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30 듀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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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의 반(VAN) - 2-30 듀셰(8)
엘리어트가 오테르에 있는 동안 피난민들과 헤어진 시라는 이틀간 서쪽으로 말을 달리고 있었다.
일대에 산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조금 전부터 그는 다시 험준한 산맥으로 접어 들었다. 그렇게 한참 달려가다가 머리 위에서 날카롭고 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멈추고 시라는 위를 올려다 보았다.
높은 회색 하늘을 길게 날아오고 있던 매가 고도를 낮추며 이쪽으로 빠르게 접근해 왔다.
잠시 후 시라는 벤더볼린에서 떠날 때 레이가 그에게 보낸 서신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시라에게 오테르로 가는 건 부탁하지 않지만 엘리어트들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어야 했기에 벤더볼린에서 떠나기 전 이쪽 사정이 적힌 서신을 레이를 통해 엘리어트는 그에게 보냈다.
편지를 다 읽고 난 뒤 시라는 손을 내렸다. 랭더발이 벤더볼린을 이용해 아드리엥을 고립시킬 전략을 짰다는 건 직접 쳐들어 가는 것보다 그렇게 하는 게 아드리엥을 함락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될 때까지 아드리엥이 가만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말이야.’
어느 쪽이 승기를 잡을지 두고 봐야할 일이었지만 랭더발에게나 아드리엥에게나 둘 다에게 쉬운 싸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전략을 짠 덕분에 엘리어트들 역시 더욱 바빠지게 되었다.
'다들 고생인걸.'
생각하며 이제 다시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고 있는 매를 시라는 잠시 응시했다. 그렇게 보고 있는데 문득 매가 날아가는 하늘 저쪽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한 개가 아니라 검은 연기는 여기저기서 올라오고 있다. 가고자 하는 방향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연기를 보다가, 잠시 있다가 시라는 곧 말에 박차를 가했다.
연기를 향해 곧장 말을 달리다가 산 깊은 곳에 형성되어 있는 낮은 평지까지 도착하는 찰나,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무겁고 기분 나쁜 타는 내가 진동하는 걸 느끼며 시라는 말에서 내려섰다. 검게 탄 수십 구의 시체들이 땅바닥 여기저리를 굴러다니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오자 경계를 올리며 그는 주위를 살폈다.
두리번거리며 시체들 사이를 걸어가다가 잠시 후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그는 자리에 섰다.
바닥에 떨어진 창과 방패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게 불에 탄 시체들은 병사가 아니다.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은 모두 평범한 민간인일 것이다.
인가 한 척 없는 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며칠 전 마주친 피난민들처럼 이들 또한 그랬는지 모른다. 그런 자들을 누가 무슨 이유로 죽였을까.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걸 보아 이런 짓을 저지른 자들은 아직 멀리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주변을 살피다가 어둑해 보이는 산속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기척을 감지하고는 그쪽을 향해 시라는 다가갔다.
기척을 따라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오다가 눈앞에 야영지를 발견하는 순간 가까이 있던 수풀 사이에 시라는 몸을 숨겼다. 누군지 알 수 없지만 불타 죽은 이들이 근처에 있는 걸 보아 모습을 드러내서 좋을 거 없는 자들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라는 야영지를 응시했다. 야영지 근처를 돌아다니는 병사들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봐도 그렇고 야영지 규모를 봐도 그렇고 그 수가 제법 되어 보였다.
몸을 숨긴 채 시라는 그 중 가장 크게 설치되어 있는 막사를 응시했다. 제일 큰 막사 앞에서 꽂혀 있던 깃발들을 수거해 둘둘 말고 있는 병사가 보였다.
그 중 하나의 문양이 익숙하단 느낌과 함께 그것이 두올린의 깃발임을 알아채는 순간 시라는 깨달았다. 이들은 랭더발의 지원군이다.
기척을 지운 채 그는 막사 가까이에 튀어 나와 있는 바위 뒤로 접근했다.
두올린.
랭더발의 최측근으로 행동하고 있는 두올린이 여기까지 왔다. 두올린에서 여기까지 일반 병사들을 포함해 움직이려면 최소한 한 달은 걸릴 것이다. 그렇다는 건 페이테드 회의가 끝남과 거의 동시에 이들이 움직였다는 뜻이 됐다.
그리고 가는 길에 군대의 이동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걸 막기 위해 마주친 이들 누구라도 입을 다물게 한 게 분명했다.
조금 전 엘리어트에게 받은 편지의 내용을 시라는 생각했다. 랭더발이 벤더볼린과 아카이아를 기점으로 병사들을 전면 배치할 생각이라면 이들 역시 벤더볼린을 향하고 있는 걸까. 이 방향이면 벤더볼린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아니다. 돌아가는 길이지만 그건 눈에 띄는 걸 피하기 위해 그러는 지도 모른다.
소리없이 시라는 숨을 내쉬었다.
파비앙이 어떻게 움직일지 신경쓰다보니 그 외 랭더발에 협조하겠다고 나온 영주국들의 움직임을 잠시 놓치고 있었다. 지금까지 쉴새없이 달려왔으니 사실 안다고 해도 손을
쓰지는 못했을 일이었지만 그래도 대비는 했을 것이다.
‘차라리 행운일지도.’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가는 길에 이렇게 마주치게 된 게 오히려 운이 좋은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라는 막사쪽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에 주의를 집중했다.
병사들이 수거하고 있던 깃발은 한 개가 아니다. 두올린과 함께 있는 영주국이 또 있다면 그건 어쩌면 파비앙일 수도 있다.
무고한 사람들을 몰살시키면서 이동하고 있는 건 파비앙의 방식은 아닐 것 같지만 애초부터 랭더발과 뜻을 같이하겠다고 나선 곳이니 이제는 그것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마주쳤으니 이제 계획을 바꾸는 수밖에.
여기에 파비앙이 같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그리고나면 이동하는 병력이 이들이 다인지, 아니면 근처에 합류를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병력이 있는지. 있다면 이들이 정말 벤더볼린으로 향할지 아니면 또 다른 곳으로 향할 건지. 거기까지 확인하고 그 다음을 결정하는 수 밖에 없었다.
움직일 때까지 이제 매복해 기다리기로 하며 막사 근처로 시라는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페이테드에서 랭더발이 북쪽 지방의 분리 독립을 위해 전쟁을 선포한 이후, 혼란스럽던 각 영주국들의 분위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정리되고 그들의 입장은 이제 크게 셋으로 나뉘었다.
두올린이나 이에넨, 베닛사처럼 애초부터 적극적으로 랭더발 편에서 그들에게 가담하겠다고 나선 첫 번째 부류의 영주국들과 아스드나 쉐네드, 아드리엥처럼 그들에게 맞서는 두 번째 영주국들. 그리고 벤더볼린이나 드루타인처럼 어느 편도 아니면서 앞으로의 상황을 주시하며 자영국에 불리하지 않을 쪽을 선택하겠다는 영주국 들이 그 세 번째였다.
물론 지금 그 중 하나의 입장을 취한다고는 해도 그런 선택을 한 목적과 이유는 각기 달랐으니 만약 상황이 바뀐다면 그들의 선택은 번복될 수 있었다.
이렇다보니 당장 같은 입장을 선택한 영주국들끼리도 협력은 쉽지 않은 상태였고, 검은 기사단이라는 거대한 병력을 가지고도 랭더발이 북쪽 지방 전체를 한꺼번에 장악하기 어려운 것처럼 랭더발에 대항하면서도 통합이 어려운 탓에 이제 시작된 싸움은 앞으로 길이 험난할 거란 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어트들은 지금 그 세 번째 입장을 취하는 영주국들이 유독 많은 곳에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아쉬에서 가깝지 않았고 에들러에서도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혈맹 종주국들의 영향을 덜 받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그랬다.
오테르를 제외하고, 드루타인 뿐 아니라 혼란을 틈 타 그렇게 자영국에 유리한 분위기를 이끌려 하는 영주국들이 근처에 대거 포진해 있었고 인접하고 있는 영주국들이 사이가 좋은 경우는 원래도 드물었지만 언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른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그 틈을 타 그들의 신경전은 이제 노골적으로 표현되며 크고 작은 싸움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자 마자 며칠 사이에 놀랄 만큼 많은 수의 영주국들이 전쟁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렇게 서로 간의 전쟁에 집중한 나머지 영주민 보호에 소홀해지자 전쟁에 휘말리는 걸 피하기 위해 영주국을 이탈하기 시작하는 피난민들 또한 며칠 새 대거 늘어 나고 있었다.
“아부지 아부지..!”
여덟 아홉 쯤 되어 보이는 소녀 하나가 총총 땋은 머리를 등 뒤에서 촐랑촐랑 흔들며 산속 작은 집 마당으로 뛰어 들어 왔다.
“또 지나가요 아부지..!”
딸아이의 목소리에 마당 한 쪽 창고 앞에서 나무를 다듬고 있던 사내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평범한 체격이었지만 산에서 나무를 하는지 손바닥에 굳은 살이 여기저기 박힌 남자가 들고 있던 도끼자루를 마당 한 쪽에 내려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도 어~엄청 길어요.”
그런 아비 앞으로 뛰어와 설명하며 소녀가 팔을 길게 뻗었다.
“또?”
눈을 반짝이는 딸아이와 달리 산속 길을 지나는 행렬을 발견했다는 말에 사내의 표정은 진지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굳어지고 있었다.
“가서 볼 거에요?”
생각에 잠겨 있던 사내는 눈을 반짝이며 묻는 소리에 생각에서 빠져 나오며 딸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가보자.”
미소지으며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소녀가 신이 나서 먼저 발을 뗐다. 그러나 그 손에 이끌려 가는 사내의 표정은 다시 심각해지고 있었다.
“아부지 빨리요, 빨리요.”
좋은 일도 아닌데 산속에서 부모 외에는 사람을 별로 못보고 커서인지 몇 발 먼저 앞서가서는 소녀가 신이 난 기색으로 아비를 향해 손짓을 해댔다.
“그래 간다.”
거기에 대고 미소로 대꾸하며 남자는 집에서 이어지는 산길 한 쪽에 형성되어 있는 언덕배기 위로 걸어 올라갔다.
남자가 살고 있는 집은 산속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집 중 하나였다. 가난한 나무꾼들이 자리잡은 서너 채의 집에서 언덕배기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 언덕 아래 산길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이곳을 지나가는 자들은 1년에 몇 번 보기도 힘든 곳이었다.
그런 산길을 지나가는 자들이 며칠 전부터는 드물지 않게 눈에 띄었고 어제 오늘은 그 수가 상당히 많았다.
그 중 몇 명에게 물어보니 그들 대부분이 전쟁을 피해 떠나는 피난민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와, 많다.”
어제도 상당한 수가 지나갔는데 오늘은 그보다 더 많은 수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걸 보고 딸 아이가 그 규모에 감탄하는 동안 마찬가지로 남자는 피난민 행렬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며칠 전에도 이 길을 따라 피난을 가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지금은 그 때보다도 더 인원이 많았다. 또 어디서 전쟁이 난 건지. 이 길을 따라 산을 지나간다고 해도 삶의 터전을 잃고 떠난 사람들이 몸 편히 쉴곳은 금방 찾기 어려울 것이다.
‘걱정이군 참..’
이곳을 지나는 부쩍 늘은 사람들이 부디 무사히 지낼 곳을 찾길 바라며 그렇게 발 아래로 지나가던 행렬을 보고 있던 남자는 인기척을 느끼고 문득 옆을 보았다. 좀 떨어진 언덕 옆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 세 사람이 거기 있었다.
그들은 어제도 같이 피난민 행렬을 보고 있던 자들로 자신에게 근처에서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는 걸 보지 못했냐고 묻던 자였는데 돌아가지 않았는지 여기 와 있었다.
“정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도 될까요?”
같이 있는 남자들보다 좀 어려 보이는 소년 하나가 어제 자신에게 물었던 남자를 향해 말을 걸고 있었다.
“우리가 앞질러 온 게 맞을지 모르겠어요.”
“그 정도 운은 있길 바래야지.”
피난민 행렬을 내려다보며 남자가 소년의 말에 대꾸하고 있었다.
“우리를 위해서라도 그들을 위해서라도.”
말하던 그는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걸 알았는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목례하듯 그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모습에 남자 역시 얼결에 고개를 숙였다.
어제부터 서로간에 말하는 내용을 얼핏 듣기론 그는 기사인 듯 보였는데 기사치고는 상당히 예의가 바른 남자였다.
물어본 내용으로 보아 아마 그는 병대를 놓친 모양이었다. 얼마나 어리숙하면 자신이 속한 병대를 놓치고 돌아다니나 싶었지만 거기까지 뭐라할 바는 아니다. 병대에서 떨어져 나왔으면 전장에 가지 않아도 될테니 요즘 같으면 오히려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그만 가자 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행렬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딸을 향해 이제 남자는 말했다. 자신은 산속에서 나무나 하며 근근이 먹고사는 사람이다. 피난민들이 안타깝긴 하지만 전쟁이나 싸움이나 신경을 쓰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저 아저씨들은요?”
아비의 말에 이제 행렬에서 눈을 떼며 몸을 돌리다가 엘리어트들을 쳐다보며 문득 소녀가 물었다.
“같이 안가요?”
어제 집에 들렀을 때 보아서 그들이 손님이란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산속에 떨어져 산다고 해도 가끔씩 찾아오는 손님은 있었고 특히 요즘 찾아온 손님들은 웬만해선 아비가 그냥 보내지 않았던 걸 소녀는 기억하는 듯 했다.
“글쎄다.”
그러고보니 어제부터 끼니는 제대로 챙기긴 했나. 혹시 여기 계속 있을 생각이라면 찬은 없어도 한 끼 정도는 대접할 마음도 있었지만 오라고 해도 보아하니 그럴 마음의 여유는 없을 것 같은데..
“일단 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는 왔던 길을 되돌아 가기 위해 먼저 걸음을 뗐다. 그 뒤를 긴 머리를 촐랑거리며 소녀가 따라갔다.
사내와 그의 딸아이가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여전히 자리에 서서 엘리어트는 언덕 아래 길에서 이어지고 있는 피난민 행렬을 보고 있었다.
며칠 전 그는 오테르의 영주가 알려준 듀셰의 군대가 대기하고 있다는 장소에 찾아 갔었다. 문제는 오테르 영주가 알려준 곳에 이미 듀셰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느 길을 따라 이동하는지는 피셔 영주도 모르고 있었다. 랭더발로 가는 길은 한 두 개가 아니다. 놓친 그들을 찾기 위해 그 길 전부를 쫓는 건 불가능했기에 중간에 꼭 거칠 거라고 예상되는 곳을 꼽아 가슈들과 둘로 나뉜 뒤 길을 앞질러 엘리어트들은 여기로 왔다.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행렬을 보며 엘리어트는 생각했다.
여기서 놓친다면 듀셰는 그대로 랭더발로 진격하게 될 것이다. 검은 기사단이 랭더발 밖에 있는 지금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랭더발을 점령한다고 해도 에르디스 영주에게 결정적인 타격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뿐아니라 혹 운이 없어 만에 하나 소식을 듣고 랭더발로 달려온 검은 기사단이 듀셰의 병력을 포위하기라도 했다간, 그들은 전멸당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부디 듀셰가 이 길로 들어서길 바라며 엘리어트는 어제 오늘 이 길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피난민 행렬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듀셰도 문제지만 아직 싸움이 전면전으로 일어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민간인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전장을 벗어나기 위해 자영국을 떠나고 있는 영주민들의 수가 이미 상당했다.
“아저씨..!”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등뒤에서 기운 찬 목소리가 날아왔다. 고개를 돌리니 아까 언덕을 내려간 줄 알았던 소녀가 서 있었다.
“혹시 식사가 필요하면 오시래요 아부지가.”
엘리어트를 향해 말하며 소녀는 옆에 있는 길더와 시즈를 향해 고개짓을 했다.
“아저씨들도요.”
“그래.”
어제 남자가 불렀던 소녀의 이름을 기억하며 엘리어트는 소녀를 향해 대꾸했다.
“고맙다. 릴.”
씨익 웃고는 다시 총총 걸음으로 달려가는 소녀를 옆에서 시즈가 쳐다보며 으쓱했다.
“이름이 릴이에요? 여자애 치곤 특이하네.”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지.. 이럴 때 헨터만 님이 계셨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어요.”
여기 저기 소식통들을 거느리고 있는 그였으니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슬로런들과 같이 움직이고 있고 어디에 있는지 계속 연락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네바렌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릴이란 이름에 문득 생각나 시즈는 중얼거렸다.
4개 혈맹국 중에서는 그래도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아직은 싸움에서 한 발 벗어나 있는 시마르 혈맹, 그 중 이제 종주국에 해당하는 네바렌의 드안 가메인 공작과 최고 행정관인 아우드 릴을 그는 떠올렸다. 떠나온지 이제 제법 되긴 했지만 한 때 존경했던 두 사람이었다.
“시마르는 아직은 괜찮겠지?”
네 개 혈맹중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시마르가 전쟁에 발을 들이는 건 가장 나중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시즈는 좀 전부터 조용한 길더를 향해 확인하듯 물었다.
“응?”
“아저씨 소리 처음 들었어.”
그런 길더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시즈를 향해 묻고 있었다.
“나 아저씨 같아?”
“꼬맹이가 한 말이잖아. 그리고 나도 들었다고.”
별 걸 다 신경쓴다는 듯 시즈는 으쓱했다.
여전히 길더가 충격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동안 길 아래를 보고 있다가 엘리어트는 입을 뗐다.
“잠깐 있어.”
갑자기 나서는 엘리어트를 보고 그제야 길더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요?”
“다른 곳 좀 살피고 오게.”
엘리어트는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알겠어요.”
길더가 끄덕이자 엘리어트는 곧 자리에서 사라졌다.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테니까 넌 가서 한 끼 얻어 먹고 와.”
엘리어트가 사라지자 길더는 시즈를 향해 말했다. 무슨 소린가 싶어 시즈가 쳐다보니 길더는 언덕 아래쪽으로 턱짓을 했다. 언덕을 내려가길래 돌아간 줄 알았던 소녀가 저기 길 한쪽에 서서 이쪽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바로 따라 오는 줄 알고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끼니 해결해야 싸울 힘도 얻지.”
쳐다보는 시즈를 향해 길더는 말했다.
“오면 교대해.”
잠깐 있다가 시즈는 끄덕였다.
“알았어.”
그 말대로 계속 굶으면 지켜볼 힘도 없다고 생각하며 시즈는 몸을 돌렸다.
“아부지. 아저씨들 데려왔어요...!”
그리고 잠시 후 시즈가 어제 들렀던 집 마당으로 들어서자 소녀가 안을 향해 길게 외쳤다.
열 여섯 살에 아저씨 소리 듣는 건 살짝 억울한 기분이 드는 건 마찬가지라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동안 남자가 안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오셨소?”
잘됐다는 듯 남자는 말했다.
“점심 먹을 참이었으니 같이 듭시다. 찬은 별로 없지만.”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남자를 향해 넙죽 인사하며 시즈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시즈가 산속 집에서 요기를 하며 잠시 한숨 돌리는 동안 엘리어트는 산 꼭대기 높은 곳까지 와 있었다.
오기 전 오테르의 영주에게 들은 듀셰의 병력은 십 만. 열여섯 개 영주국에서 각기 차출한 기사와 병사들이다.
산 전체를 놓치지 않고 주시하며 엘리어트는 생각했다. 단지 랭더발만을 상대하는 거라면 오테르 영주가 벤더볼린의 에르코 영주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란 것도 이해가 되는 규모다.
그런 그들이 아스드 같이 뜻이 같은 영주국들과 적시에 같이 움직일 수 있다면 중요한 전력이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직은 이른 기대로 오르시 영주를 설득했을 때의 얘기다.
'설득은 고사하고 놓친 건 아니어야 할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어트는 산 전체를 놓치지 않고 쳐다보았다. 전력이 노출되서 좋을 건 없으니 싸움이 시작되기 전까지 가급적 눈에 띄지 않는 길을 택해 이동할 것이다. 그렇다고 여정이 너무 길어지는 것도 좋을 게 없으니 지나치게 돌아가는 길을 택할 수는 없다.
그 두 가지를 고려한다면 적당한 길은 이 산을 통과하는 것이다. 듀셰 쪽에서도 그렇게 판단했길 바라며 엘리어트는 어디서든 조금의 변화라도 바로 감지할 수 있게 산 전체를 예리하게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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