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30 듀셰(14)
하트의 반(VAN) - 2-30 듀셰(14)
아스드에서 나오자 마자 엘리어트들과 헤어진 시라가 파비앙으로 출발한지는 이미 한참 전, 그 사이 벤더볼린 일로 연락이 오갔고 듀셰의 야영지에 도착하기 전 레이가 다시 한 번 매를 보냈다. 그 매가 그냥 돌아왔다.
“어디쯤에서?”
시라가 어디쯤 가고 있었을지 가늠해보며 엘리어트는 물었다.
“돌아온 거리로 보면 여기서 서쪽으로 대략 이레쯤 떨어진 곳이에요.”
이틀 만에 돌아온 매의 이동 속도를 생각하면 시라와 연락이 끊긴 건 그쯤이다.
그러나 그것은 엘리어트의 예상보다 에들러와 멀고 오히려 이쪽과 가까운 위치다. 시라라면 지금쯤 대륙의 중앙을 한참 가로질러 에들러 혈맹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을 지나고 있어야 했다.
그렇다는 건 역시 그 쯤에서 시라의 발이 묶일 만한 일이 생겼단 뜻이다.
엘리어트는 생각했다. 시마르가 위치한 남쪽 방향에서까지 지원군이 이동해 온 걸 생각하면 랭더발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영주국이 더 많이 포진해 있는 서쪽 방향에서도 지원군이 이동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시라가 그들과 마주쳤을까.
“가봐야 겠어.”
이윽고 엘리어트가 말했다.
헨터만이 멈칫했다.
“지금 말입니까?”
아무 일 없이 연락이 끊길 리 없다는 건 알지만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 그저 잠시 지체 된 걸 수도 있다.
“혹시 모르니 좀 기다려 보는 건 어떻습니까?”
게다가 지금은 여기서 얽힌 문제만 해도 복잡해 시라가 있는 곳까지 갔다 올만한 여유가 있지도 않다.
“금방 다시 연락이 올지도 모르니까.”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거면 시간을 지체할수록 점점 시라에게 불리해질 겁니다.”
단지 잠깐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도였다면 이쪽이 걱정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시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연락을 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생겼고, 그것도 혼자 해결하기 쉽지 않은 일에 빠져 있다.
조금 전까지 에드리안 피셔드나 기하족의 일로 골몰하는 것 같았는데 시라의 얘기에 그 문제는 그 새 머릿속에서 사라졌는지 그렇게 말하는 엘리어트를 헨터만은 잠시 응시했다. 소리 없이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결심이 확고한 것 같다.
혹시 단념시키는데 도와달라고 할 수 없을까 해 헨터만은 가슈들 쪽을 힐끔 보았다. 그러나 엘리어트의 말에 동감이었는지 가슈나 나머지 사람들도 말이 없었다.
“가슈만 남고..”
지금 에드리안 피셔드에 대해 알지 못하니 단념시키는 걸 도와달라고 해봤자 안될 거라는 걸 알고 헨터만이 이제 포기하는 동안 몸을 돌리며 엘리어트가 말했다.
“나머진 날 따라와.”
끄덕이며 아비크를 비롯해 나머지 사람들이 말이 있는 쪽으로 가는 엘리어트의 뒤를 따라 갔다.
“여기도 복잡한데 지금 저렇게 가버리면 어쩌자는 건지..”
그렇게 말에 오르는 엘리어트들을 보며 헨터만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대장한텐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이니까요.”
뒤에 남아 있던 헨터만이 혼자말처럼 중얼거리자 가슈가 거기에 응수했다.
“아.. 아가씨 빼고.”
“그건 압니다만 이건 어쩌면 오랫동안 엘리어트가 원했던 일을 단번에 해결하게 될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데...”
그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엘리어트일텐데 그런데도 망설이지도 않고 출발하는 걸 헨터만은 혀를 찼다.
“대단하다고 해야할 지 사람이 너무 무르다고 해야할 지.”
“듀셰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무심코 하는 소리에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하며 가슈가 대꾸했다.
“듀셰 뿐만이 아닙니다.”
“무슨 소립니까?”
의아한 듯 되묻는 가슈를 헨터만은 힐끔 보았다.
“아닙니다. 하여튼 괜히 또 문제에 휘말리지 말고 빨리 돌아오기나 바래야겠네요.”
말을 끝내며 헨터만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이제 동시에 출발하는 그들을 다시 응시했다.
매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엘리어트들은 말을 달렸다. 시라가 지나갔던 길은 서쪽으로 곧장 뻗어 있었다. 몇 개의 영주국을 지나 산맥과 황무지를 지났다. 보통 사람이면 이레는 넘게 걸리는 길을 말을 몇 번 갈아타고 밤낮으로 말을 달려 삼일째가 되던 날 엘리어트들은 좁게 이어지는 협곡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이 근처에요.”
더 이상 날아가지 않고 머리 위를 뱅뱅 돌고 있는 매를 올려다 보며 레이가 말하는 동안 말에서 내린 엘리어트는 다리가 끊긴 협곡 제일 끝으로 갔다.
절벽을 사이에 두고 중간에서 끊어진 다리가 바람에 흔들리며 아래에서 부딪치고 있었다.
“그냥 끊어진 건 아니네요.”
끊어진 밧줄을 끌어 올려 아비크는 그 끝에 칼로 내리친 흔적을 확인했다.
“여기가 맞다면 싸움에 휘말렸을까요?”
“저 아래 뭐가 있는 것 같진 않은데.”
그가 묻는 동안 절벽 가장자리에서 몸을 내민 채 떨어질 듯 아래로 숙이고 있다가 시즈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기척도 없고.”
다리로 이어져 있던 걸로 보이는 절벽 양쪽이 거리가 멀긴 했지만 그 사이는 그리 깊은 절벽은 아니다. 저기 아래로 강이 흐르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시즈가 확인하기로 강주변에서 인기척이나 사람 소리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 곳에 가만 있을 것도 아니니까 또 모르지만요.”
“죽지 않았다면 그렇겠지.”
단서를 다는 레이의 음성에 시즈가 움찔하는 동안 엘리어트는 말했다.
“그 녀석이 쉽게 죽을 리는 없으니까 일단 내려가 보자.”
말하고는 엘리어트가 먼저 절벽 아래로 뛰어 내려가자 아비크와 길더가 그 뒤를 따랐다. 마찬가지로 아래로 내려가려다 옆에서 노려보는 시선에 레이는 고개를 돌렸다.
“왜?”
“말 좀 가려하면 안 돼?”
그를 향해 못마땅한 듯 시즈가 말했다.
“케이우드 님이 어떻게 됐음 좋겠어?”
“누가 그렇대? 혹시나 모를 일이라는 거지.”
"왜 모를 일이야? 별 일 없어야지."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시즈는 먼저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저 자식 저러다 누구 하나 잘못되면 어떻게 견디려고 매번..."
혼자말로 레이가 중얼거렸다. 저렇게 냉정하지 못해선 앞으로 가장 염려되는 건 시즈라고 생각하며 그 역시 절벽 아래로 뛰어 내렸다.
협곡 사이 흐르고 있는 강을 기준으로 그 주변을 샅샅히 살피며 반대쪽으로 건너올 때까지 아무 것도 발견한 게 없었다.
그리고 반대쪽에 다다르자 그들은 다시 절벽을 타고 위로 올라 왔다.
“다리가 끊긴 거 외엔 아무 것도 없는데...”
힘겹게 절벽을 기어 올라온 레이와 시즈를 길더가 잡아 주는 동안 아비크는 말했다.
“여기 있었던 건 맞을까요?”
대답 없이 엘리어트는 여기서부터 앞으로 이어지고 있는 길을 쳐다보았다.
“더 앞으로 나가볼까요?”
매가 쫓아온 곳은 여기까지지만 시라라면 더 멀리까지 이동했어도 이상한 게 아니어서 아비크가 다시 물었다.
“피난민들이나 근처에 누가 있는지 확인해봐.”
혹시 이 길을 통해 이동하고 있던 랭더발의 지원군을 시라가 마주쳤거나 그게 아니라도 시라가 당할 정도의 무언가가 여길 지나갔다면 아무도 못보진 않았을 것이다.
끄덕이며 아비크들이 근처를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리는 동안 엘리어트는 한 쪽 무릎을 굽히며 몸을 숙였다. 바닥에 손을 대며 그는 땅의 상태를 확인했다.
산을 사이에 둔 채 넓은 길이 펼쳐져 있다. 다리가 끊기지 않았다면 많은 인원이 이동하기 쉬운 길이었을 것이다. 거기다 땅의 상태를 보니 발자국은 많았지만 희미한 것으로 보아 이쪽으로는 다니는 사람이 뜸한 길이었을 것이다.
민간인이 별로 없는데다 많은 인원이 이동하기 쉬운 넓고 평탄한 길에 거기다 랭더발이나 벤더볼린으로 곧장 뻗어 있는 방향이니 서쪽에서 오고 있는 지원군이 있었다면 선택할만한 이동경로였다.
“엘리어트.”
잠시 후 아비크가 돌아왔다.
“근처에 있던 피난민들한테 물어봤는데 여기서 본 사람은 없대요.”
등 뒤로 길 저쪽을 가리키며 아비크는 말했다.
근처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을 찾아내 시라의 인상착의를 설명했지만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
여기로 지나갔을 확률이 높아 보였지만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면 여긴 아닐 수도. 그렇다면 계속 서쪽으로 가며 수소문 해보는 수 밖에 없다.
“가서 애들 데려 올게요.”
그 생각을 알았는지 아비크가 말하고 있었다.
잠시 후 아비크와 나머지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다. 여기서 더 서쪽으로 내려가기 위해 말을 묶어둔 곳으로 가려고 엘리어트들은 발을 돌렸다. 그렇게 아까 내려온 협곡 입구 절벽으로 한참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어이!”
엘리어트들이 돌아섰다. 그리고 길 위 멀리서 보이는 사람을 알아보고 그들이 멈칫했다.
시라는, 남자의 부축을 받은 채 절뚝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분명 시라였다.
“맞구나.”
자신들을 알아보고 그 역시 멈칫하고 있었다.
“케이우드 님.”
그를 보고 얼굴이 환해져서 달려가는 시즈의 뒤에서 나머지 사람들도 그를 향해 서둘러 다가갔다.
“걱정했잖아요.”
제일 먼저 앞으로 달려온 시즈가 원망스럽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미안.”
난감한 듯 시라가 말했다.
“다쳤어요?”
다행히 쉽게 그를 만났지만 남자의 부축을 받고 있는데다 옷 속 여기 저기 조금씩 보이는 붕대를 보고 가까이 온 길더 역시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별 거 아냐. 그보다 다들 여기까지...”
이제 마지막으로 다가온 엘리어트를 보고 시라는 더 난감한 얼굴이 됐다.
“엘리어트.”
그를 보다가 이윽고 엘리어트는 입을 뗐다.
“괜찮아?”
그 시선에 시라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러나 대답하는 얼굴이 아직도 창백했다.
“정신 차린지 얼마 안되서.”
엘리어트의 시선에 걱정하고 있는 걸 알고 염려말라는 듯 시라가 덧붙였다.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매다 어제 겨우 눈뜨셨지 않습니까.”
시라를 부축하고 있던 남자가 그 옆에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못 깨어나시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시라의 표정이 더 난감해지는 걸 모르고 남자가 말하는 동안 다들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걸 알고 시라는 어쩔 수 없이 미소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좀 앉아서...”
왜 이러고 있는지 다들 궁금할테니 말을 해주어야 할 것 같아 그는 입을 뗐다.
“얘기할까.”
“아, 여기요.”
마침 근처에 무릎 높이로 낮게 튀어나와 있는 작은 바위를 시즈가 손으로 가리켰다. 두어 걸음 걸어가 시라가 거기 앉았다.
“고마워.”
남자의 반대쪽에서 얼른 자신을 부축하는 시즈를 향해 말하고는 시라는 이제 자신을 둘러 싸고 있는 나머지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나직히 엘리어트가 물었다.
“이쪽으로 랭더발의 지원군이 지나갔어.”
낮은 바위에 걸터 앉은 채 시라는 말했다.
“여기 산에 피난민들하고 마주쳐서 좋을 게 없어서 유인하다가 보다시피.”
웃옷 사이로 보이는 붕대를 시라가 가리켰다.
“절벽 아래로 떨어질 때까진 그래도 괜찮았는데 다시 돌아와서 여기 사람들을 피신시키다 보니..”
절벽에서 떨어질 때까지만 해도 부상은 심했지만 다행히 정신은 차리고 있었다. 그 뒤로 절벽에서 빠져 나와 유인당한 걸 알아챈 두올린을 앞질러가 한 곳에 모인 채 우왕좌왕 하고 있던 사람들을 피신시켰다. 그리고 두올린이 산을 수색할 때까지 그는 버텼다.
그러나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부상 당한채 움직인 게 역시 무리였는지 그 뒤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며칠을 앓다가 다시 깨어난 게 어제였다.
“아까 물었을 땐 누군지 몰라서...”
아까 아비크가 물어본 사람은 지금 시라를 부축하고 있는 남자였는데 그가 시라를 치료해주고 지금껏 돌봐주고 있었다.
아비크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내리 떴다.
갑자기 나타난 자가 시라를 찾자 혹시나 싶어 거짓말로 둘러 댄 뒤 시라에게 전했고 아비크의 인상착의에 대해 듣고 시라가 직접 이쪽으로 온 참이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요 기사님. 뗄감을 준비하다 말고 와서..”
아까 거짓말한 게 걸렸는지 아니면 이들이 시라의 동료들이란 거에 안심해서인지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허둥지둥 자리에서 몸을 틀었다.
“혹시나 해서 쫓아왔는데 너희들인 걸 보고.”
서둘러 길 저쪽으로 가는 남자를 보면서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게 아무래도 걸렸는지 시라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참 민폐를 끼쳐서..”
“됐어.”
엘리어트가 그 말을 잘랐다.
“네가 무사한 것만 해도 다행이야.”
평소처럼 담담하지만 단호하게 들리는 소리에 시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물었다.
“듀셰는 어떻게 됐어?”
듀셰를 찾기 위해 벤더볼린에서 나왔다는 게 그가 들은 마지막 소식이었다.
“만났어.”
그간의 일에 대해 엘리어트가 얘기했다.
“그렇구나.”
얘기를 다 듣고 이제 시라가 끄덕였다.
“듀셰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야?”
“노력은 해보려고.”
대답하는 소리에 끄덕이다가 시라는 다시 말했다.
“파비앙은 이제 어쩌지?”
애초에 그가 여기 있는 건 파비앙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내가 이 꼴이 되서.”
"걱정할 거 없어."
엘리어트는 말했다.
“가까이 있는 누군가에게 부탁해 보려고 하니까."
“누구?”
“랄페르 아가씨.”
셰릴들과 함께 돌아간 네이엔느 랄페르는 베이그릴스 근방에 있을 것이다. 거기서 파비앙까지면 여기보다 훨씬 가깝다.
“그래?”
그러나 모호하게 대꾸하며 시라는 조금 생각하는 얼굴이 되고 있었다.
“지금으로선 그 방법 밖에 없겠지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부탁해도 될까?”
그가 말했다.
“아가씨를 위험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엘리어트가 끄덕였다.
“그래야지.”
발이 넓은 그녀의 연줄을 이용해 확인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부탁해볼 생각이다.
“게다가 지금은 파비앙보다 더 신경 쓸 일이 있어.”
“신경 쓸 일?”
“돌아가서 얘기하자 그건.”
상태도 좋지 않은 시라에게 아직 전부 말할 단계가 아니다.
“움직일 수 있겠어?”
상태를 살피듯 시라를 보며 엘리어트가 다시 확인했다.
“물론이지. 걱정 마.”
그런 건 물을 필요도 없다는 듯 파리하게 웃으며 시라가 대꾸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은 말을 달렸다. 시라를 찾으러 올 때 열흘 거리를 밤낮으로 말을 달려 삼 일 만에 도착한 거리를 돌아갈 때는 나흘이 걸렸다. 시라는 별 말이 없었지만 그의 상태를 고려해 엘리어트가 속력을 늦춘 듯 했다.
그렇게 왕복을 마치고 일주일 전 출발했던 장소로 엘리어트들은 돌아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 헨터만과 가슈를 제외하고 듀셰의 병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왔습니까?”
생각보다는 일찍이었는지 다행이라는 듯 말하는 헨터만의 뒤에서 엘리어트는 일주일 전만해도 넓게 자리잡고 있던 듀셰의 야영장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야영장이었던 곳은 황량하게 비어 있었다.
“보시다시피. 떠났습니다.”
으쓱하며 헨터만은 이제 말에서 내리는 시라를 보았다.
“무사해서 다행이네요.”
안색은 좋지 않았지만 살아있으니 됐다.
“갑자기요?”
“갑자기라기보다..”
듀셰가 사라진 게 황망하긴 했는지 되묻는 엘리어트를 향해 헨터만은 대꾸했다.
“당신이 가고 누가 나타났는데 그 뒤로 그렇게 됐습니다.”
“누구요?”
“알비아의 라크네트 공녀라고 하더군요.”
헨터만이 대답했다.
알비아의 라크네트가 나타난 건 엘리어트가 시라를 찾아 나선 바로 그 날이었다. 엘리어트가 출발하고 가슈와 얘기를 더 한뒤 여기 왔으니 라이론 피셔드와 그리고 오르시의 세틴 영주를 만나려고 헨터만은 오르시 영주의 막사로 향했다.
막사 밖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에게 용건을 말하고 안으로 들어가 얘기를 전한 병사들이 돌아와 안으로 들어가라는 허락에 막사 안으로 들어간 헨터만은 그 안에 오르시 영주와 라이론 피셔드, 그리고 또 한 사람을 보았다.
“북쪽의 저명한 책사께서 무슨 볼 일이시오?”
그녀가 알비아의 라크네트 공녀라는 짧은 소개를 듣고 이 자리에 라이론 피셔드와 순순히 함께 있게 한 걸 보아 영주의 신뢰가 그녀에게 제법 가 있다는 걸 헨터만이 느끼는 동안 오르시의 세틴 영주는 말하고 있었다.
“책사께서 우리를 도울 일은 없을 거요.”
그리고 여기 온 용건을 (용건이라기보다 새로 영주들을 만나면 늘상 대는 핑계를) 헨터만이 공손히 전하자 오르시의 세틴 영주는 그렇게 말했다.
“그럴 일이 있다고 해도 그대에게 까지 도움을 요청할 뜻도 내게 없고.”
그리고 잠시 후 가끔 느끼는 익숙한 냉대와 함께 곧 쫓겨나듯 그 자리에서 내몰릴 때에도 라크네트 공녀는 아무일 없다는 듯 공손한 자세로 오르시 영주의 옆에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가 나타나고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부대 이동이 결정되었다는 얘기가 야영장에 돌았다.
“나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는 영주들도 있어서..”
엘리어트가 돌아올 때까지 만이라도 잡아두고 싶었지만 세틴 영주가 자신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었으니 그로서는 나설 수가 없었고 영주가 중간에 엘리어트를 찾았지만 그는 자리에 없었으니 더 방법이 없었다.
“셰릴 아가씨도 나서서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했는데 소용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셰릴까지 나서서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그것도 통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렇게 태연한 이유는요?”
평소 헨터만이라면 혼자서라도 듀셰를 쫓아가고도 남았을텐데 의외로 태연한 건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듀셰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다행히 여기 남아 있어서요.”
그 생각대로 였는지 헨터만이 대꾸했다.
“라이론 피셔드 전하가.”
여동생 때문인지 아니면 엘리어트를 다시 만날 생각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헨터만의 짐작에) 셰릴 때문인지 듀셰를 따라가지 않고 라이론 피셔드는 여기 남았다.
그라면 듀셰의 이동경로를 알고 있을 테니 어디로 가는지 알면 여기 없다고 해도 초조하게 생각할 건 아니었기에 듀셰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고 헨터만은 엘리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알비아 공녀는 무슨 말을 했을까요?”
그리고 그의 궁금증은 이제 자신보다 더 신뢰받는 것 같은 알비아 공녀에게 향해 있었다.
“무슨 말을 했길래 오르시 영주가 그녀를 따라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공녀를 영주가 그렇게 신뢰하는 것도 의외고.”
“무슨 말이어도 세틴 영주님께 거짓을 고한 건 아마 아닐 겁니다.”
듀셰에 연락을 취해준 오테르 영주는 알비아가 아드리엥과 가까운 사이란 걸 잘 알고 있어서인지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오르시 영주는 또 다를 수도 있다.
“아니면 신뢰의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오르시의 세틴 영주도 호락호락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런 그가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다면 그럴 만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엘리어트는 생각했다.
“듀셰는 이제 그렇다 치고요.”
어디로 갔는지 알면 따라잡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 시라를 찾으러 가기 전 그것보다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될 얘기를 헨터만은 이제 꺼냈다.
“다른 건 어쩔 겁니까?”
“다른 게 또 있어요?”
중간부터 다가와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아비크가 그제서야 끼어들었다.
“말을 해주죠.”
숨기고서는 일을 진행하기도 어려우니 가슈들은 알고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헨터만이 말했다.
“그럴 겁니다 이제.”
가슈들한테까지 오래 비밀로 하고 있을 생각은 아니었는지 엘리어트는 대꾸했다.
그리고 피곤했는지 근처 바위 위에 앉아 조용히 있던 시라를 비롯해 나머지 사람들을 향해 이제 얘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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