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22 반향(5)
2.22 반향(5)
방금 전 주위를 둘러 봤을 때만해도 얘기가 들릴만한 거리에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불쑥 나타나 자신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는지 다들 놀라 일어나는 동안 눈치 빠른 자들은 그대로 후다닥 자리에서 뛰쳐 나가고 있었다.
허름한 옷차림의 남자 역시 안색이 변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치려는 남자의 뒷목과 팔을 엘리어트가 뒤에서 잡아챘다.
“사, 살려주시오.”
잡힌 팔과 목덜미가 꿈적도 안 해 그 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며 남자가 버둥거렸다.
“시키는 데로 할게.”
어쩌다 마을에서 도망친 자이긴 했지만 남자는 겁이 많고 순진했다.
“달리 시킬 건 없소. 그 말을 한 자가 어디 있는지 그것만 말해주면 되니.”
남자를 향해 엘리어트는 말했다.
엘리어트가 자신들을 잡으러 온 남자라고 생각하고 그를 피해 남자들은 밖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술집 앞 나무에 묶여 있는 대여섯의 남자들을 발견하고 어리둥절 그들은 다시 자리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잡으러 왔을 겁니다. 당신들을.”
방금 전 술집 앞에 막 도착해 묶여 있는 남자들과 그리고 밖으로 쏟아져 나온 남자들을 보고 상황 파악을 하던 헨터만이 그들을 내려다 본 채 말했다.
“이런 자들이 근방에 더 있겠죠. 지금은 도망칠 생각 말고 잠깐 기다려 보는 게..”
말 위에서 그가 말하는 동안 그들은 나무 주변에 떨어져 있는 검과 각종 무기들, 그리고 묶여 있는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말 위의 남자를 향해 욕을 해대며 밧줄에서 벗어나려고 그들은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묶여 있는 남자들은 척 보기에도 용병단이다. 그럼 안에 나타난 남자 역시 같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세 명이 헨터만의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은 채 길 밖으로 뛰쳐 나갔다. 한 명 만이 어찌해야 할 지 모르는 얼굴로 자리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저런..”
말 옆을 지나쳐 길 밖으로 뛰어 나가는 남자들을 보고 헨터만이 혀를 차는 동안 안에서 엘리어트가 걸어 나왔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습니까?”
술집으로 들어가려는 용병들을 나무에 묶어 두고 안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여기 없던 헨터만이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고 엘리어트가 물었다.
“산채에 갔었습니다.”
엘리어트가 남자들을 묶는 것을 내려다 보며 헨터만은 주변에 시선을 돌렸다.
“왜 혼잡니까?”
그가 물었다.
“딴 사람들은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가슈를 비롯한 나머지 네 사람은 티에리가 말해 준 다른 몇 군데를 돌아 보고 올 것이다. 베이그릴스에 들러 부탁한 얘기를 전한 다음 며칠 뒤나 돌아올 것이다.
“자주 못 만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두올린 성으로 들어간 뒤로 헨터만과는 며칠 만에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쪽으로 온 겁니다. 근처에서 만나면 눈에 띄니까.”
엘리어트가 향한 곳을 듣고 이쪽으로 쫓아온 헨터만은 말했다.
“필센에 갔다 왔습니다.”
그에게 경과 보고를 해야 할 때였다.
“예상대로 거기도 이미 다녀갔더군요.”
에둘러 얘기했겠지만 키히스에게 협박 당한 건 분명했는지 그가 갔을 때 필센 영주는 이미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필센 영주는, 원한다면 당신 편에 서서 두올린에 얘기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갈등하는 것 같긴 했지만 엘리어트가 위험에 처한 것을 알고 마음의 결정을 하며 영주는 그렇게 말했다.
“그럴 거 없습니다.”
엘리어트는 말했다.
"필센에서 나서준다고 해도 어차피 귀담아 듣지 않을 테니."
게다가 일렌 키히스가 이미 다녀갔다면, 필센 영주가 그에 반했다간 경고한대로 키히스는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가 검은 기사단을 일이천만 끌고 온다고 해도 필센 같은 소영주국은 하루 만에 잿더미가 될 것이다.
데리고 나온 허름한 옷차림의 남자가 묶여 있는 남자들을 보고 어리둥절해 하는 동안 엘리어트는 욕을 해대고 있는 그 중 한 사람에게 다가섰다.
“이 사람들을 어쩔 겁니까?”
그의 입에 헐거워진 재갈을 다시 물리는 엘리어트를 보며 헨터만이 물었다.
“멀리 갖다 버려 두게요.”
입에 물린 재갈을 뒤로 꽉 조이자 남자가 더욱 발악을 하며 몸을 비틀어 댔다.
“당분간 못 쫓아오게.”
어디로 데려다 둔다는 건지 이해 못할 소리였지만 더 묻지 않고 헨터만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저 사람들은요?”
엘리어트가 구해준 둘은 헨터만이 턱짓을 한 쪽에 몰려 서서 불안한 얼굴로 서로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산채로 데려갈 겁니다.”
대답에 헨터만은 깊이 숨을 들이 마셨다.
“계속 이런 식으로 할 건 아니죠?”
그가 확인했다.
“이러다간 끝이 없을 겁니다.”
티에리와 그와 같이 있던 남자들을 통해 기하족 끼리 연락을 취하는 몇 몇 장소가 있다는 걸 알았다. 랭더발이 기하족을 데려가 어떻게 하는지 전혀 단서가 없었기 때문에 일단 연결점을 찾아보기 위해 엘리어트들은 각각 흩어져 그런 곳을 수색하고 있었다.
이곳은 엘리어트가 세 번째로 찾아온 장소였다.
“잡혀 갔다 도망친 자가 있다니 이번엔 거기서 무슨 얘기가 나오는지 알아 보려고요.”
말하며 엘리어트는 몸을 돌려 헨터만 앞으로 걸어갔다.
“소식 있습니까?”
그러면서 그가 물었다.
“아쉬 회의는.”
헨터만이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더 얘길 해야 할 것 같아 찾아 온 겁니다."
랭더발 영주가 달려간 아쉬 회의는 보통 닷새 정도가 지속된다. 회의가 시작된지 오늘로 열흘이 넘었고 이제 결과가 나와 아쉬에 참석한 영주국 중 연이 닿아 있던 한 곳을 통해 헨터만은 막 연통을 받은 참이었다.
“쉐네드를 비롯해 몇 몇 영주국이 랭더발이 저지른 짓에 대해 정식으로 처벌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이번 회의는 일주일이 넘게 이어졌다.
“몇 몇 영주국들은 랭더발 편을 들기도 했다더군요. 그 중엔 좀 뜻밖인 곳도 있었는데..”
아드리엥이나 퍼보스를 제외하고도 아쉬에서 중진 영주국에 해당하는 몇 몇 곳이 은근슬쩍 랭더발을 두둔 해줬다는 얘기가 나왔다.
“당신 말대로 이제부터 하나 둘씩 수면 위로 올라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랭더발 뿐 아니라 그에 동조하는 영주국들이.”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끄덕이며 엘리어트는 다시 물었다.
“결론은요?”
“뚜렷한 결론은 없었나 봅니다.”
일주일 넘게 회의를 했으면서 명확한 결론은 떨어지지 않은 듯 했다.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경고 수준의 말이 나온 것 같은데.. 그런 말은 해봤자죠.”
헨터만은 으쓱했다.
"좌우간 일주일도 넘게 있었으면서 구체적인 얘기는 나온 게 없으니."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아드리엥이 결정을 유보했기 때문이었다. 쉐네드가 회의를 주도했을 때만 해도 그 편에 동의했던 아드리엥은 막상 회의가 시작되자 한 발 물러나 다시 침묵했다.
“어쨌든 랭더발 쪽에 가깝게 있는 영주국들이 누군지 대충 확인할 수 있었던 게 그나마 수확인 것 같습니다."
“그 정도 말이라도 나왔으니 앞으로 랭더발도 무대포로 전쟁을 일으키진 않을 겁니다."
잠시 카뷔에 에르디스를 떠올리며 엘리어트는 말을 이었다.
"쉐네드로 인해 제동이 걸렸으니 표면적으로나마 전략을 바꾸겠죠.”
"군도 때처럼 한다면 더 이상 표면적으로 나설 필요도 없을텐데요 뭐. 게다가 길을 막은 건 정확히 쉐네드만은 아니죠."
군도를 막은 건 엘리어트였으니 적어도 하나의 길은 그가 막은 셈이다.
"물론 지금으로선 그걸 아는 사람이 없는 게 문제지만.”
헨터만은 말을 계속했다.
“이 방대한 북쪽 지방에서 어찌됐든 랭더발 혼자 움직일 순 없습니다. 그들에게도 새로운 동맹관계가 필요하겠죠. 어쩌면 이미 결성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지만.”
“결정이 되 있는지 아니면 앞으로 또 다른 행보를 보일지, 그걸 알게 됐을 때 막아내기 위해 우린 우리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엘리어트가 그 말에 응수했다.
토렌 근처로 돌아올 때까지 헨터만과 같이 움직이다 중간에 헤어져 엘리어트는 산채로 향했다.
술집에서 만난 두 남자와 그리고 달아났다 용병에게 잡힌 걸 찾아서 구해준 남자들이 그와 함께였다. 다행히 그들 중 한 명이 티에리를 알고 있었는지 얘길 하자 좀 망설이는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엘리어트를 따라 왔다.
“집은 계속 늘리고 있소.”
산채로 돌아오자 슬로런이 그를 찾아와 말했다.
티에리들을 시작으로 나갔다 돌아오면 엘리어트는 매번 사람들을 데려왔고 이제 산채도 과포화 상태였기 때문에 더 확장할 수 밖에 없었다. 슬로런의 주도하에 산채 사람들은 요즘 매일 작업이 한창이었다.
“계속 부탁을 좀 해야할 것 같습니다.”
본거지로 이용할 만한 장소로 산채만큼 적당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이쪽에서 움직일 엘리어트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우리도 몸 사려야 할 처지였는데 당신 덕에 여기서 도망치지 않아도 되게 되었잖소.”
슬로런은 말했다.
“은혜를 갚는 거요.”
군도 일로 부수적인 이득을 봤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말했다.
산채가 있는 산이 원래 두올린과 토렌의 영토 분쟁지에 위치하기도 했지만 이번 일로 더 두올린에서 이쪽에 손을 댈 수 없게 된 상황이었다.
키히스로부터 엘리어트 뿐 아니라 영주의 성을 엉망으로 만들고 감옥에서 탈출한 자들이 이 곳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두올린으로서는 당장에라도 쳐들어 가 산채를 아작내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도와 일이 벌어졌을 때 그리고 그 이후로도 자기 입장만 챙기고 몸을 사린 덕에 토렌과의 관계는 지금 상당히 냉각된 상태였다.
아무리 랭더발이 뒤에 있더라도 이 상황에 분쟁 지역에서 일을 벌였다간 토렌도 가만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두올린 영주는 이번에는 쉽게 움직이지 않고 조심하고 있었다.
모략에 소질 있는 건 일렌 키히스 만은 아니다. 그나마 행동이 자유로운 헨터만이 진실에 조금 더 보태 두 영주국을 이간질 시켜 놓은 덕에 사실 토렌은 지금 속으로 꽤나 두올린에 이를 갈고 있었다.
만약 이 상태에서 두올린이 토렌을 건들기라도 한다면 두올린 영주의 예상대로 토렌은 그들과 전면전이라도 불사할 상태였다.
좌우간 헨터만 덕분에, 그리고 엘리어트에게 신세진 것을 그래도 완전히 모른 척 하지는 않을 심산인 듯한 태도 덕에 두올린에서 엘리어트와 도둑들 무리에 대한 공문이 갔을 텐데도 토렌 쪽에서는 그에 대한 어떠한 감시도 강화하지 않고 있었다.
엘리어트로서도 그리고 산채 사람들로서도 그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우리한테 두올린은 지금 갈아 죽여도 시원찮은 놈들이오."
슬로런과 얘기 중에 다가온 페이든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끼어들었다.
"그러니 그 놈들한테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뭐든 할거요."
이용하고 죽이려 들었으니 페이든 입장에서는 엘리어트가 하는 일이 두올린에 맞서는 거라면 그게 뭐가 됐든 기꺼이 돕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게 신세를 갚는 길이 된다면 더 없이 환영이지."
"그렇게 말한다면.."
페이든의 말에 살짝 끄덕이며 엘리어트는 말했다.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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