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엘리어트는 행렬의 중간쯤에서 말을 타고 가고 있는 누군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보스와 함께 테라스 위에 있던 남자로 두올린에서 돌아갈 때 가만 있지 않겠다고 선전포고를 날리고 간 자를 발견하고는 병사들과 함께 그도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뛰어 나갔다.
비명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중간을 차단하고 위에서 투석기와 노포로 뒤쪽 병사들이 움직이는 걸 막았다고 해도 만 오천이 넘는 병사들이 앞에 있다.
그들은 엘리어트를 향해 그리고 아비크와 길더, 시즈를 향해 동시에 달려 들었다. 검과 도끼와 망치가 모두를 향해 날아 들어왔다. 그러나 비명과 함께 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먼저 쓰러지는 건 그쪽이었다.
덤벼드는 군도의 병사들을 쓰러뜨리며 엘리어트는 그들 사이를 뚫고 나갔다. 그의 검에서 붉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뒤에서 덤벼드는 자의 허리에 깊이 검을 찔러 넣었다. 비명과 함께 나무토막처럼 굳어지는 남자에게서 검을 빼며 엘리어트는 계속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군도의 병사들에게 검을 날렸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화살과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병사들에 의해 발이 묶인 채 군도의 부수장은 갑자기 싸움터가 되버린 행렬 중간쪽을 보고 있었다. 함성과 비명소리는 조금씩 더 커져갔지만 낮은 언덕으로 둘러 싸인 곳을 통과하는 중이라 많은 병사들이 있어도 그들 모두가 동시에 움직일 수는 없었다.
공격을 당하자마자 부수장은 병사들 사이를 통과해 함성이 인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다 그 중간에서 그는 말을 멈추었다.
비명 소리는 조금씩 가깝게 다가왔다. 쓰러지고 있는 병사들이 이쪽을 향해 가까워 지고 있는 것을 그는 유심히 보았다. 단 한 명이 그 중심에서 병사들을 상대하고 있는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부수장 역시 전사였다. 적진 한가운데서 우두머리를 먼저 치기 위해 누군가 달려오고 있다는 것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오랜 싸움으로 길러진 감으로 지금 저기서 혼자 검을 들고 달려오고 있는 자가 어떤 자인지도 바로 알아 볼 수 있었다.
양 옆에서 몰려드는 군도의 병사들을 쓰러뜨리며 앞으로 나오는 엘리어트를 향해 검을 빼든 부수장이 말을 달렸다.
마지막으로 달려드는 남자가 쓰러지며 사방에 피를 튀겼다. 시야를 가리는 피를 손으로 훔쳐내며 엘리어트는 앞을 보았다. 말을 타고 남자는 바로 앞까지 달려와 있었다.
먼저 검을 날리는 부수장을 향해 엘리어트가 위로 뛰어 올랐다. 두 개의 검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말을 타고 달려온 힘을 그대로 검에 실어 엘리어트와 맞부딪쳤지만 뒤로 밀려난 건 오히려 부수장쪽이었다.
자리에서 뛰어 올라 검을 막았을 뿐인데 악력이 어찌나 센지 손에서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주변을 보니 가까이에 상대편 병사라고는 아무도 없다. 적진 한 가운데를 혼자 뚫고 남자는 자신 앞에 왔다.
엘리어트를 막기 위해 부수장은 말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는 바로 앞에 있는 엘리어트의 머리로 그대로 검을 내리쳤다. 손을 올려 엘리어트가 머리 위를 막았다. 부수장의 사자 같은 얼굴이 바로 눈 앞에서 자신을 잡아 먹을 듯 노렸다.
"진격을 멈추십시오."
그의 검을 막은 채 엘리어트가 말했다.
"병사들이 몰살당하길 원치 않는..."
적의 말을 들을 생각은 없었는지 엘리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수장의 주먹이 엘리어트의 배를 가격했다. 보통 사람같으면 망치로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이었겠지만 자리에서 꿈쩍 않고 엘리어트는 날아들어오는 부수장의 검을 다시 막았다.
엘리어트의 검에도 조금 전보다 힘이 실렸다. 맞닿은 검에서 느껴지는 악력에 부수장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체격이 거대한 것도 아닌데 전해지는 힘이 어마어마했다. 토렌으로 가는 길에 걸쳐 있는 가볍게 쓸어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곳에 이런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부수장은 매섭게 엘리어트를 노려보았다. 싸움은 적장의 목이 땅에 떨어져야 끝이 나는 법이니 지금 이 자가 왜 여기까지 달려 왔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패할 일은 없다.”
거대한 바위덩이를 마주한 느낌에 격노한 기색으로 그가 말했다.
여차하면 자신의 목숨은 여기서 끝이 나겠지만 그런다고 해도 군도는 포기하지 않는다. 삼 만이 패한다면 모두가 몰살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더 거대한 힘을 앞세워 군도의 형제들은 복수할 것이다.
“압니다.”
부수장의 검과 맞대고 있는 자신의 검에 팽팽히 균형을 맞추며 엘리어트는 말했다.
“그러니 물러나 달라고 하는 겁니다.”
등 뒤로 살기가 느껴졌다. 몸을 돌려 엘리어트는 번개같이 뒤로 검을 날렸다. 째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살기가 사라지고 동시에 앞에서 그의 가슴으로 날아들어오는 부수장의 검을 엘리어트가 다시 막았다.
“군도의 수장이 쓰러진 건 토렌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짓을 벌여 군도를 싸움에 끌어 들인 자는 따로 있습니다.”
다시 검 너머에 보이는 부수장을 향해 엘리어트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자에게 이용당해 쓸데없이 피를 흘릴 겁니까?”
날아들어오는 부수장의 검을 전부 막아내며 엘리어트는 뒤에서 달려드는 군도인을 발로 쳐냈다.
“누구냐.”
엘리어트가 한 말이 아닌 엘리어트의 정체에 대한 질문이었다. 빈틈없는 검에 반격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부수장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런 소리로 우리를 우롱하려는 네 놈은.”
등 뒤와 양 옆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남자들을 엘리어트가 다시 막아냈다.
“난 진실을 말하는 겁니다. 괜한 음모에 휘말려 군도인들을 희생시키지 말라고.”
말을 하는 동안 맞부딪치고 있는 검에 밀려 부수장의 검이 공중을 날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에서 튕겨나간 검으로 인해 진동이 남아 있는 손을 움켜쥐며 부수장은 자신을 향해 달려들 엘리어트를 보았다.
“군도는 패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쪽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더 이상 달려들지 않고 그 앞에 서서 엘리어트는 이쪽을 보고 있었다.
“삼만이 진격하면 삼만. 그 이상이 진격해 오면 그 이상을 막아 낼 겁니다. 나 역시.”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난무하는 와중에도 목소리는 나직하고 조용했다. 이런 혼란속에서도 엘리어트의 목소리는 정확하게 부수장의 귀에 꽂히고 있었다.
“그러니 진짜로 빚을 갚아야 할 자가 누군지 알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법을 배우십시오. 라곤이 아니라 당신들을 위해.”
보여준 실력으로 보아 지금 하는 소리가 헛소리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으며 부수장이 처음으로 짧게 그를 응시하는 동안 또 다시 달려드는 군도인을 향해 엘리어트가 검을 날렸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